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 봉투에 들어있는 것은 내용 증명이었다. 내용 증명은 방송국과 김 PD, 김 PD가 제작하는 프로그램의 작가를 수신인으로 하고 있었다. 발신인은 일간지에 주말마다 연재하는 B 의사였다. 김 PD가 제작하여 종편 방송사에서 방송하는 프로그램은 매주 재현 드라마가 들어가고 이에 대한 의학 정보를 주는 것인데, 몇몇 회에서 B 의사가 칼럼에 연재하였던 내용을 저작권자의 동의없이 그대로 차용하였다는 것이었다.
B 의사는 종합병원에서의 다양한 임상 경험을 토대로 자신의 상상력을 보태 스토리를 엮어내서 그에 대한 의료 정보나 환자에게 필요한 주의사항, 병원을 이용할 때의 TIP 같은 것들을 연재하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B 의사의 칼럼은 사실 보도가 아니라 저자에 의해 가공된 이야기이고, 해당 매체의 온라인 화면에는 그에 대한 저작권이 저자와 매체에 있는 바 무단 복제를 금지한다는 저작권 관련 문구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제작진은 제작 과정에서 제작진이 위 내용을 사실 보도라고 단정하였고, 임의로 구성이나 내용을 그대로 차용하여 대사만 만든 후 원작자와 상의를 거치지도 않고 원작의 출처를 밝히지도 않은 채 작가와 피디의 순수창작물인양 제작되어 방송이 나갔다.
B 의사는 그 즈음 연재하던 글이 호응을 받으면서 유사한 프로그램의 작가로부터 "저희 프로그램에 연재하신 글 중 ○회분의 내용을 좀 써도 될까요?"라는 문의를 종종 받는 중이었다. B 의사는 처음엔 자기의 글이 좋았나보다는 생각에 허락을 해주었는데, 문의가 많아지면서 "이건 좀 아니지 않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해서 지상파 방송사와 종편 방송사의 의학 관련 프로그램에 겹치는 내용이 있는지를 점검했다. 그리고 자신의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출처도 밝히지 않은 채 자신의 글이 여러 차례 도용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B 의사는 김 PD의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내용 증명을 통해 사과문을 게시하고 더 이상의 차용을 중단할 것과 크레디트에 출처를 명시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고, 이미 출판하기로 계약이 되어있는 창작물을 임의로 사용한 것에 대한 저작권료와 손해 배상을 요구하고 있었다. B 의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이미 법률 대리인을 선임한 것 같았고, 내용 증명은 법률 대리인이 발송한 것이었다. 김 PD는 자신은 잘 모르는 상황에서 작가가 써온 대본대로 찍었을 뿐인데 책임이 있는지, 해당 방송사는 납품을 받아 송출했을 뿐인데도 B 의사에 대해 책임이 있는지, B 의사의 내용 증명이 자신에 대한 명예 훼손 같은 게 되는 건 아닌지 등에 대해 궁금해했다.
B 의사의 연재물을 찾아보니 해당 연재물이 실제 사실을 그대로 적은 것도 아니고 B 의사에 의해 재구성되었다는 사실이 공지되어 있었다. B 의사의 말대로 연재물에 대한 저작권이 저자에게 있다는 마크도 있었다. 그리고 김 PD가 만든 프로그램의 해당 회 재현 드라마는 사실상 그 구성이나 이를 통해 주고자 하는 정보들이 B 의사의 연재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따라서 김 PD의 프로그램은 B 의사의 창작물에서 아이디어를 거의 유사하게 차용하였기 때문에 저작물에 대한 표절 시비에서 자유롭기 어려워 보였다.
김 PD에게 이러한 부분을 알려주고, 직접적인 저작권 침해는 제작자로부터 발생하였으나 이를 통해 방송사가 이익을 보고 B 의사가 피해를 받은 것은 사실이므로 제작 주체이든 방송사든 각각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려움을 알려주었다. PD는 총 제작 책임자이므로 1차적인 책임이 작가에게 있더라도 이를 관리, 감독해야 할 책임이 있고 제작사 역시 응당 그러하다.
이야기를 듣는 김 PD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향후에 정말 소송으로 비화되서 제작자나 방송국이 먼저 배상 등을 하게 되면, 방송국과 제작자의 당장의 관계도 악화되겠지만 이들로부터 1차적인 책임자들에 대한 구상이 들어올 수도 있다는 지점을 이야기하자 어떻게 해야 하느냐며 난감해했다.
김 PD에게 일단 B 의사에게 연락을 취해서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사정을 설명하면서 문제가 되고 있는 지점에서 김 PD 선에서 해줄 수 있는 해결 방안을 제시하라고 조언했다. 해당 회 프로그램 크레디트에 출처를 표기하여 재방송 때에는 시정되도록 하면서 프로그램 다음 회의 선두나 말미에 간단한 정정 자막을 내보내고, 소정의 저작권료를 지급하도록 하면 어떤지 의사를 타진해보라고 하였다. 향후에 이런 일이 나중에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에 잘 점검하여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는 것이 중요하고, 이러한 사항들을 제작진들과도 잘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알려주었다.
온라인 시대는 쉽게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차용할 수 있는 유혹을 만든다. 수많은 control+C 와 control+V를 통해 타인의 아이디어와 스토리를 가져와 다양한 매체로 변주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원작에 대한 존중이나 이를 도용함에 대한 문제의식은 잘 알지 못하고 제대로 교육되지도 않은 중이다.
그러는 사이 누군가는 힘들게 쓴 창작물을 도용당하면서 피해와 상처를 받고, 누군가는 자기의 의도와 상관없이 다른 창작자에게 실례를 범하고 법적 책임을 지는 상황을 맞는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전파와 이를 통한 정보의 무한교류라는 혜택의 시대를 살고 있다. 혜택이 유익함으로 이어지려면 혜택을 향유할 때의 신중함과 예의가 필요하다. 알면 선결할 수 있고, 선결할 수 있으면 후일의 낭패를 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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