부활하는 공자, '중국의 품격' 이끌까?

[김윤태의 중국은 하나?] 공자가묘의 두 집 살림, 남종과 북종

중국은 최근 유가 사상을 정권 통치에 도입하고 있다. 중국의 최고 지도부는 외교 무대에서 종종 공자의 말을 인용하고, 최근에는 중국의 전통을 특히 중시하며 유가 사상을 중화민족 문화의 유전자로 계승해야 한다는 점을 때마다 강조하고 있다. 국가 이데올로기도 사회주의에서 유가 문화로 바뀌고 있다. 국민을 한데 모으는데 전통과 유교 문화의 역할을 매우 중시하고 있는 것이다.

유교 문화의 국가 이데올로기화

중국 정부가 전통 문화, 특히 유교를 중시하는 데는 공백 상태에 있는 국가 이데올로기를 재건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 개혁 개방을 하면서 전 사회를 장악했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그 설득력을 잃었다. 중국 사회에서 사회주의 이념은 더 이상 백성에게 먹거리를 제공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1949년부터 1978년까지 중국 사회를 지배했던 사회주의 이념이 설자리를 잃어버리자 중국 사회는 이데올로기 공백 상태에 빠졌다. 공산당의 안정적 집권을 위해서도, 백성의 가치 정립을 위해서도, 56개 민족의 통합적 사회 건설을 위해서도 정신적, 문화적 지주가 필요했다. 공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이상의 문제라기보다는 현실의 문제가 되어버렸다. 중국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적 문제에 정신적 자원을 공급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중화 전통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 각국에 확산시키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세계 각국에 공자 학원을 세우면서 중국어와 중화 전통문화의 보급과 확산에 천문학적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줄잡아 120여 개 국가에, 5백 개에 가까운 공자 학원, 7백여 개의 공자 학당이 세워졌다. 최근에는 공자탄신일을 '공자 학원의 날'로 공식 지정했다. 중국 정부의 이러한 행보는 중화 문화의 아이콘인 공자를 내세워 중국 내부적으로는 계층 간 갈등, 세대 간 갈등, 지역 간 갈등, 민족 간 갈등을 봉합하는 사회 통합의 기제로 삼고자 함일 것이다. 또한 외부적으로는 재정립한 유교 문화를 바탕으로 문화 강국으로서 자리매김 하겠다는 전략일 것이다.

전통의 부정에서 존공숭유(尊孔崇儒)로

중국 사회가 공자를 존경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존공숭유(尊孔崇儒)'의 길에 들어섰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공자를 향한 중국인의 존경과 유교의 숭상이 평탄한 길만을 걸었던 것은 아니다. 불과 100년 전 5.4운동 때만 해도 공자는 철저히 배격당한 바 있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봉건주의와 전통을 부정하면서, 새로운 가치로 민주와 과학을 주창했다. 천두슈(陳獨秀)는 <신청년> 잡지에 '더선생(德先生)'과 '싸이선생(赛先生)'에 대한 글을 올리면서 민주와 과학의 도입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는 길임을 설파했다. 민주(Democracy)를 음역한 중국어 표현이 더모커라시(德莫克拉西)이고, 과학(Science)을 음역하면 사이인스(赛因斯)이기 때문에 이를 의인화해서 칭한 것이다.

당시 베이징 대학에 더선생과 싸이선생의 동상이 세워질 정도로 열혈 지식 청년들은 민주와 과학의 가치에 푹 빠져 있었다. 당연히 전통과 공자는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심지어 유교가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食人) 문화'로 치부되기도 했다. 마오쩌둥 시절도 공자가 배격되었던 것은 마찬가지다.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마오쩌둥의 정적 린뱌오(林彪)와 공자는 동시에 공격을 받았다. 홍위병들은 '비공비림(批孔批林)'의 구호를 외치며 공자를 훼손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공수양작(孔洙讓爵)의 지혜: 더불어 사는 세상 만들기

공자가 어려움을 겪은 것은 이보다 훨씬 이전에도 있었다. 송나라(北宋)가 금나라에 패하자, 송 고종은 수도를 볜징(汴京: 현재의 카이펑)에서 린안(臨安; 현재의 항저우)으로 옮기고 남송을 세웠다. 당시 취푸(曲阜)에 있던 공자의 48대 적장손이 송나라 왕실을 따라 일족을 데리고 남쪽의 취저우(衢州)에 이사해서, 취푸 공자가묘의 모습대로 가묘를 재건했다. 취푸 공자가묘와 구별하기 위해 이곳은 '공씨남종가묘(孔氏南宗家廟)'라고 했다. 공자의 존재는 국가의 정통성 유지에도 필요했을 것이다.

▲ 취저우에 있는 공씨남종가묘. ⓒwikimedia.org

남송은 남종에게 금(金)은 북종에게 각각 연성공의 작위를 내어주며 공자 가문의 정통성은 물론 국가의 정통성을 유지하려 했다. 이로써 공자의 가묘는 취푸에 있는 북종과 취저우의 남종으로 두 집 살림을 하게 되었다. 후일 남송이 멸망하고 적장손이 북방의 취푸로 돌아올 기회가 있었으나, 취저우에 이미 5대에 걸친 조상의 묘가 있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남종의 연성공 공수(孔洙)는 "취푸의 자손이 비록 적장손은 아니지만 선영을 지켰으니 조상께 공이 있다"며 자리를 양보했다. 이후 북종이 연성공 작위를 세습하게 된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공수가 작위를 양보했다 하여 '공수양작(孔洙讓爵)'이라 부르며 이를 칭송했다. 공자의 후손답게 도리를 지키기 위해 명예를 양보한 것이 후세의 귀감이 되었다. 모진 풍파를 겪고 일어나 천하제일 가문으로서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이유가 달리 있지 않았다.

중국에서 빠르게 부활하고 있는 공자를 바라보는 마음이 기쁘지만은 않다. 물론 중국 정부는 "조화로운 것이 귀한 것이다"라는 논어의 '화위귀(和爲貴)'를 인용하면서 대내적으로는 각 민족의 통합을 강조하고, 대외적으로는 세계 각국의 문화와 중화 문화의 조화로운 융합을 내세운다. 하지만 주변국으로서는 새로운 패권주의의 등장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유가의 덕목은 더불어 사는 세상을 이야기한다. 중국이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나 '더불어 사는 세상' 만들기에 귀 기울이기 바란다. 그 길이 바로 품격을 갖춘 중국이 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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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

동덕여자대학교 중어중국학과에서 중국 사회를 강의하고 있다. 외교부 재외동포정책 실무위원이며, 동덕여대 한중미래연구소에서 수행하는 재중한인연구사업단 단장을 맡고 있다. 국립대만대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중국 사회에 관한 다양한 이슈뿐만 아니라 조선족 및 재중 한국인에 대한 연구를 수행해 왔다. <재중 한국인 사회 조사 연구>, <臺灣社會學想像> 등 다수의 저서와 역서, 연구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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