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원전 인근 5살 아이 몸에 방사선물질이…

[함께 사는 길] 경주, 지진 그리고 원전·②

황분희 씨 명의로 만들어진 농협 통장에 1124만5000원이 입금됐다. 9월 14일 기준이다. 모금이 마무리되면 약 1200만 원이 되지 싶다. 1200만 원의 후원금은 전국의 개인과 단체 200여 곳에서 모아준 탈핵 군자금이다.

올해 68세의 황분희 씨는 월성원전 원자로에서 약 1킬로미터(㎞) 근처에 살고 있다. 그는 5살 손자를 돌보고 있다. 원전 마을로 불리는 이곳의 행정명은 '나아리'다. 이곳에 사는 총 300가구 중의 72가구가 '월성원전 인접지역 이주대책위원회'를 만들어 2014년 8월 25일 천막농성장을 꾸렸다. 그렇게 시작한 원전 앞 천막농성이 지난 8월 25일 만 2년이 됐다. 처음 72가구로 시작한 이주대책위원회에는 30여 가구만 남았다. 절반의 주민이 도중하차한 것에서 싸움이 간단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천막농성 2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주민들이 여러 행사를 준비했다. 그중 하나가 '천막농성 2년, 나아리 방문의 날'이다. 주말인 9월 3일 농성장에서 개최된 행사에 100여 명의 탈핵시민이 모여 따뜻한 연대의 정을 나누었다. 인근의 울산, 포항뿐 아니라 멀리 서울에서도 달려왔다. 이런 정성이 1200만 원의 후원금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달리 보면 지난 2년의 싸움이 헛되지 않았고 이 땅 양심들의 공감을 일궈냈다는 뜻이다.

ⓒ함께사는길(이성수)

살기 위해 천막 친 주민들

나아리 주민들은 왜 천막을 칠 수밖에 없었을까? "살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을 접하면서 치유될 수 없는 근원적인 불안이 일기 시작했다. 혹시나 하고 소변을 검사했더니 모든 주민의 몸속에서 방사성물질인 '삼중수소'가 나왔다. 정부는 양이 적어서 건강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하지만, 당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서울 사람의 몸속에는 없는 방사능이 왜 우리 몸에서만 나와요?"라고 하소연한다. 특히 5살 손자를 돌보고 있는 황분희 씨는 하루빨리 방사능과 원전 사고의 공포가 없는 곳으로 이사 가길 원한다.

그러나 집을 내놓아도 팔리지 않는다. 우리 국민의 뇌리에 핵발전소 주변은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으로 강하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나아리는 부동산 거래가 없는 동토가 됐다. 이사를 하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사람들! 그래서 "이곳은 수용솝니더"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다. 나아리 주민은 바로 그 '거주 이전의 자유'를 박탈당했고, 핵발전소가 주범이다. 그러므로 핵발전소를 건설한 정부와 한국수력원자력(주)(이하 한수원)이 주민 이주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주민들의 이주요구에 대해서 정부와 한수원은 '근거 없는 불안 심리'에 의한 부당한 요구라고 일축한다. 정부는 원전 주변 주민들의 건강에 대해서 지난 20년간 역학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원전 반경 10㎞ 이내에 사는 사람의 갑상선암 발병이 2.5배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 역학조사 결과를 근거로 환경단체와 원전 주민들이 한수원을 상대로 갑상선암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암 발병자 기준으로, 월성원전 인근 주민 93명이 소송 원고로 참가하고 있다. 4개 원전의 원고는 모두 600명이 넘는다. 무엇이 근거 없는 불안 심리인가.

5살 손자 몸에서 검출된 방사성물질

올해 1월 21일 이주대책위 주민 6명이 새벽잠을 설치며 상경했다. 주민들은 청와대와 가까이에 있는 환경연합 사무실에서 '월성원전 주민 삼중수소 검사결과 발표 및 대책 마련 요구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나아리 주민 40명의 소변을 받아서 방사능 분석을 의뢰했더니 40명 전원에게서 삼중수소가 검출된 것이다. 검출량은 소변 1리터에 평균 17.3베크렐(Bq, 1초에 방사선이 1개 방출되면 1베크렐)로 나타났다.

이날 기자들 앞에 선 황분희 씨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격양되어 있었다. 주민 40명 안에는 그의 5살 손자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의 몸속에서 평균치보다 많은 17.5베크렐의 삼중수소가 검출됐다. 5세 아동의 몸속에서 방사성물질이 검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때문인지 사무실은 언론사 카메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5세 아동의 몸속에서 성인보다 많은 방사성물질이 나와도 정부와 한수원은 여전히 "미량이기 때문에 건강에 영향이 없다"는 입장을 고집하고 있다. 지난해 8월 22일 이주대책위 천막농성장에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멀리 영국에서 크리스토퍼 버스비(Christopher Busby) 박사가 작은 시골 마을까지 방문했다. 버스비 박사는 유럽방사선리스크위원회(ECRR)의 대표를 맡고 있다. 갑상선암 공동소송의 증인으로 법정에 서기 위해 방한했다.

주민들을 만난 자리에서 버스비 박사는 삼중수소의 위험성에 대해 한 시간가량 특별강연을 했다. 그는 한국 정부의 방사능 피폭량 계산에서 1000배 이상 곱해야 실제 피폭량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렸다. 주민들은 난마처럼 꼬여 있던 의문이 시원하게 풀리는 순간을 맛봤다. "미량이기 때문에 건강에 영향 없다"는 주장은 사실 '주술'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주술이 과학으로 포장되어 위세를 떨치는 곳이 바로 대한민국이다.

ⓒ함께사는길(이성수)

정부 연구보고서 '이주대책 마련해야'

주민들은 참으로 먼 길을 달려야만 했다. 지난해 2월 월성1호기 수명연장 심사 기간에 숱하게 상경투쟁을 했다. 오전 10시까지 광화문의 원자력안전위원회 앞에 도착하기 위해서 주민들은 새벽 3시에 관광버스를 탔다. 유독 추운 겨울이었다. 어느 날은 관광버스 안에서 아침 식사 대용으로 생미역무침을 먹었다. 월 3만 원씩 회비를 거둬 이주대책위원회 운영 경비를 마련하는데 거듭된 상경 투쟁으로 재정이 바닥난 것이었다.

지난해 9월 새누리당 정수성 의원의 경주사무소 앞에서 피켓 농성을 하기도 했다. 3인 1조가 되어 사무소 앞에서 피켓을 들고 전단을 배포했다. 점심때가 되면 길바닥에 둘러앉아 도시락을 먹었다. 국회 회의록에서 정 의원의 경주 시민의 민의를 왜곡하고 비하하는 발언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회의록에 기록된 그의 발언은 이랬다.

"월성1호기는 원안위에서 결정됐기 때문에 경주 시민들은 일체의 이의를 안답니다."

"이미 결정 난 것에 대해서는 주민들이 다 따른다 이거예요."

피켓 농성 2주 만에 정 의원을 면담하고 사과를 받아냈다. 지난해 11월 영덕핵발전소 유치찬반 주민투표를 앞둔 때에는 수차례 영덕을 방문하여 힘을 보탰다. 황분희 씨는 영덕 달산면의 어느 마을회관에서 '핵발전소가 들어서면 영덕이 천지개벽한다'는 정부의 주장이 새빨간 거짓말임을 나아리의 사례를 들어 강연했다.

이처럼, 주민들은 노후 원전 월성1호기 폐쇄 운동의 중심에 있었고, 장기 천막농성은 핵발전소의 비윤리성을 세상에 보여주는 상징이 되기도 했다. 때론 못된 정치인을 꾸짖는 민의의 대변자도 되었다.

주민들이 오로지 자신만의 문제를 들고 국회에 들어가는데 2년의 세월이 걸렸다. 천막농성 2주년 행사의 일환으로 '월성원전 인근 이주요구의 타당성과 제도개선 방향' 국회 토론회를 개최한 것이다. 무소속 윤종오 의원(울산 북구)과 김종훈 의원(울산 동구)이 나아리 주민의 투쟁에 관심을 두면서 국회 토론회가 성사됐다. 9월 8일 주민들은 또다시 새벽 3시에 관광버스를 탔으나 마음은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주민들은 정의용 산업통상자원부 상생협력팀장, 전휘수 월성원자력본부장 등이 토론자로 참가하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기뻐했다. 그동안 책임 있는 정부 관계자와 공론을 형성할 수 있는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토론회의 제일 큰 성과 중 하나는 산업통상자원부가 실시한 '발전소 인근지역 주민 집단이주제도의 타당성 고찰 및 합리적 제도개선 방안 연구'를 일반에 공개한 것이다. 연구 보고서는 '원전 최인접 마을은 간접제한구역으로 지정하여 주민들이 이주할 수 있도록 제도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고 결론 맺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통상자원부의 연구 보고서는 이주대책 마련의 근거를 제공하고 있었다.

정의용 팀장은 나아리 주민의 이주대책 필요성은 공감하지만, 현재까지 밝혀진 주민 피해로는 이주에 필요한 법 개정의 공감대를 끌어내기 힘들다는 입장을 밝혔다. 여전히 "미량이기 때문에 건강에 영향 없다"는 주술에 갇혀 있는 것이다. 여러 주민들이 발언을 신청하여 "특별한 보상을 해 달라는 게 아니다. 이사 갈 수 있도록 자산을 처분해 달라는 것인데 그것도 안 되느냐"며 정부 측을 성토했다. 10시에 시작된 토론회는 12시에 마칠 예정이었으나 토론 열기가 뜨거워 오후 1시가 지나서 마칠 수 있었다. 정의용 팀장은 천막농성장을 방문하여 대책을 더 협의하겠다고 약속했다.

지진 발생으로 더 불안한 원전사고

경주는 지금, 갑작스러운 대규모 지진으로 시민들의 일상이 파괴됐다. 9월 12일 규모 5.8의 지진 이후 22일 현재 410차례가 넘는 지진이 발생했다. 공원에 텐트를 설치하여 숙박하는 것은 불법이지만 황성공원에 '생존을 위한' 텐트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 행정 당국도 시민들의 불안까지 단속할 수는 없는 일이다. 더욱 불안스러운 것은 원전 사고의 재앙이다. 정부는 이미 2012년에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연구를 통해 이번에 지진을 일으킨 '양산단층'이 활성단층이란 결론을 내렸으나, 국민에게 알리지 않고 은폐했다. 핵발전소 가동을 위한 유리한 환경조성에만 목을 맸지 시민의 안전은 또다시 뒷전이었다. 지진 재난이 일상이 된 현실에 무엇에 의지하고 살아야 할지 난감하다. 핵발전소를 코앞에 두고 살아야만 하는 이주대책위 어르신들의 마음은 또 어떨까? 일단은 월성원전 폐쇄를 요구하며 싸울 뿐이다. 이주대책위원회에 1200만 원의 후원금을 모아준 그 연대의 힘으로 난세를 헤쳐나갈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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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함께 사는 길>은 '지구를 살리는 사람들의 잡지'라는 모토로 1993년 창간했습니다. 사회적 약자와 생태적 약자를 위한 보도, 지구적 지속가능성을 지키기 위한 보도라는 보도중점을 가진 월간 환경잡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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