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한 박정희, 신원 보증인마저 핍박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40> 유신 쿠데타, 서른세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한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쿠데타다.

프레시안 : 공화당 원로 정구영은 3선 개헌에 반대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그런데 공화당은 1969년 7월 29일에 시작돼 30일 새벽에 끝난 의원 총회를 통해 3선 개헌안 발의를 결의했다. 그 후 정구영에겐 어떤 일이 일어났나.

서중석 : 정구영은 공화당 내 개헌 반대파를 어떻게든 추슬러서 저쪽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그래서 13명 선만은 지켜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 8월 10일 충북 옥천 집에 갔다. 이때는 주로 라디오로 뉴스를 들었는데, 정구영은 라디오에서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개헌하기로 당론이 확정됐으니까 정구영 의원은 탈당하든지 개헌에 찬성하든지 양자택일을 할 필요가 있지 않느냐', 공화당 의원들이 청와대에 가서 칵테일파티를 할 때 대통령이 이렇게 얘기했다고 뉴스 첫 소식으로 나오는 걸 집에서 들은 것이다. 공화당 원로가 결국 공화당 총재의 뜻에 반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러면서 차지철이 특사로 내려오게 됐다. 정구영은 회고록에서 "정말이지 대통령의 의도를 헤아릴 수 있는 기막힌 특사 선택이었다. 부연해서 말하면 이론 같은 건 필요 없이 그저 밀어붙이고 부딪치는 역할이 필요한 일에 어울리는 차지철을 골라 쓴 셈이었다", 이렇게 평했다. 차지철은 그냥 막 밀어붙이는 사람 아니었나. 우격다짐으로 일을 해치우는 사람이었다. 박정희가 특별히 이런 사람을 선택해서 보낸 것이다. 그런데 차지철이 결혼할 때 주례를 선 게 바로 정구영이었다.

김재규와 차지철을 특사로 보낸 박정희, 끝까지 버틴 정구영

프레시안 : 차지철은 정구영에게 어떤 내용을 전했나.

서중석 : 차지철은 대통령 서한을 정구영에게 전했다. "1969년 8월 5일 공화당 총재 박정희 올림", 라디오 뉴스를 들은 건 10일인데 이 서한은 그보다 닷새 전인 8월 5일 자로 돼 있었다. 내용은 뉴스에 나온 그대로였다. 정구영이 "알았다"고 하는데 차지철은 "양자택일을 하십시오", 이렇게 나왔다. 두 시간 동안 노인네하고 싸웠다. 다음 날 정구영은 기차 편으로 서울에 올라왔는데, 차지철이 '청와대로 직행하자'고 하는 것을 간신히 떼어버렸다. 오후 4시에 다시 차지철이 와서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노인네가 버티고 있는데, 이번엔 김재규 보안사령관이 왔다.

내가 이 부분이 재미있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보는 건 박정희가 차지철과 김재규, 두 사람을 보냈다는 점 때문이다. 아무튼 김재규 보안사령관이 와서 대통령의 뜻에 따라야 한다고 정구영한테 이야기했다. 그런데 정구영은 그전에, 그러니까 6월에 이미 김재규가 집으로 찾아와 '개헌에 찬성해달라'고 얘기하는 것을 들은 바가 있었다. 6월에 김재규가 왔을 때 정구영은 5시간이나 이야기했다. 이때는 주로 정구영이 많이 이야기했다. "권력이 1인 체제가 되고 장기화되면 부패가 생겨나고 그리되면 바로 부정부패 때문에 권력을 내놓지 못하게 된다. 지금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다. 부정부패를 일소하지 못한 점에 있어서는 그분(대통령)이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해가면서 장기 집권해서는 안 된다고 오히려 김재규를 설득하려 한 것이다. 그때 김재규가 이렇게 말했다. "다 선생님 말씀에 동의하지만 개헌이 안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비상사태와 위기가 닥칠 수 있습니다."

3선 개헌에 부정적이던 김종필이 끝까지 버티지 못한 이유로 '박 대통령은 우리 주류계에서 반대한다고 개헌을 그만둘 사람이 아니다. 그러면 다른 방법을 구사하려고 할 텐데 그건 아주 불행한 일 아니겠느냐',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김재규 보안사령관도 그 이야기를 한 것이다. 개헌이 안 되면 비상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 이게 뭐겠나. 또 군이 출동한다는 것 아니겠나. 그러니까 개헌에 찬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정구영은 이렇게 답했다. "어차피 정권을 한 번 잡은 후에는 정권을 내놓지 않겠다고 하고 비상한 방법으로 정권을 연장하겠다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이 운명이라면 그건 어쩔 수 없지 않느냐. 그런데 그것은 나라를 최악의 상태로 만들어놓는 것이다. 그건 결국 파국적 비극을 겪게 되는 것이다. 이건 다른 나라 역사가 다 이야기하는 것 아니냐." 정구영이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김재규가 더 대답을 못하고 돌아갔다. 그것에 대해 정구영 이 양반이 평한 것을 주목하고 싶다.

프레시안 : 정구영은 어떻게 평했나.

서중석 : 정구영은 <중앙일보> 이영석 기자한테 이렇게 얘기했다. "나는 참 김(재규) 장군을 애국자라고 봐요. 생각이 단순하거나 천박하지 않아. 아주 깊고 넓게 보는 눈을 가졌어. 그래서 내가 그 사람 얘기도 귀담아듣고 나도 성의를 다해 얘기를 했어. 무려 5시간을 얘기했었어. 대통령도 그가 단순히 동향이라거나 해서가 아니라 그의 심성을 취해 측근으로 픽업할 수 있었겠다는 생각도 했어. 덮어놓고 맹종만 하는 그런 사람은 아닌 듯해."

이 얘기가 왜 중요하다고 보느냐 하면 정구영은 1978년에 죽었다. 김재규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한테 총을 쏘는 걸 못 본 사람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1972년에 한 것이다. 그러니까 김재규와 차지철이 나중에 박정희와 어떤 관계를 맺게 될지 그 역사를 전혀 모른 채,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사절 비슷하게 온 이 두 사람에 대해 용케도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다. 이 평가는 상당히 의미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정구영이란 사람은 딸깍발이 기질을 갖고 있었다.


▲ 2012년 10월 10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시대의 양심 정구영 평전> 출판 기념회 및 추모 사업회 발족식 모습. ⓒ연합뉴스


프레시안 : 다시 찾아온 김재규와 정구영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나.

서중석 : 6월에 왔던 그 김 장군이 8월에 또 왔다. 차지철이 와 있는데 이날 5시쯤 김재규가 다시 정구영을 찾아온 것이다. 정구영은 차지철을 간신히 돌려보내고 김재규와 이야기했다. 제발 찬성해달라며 김재규는 침통한 표정으로 정구영을 쳐다봤다. 정구영은 김재규한테 3선 개헌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다시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3선 개헌 문제, 헌법 정신을 위배한 장기 집권이 기도되고 있는 이 마당에 내가 탈당을 해?" 3선 개헌에 찬성하지 않을 거면 탈당하라는 것 아니었나. "그래서 대통령이 절 보냈습니다"라고 김재규가 말하자 이 양반은 "국민에 대한 나 자연인의 약속을 무시하고 탈당을 해? 그건 안 되지.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나는 이걸 저지하는 데 전력을 다할 것이다", 이렇게 얘기했다. 김재규가 보기에 이건 안 되는 것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갔다고 한다. 아주 침통한, 무거운 얼굴이었다고 한다.

김재규가 그날 저녁 7시경 다시 왔다. "대통령한테 대충 선생님의 생각을 말씀드렸습니다"라고 하면서 "각하께서 더는 선생님을 괴롭히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줄 알고 계세요"라고 하고 김재규는 돌아갔다. 나는 1979년 부마항쟁이 일어났을 때 김재규가 그 상황을 대통령한테 충직하게 사실 그대로 이야기했듯이, 이때도 사실 그대로 얘기했다고 본다. '그 양반은 안 됩니다. 절대 설득이 안 되는 분입니다. 탈당도 안 할 사람입니다'라고 하면서 '이 양반을 가지고 더 뭔가를 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놔두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싶다.

김재규 같은 사람을 측근으로 계속 두고 있었다는 건 그래도 박정희 대통령이 인물을 쓰는 점에서 잘한 점이 일정하게 있었다는 걸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자신이 제일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그런 충직한 말을 하는 김재규를 곁에 두긴 했을 것이다. 김재규는 박정희가 굉장히 믿었던 사람 아닌가. 육사 2기 동기이기도 하고 고향 사람이기도 하지만, 또 이 사람 하는 것을 보고 그렇게 여기지 않았겠나. 1964년 6.3 계엄 때에도 6사단장이던 김재규에게 그 군대를 이끌고 오도록 하지 않았나. 어쨌든 김재규를 옆에 두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박정희 대통령도 좀 평가를 할 만한 게 있다는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 : 김재규가 다녀간 후 정구영은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정구영 이분은 집념이 참 강한 분이었다. 옳다고 여기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어려움이라도 견뎌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 분이었다. 그래서 청구동 김종필 집을 찾아갔다. 어떻게든 3선 개헌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간 것이다. 김종필은 3선 개헌을 반대했다가는 최악의 사태가 올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았겠나. 그러자 정구영은 "형은 혁명(5.16쿠데타)도 결행했던 몸 아니오. 형의 일신이 죽어 이 나라 건국을 10년 앞당긴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면 의미 있는 죽음 아니오", 이렇게 얘기했다.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고 김종필이 이야기한 모양이다. 이어서 정구영은 "그러니 최악의 결론까지도 각오하고 결심을 하시오", 이랬는데 김종필은 아무 말도 안 하고 아주 애매한 태도만 취했다고 한다.

노인네는 섭섭해서 돌아갔지만, 김종필은 바로 다음 날 개헌 반대파 의원 30명을 모아놓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대통령이 결심했으니까 따르자는 쪽으로 몰고 간 것이다. 그런데도 9월 6일, 그러니까 국회에서 3선 개헌안을 표결에 부치기 8일 전인 이때 정구영은 다시 청구동에 갔다. 김종필은 다시 미지근한 대답만 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정구영은 끝까지 3선 개헌을 반대했는데, 그것은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3선 개헌 앞두고 미국 간 박정희, 사사오입 전 방미한 이승만과 닮은꼴

ⓒ오월의봄
프레시안 : 정구영은 박정희가 공화당에 입당할 때 신원을 보증한 사람이다. 1963년 8월 30일 박정희는 전역식을 하고 공화당에 들어오는데, 그 풍경을 전한 <동아일보> 기사(1963년 8월 31일 자)에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국민학교에 들어갈 때처럼 제가 보증을 섭니다"라고 정구영이 말하자 박정희는 "원래 무슨 사고가 나면 보증인이 책임지는 건데…"라고 답했다. 그러자 정구영은 이렇게 얘기했다. "사고가 나도 충분한 각오가 돼 있습니다." 정구영은 3선 개헌을 마지막까지 반대하고 유신 쿠데타 이후에는 공화당에서 탈당(1974년 1월)하는데, 여기에는 자신이 보증을 선 인물이 친 대형 사고에 나름대로 책임을 지려 한 뜻이 담긴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5.16쿠데타 후 쿠데타 세력과 손잡은 부분 등은 그것대로 비판적으로 평가해야 할 대목이지만, 3선 개헌 정국에서 정구영이 보인 모습은 오늘날 보수를 자임하는 이들에게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입으로는 보수를 자칭하며 자유민주주의를 운운하면서도 실제로는 보수라는 이름도,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도 욕되게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아울러 신원 보증인마저 핍박하는 박정희의 모습은 위기 상황에서 여러 차례 자신을 구해준 은인 장도영을 5.16쿠데타 직후 내쫓고 이른바 '혁명 동지'들 중 상당수를 반혁명 사건으로 엮어 밀어낸 것 등을 떠오르게 만든다. 이래저래 씁쓸한 풍경이다. 다시 돌아오면, 7월 30일 공화당에서 개헌안 발의를 결의한 후 3선 개헌의 다음 수순은 무엇이었나.

서중석 : 8월 7일, 윤치영 의원 외 121명 의원의 이름으로 3선 개헌안이 제출됐다. 개헌안의 핵심은 대통령의 계속 재임은 3기에 한한다고 하여 3선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이 '계속 재임'이라는 게 문제가 된다. (1969년 9월 11일 국회 본회의에서 야당의 박한상 의원이 '3기 재임'의 뜻을 물었다. 이에 공화당 백남억 의원이 "만일 대통령께서 (19)71년에 입후보하셔가지고 당선되신다면 그때부터 3기가 시작되는 것이다"라고 답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야당 의원들 사이에서는 '1975년까지 대통령을 하면 박정희 대통령이 더는 못한다는 뜻 아니었느냐'는 등의 반발이 터져 나왔다. 1971년부터 새롭게 3번 더 대통령을 할 수 있다는 규정인지, 이미 2번 당선된 박정희 대통령은 최대 1번만 더 할 수 있다는 규정인지를 놓고 벌어진 논란이었다. 후자로 정리되긴 하지만, 논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발언이었다. 백남억 발언 다음 날 야당 의원 김응주는 "이번 개헌은 3선 개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종신제 개헌을 한다고 하는 것이 드러났다"고 비판했다. <편집자>) 그리고 대통령 임기는 4년으로 했다. 이경재 기자의 취재에 따르면 3선 개헌안이 여권 내에서 거론될 때 박정희 대통령은 임기를 통일 시까지 또는 6년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전에 이야기했는데, 개헌안에서는 4년만 더 하도록 확정됐다.

국회의원 122명이면 이건 통과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에는 신민당 의원도 3명 포함돼 있었다. 성낙현, 조흥만 의원이 표변해 7월 29일 개헌 찬성을 선언했고 그다음 날 신민당 전국구 의원인 연주흠도 돌아섰다. 성낙현은 유진산의 조카사위인데, 1970년대 말에 여고생들과 성 추문을 일으켜 크게 구설에 오르기도 한다. 하여튼 1969년 이때는 이런 짓을 했다. (성낙현은 3선 개헌 찬성 후 공화당으로 옮겨 다시 국회의원이 되지만, 여고생들을 상대로 한 성 추문으로 1978년 국회의원 자리를 내놓게 된다. 그리고 연주흠의 아들이 바로 박근혜 정부에서 청와대 국방비서관을 맡았던 연제욱 전 사이버사령부 사령관이다. 연제욱은 2012년 대선 당시 사이버사령부의 정치 관여 문제로 재판을 받고 군복을 벗었다. <편집자>)

8월 20일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했다. 사사오입 개헌으로 나중에 알려진 이승만 대통령의 영구 집권을 위한 개헌이 1954년 5.20선거 이후 추진될 때,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 된 후 처음이자 대통령으로서 가는 것으로는 마지막으로 미국을 방문하지 않았나. 그것과 마찬가지로 박 대통령도 3선 개헌을 앞두고 미국에 갔다. 물론 이 대통령도, 박 대통령도 미국에 가서 장기 집권 이야기를 한 적은 없다. 그러나 미국의 지지를 확고하게 받고 있다는 걸 국민들한테 과시하는 면은 분명히 있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9월 7일 신민당은 전당 대회를 열고 해산을 결의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프레시안 : 3선 개헌안 통과가 코앞이던 이때 신민당은 왜 그런 결의를 한 것인가.


서중석 : 극약 처방을 한 것이다. 중앙정보부의 공작에 넘어가 3선 개헌 지지로 돌아선 세 국회의원의 의원직을 박탈하려면 당시 정당법으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이 방법을 썼던 것이다.


3선 개헌안이 국회에 제출되고 방학이 끝나가면서 대학가 곳곳에서 다시 시위가 벌어졌다. 8월 하순 대학들이 문을 열게 되는데, 8월 21일 고려대생들이 학생 총회를 열고 개헌 반대를 외쳤다. 이날 연세대에서도 그런 활동이 벌어진다. 25일 고려대생들은 다시 교문 밖으로 진출해 경찰과 충돌했다. 고려대생들은 26일에는 황소 파시즘 화형식을 거행하고, 세 차례에 걸쳐 학교 밖으로 진출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8월 28일과 29일에는 경북대생들이 개헌 반대 시위를 했다.

9월 들어 개강한 학교들이 늘어나면서 서울대 문리대생들의 개헌 음모 규탄 학생 총회 같은 것이 잇달아 일어났다. 서울대 문리대, 상대 쪽에서 시위가 계속 이어지고 서울대 법대, 공대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경북대에서도 계속 시위가 벌어졌다. 9월 1일 서울대는 다시 무기 휴교를 결정했다. 그러나 서울대생들의 철야 농성이 법대에서 이뤄지는 식으로 투쟁이 계속됐다. 3일에는 연세대, 고려대, 대전대, 영남대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4일에는 공대 캠퍼스에 있던 교양 과정부 학생들과 공대생들이 크게 시위를 벌였다. 성균관대생들도 이날 시위를 했는데, 학교에서는 임시 휴강 조치를 취했다. 5일에는 연세대, 계명대, 부산대, 전남대 등에서 시위와 성토대회가 이어졌고 8일에도 여러 대학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9일에도, 10일에도 서울과 지방의 많은 대학에서 학생들이 계속 시위를 했다. 그러자 9월 11일까지 전국 38개 대학이 무기 휴교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그간 시위를 벌이지 않았던 여대생들도 나서게 된다. 11일 숙명여대생 1000여 명이 결의 대회를 열었고 이화여대생 4000여 명은 성토대회를 했다. 이때 이화여대생들이 검은 치마와 흰 윗도리로 복장을 통일해 눈길을 끌었다.

개헌안 통과가 임박했다 싶었던 9월 10일 밤 서울대 문리대, 법대, 상대, 사범대 학생들 100여 명이 법대 도서관을 기습 점거했다. 학교 당국은 수도와 전기조차 끊었다. 학생들은 도서관에서 외부와 단절된 채, 외부 소식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속에서 75시간 동안이나 단식 농성을 했다. 굉장히 힘든 단식 농성이었다. 이런 단식 농성은 전두환 정권 때인 1986년 10월 건국대 사태가 벌어졌을 때에도 있게 된다. 그때는 학생들이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경찰이 학생들을 대거 그쪽으로 몰아넣어서 규모가 큰 단식 아닌 단식 농성이 있었던 것인데, 그와 달리 1969년 이때 이렇게 외부와 단절된 채 75시간 동안 단식 농성을 했다는 건 당시 학생 운동에서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이날 고려대생들도 농성에 들어갔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범국민 투쟁 위원회에서도 9월 7일 인천, 광주, 청주에서 3선 개헌에 반대하는 큰 규모의 유세를 했다. 대한변협의 일부 변호사들도 9월 12일, 3선 개헌 반대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런데 이러한 운동은 1965년 한일협정 비준 반대 운동에 비하면 규모가 좀 작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비밀 군사 작전을 하듯 일요일 새벽 전격 날치기

프레시안 : 3선 개헌안, 어떻게 통과됐나.

서중석 : 9월 14일 일요일, 거꾸로 읽으면 4.19가 된다고 이야기하는데, 새벽 2시 30분 국회 본회의장이 아닌 제3별관에서 개헌안이 날치기로 통과됐다. 본회의장에서는 야당 의원들이 농성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분위기 때문에도 본회의장에서 할 수가 없었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본회의장에서 개헌안 통과를 시도할 경우 이탈 표가 나올 것을 두려워해 아예 제3별관으로 간 것이다. 3선 개헌에 찬성한 의원들은 쓰레기를 버리는 뒷문을 통해 제3별관으로 조용히 들어가 일렬로 서서 차례로 투표를 했다. 새벽 2시 38분, 이효상 국회의장이 개헌안 통과를 선포했다. 개헌안에 이어 국민 투표 법안까지 통과를 시키고,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많은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새벽 2시 54분 기자들이 막 플래시를 터트릴 때 별관을 빠져나왔다.

공화당에서 축출돼 무소속으로 돼 있던 예춘호, 양순직, 김달수는 3선 개헌에 끝까지 반대했다. 정구영도 물론 반대했고 서민호 의원도 반대했다. 신민당을 해산하고 신민회라는 교섭 단체를 만든 야권에서도 반대하자, 공화당 쪽에서 이런 식으로 변칙 처리를 한 것이다. 이 변칙 처리는 논란을 자초했다. 법을 어긴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국회가 본회의 장소를 옮겨 투표를 할 때는 본회의 장소를 옮겼다는 것을 야당 의원들한테 통고해줘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건 회의법을 어긴 것이다. 그리고 14일이 공휴일 아니었나. 공휴일에 국회 본회의를 열려면 반드시 결의를 하도록 돼 있었다고 하는데, 그런 결의 없이 회의가 열렸다. 이 두 가지 점에서 불법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변칙 처리에 대해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신문에 '날치기로 처리됐다'는 식으로 보도되지 않도록, '개헌안 통과'로만 나가도록 압력을 가하라고 각 신문사에 파견된 요원들에게 지시했다고 한다. 김충식 기자의 취재에 의하면 <동아일보>에도 담당 중앙정보부 요원이 '처리가 아니라 통과로 제목을 달라'고 압력을 넣었지만, 울분에 차 있던 편집국 기자들은 굴복하지 않고 '개헌안 전격 변칙 처리'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내보냈다. 그랬더니만 그다음 날 <동아일보> 담당 중앙정보부 요원이 얼굴에 여기저기 멍이 든 채 나타났다고 한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한테 직접 얻어맞아서 그렇게 됐다고 그런다.

▲ 3선 개헌안 날치기를 보도한 <동아일보> 1969년 9월 15일 자 1면. ⓒ<동아일보>

프레시안 : 비밀 군사 작전을 하듯 은밀히 이동해 전격 처리하고, 그 과정에서 이효상 국회의장은 의사봉 대신 주전자 뚜껑으로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부끄러운 짓이라는 것을 그래도 모르지는 않았는지 상당수가 고개를 숙이고 나오는 모습 등은 3선 개헌안 통과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3선 개헌안 통과 후 각계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9월 14일 개헌안이 통과되자 다시 대학에서 들고일어났다. 15일 중앙대, 건국대, 한양대, 연세대 의대와 간호대에서 성토대회와 시위가 벌어졌다. 경기고 등 일부 고등학교 학생들도 시위를 했다. 16일에는 다시 연세대 의대생이 시위를 벌였다. 이 연세대 의대생들은 1960년 4.19 때도 시위를 참 잘했다. 이날 중앙대생 등도 시위를 했는데 중앙대생 일부는 삭발도 했다. 영남대, 관동대, 성심여대, 춘천농대에서는 학생들이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서울고 학생들도 반대 집회를 열었다. 17일에는 장로회신학대생이 성토대회를 했고 성심여대 학생들은 구국 기도회를 열었다. 우석대, 홍익대, 대전대, 영남대 등에서도 성토대회와 시위가 벌어졌다. 그리고 4.19 때 역시 대단한 역할을 했던 대광고에서 1000여 명이 카드 시위를 했다. 부산상고 학생들도 거리에서 시위를 했다. 18일에는 국민대, 동성고, 건국고 학생들이 3선 개헌 반대 집회를 열었는데 동성고는 대광고와 더불어 4.19 때 큰 역할을 했던 곳이다. 19일에는 감리교신학대, 한국신학대에서 구국 기도회가 열렸고 경북대, 서울사대부고 등에서 개헌 반대 농성이나 집회가 열렸다.

이렇게 고등학생들까지 시위를 하자 정부는 고교생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시위가 격렬했던 학교의 교장을 해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휴교에 들어가는 학교가 늘어나는데, 9월 19일까지 전국 38개 대학과 9개 고등학교가 휴교에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개헌 반대 시위를 한 학생들을 국민 투표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는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개헌에 대한 찬성 또는 반대 운동은 선관위에 신고한 연설회만 허용하는 것으로 법 조항을 만들어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정당 같은 데서 신고한 연설회만 합법적으로 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연설회가 아닌 옥외 집회에서는 찬성 또는 반대를 하지 못하도록 법에 규정돼 있었다. 물론 선전 벽보도, 현수막도 못 붙이게 했다. 교회나 학교 등을 이용한 찬성이나 반대 운동도 금지했다. 그래서 학생들이 3선 개헌 반대 투쟁을 하기가 아주 어렵게 되는 사태를 맞이했다.

9월 20일에는 신민회가 신민당으로 다시 창당하는, 한국 정당사에서 참 웃지 못할 일이 일어났다. 그런 속에서 국민 투표가 10월 17일 실시됐다. 투표율 77.1퍼센트, 찬성률 65.1퍼센트로 3선 개헌안이 통과됐다. 박정희 대통령이 7.25 특별 담화를 통해 3선 개헌안 국민 투표와 자신에 대한 신임 문제를 연계하고, 정부가 다양한 홍보, 선전을 통해 3선 개헌안 통과 쪽으로 분위기를 몰아가지 않았나. 그런 노력에 비하면 찬성률 65.1퍼센트는 너무 약하지 않느냐, 승리라 해도 참 빈약한 승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투표율은 서울이 60.7퍼센트로 제일 낮았고 경북이 85퍼센트로 가장 높았다. 서울에서는 반대표가 찬성표보다 더 많이 나왔지만, 경상남북도와 전남에선 찬성표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10월 21일 중앙정보부장과 비서실장이 드디어 갈렸다. 청와대 비서실장에 김정렴, 중앙정보부장에 김계원이 임명됐다. 김정렴은 최장기 비서실장이 되는 사람이다. 그리고 재무부 장관에 남덕우가 임명되면서 이른바 서강대팀이 등장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대학이 10월 20일부터 부분적으로 문을 열었다. 서울대는 10월 23일 개강했다. 3선 개헌 국면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마흔한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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