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에게 항의해야" 발언한 교수의 억울한 죽음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49> 유신 체제, 다섯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두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체제다.

프레시안 : 김대중 납치 사건을 계기로 반유신 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난다고 앞에서 이야기했다. 이 사건 후 반유신 운동은 어떤 식으로 불붙었나.

서중석 : 김대중 납치 사건이 일어나자 우선 대학이 가만있을 수 없었다. 유신 쿠데타 이후 대학가에서는 '유신 체제의 철벽과 싸울 수 있겠느냐'고 해서 시위 투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대중 납치 사건 같은, 있을 수 없는 행위를 국가가 저지르니까 '이제 더 이상 우리가 좌시할 수 없지 않느냐. 우리도 유신 체제에 대해 발언해야 한다', 이러한 태도를 많은 학생이 취하게 된다. 그러면서 납치 사건이 일어난 지 두 달이 채 안 된 1973년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드디어 시위가 일어나게 된다.

10월 2일 "도서관에 불이 났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면서 갑자기 서울대 문리대 학생 수백 명이 모여들었다. 500명 내외로 보이는데, 문리대 인원으로 따져도 거의 전부 나오지 않았느냐고 볼 수 있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학생이 쏟아져 나온 건데, 이들은 어깨를 겯고 4·19탑을 중심으로 해서 교정을 돌면서 구호를 외쳤다. 이날 선언문과 결의 사항이 낭독됐는데 학생들은 결의 사항에서 정보·파쇼 통치 즉각 중단, 대일 예속화 즉각 중지, 정보·파쇼 통치 원흉인 중앙정보부를 즉각 해체하고 만인 공노할 김대중 납치 사건의 진상을 즉각 밝힐 것 등을 요구했다. 여기서 대일 예속화, 이건 주로 경제 문제를 얘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날 문리대 시위는 몇 가지 점에서 1960년대 시위와 달랐다.

프레시안 : 어떤 점에서 달랐나.

서중석 : 우선 1960년대에는 시위를 하려면 문리대 같은 경우조차 4·19탑 앞에 모이는 인원이 처음에는 몇 십 명이었다가 며칠이 지나야 100~200명이 되는 식이었는데, 1973년 10·2 시위 때에는 오전 11시쯤 "모이자"는 소리가 어디선가 나니까 학교에 있었던 학생들이 거의 다 쏟아져 나왔다. 그런 점에서 굉장히 특이했다. 과거에 못 보던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아마 1960년 4·19 그날 문리대에서 그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을 것이다. 문리대에서 이과 계열은 데모를 잘 안 하는 것으로 그전에는 알려져 있었는데, 그쪽에서도 다들 나왔다. 그리고 여학생들이 물 길어다 주고 시위대와 "으쌰으쌰" 하면서 함께 교정을 돌았는데, 그것도 놀라웠다. 그렇게 여학생이 여러 명 나와서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도 전에 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또 개신교 학생들이 이 시위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포함해 상당한 역할을 한 것도 과거에 볼 수 없던 현상이었다. 이처럼 이전에는 잘 나서지 않던 학생들이 이때는 다 함께 일어섰다.

이날 연행된 학생이 180명에 이르렀는데, 그중 20명이 구속되고 9명이 불구속 기소됐다. 57명은 구류 처분을 받았고 94명이 훈방됐다. 그 후에도 체포가 계속돼 10월 30일까지 구속된 서울대 학생은 30명으로 늘어났다. 한 학교 시위에 이렇게 많은 처벌을 하는 것도, 물론 이 이후에는 있는 현상이긴 하지만 이때까지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얘기할 수 있다. 그야말로 박정희가 초강경책으로 유신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학생들의 요구를 틀어막으려 했다고 볼 수 있다.

서울대 문리대 10·2 시위를 시작으로 불붙은 대학가의 유신 반대 운동

ⓒ오월의봄
프레시안 : 초강경 조치는 효과가 있었나.

서중석 : 그와 같은 초강경 조치로 나왔는데도 이틀 후인 10월 4일에는 법대생들이, 5일에는 상대생들이 일어났다. 서울대 단과대에서 동맹 휴교를 결의하는 곳도 나타났다. 이러한 시위는 신문에 거의 실리지 못했지만, 11월로 넘어가면서 크게 확산된다. 경북대의 경우 10월 30일 시위를 시도했다가 실패했는데, 11월 5일에는 "박정희 물러가라"는 현수막을 앞세우고 구호를 외치면서 교내를 행진하고 잠시 학교 바깥으로 진출하기까지 했다.

11월에 들어서면서 동맹 휴학이 확산됐다. 11월 5일 서울대 사범대 학생들이 동맹 휴학을 결의한 것에 이어 7일에는 서울대 공대, 문리대, 상대 학생들도 동맹 휴학에 돌입했다. 8일에는 서울대 교양과정부 학생들도 동맹 휴학을 결의했고, 서울대 가정대에서도 동맹 휴학에 돌입했다. 동맹 휴학은 서울대 농대와 치대, 그리고 한신대 등으로 계속 번졌다. 이 시기에 동맹 휴학 여부는 우선 학과별로 회의를 열어 그야말로 민주적으로 결정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강의를 들어야 하느냐. 그건 안 된다' 해가지고 동맹 휴학 동참 같은 걸 문리대에서는 거의 다 결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11월 12일에는 이화여대 학생들이 일어났다. 이날 채플이 끝나고 대강당에 4000여 명이 모여 있었는데, 이 학생들은 민주 체제 확립 등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기로 결의했다. 이화여대 학생들은 사흘 후(15일)에도 다시 대강당에 모여 "진정한 민주 체제를 확립하라"고 요구했다. 고려대, 연세대에서도 11월 중순에 여러 가지 움직임을 보였고 서울신학대, 성균관대에서도 농성에 돌입하거나 동맹 휴학을 했다. 11월 15일에는 고려대생 2000여 명이 기동 경찰대와 투석전을 벌이면서 학교 뒤편 거리에서 충돌했다. 16일에는 숙명여대에서도 3000여 명이 모여 학생 총회를 열고 구속 학생 석방을 요구하면서 검은 옷을 입기로 결의했다. 20일에는 전남대에서도 들고일어나는 등 서울 이외 지역에서도 유신 체제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11월 하순이 되면 시위 참여 학교가 더 늘어났다. 예컨대 11월 26일에는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 등 6개 대학에서 구속 학생 석방 등을 요구하면서 시위를 벌였는데, 이 중 일부 대학에서는 기말 시험 거부 움직임도 나타났다. 이런 움직임은 27일과 28일에 여러 대학으로 번졌다. 29일에 가면 다시 연세대, 고려대 등 서울의 9개 대학과 영남대에서 시위를 벌이거나 농성을 하거나 기말 시험을 거부했다. 30일에도 서울의 7개 대학 학생들이 교내에서 시위를 하거나 기말 시험을 거부했다.

프레시안 : 엄혹한 유신 체제에서, 더욱이 10·2 시위 참가자들에게 초강경 조치를 취했는데도 시위는 오히려 번졌다. 유신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의 행태에 얼마나 분노했으면 그랬을까 싶다.

서중석 : 서울에 있는 대학들을 중심으로 그야말로 일파만파로 번졌다. 1971년 10월 15일 위수령을 발동, 군인들을 대학에 투입해 탄압한 후 대학가는 한동안 조용하지 않았나. 그랬는데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이 일어나고 10·2 문리대 데모가 있고 하면서 11월에 들어 이렇게 많은 대학에서 움직인 것이다. 그러면서 유신 체제가 굉장한 위기에 몰리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은 사람이 갖게끔 했다.

시위가 번지자 11월 하순부터 여러 대학이 조기 방학을 실시했지만, 12월에 들어서도 기말 시험 거부 운동과 시위 등이 계속 일어났다. 12월에 가면 서울에 있는 대학들은 물론 지방에 있는 경북대, 영남대, 부산대 같은 데서도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부산대에서는 1000여 명이 기말 시험도 거부하고 거리에 나와 연좌시위 같은 걸 벌였다. 전남대에서도 1000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12월에는 고등학생들도 시위를 했다. 12월 5일 광주일고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고 8일에는 서울 신일고 학생들도 시위를 했다. 서울에 있는 대광고, 경기고의 경우 학생들이 시위를 할 조짐을 보이자 학교 측이 조기 방학을 실시해버렸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수들도 나섰다. 한신대는 유신 체제에 맞서 참 잘 싸운 학교인데, 11월 15일 김정준 학장 등 이 학교 교수 10여 명이 학생들을 지지한다는 의미로 삭발을 했다. 그런 형식으로 유신 반대 시위를 한 것이다. 12월 3일에는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에서 구속 학생 석방을 요구했다. 그에 앞서 11월 30일에는 이화여대 교무위원회에서 관계 장관들한테 구속 학생 전원 석방 등을 요구하는 건의문을 보냈다. 심지어 전국 대학 총·학장 회의에서도 이번 사태를 학생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12월 13일에 나올 정도였다. 그만큼 대학 사회가 김대중 납치 사건 이후 크게 달라지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12월 7일 박정희는 그때까지 구속된 학생들을 풀어주고 학칙에 따라 처벌받은 것을 다 백지화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이전에도 유화 정책을 여러 번 썼던 민관식 문교부 장관이 건의해서 이뤄진 것이겠지만, 하여튼 박정희 정권이 학생 시위에 대해 이렇게까지 대폭 양보하고 들어간 경우를 그 이전에는 찾기가 아주 힘들다. 1960년대에는 보기가 어려웠던 모습인데, 그만큼 박정희 정부가 당황한 것 아니냐고 볼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항의해야" 한다던 최종길 교수의 억울한 죽음

프레시안 : 10·2 시위를 시작으로 학생 데모가 번지던 시기에 의문사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나.

서중석 : 우리나라 의문사 제1호라고도 얘기하는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의 의문사다. 그간 언론에서 많이 거론한 사안인데, 간략히 살펴보자. 서울대 문리대, 법대, 상대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많은 학생이 구속·연행되던 1973년 10월 16일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가 중앙정보부 감찰실에 근무하는 동생 최종선을 따라서 남산으로 갔다. 동생은 중앙정보부 간부로부터 '유럽 거점 간첩단 사건 수사에 필요하니까 형의 협조를 바란다'는 얘기를 듣고 형을 남산으로 데리고 간 것이었다. 그런데 그날로 형과 동생은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운명에 처했다.

서울대 문리대, 법대 등에서 학생들이 데모할 때 최종길 교수는 교수 회의에서 "경찰의 강경 진압에 대해 스승으로서 모른 체하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 "부당한 공권력의 최고 수장인 박정희 대통령에게 총장을 보내 항의하고 사과를 받아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16일 그러한 형과 같이 남산에 갔던 동생은 사흘 후(19일) 자신이 속한 중앙정보부로부터 형이 죽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투신자살했다는 통보였지만 최종선은 고문치사를 확신했다. 간첩 혐의를 시인하는 자필 기록을 형이 남긴 것도 아니었고, 투신 현장이라고 중앙정보부에서 알려준 곳에 핏자국은 물론 물로 씻은 흔적조차 없는 것을 보고 '이건 투신자살이 아니다'라고 동생은 확신했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 중앙정보부는 가족들이 시신을 확인하는 것도 거부했다.

그로부터 엿새 후인 10월 25일 중앙정보부 김치열 차장은 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이라는 것을 발표하면서, 간첩단 사건과는 무관한 최종길을 간첩단 일원으로 포함시켰다. 김치열은 유신 정권에서 그야말로 승승장구하며 최고 권력 요직을 모두 누렸다고 볼 수 있는 사람이다. 중앙정보부 차장뿐만 아니라 검찰총장, 내무부 장관, 법무부 장관 같은 자리를 계속 차지했다. 이 사람은 이날 "중앙정보부는 유럽을 거점으로 암약하던 대규모 간첩단을 적발했다"면서 "관련자로 54명이 있고 이 가운데 3명은 구속했는데 그중 한 명은 구속 후 자살했고", 이게 최종길인데, "17명은 불구속 입건했다"고 발표했다. 서울대 법대 교수 최종길은 중앙정보부에서 간첩임을 자백, 여죄를 조사받던 중 화장실 창문에서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 1973년 중앙정보부에서 억울하게 죽은 최종길 교수의 동생 최종선이 2001년 3월 12일 '박정희 기념관 건립 반대' 1인 시위를 하는 모습. ⓒ연합뉴스
그 후 최종길 유족은 억울하다고 하면서 신원을 계속 호소했다. 공소 시효가 끝나가던 1988년 10월을 앞두고 최종선은 검찰이 다시 이 사건을 다뤄달라고 호소했다. 6공 검찰이 손을 대긴 했지만,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그런 속에서 2000년에 출범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이 사건을 재조사해 2002년 그 결과를 발표하게 된다. 이때 일부 법의학자들은 사체의 모습이 추락 직후의 모습이 아니라 조작을 위해 옮겨진 모습이라고 판단했다. 이 위원회는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최종길 유족한테 3000만 원이라는 거액을 보상하겠다고 제의했는데 뒤가 구리니까 이런 일이 일어난 것 아니냐는 것 등 여러 가지 사항을 조사 기록에 실으면서 결론으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최종길이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의 고문이라는 위법한 공권력에 의하여 사망하였다고 인정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다",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처럼 2000년대에 들어와서 국가에 의한 의문사라는 것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인정하자, 유족은 국가를 상대로 배상을 요구했다. 2006년 2월 법원은 최종길 교수 유가족에게 고인의 죽음과 그동안 겪은 고통에 대한 배상을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으로서 이 사건을 조사한 김형태 변호사는 2012년 한겨레 기고에서 최종길이 세상을 떠났다는 통보를 받은 날 유족이 중앙정보부의 요구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탄원서까지 써야 했다고 밝혔다. "나라를 배신한 천인공노할 간첩 최종길의 가족으로서 (…) 최종길이 한없이 밉고 원망스러우나 살아 있는 가족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부디 살아남은 우리 가족을 불쌍히 여겨서 (중앙정보)부장님께서 저희를 용서해주시고 우리를 보호해주시며(…)". 억울하게 가족을 잃고도, 그 가족을 죽인 자들에게 '그는 나라를 배신한 죄인이며 우리는 그를 미워한다'는 글까지 써줘야 하는 끔찍한 시대였다. '편집자')

유신 헌법 개정 운동 열기에 긴급 조치 무리수로 맞선 박정희

프레시안 : 현직 중앙정보부 요원의 가족조차 고문과 억울한 죽음, 간첩 조작을 피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유신 체제가 어떤 체제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지표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유신 반대 운동으로 돌아오면, 학생 시위는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서중석 : 학생들의 투쟁에 이어 이제는 언론계, 재야, 종교계로 반유신 운동이 확대돼나간다. 그 무렵 언론계는 유신 쿠데타 이전에 워낙 당해서 비판적인 보도, 진실 보도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1973년에 들어오면서 언론계도 조금씩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1973년 3월 동아일보 기자들은 독자적인 편집권 행사와 신문 지면 쇄신을 요구하는 연판장을 돌렸다. 10월 19일에는 경향신문의 젊은 기자들이 외부 압력 배제 등을 요구했다. 한국일보 기자들도 11월에 기사 누락에 대해 여러 차례에 걸쳐 항의했다. 11월 20일에는 동아일보 기자들이 언론 자유 수호 제2선언문을 채택했다. 1971년에 언론 자유 수호 제1선언문을 채택했던 동아일보 기자들이 이때 제2차 선언을 한 것이다. 이 시기에 동아일보, 경향신문, 한국일보뿐만 아니라 기독교방송국, 조선일보, 문화방송, 중앙일보, 신아일보 같은 데서도 언론 자유 수호를 결의했다. 그러자 유신 정권은 11월 중순부터 압력을 행사했고, 결국 신문 발행인들에게 '유신 체제나 안보에 위해가 되는 기사는 싣지 않기로 한다'는 이른바 자율 방침이라는 걸 마련해 그것에 따를 것을 종용했다.

언론계에서 이렇게 언론 자유를 위해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을 때 김재준, 지학순, 천관우, 함석헌, 계훈제, 김지하 등의 종교인, 언론인, 지식인 등 15명이 1973년 11월 5일 시국 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지금 독재 정치, 공포 정치로 국민의 양심과 일상생활이 더없이 위축되고 우방 각국의 신뢰와 친선이 극도로 실추되어", 이건 김대중 납치 사건 때문이라는 것을 시사하는 것일 텐데, "대한민국은 내외로 최악의 상태에 직면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12월 13일에는 NCC 총무 김관석, 김수환 추기경, 윤보선 전 대통령, 이병린 전 변협 회장, 한글학자 이희승, 함석헌, 김재준, 천관우 등 각계 원로들이 모여 시국 간담회를 열었다. 이들은 국민 기본권을 보장하고 3권 분립 체제를 다시 갖춰야 하며 평화적 정권 교체의 길을 열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건의문을 청와대에 보냈다.

학생 시위에 이어서 이렇게 언론계, 재야, 종교계 등에서 대표급 되는 분들이 활발히 움직이자 박정희 유신 정권은 신경을 곤두세우게 됐다. 그런 가운데 유신 정권으로 하여금 한층 더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2월 24일 헌법 개정 청원 운동 본부가 구성되고 여기서 개헌 청원 100만 인 서명 운동을 벌인 것이다. 여기에는 당시 유명한 사람들이 거의 다 들어가 있었다. 앞에서 이야기한 시국 간담회 참가자들 이외에도 많은 지식인, 그리고 재야와 종교계 인사 등이 포함돼 있었다. 헌법 개정 청원 운동이라고 이름을 붙인 건 유신 헌법에서 개정 발의권이 실제로는 대통령한테만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프레시안 : 유신 헌법을 바꾸라는 요구에 박정희 정권은 어떻게 대응했나.


서중석 : 개헌 청원 100만 인 서명 운동이 시작되자 유신 정권은 바로 반응했다. 이틀 후인 12월 26일 김종필 총리가 전국의 모든 라디오 및 텔레비전으로 무려 1시간 40분이나 연설했다. 한마디로 엄하게 다스리겠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개헌 청원 운동을 하는 쪽에서는 12월 28일 김종필의 담화를 반박하고 청원 운동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12월 29일 박정희가 바로 대통령 담화를 발표했다. "유신 체제를 부정하는 일체의 불온 언동과 소위 개헌 청원 서명 운동을 즉각 중지하라"는 것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면서 이제 훨씬 더 극 대 극의 대결로 가게 된다.

12월 31일 윤보선, 유진오, 김수환 등 15명은 대통령한테 민주 회복 조치를 건의했다. 1974년 1월 7일에는 공화당 초대 총재였던 정구영이 공화당 탈당 성명을 발표했다. 정구영은 자신도 재야인사들과 행동을 함께하겠다고 했다. 정구영이 탈당을 발표한 바로 그날 이희승, 이헌구, 이호철, 백낙청 등 문인 61명이 성명을 발표하고 개헌 청원은 국민의 당연한 권리라고 천명했다.

개헌 청원 서명 운동은 상당히 뜨거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1973년 12월 24일 시작됐는데 그 추운 겨울에 1주일 만에 서명자가 5만 명을 돌파했다. 긴급 조치 1호와 2호가 발동되는 1974년 1월 8일에는 10만 명을 돌파했다. 1월 1일에는 기독교청년협의회 회원들이 중심이 돼서 3000여 명이 가두시위를 벌였고, 1월 7일에는 앞에서 말한 문인들의 개헌 지지 성명이 발표됐다.

이렇게 유신 헌법을 바꾸라는 요구가 커지는 속에서, 1월 8일 박정희는 긴급 조치 1호와 2호를 발동했다. 긴급 조치 1호는 대한민국 헌법, 즉 유신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절의 행위를 금한다고 하면서, 이러한 긴급 조치를 위반한 자 또는 비방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내용이었다. 긴급 조치 위반자를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했는데 2호는 그러한 비상군법회의 설치에 관한 내용이었다.

▲ 긴급 조치 1호와 2호 선포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1974년 1월 9일 자 1면. ⓒ동아일보 화면 갈무리


법치의 가면 벗고 폭압의 민낯 드러낸 긴급 조치 시대

프레시안 : 박정희는 이때부터 긴급 조치를 9호까지 연이어 발표한다. 그런데 긴급 조치라는 비상 통치 수단을 쓰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당시 한국이 국내외적으로 위기 상황이었나? 아울러 긴급 조치 중에는 특이한 게 하나 있다. 경제 관련 조치인 3호다. 서민 생활 안정이라는 명분 자체는 누구도 문제 삼을 수 없던 것이긴 하지만, 이것을 일반 경제 시책이 아니라 굳이 긴급 조치라는 형태로 발표해야만 하는 필연성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국민들을 탄압하기 위해 발동한 다른 긴급 조치들 사이에 그와는 결이 다른 경제 관련 시책을 긴급 조치라는 형태로 끼워 넣은 건 뭔가 다른 의도가 있었기 때문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긴급 조치 3호라는 것은 1974년 1월 14일 발동됐는데, 이건 유신 시대의 다른 긴급 조치와 약간 달라 보이는 면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저소득자의 조세 부담 경감 등 국민 생활 안정을 위해 필요한 조치와 사치성 소비 억제, 자원 절약과 개발, 노사 협조 강화 같은 것을 위해 필요한 조치를 신속히 취하겠다는 것이었다. 1973년에 1차 석유 파동이 일어나지 않았나. 그로 인한 세계 경제의 충격, 그것에 따른 국민 경제의 위기를 국민의 총화적 참여로 극복하겠다는 취지로 긴급 조치 3호를 발동한 것인데, 실제로 어느 정도 효과를 봤는지는 분명치 않다. 긴급 조치가 무조건 탄압하기 위해서만 있는 건 아니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도 긴급 조치 3호를 발동한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는다.

어쨌건 긴급 조치 1호, 2호에 의해 '긴조 시대'가 드디어 열린다. 유신 헌법이라는 것 자체가 헌정을 유린하는 억압과 폭압의 시대를 열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런 것이 긴급 조치에 의해 더 구체화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긴급 조치라는 건 그 본뜻대로라면 경제적으로 굉장한 위기에 놓였거나 사회적으로 큰 혼란이 발생해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거나 국가 안보가 중대한 위기에 처했거나 할 때 발동돼야 하는 것일 텐데, 실제로는 그게 전혀 아니었다. '현행 헌법에 문제가 있다. 고쳐달라'고 청원하는, 유신 헌법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여론을 철저히 금압하기 위해 긴급 조치를 내렸다.

법률과 똑같은 효력이 있던 긴급 조치를 그런 목적으로 발동했다는 점에서 법치주의가 긴급 조치에 의해 사실상 끝난 것 아니냐고 볼 수 있다. 납득하기 어려운 긴급 조치로 법에 따른 정상적인 통치를 대체한 것이다. 더군다나 위반자 형량을 최고 15년으로 정해놓은 것도 그렇고, 그걸 민간 법정이 아니라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하게 한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민간인은 민간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기본 아닌가. 그런데도 박정희는 유신 헌법을 비판, 반대하는 세력을 무섭게 탄압하기 위해 위압적으로 비상군법회의에서 재판하겠다고 선포했다. 이것 자체도 법치주의에 어긋난다고 볼 수밖에 없다.

프레시안 : 유신 정권이 법치의 가면을 벗고 긴급 조치를 선포한 후 상황은 어떻게 전개됐나.

서중석 : 긴급 조치가 발동됐는데도 그것을 반대하는 움직임은 계속됐다. 그러면서 개헌 청원 100만 인 서명 운동을 주도한 장준하와 백기완, 이 두 사람이 1번으로 체포된다. 1월 14일 구속돼 장준하는 징역 15년, 백기완은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그렇지만 장준하와 백기완이 아주 떳떳한 모습으로 군사 법정에 당당하게 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1월 17일에는 이해학 전도사, 김진홍 전도사, 이규상 전도사, 박윤수 전도사, 김경락 목사 같은 사람들이 구국 선언 기도회에서 긴급 조치 1호를 철회하고 유신 체제를 폐지하라는 아주 강경한 내용의 선언문을 낭독하고 서명 운동을 벌였다. 물론 이 사람들은 체포됐다. 유신 정권은 이 사람들하고 인명진 목사에게 각각 징역 10~15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그런데 구국 선언 기도회 사건은 언론 통제 때문에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다. 그러자 권호경 목사, 김동환 전도사, 지금 국회의원인 이미경 등 여러 사람이 개헌 청원 운동 성직자 구속 사건 경위서라는 것을 작성해 전국 교회에 우송했다가 3년에서 15년까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서울대 의대생들도 유신 헌법을 비판하는 시위에 참여했다가 긴급 조치 위반으로 구속돼 5~7년형을 선고받았고 연세대 학생들도 3~7년형을 받았다.

이처럼 긴급 조치가 발동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긴급 조치에 반대하는 운동이 그렇게 쉽게 사그라지지는 않았다. 그런 가운데 대형 사건으로 사람들 뇌리에 남아 있는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쉰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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