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결재 없으면 DJ 납치 안 한다'더니 가담, 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46> 유신 체제, 두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두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체제다.

프레시안 : 유신 체제 수립 후 발생한 민우지 사건, 검은 10월단 사건, 함성지 사건, 남산 부활절 연합 예배 사건에 대해 지난번에 살펴봤다. 이번에는 김대중 납치 사건을 짚어봤으면 한다. 유신 체제의 성격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으로서 국내외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나.

서중석 : 지난번에 살펴본 사건들은 서막이 되는 셈이고 그것에 바로 이어서 정말 큰 사건, 유신 시대 최대 사건이라고 볼 수 있는 김대중 납치 사건이라는 것이 1973년 8월에 일어난다. 김대중 납치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김대중은 야당의 주요 인사였을 뿐만 아니라 '1971년 대선 때 사실 지독한 지방색만 없었더라면 당선됐을 사람 아닌가', 그리고 '박정희 이후의 정치를 맡을 만한 사람이 아니냐', 그런 평가를 받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 아니었나. 그렇기 때문에 김대중 납치 사건이 국내외에 더욱더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김대중 납치 사건은 박정희한테 굉장히 큰 손실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을 가져다줬다. 이 사건은 유신 체제를 뒤흔드는 계기로 작용했다. 우선 국내적으로 김대중 납치 사건을 계기로 해서 반유신 운동이라는 게 광범위하게 일어나게 된다. 그뿐 아니라 박정희가 유신 쿠데타를 일으킬 때 내세운 명분도 퇴색하게 만들었다. 유신 쿠데타를 일으켜 유신 헌법을 만들고 유신 체제를 세우는 명분으로 주요하게 이용한 것이 평화적 남북 통일 아니었나. 그러니까 한반도 평화와 남북 통일을 위해 유신 체제를 만들었다는 주장을 했는데, 바로 이 김대중 납치 사건을 문제 삼아 북쪽에서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후 이어진 남북 관계를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고 나오게 된다. 그래서 이 사건이 발생한 지 얼마 후부터 남북 관계는 다시 아주 나쁜 상태로 가는 걸 볼 수 있다.

국제적으로도 '도대체 한국이라는 나라는 어떤 나라냐. 유신 체제는 어떤 체제냐', 이런 것들을 크게 환기하는 계기가 됐다. 미국, 일본뿐만 아니라 유럽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1970년대 현대 사회에 저런 유신 체제가 있을 수 있는 건가. 대낮에 김대중을 납치해 처치하려고 하는 사태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느냐'고 하면서 유신 체제와 김대중 납치 사건을 연결해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이 세계에서 제일 문제가 심각한 야만 사회인 것처럼 알려지고 그렇게까지 주장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정말 한국에 사는 것이 창피하다고까지 느끼게 만드는, 다시 말해 '유신 체제, 유신 체제 하지만 어떻게 이런 일까지 저질렀느냐' 하는 분위기가 전 세계적으로 돌았다. 이 시기에 한미 관계도 별로 안 좋았지만 특히 한일 관계, 그중에서도 일본의 여론이라든가 언론 쪽, 민간인들의 유신 체제에 대한 반응이 이 사건을 계기로 정말 부정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김대중 납치 사건은 그 자체로도 굉장히 큰 사건이었지만, 그것이 국내외에 끼친 영향이 엄청나게 컸고 전반적으로 유신 체제를 계속 뒤흔드는 지렛대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 사건은 또 아주 이상한 면을 보여줬다.

유신 체제 뒤흔든 김대중 납치 사건과 한일 양국 정부의 이상한 태도

▲ 1973년 8월 납치 사건 이후 동교동 자택에서 야당 원로 박순천의 문병을 받는 김대중. ⓒ연합뉴스
프레시안 :
어떤 점에서 그러했나.

서중석 : 중앙정보부가 김대중 납치를 주도했다는 건 국내에서도 알 만한 사람은 다 그렇게 알고 있었다. 미국은 처음부터 공식적으로 그런 반응을 보였고, 일본에서도 언론이라든가 일반 국민들은 다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한국 정부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조차 그 부분에 대해 아주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이는 독특한 면을 보여줬다. 그런 면에서도 이 사건은 국제 정치학에서나 정치학에서 깊이 있게 연구해볼 만한 특이한 사건이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뻔하게 알고 있는데도, 발가벗은 임금처럼 두 정부에서는 마치 중앙정보부가 관련되지 않은 것처럼 주장하는 면을 보여줬다.

한국 정부에서 '이건 중앙정보부에서 한 짓이다'라는 걸 명백하게 밝히는 건 2000년대에 와서다. 노무현 정권 때 '국가정보원 과거 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국정원 과거사 위원회)가 만들어지는데, 그 위원회에서 다른 사건도 많이 조사했지만 이 사건에 대해서도 국정원 자료 같은 걸 활용해서 아주 구체적으로 조사했다. 그러면서 "명백한 여러 증거 자료를 통해서 김대중 납치 사건은 중앙정보부에서 주도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공식적으로 밝히는 바다", 이렇게까지 표명했다. 국정원 과거사 위원회 이름으로 그렇게 한 것인데, 이건 국정원 이름으로 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또한 노무현 정권의 입장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 정부는 '우리나라에 대한 주권 침해다. 그것에 대해 늦게라도 문제 삼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나오는 게 상식일 텐데 그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태도를 취했다. (국정원 과거사 위원회 위원이던 한홍구 교수에 따르면, 중앙정보부가 김대중을 납치했다는 사실을 한국 정부가 공식 인정하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지 말 것을 일본 쪽에서 여러 경로로 요구했다고 한다. 박정희 정권 당시 이뤄진 한일 양국 정부의 검은 유착이 2000년대에 와서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뜻이었다. '편집자')

프레시안 : 사건 당시로 돌아가 상황을 되짚었으면 한다. 1972년 10월 일본에서 유신 쿠데타 소식을 들은 김대중은 귀국하는 대신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유신 반대 활동을 벌이던 중 1973년 8월 납치를 당했다. 김대중 납치 사건, 어떻게 전개됐나.

서중석 : 이 사건이 어떤 식으로 일어났고 어떤 점이 크게 쟁점이 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미국에 있던 김대중이 일본으로 오자, 중앙정보부 해외공작단장 윤진원과 일본 주재 한국 대사관의 1등 서기관이던 김동운은 1973년 7월 21일부터 구체적으로 행동에 들어갔다. '김대중이 일본에 왔다. 이제 제거한다', 이것이었을 터인데 김대중의 일거일동을 24시간 감시했어도 김대중이 움직이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김대중 이 사람도 위기를 항상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중앙정보부의 감시망에서 벗어나 계속 활동할 수 있었던 것 아니겠나. 김대중의 동향에 관한 여러 제보가 들어오긴 했지만 공작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까 중앙정보부는 아주 초조했고, 그래서 더 서둘러서 일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만큼 명령이 급하게 상부에서 내려왔기 때문에도 서둘렀을 터인데, 그런 상황에서 주일 공사 김재권(김기완)이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다. 이 사람은 남산, 그러니까 중앙정보부의 일본 현지 총책이었고,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주한 미국 대사를 지낸 성김의 아버지다. 하여튼 통일당 당수 양일동이 이때 일본을 방문 중이었는데, 8월 8일 김대중이 양일동을 만나기 위해 양일동의 숙소인 도쿄 그랜드팔레스 호텔 2211호를 방문한다는 정보를 드디어 알아낸 것이다. 이 정보를 사건 이틀 전인 8월 6일에 입수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러면서 윤진원 행동대가 나서게 된다.

김대중이 8월 8일 2211호실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이때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뜻밖이라는 건, 나중에 '김대중이 이것 때문에도 살아난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하게 되는데, 일본에 와 있던 국회의원 김경인이 이 방에 들어온 것이다. 김경인 의원은 그날 오후 1시 15분께 양일동 숙소에서 나선 김대중을 따라 복도로 나왔다. 바로 거기서 행동대가 김대중을 덮쳤는데, 그때 김경인 의원도 김대중과 함께 소리를 질렀다. 중앙정보부 행동대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하나의 사건이 생겨버린 것이다.

그래서 행동대는 물품을 제대로 챙기지도 못하고 현장에 여러 가지 유류품을 놔둔 채 김대중을 지하로 끌고 갔고, 대기하던 승용차에 바로 태워 이동했다. 해안가로 가서 모터보트로 갈아타고 이동하다가 다시 커다란 배, 이게 바로 중앙정보부 공작선 용금호인데 그 배로 옮겼다. 납치한 김대중을 실은 용금호는 8월 9일 일본 오사카를 떠나 10일 밤 부산항 외곽에 도착했다. 배에서 11일 낮을 보낸 후 11일 밤에 하선해 의사에게 김대중을 간단히 진찰하게 했다. 그런 다음에 김대중을 구급차에 태워 서울의 중앙정보부 안가로 데려갔다. 8월 13일 오후 집으로 데려다준다는 게 결정된 모양인데, 그날 밤 김대중을 동교동 자택 앞에 내려줬다.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8월 13일 밤 동교동 자택에 데려다준 자들은 김대중에게 자신들이 구국동맹행동대라고 이야기했다.

김대중 자서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나는 동교동 집 근처 골목에 서 있었다. 하늘에는 보름달이 둥실 떠 있었다. 나는 살아서 돌아왔다.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막 퇴근한 가장처럼." 이게 김대중이 납치된 때부터 5일 만에 집에 돌아올 때까지의 개요다.

이후락 "나는 뭐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

프레시안 : 김대중 납치를 누가 지시했는가를 놓고 오랫동안 논란이 많았다. 박정희 정권에서 중책을 맡았던 인사들 중 일부는 '시키지도 않은 일을 이후락이 했다며 박 대통령이 역정을 냈다', '박 대통령은 이 사건을 지시하지 않았는데도 마치 정적을 납치하게 한 것처럼 오해를 받았다'는 주장을 폈다. 이에 더해, 1973년 초에 발생한 윤필용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이후락이 이를 만회하고자 단독으로 김대중 납치 사건을 일으킨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정리하면 '박정희 대통령은 몰랐고 그런 지시를 할 분도 아니다', 이런 논리를 펴며 박정희를 감싸는 주장들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상황을 감안해도 그렇고 논리적으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들이긴 한데, 그간 이런 주장들이 심심찮게 나온 것이 사실이다.

서중석 : 이 사건에서 사람들이 크게 관심을 가진 것은 백범 사건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백범 김구 암살 사건(1949년 6월 26일)이 반세기 동안 그렇게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관심을 갖게 만든 가장 큰 것은 배후가 누구냐, 이승만 대통령과 이 사건이 어떤 관계가 있느냐, 이런 문제였다. 김대중 납치 사건에서 사람들이 제일 궁금하게 여긴 것은 누가 납치를 지시한 것이냐, 납치 지시를 어느 선에서 한 것이냐, 그리고 살해하려 했느냐 하는 것이다. 사실 많은 사람이 '살해하려 한 것 아니냐'고 생각은 하면서도 어쨌든 그런 부분을 궁금해 했다.

납치를 지시한 최고 윗선은 박정희가 아니겠느냐는 지적들이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지적들도 있긴 하지만, 최고 윗선으로 박정희를 가리키는 증언으로 이런 것이 많이 거론된다. 이철희 중앙정보부 해외 담당 차장보한테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대중 납치 사건을 지시하자, "동백림 사건으로 정보 활동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는데"라고 하면서 반대했다고 이철희 본인은 이야기했다. 1967년 동백림 사건 때 서독 등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관련 인물들을 속여 억지로 끌고 오는 등 체포 과정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켜 국제적으로 크게 논란이 되지 않았나. 그 얘기를 하면서 반대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이후락이 다시 이철희를 안가로 불러서 이번에는 "김대중을 데려와야겠다. 데려오기만 하면 그 후의 책임은 내가 지겠다. 나는 뭐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라는 유명한 말, 많이 인용되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재차 강력히 지시했다고 한다. 그렇게 되자 이철희는 '이후락 부장이 상당히 큰 어려움에 처해 있구나' 하는 심증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이 사건은 이후락이 단독으로 일으킨 것이라고 보기 어렵지 않겠느냐는 것인데, 그럴 때는 생각나는 사람이 있지 않겠나.

프레시안 : 최고 윗선으로 박정희를 가리키는 다른 증언으로 어떤 것이 있나.

서중석 : 그다음에 유력하게 얘기되는 것이, 이것도 여러 군데에서 참 많이 인용하는 것인데, 최영근 의원이 한 얘기다. 이후락은 1980년 서울의 봄이 왔을 때 동향(울산) 친구인 최영근 의원한테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이 어느 날 부르더니 김대중을 없애라고 했다." 그 소리에 이후락이 놀라며 머뭇거렸더니 박 대통령이 다시 불러서 호통을 쳤다고 한다. "당신, 시킨 것을 왜 안 하느냐. 총리하고도 다 상의했는데 왜 안 하느냐", 그러면서 빨리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하들이 다 반대했지만 대통령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이후락이 털어놨다고 한다.

물론 1987년에 가서 이후락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그렇지만 최영근한테 했다는 얘기가 상당히 구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이 최영근 발언을 중시하고 있다.

프레시안 : 최영근이 전한 이야기를 1987년에 부인한 후 이후락이 이 사건에 대해 더 이야기한 것은 없나?

서중석 : 이야기하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점에서도 이후락은 무서운 사람이었다. 어쨌건 조금 전 한 이야기에 대해 한홍구 교수가 새롭게,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해석했다. 한 교수는 국정원 과거사 위원회 위원이었다. 그래서 국정원 자료를 많이 볼 수 있었다.

이후락이 이철희를 두 번째로 불러 "나는 뭐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라고 하면서 강력히 지시하자 이철희는 해외공작국장 하태준, 그리고 중앙정보부의 일본 현지 책임자인 주일 공사 김재권 등을 불러서 공작 계획을 세웠다. 이철희 증언에 따르면 김재권도 이 명령을 따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자 이철희가 '못 하겠으면 당신이 직접 부장께 반대 의견을 말하라'고 김재권한테 이야기한 것으로 돼 있다. 김대중을 납치한 행동대장, 즉 현지 공작단장인 윤진원도 김재권이 "박 대통령 결재 사인을 확인하기 전에는 할 수 없다"고 버텼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그렇게 강력하게 반대하던 이철희, 김재권 이런 사람들이 결국 다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나. 그렇다면 그렇게 행동으로 옮길 만한 것을 이들이 확인한 것 아니겠느냐고 한홍구 교수는 추측했다.

국정원 과거사 위원회에서는 박 대통령이 사전에 이후락에게 지시했느냐 하는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다. 뭐냐 하면 "중앙정보부에 의한 납치임이 탄로가 났을 경우 일본과의 외교 문제 발생과 국제 사회에서 위신 추락 등을 고려할 때 과연 이후락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해 실행될 수 있었겠는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된다", 이것이다. 김대중 납치 사건을 저질렀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큰 국내외적인 문제들이 있는데 이후락이 과연 독단적으로 그런 일을 했겠는가 하는 문제 제기다.

김대중 납치 사건, 박정희와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오월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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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로서 이 문제를 어떻게 보나.

서중석 : 내 의견도 간단히 이야기하면, 박정희 집권 18년을 살펴보면 중요한 모든 사건 중에서 사실 박정희 지시 없이 일어난 게 있느냐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여러 항명 파동, 특히 1971년 10·2 항명 파동 때 박정희의 뜻을 거스른 인사들이 가장 강한 보복을 당하지만, 하여튼 그런 항명 사건을 보건 윤필용 사건을 보건 다른 여러 사건을 보건 그러한 사건들은 박 대통령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이 사건들의 경우 박 대통령이 직접 지시했다는 증언이 나왔기 때문에 그 부분이 명백하게 된 것이지만 그런 사건들을 포함해 중요한 사건 중에서, 나중에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도 살펴볼 터이지만, 박 대통령과 무관하게 일어나는 사건은 없지 않았느냐는 생각을 갖게 한다.

역사를 두루 살펴보면 독재자들은 다른 사람을 믿지 않고 중요한 명령은 스스로 내리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 명령을 어떤 식으로 내리느냐 하는 것은 독재자마다 특징이 있다. 직접적인 명령도 있지만 간접적으로 내리는 명령 등 여러 방식이 있을 수 있는데, 어쨌건 중요한 명령은 최고 권력자한테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말한 여러 가지를 고려할 때 이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과 무관하게 일어난 사건이라고 보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마흔일곱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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