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세동점'의 해소, 다른 백 년을 가져온다 ③

[백년포럼] 유기론적 원리 복원, 서구 한계 극복할 대안인가

오는 26일 저녁 7시 30분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열리는 '백년포럼'에서 발표될 역사학자 김기협 선생의 발제문 '서세동점의 해소, 다른 백 년을 가져온다'의 마지막 글을 싣는다. 이번 '백년포럼'에서는 김기협 선생의 발제에 이어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가 토론을 할 예정이다.

(3) 어떻게 달라질까?

전쟁이 정치가 된 까닭

전쟁의 의미에 관해 가장 많이 인용되는 말이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1780-1831)의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장(延長)"이란 말이다. 이 말의 의미를 요즘 다시 생각해보고 있다.

전쟁의 원래 목적은 약탈이었다. 재화나 영토를 빼앗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인민을 포획해 노예로 삼는 것도 인적자원의 약탈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의 카르타고 정벌처럼 화끈한 사례는 말할 나위도 없고 십자군전쟁에서 장미전쟁까지, 모든 전쟁에는 손익계산서가 붙었다.

전쟁에는 파괴가 따르므로 승자의 이득이 패자의 손실보다 작은 것이 정상이다. 중세사 연구가 잘 되어 있는 잉글랜드 경우를 보면, 전쟁 때문에 왕권이 흔들리는 일이 많았다. 전쟁 비용을 영주들에게 빌렸다가 전리품을 충분히 얻지 못했을 때 왕의 직할지를 떼어 갚는 일이 다반사였다. 중세 유럽에서 전반적으로 왕권 신장이 어려웠던 한 가지 이유다.

그런데 산업혁명기에 전쟁의 성격에 변화가 일어났다. 전쟁이 '수지맞는 사업'이 된 것이다. 프레데릭 바스티아의 1850년 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Ce qu'on voit et ce qu'on ne voit pas)에 나오는 '깨진 유리창' 이야기가 이 변화를 보여준다.

주인 아들이 빵집 유리창을 실수로 깨뜨렸을 때, 사회 전체를 봐서는 나쁜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당시 유행했던 모양이다. 유리가게 주인에게 일거리가 생겨 수입을 얻고, 그가 그 돈을 다시 소비하고, 경제의 활성화에 보탬이 되는 행위가 이로부터 연쇄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바스티아는 이런 관점이 '보이는 것'에만 얽매여 '보이지 않는 것'을 놓치는 오류라고 지적했다. 유리가 안 깨졌으면 빵집 주인이 유리값으로 쓸 돈을 뭐든 다른 곳에 써서 어차피 비슷한 경제 활성화 현상을 일으켰을 것이고, 유리가게 주인이 번 돈은 빵집 주인이 쓴 돈보다 작으니, 사회 전체에게는 분명한 손실이라는 지적이었다.

▲ 역사학자 김기협 ⓒ홍익표 의원실

산업혁명이 몰고 온 대량생산-대량소비 구조에서는 전쟁의 파괴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파괴로 인한 수요의 증대가 오히려 경제 활성화를 부채질하는 것이 크게 보인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큰 손실이 발생하더라도 대량생산체제가 확장되는 단계에서는 문제로 인식되지 않았다. 바스티아가 말한 '보이지 않는 것'은 20세기 들어와서야 경제학에서 '기회비용'이란 개념으로 채택되었다.

전쟁이 약탈행위에 그친다면 그 정치적 의미가 제한된다. 이길 자신이 있으면 전쟁을 걸고, 자신이 없으면 피할 뿐이다. 그런데 19세기 유럽에서는 소득이 큰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정치적 수단으로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시대 상황에 따른 전쟁의 의미 변화를 깨달았던 것이다.

요즘 클라우제비츠의 말을 다시 생각하는 것은 산업혁명기 전쟁의 목표가 단순한 자원 획득을 넘어 자본주의체제 확장을 바라보게 된 점을 염두에 둔 것이다. 자본주의체제는 그 지속을 위해 시장 확대를 필요로 한다는 세계체제론의 지적에서 떠오른 생각이다. 지금 존재하는 자원을 탈취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자본주의체제의 주변부로 끌어들여 지속적으로 착취하는 목표로 바뀐 것이 아닌가. 함포 외교의 첫 번째 요구가 '개항'이었다는 사실도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서세동점의 척후병 동인도회사

1600년 영국 동인도회사가 설립될 때는 유럽인의 해상활동이 약탈 단계에 있을 때였다. 특히 영국인의 해상활동은 프랜시스 드레이크(1540~1596)의 경우에서 보듯, 해적 행위와 구분이 잘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해전에 부사령관으로 나선 드레이크는 스페인 왕이 거금의 현상금을 걸어놓은 해적이었다.

1588년의 승리를 발판으로 1591년 3척의 영국 선단이 처음으로 동양무역에 나서서 3년 만에 귀항했다. 그러나 1596년 출항한 제2차 선단은 실종되고 말았다. 제3차 선단을 준비하기 위해 자본을 모은 상인들은 1599년 이 사업의 독점 보장 등 국왕의 보호를 청원하기로 했다. 이 청원에 따라 1년 후 흠정 헌장이 내려짐으로써 동인도회사(EIC)가 성립되었다.

초기의 동인도회사는 하나의 벤처기업이었다. 그런데 17세기 중엽의 내전 후 왕정복고 때 동인도회사의 위상에 변화가 일어났다. 1670년경의 5개 법령을 통해 독자적 영토 획득과 그 영토 내의 사법권과 화폐주조권, 군대를 보유하고 전쟁을 선포할 수 있는 군사주권 등을 갖게 된 것이다. 영국의 해외 확장을 위한 '하청(下請)국가'가 만들어진 셈이다.

군대 보유권을 갖고도 동인도회사의 병력은 수십 년 동안 수백 명의 경비병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가 18세기 중엽 크게 늘어나기 시작하고, 특히 프랑스와의 7년 전쟁 동안 급증해서 전쟁이 끝난 1763년에는 2만 6000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 후 미소레 왕국과의 전쟁(1767~69, 1780~84, 1789~92, 1799), 마라타 제국과의 전쟁(1775~82, 1803~05, 1817~18) 등을 통해 동인도회사의 인도 지배가 확장되는 동안 수십만 대군으로 확대됐다. 동인도회사는 세포이반란(1857) 때까지 인도 지배의 주체였고 중국과의 무역도 독점했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자본이 국가를 조종한다는 지적이 있거니와, 100년(1757~1858) 동안 동인도회사는 실제로 국가 노릇을 했던 것이다. 아편전쟁의 원인도 동인도회사의 활동에 있었다.

서세동점의 가장 강력한 주체로 활동하던 동인도회사가 세포이반란을 계기로 1858년 인도 통치권을 국왕에게 넘기고 1874년 해산에 이르게 된 것은 영국 제국주의가 궤도에 오른 결과였다. 17세기 영국의 해외 활동은 '약탈' 단계를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았고 본국 정치와 별개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하청업체'가 필요했다.

그런데 19세기에 와서는 산업혁명의 진전에 따라 약탈보다 시장 확대를 중시하게 되었고, 식민지 경영도 본국 정치와 긴밀한 연관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국가 간 경쟁의 심화 때문에 국가가 해외 활동에 직접 나설 필요도 있었다. 한편 영국 의회가 넓은 범위의 자본세력을 대표하게 되었으므로 회사와 관계된 좁은 범위의 특권세력이 배제되기에 이른 것으로 볼 측면도 있다.

동인도회사의 퇴진으로 본격적인 '대영제국'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영국의 인도 지배 목적은 재화 약탈에서 자원 획득을 거쳐 체제 확장으로 그동안 바뀌어 왔다. 인도는 주변부에서 반 주변부로 접근해 왔고, 그에 따라 대영제국의 국가체제 안에 더 깊이 편입된 것이다. 이 무렵, 19세기 중엽에는 산업혁명의 성과가 쌓여 열강의 해외활동 목적이 자본주의체제 확장에 집중되고,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개항' 요구가 강화되기에 이른다.

▲ 항구로 실려 나가는 인도산 원면 ⓒ프레시안 자료사진

슬픈 학문의 시대

1990년경의 공산권 붕괴 앞에서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공산주의체제 실패의 필연성을 논한 대목을 면밀히 읽어보면, 자본주의체제에도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전체주의 국가의 경우, 그 근저에는 인간생활 전체를 포괄하는 명확한 이데올로기가 있다. 전체주의는 시민사회의 완전한 파괴를 시도했으며, 시민 생활의 완전한 관리를 목표로 했다. 1917년에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이래 소련은 반대당, 신문, 노동조합, 사기업, 교회 등 러시아 사회에서 권력에 맞설 가능성이 있는 모든 조직을 탄압해 왔다. 1930년 말에도 이러한 조직 중 몇 개는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옛 정신의 골자는 모두 빠져 버리고, 국가에 의해 철두철미하게 통제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민 하나하나는 원자(原子) 상태에 놓여, 전능한 정부 이외의 모든 '중간조직'으로부터 동떨어진 존재로 남겨졌다.

전체주의 국가 소비에트는 보도관리나 교육, 정치선전을 통해서 개인의 신념이나 가치관 그 자체의 골격을 바꾸고, 그것에 의해 소비에트 인간 자체를 변화시키려고 했다. 이러한 시도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개인적이고 가까운 관계인 가족관계에까지 미쳤다. (...)

사회가 체계적으로, 조직적으로 분화되어감에 따라, 사회를 구성하고 있던 여러 가지 인간관계 - 가족, 종교, 역사적 사실, 언어 - 가 공격 목표가 된다. 그리고 개개인의 밀접한 관계는, 그 당사자를 위해서 할당되어지는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다른 인간관계에 의해 대치된다. (<역사의 종말>(이상훈 옮김, 한마음사 펴냄) 57쪽, 필자 밑줄)

자본주의사회에서도 똑같이 일어난 일 아닌가? 후쿠야마는 파괴, 탄압, 통제, 조작 등 행위의 주체로 국가를 지목하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주체는 당(黨)이고 국가는 도구다. 자본주의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국가를 도구로 같은 행위를 행하는 세력이 있다. 자본주의사회의 자본세력은 공산주의체제의 당처럼 명확한 형태를 취하지 않기 때문에 그 행위를 확인하고 증명할 수 있는 범위에 차이가 있지만, 장기간에 걸쳐 나타난 경향은 그 존재를 분명히 보여준다.

무엇보다 밑줄 친 두 부분이 두 체제에 확실히 공유되는 것이다. '인간생활 전체를 포괄하는 명확한 이데올로기', 자본주의체제 확장에서도 이것이 핵심적 요소였다. 이 이데올로기, 즉 배금주의 없이는 주변부 착취의 효율성에 한계가 있다. 피착취 사회나 계층의 자발적 호응 없이 착취자가 일일이 힘들여 빼앗아오는 것으로는 체제 작동이 제대로 안 된다.

"주민 하나하나가 원자 상태에 놓이는" 것 또한 자본주의체제 성립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가족, 종교, 역사, 언어 등 이익관계 아닌 다른 원리에 입각한 모든 인간관계가 자본주의체제에서는 공격받거나 주변화된다. 자본주의체제의 가치체계 획일화에는 탄압보다 선전이 더 큰 몫을 맡았는데, 여기에는 근대적 학문이 적극 활용됐다. 노명우는 <사회학의 쓸모>(지그문트 바우만 외 지음, 서해문집 펴냄) '역자 후기'에 이렇게 적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쓸모없다고 박대당하고 있는 철학을 '슬픈 학문'이라고 불렀다. 사회학 역시 철학과 더불어 또 하나의 '슬픈 학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도르노는 '슬픈 학문'의 마지막 희망을 "철학이 방법론으로 변질된 이후 지성의 냉대를 받거나 자의적 경구에 머물다가 끝내는 잊히게 된 영역, 즉 '올바른 삶'의 이론"을 회복하는 데서 찾았다. 철학만큼이나 '슬픈 학문'인 사회학의 마지막 비상구 역시 거기에 있다.

제도화된 사회학은 방법론적 정교화에 몰입한 나머지 질문의 능력을 상실했다. 사회학적 질문은 질문을 위한 질문이 아니며, 사회학적 연구의 최종 목적지는 계량화된 연구 실적이 아니다. 질문을 위한 질문, 연구를 위한 연구와 같은 동어반복적 폐쇄회로의 저편에 놓여 있는, '올바른 삶'을 위해 던지는 사회에 대한 질문, 사회학은 그러한 질문에 내재한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기회를 잃어버렸다. 질문의 힘을 잃어버린 사회학은 주어진 '현재'에 존재하는 '사실'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데는 뛰어나지만, 무엇이 없어야 하고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상상을 상실했다. '좋은 삶'과 '좋은 사회'에 대한 상상을 키우는 질문의 힘을 잃어버린 사회학은 그저 세간의 눈으로는 쓸모없어 보인다.(245쪽)

어느 분야의 학자라도 이 글을 읽으며 자기 분야도 또 하나의 '슬픈 학문'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학도 그렇다. 계몽주의시대에 발흥한 근대역사학이 이전 시대의 '봉건제'를 비판한 데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 위한 정지작업의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근대적 가치체계가 자리 잡고 그 위에 자본주의체제가 세워진 후의 봉건제 비판은 반동적 행태일 뿐이다. 질문의 능력을 스스로 포기하면서 학문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이다.

근대 세계체제의 한계

인간생활 전체를 포괄하는 '명확한 이데올로기', 인간 하나하나를 '원자 상태'에 두는 조직방법, 둘 다 공산주의체제와 자본주의체제의 공통된 요소다. 그리고 이들은 두 체제의 형성기인 19세기의 '과학 신앙'에 뿌리를 둔 것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주어진 조건이다. 문명 발생 이후 인간은 자연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늘리려고 노력해 왔다. 그것인 인간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이해하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나는 이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자연과 자신에 대한 인간의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입증도 반증도 불가능한 명제다. 지금으로써는 완전한 이해가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만 일단 관심을 둔다.

인간은 이해가 부족한 영역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여 왔다. 그런데 자연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가능하다는 믿음이 17세기 이후 유럽에서 확장되어 19세기에는 '과학 신앙' 현상에 이르렀다. 한편으로는 다른 문명권에 뒤져 있던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 또 한편으로는 해외 약탈활동을 통한 물질적 조건의 향상이 이 믿음을 뒷받침해 줬다. 그리고 산업혁명의 성과를 얻으면서 이 믿음이 사회를 지배하기에 이른 것이다.

자연과학의 성과를 발판으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도 완성을 바라볼 수 있다는 믿음 위에 사회과학이 일어났다. 사회과학은 애초에 종교와 봉건 관계에서 벗어난 '신세계'의 합리적 원리를 모색하는 사명을 갖고 태어났지만, 개척기가 지난 뒤에는 위에 인용한 노명우의 탄식처럼 '제도의 덫' 속에서 특정 이데올로기에 복무하는 역할이 더 크게 된 것이다.

19세기를 풍미한 원자론이 이 신앙의 경전이 되었다. 19세기 벽두에 발표된 존 돌턴의 원자론은 한편으로는 자연의 완전한 이해에 이르는 지름길로 보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 평등 등 계몽주의적 관념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에 따라 이런 관념을 이념을 넘어 진리 차원으로 받드는 이데올로기가 형성되어 사회 조직방법으로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자연과학에서 원자론은 19세기가 다 지나가기도 전에 물질 탐구의 진전에 따라 힘을 잃기 시작해서 20세기 들어와서는 완전히 폐기되었다. 그러나 사회과학 여러 분야에서는 원자론에 입각한 제 원리가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상당한 힘을 지키고 있다. 원자론에서 파생된 이데올로기가 버티고 있어서 질문의 능력을 잃어버린 학문이 현실의 정당화에 동원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원자론이 그리스철학의 일각에서 나타난 일은 잘 알려져 있다. 그 밖에도 여러 문명권에서 원자론과 비슷한 환원론적 세계관이 등장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근대 이전에는 어느 사회에서도 이런 세계관이 긴 시간에 걸쳐 강한 지배력을 가진 일이 없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일로 보인다. 원자론에서 도출되는 개인주의는 사회 조직방법으로서 지속가능성에 불리하다는 약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 과도한 경쟁과 사회안전망의 약화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원자론이 19세기 유럽을 풍미하고 오늘날까지 큰 힘을 발휘해 온 것은 산업사회로의 재편기라는, 지속가능성의 약점이 부각되지 않는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중국에서도 전국시대에 원자론에 가까운 사조가 상당한 힘을 얻었던 것 역시 농업사회로의 재편기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1970년대에 로마클럽보고서 <성장의 한계>가 나오고 오일쇼크가 겹쳐지면서 지속가능성 문제가 비로소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구조적 문제를 밝히는 '세계체제론'도 이 무렵에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뒤이어 문학계와 학술계의 관성적 현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확산되었다.

어찌 보면 근대 자본주의 세계체제(공산주의체제 포함)의 한계가 1970년대에 확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안이 없는 상황 때문에 신자유주의 반동노선이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가운데 국제적으로, 그리고 각국 내부에서 모순이 심화되어 왔다. 21세기 들어 중국의 부상에서 대안을 찾으려는 움직임은 이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 세계체제론을 주장한 주요 학자. 왼쪽부터 이매뉴얼 월러스틴, 조바니 아리기, 안드레 군더 크랑크, 사미르 아민. ⓒ프레시안 자료사진

중국의 굴기를 보는 시각

1998년 7월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 공화당 우파와 민주당 좌파가 이례적으로 손잡고 반대했다. 자본주의에 정식으로 투항하지 않는 중국의 성장에 도움이 될 행동을 미국이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우파의 주장이었고, 좌파의 주장은 미국사회가 요구하는 인권 기준을 중국이 충족시키도록 압력을 넣기 위해 우호적인 행동을 아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시점까지도 미국인들이 중국을 얼마나 깔보고 있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 상황이다. 중국이 공산권 붕괴의 소용돌이를 용케 모면하기는 했지만 끝끝내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제정책에서나 인권정책에서나 미국의 기준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동유럽의 구 공산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시장경제' 전면 도입도 시간문제로 보였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은 중국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이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옮겨져 있다. 중국이 초강대국이 될 것인가 여부가 아니라 어떤 성격의 초강대국이 될 것인가에 지금은 관심이 모이고 있다. 기존의 초강대국과 비슷한 성격이 될 것인가, 전혀 다른 성격이 될 것인가?

중국도 기존의 초강대국과 비슷한 성격의 패권국가가 되리라고 보는 관점은 기존 세계체제의 성격에 큰 변화가 없으리라는 점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관점은 관성에 휩쓸려 1970년대 이래 변화의 조짐과 추세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는 인상을 준다. 세계체제의 성격 변화라는 것은 매우 함의가 큰 현상이므로, 그 전망이 분명하지 않은 단계에서도 그 가능성을 가늠하는 데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 방향으로 참고할 만한 논설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중국의 성공'이 널리 확인된 2008년(베이징 올림픽과 미국의 금융공황이 있었던 해) 이후 담론 확산이 크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직전에 나온 조반니 아리기(1937~2009)의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강진아 옮김, 길 펴냄)가 이 방면 담론의 중요한 지표를 담은 것으로 본다.

아리기는 1970년대부터 이매뉴얼 월러스틴 등과 함께 세계체제론을 발전시켜 온 비교사회학자다. 1994년 <장기 20세기>로 20세기 미국의 헤게모니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전개 과정을 개관하고 미국 헤게모니의 말기 증상을 살펴본 그가 중국의 약진에 관심을 집중해서 그 특징적 현상에서 세계체제의 다음 단계를 내다보는 열쇠를 찾은 것이 이 책이다. 얼마 전까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중국의 급속한 발전에 대한 이 시점에서 가장 깊이 있는 이론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 도입부에서 아리기는 제목에 애덤 스미스를 불러낸 이유를 설명한다. '자본주의의 시조'로 알려진 스미스의 <국부론>(1776)에서 제시된 '시장경제'가 자본의 무제한적 축적을 지향하는 자본주의 원리와 다른 것이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중국의 비자본주의적 경제발전 방식이 "자연스러운 경로"라고 평가한 점을 상기시킨다. 자본주의 아닌 경제발전 방식이 가능하며 전통시대 중국의 경우를 그 구체적 사례로 검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의 경제발전 방식은 유럽 발 자본주의와 어떻게 다른 것인가. 아리기는 스기하라 가오루가 제기한 '근면혁명'(Industrious Revolution)을 예시한다.

스기하라에 따르면, 경제적 향상을 추구하면서 비인적 자원보다 인적 자원을 동원하는 이 같은 성향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자국 경제 내에서 서구 기술을 통합하려고 하던 때에조차도, 계속해서 동아시아 발전 경로의 특징이 되었다. 그러므로 1880년대까지 일본 정부는, 일본이 토지와 자본 모두 부족하지만 노동은 풍부하고 상대적으로 질이 높다는 인식에 입각하여 산업화 전략을 채택하였다. 따라서 새로운 전략은 "전통적인 노동 집약적 기술의 적극적 이용, 전통 산업의 근대화, 그리고 요소 부존량의 상이한 조건을 감안하여 서구 기술을 신중하게 적용하도록" 장려하였다. 스기하라는 이 이종 교배의 발전 경로를, "서구 경로보다 노동을 더 전면적으로 흡수하고 이용하면서 기계와 자본으로 노동을 대체하는 것에는 덜 의존한다"는 의미에서 "노동 집약적 산업화"라고 불렀다.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 61쪽)

원래 스기하라가 근면혁명 개념을 제기한 것은 메이지 시대 일본의 발전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는데, 아리기는 이 개념이 전통시대의 중국에 또한 적용될 뿐 아니라 20세기 후반 이래 동아시아-동남아시아 지역의 급속한 경제발전에도 적용된다고 주장했다. 자본집약적 발전 원리인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노동집약적 발전 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전통시대 중국의 발전 원리가 오늘날의 상황에도 적용 가능하다는 아리기의 관점은 시사하는 바가 엄청나게 크다. 무엇보다 나는 근대문명의 원자론적 관점(atomic view)에 밀려난 여러 지역 전통문명의 유기론적 관점(organic view)의 부활 가능성을 여기에서 본다. '서세동점'의 본질인 원자론적 관점의 극복에서 그 해소의 결정적 열쇠를 찾는 것이다.

▲ 중국 군인들이 9월 3일 세계 2차대전 승전 70주년 기념 열병식을 앞두고 베이징 근교의 한 부대에서 행진 훈련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사회주의가 좌익이 된 까닭

<해방일기> 작업 중 '사회주의'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앞에서 소개한 1946년 8월, 응답자의 70%가 바람직한 체제로 사회주의를 꼽았던 여론조사를 살펴보면서였다.

이 응답자들이 생각한 '사회주의'가 어떤 것이었을까? 나란히 제시된 다른 선택지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있었으니, 소유권을 절대시하는 자본주의나 전면 부정하는 공산주의와 다른 것, 즉 소유권을 제한된 범위에서 인정하는 체제로 사회주의를 생각한 것 같다.

이 무렵의 여론조사에 대해 "피면접자들의 대표성도 의심스럽거니와 면접의 절차와 분위기가 과연 정확한 민심의 소재를 밝혀낼 정도로 적절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도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 연구자도 있다. (전상인 <고개 숙인 수정주의> 14쪽) 여기 소개한 항목 같으면 응답자들이 과연 사회주의가 어떤 것인지 충분한 이해를 갖고 응답한 것인지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회주의'가 어떤 것인지는 1946년의 일반인만이 아니라 2015년의 연구자들도 명확하게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지난 200년 동안 이 말이 쓰여 온 폭이 너무 넓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말을 쓰는 데는 정치적 의지가 얹히는 일이 많아서 더욱 혼란스럽다.

1820년대에 '사회주의'(socialism)란 말이 처음 쓰인 것은 개인주의(individualism)에 대립되는 뜻이었다고 한다. 당시 원자론의 폭발적 유행으로 개인주의 풍조가 강화되는 데 대한 저항의 의미로 생각된다. 그런데 20여 년 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1848)에서 사회주의를 '반(反) 자본주의'의 뜻으로 쓰고 사회주의 중에도 제대로 된 사회주의, 즉 '과학적 사회주의'를 '공산주의'로 지칭하면서 사회주의의 뜻이 굴절을 겪게 되었다.

'반 개인주의'의 뜻을 가진 사회주의를 '반 자본주의'로 정의하는 것은 일종의 범주착오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개인주의에 입각한 것인데, 자본주의에 반대한다는 공통점만을 근거로 사회주의를 동류(同類)로 끌어들인 데서 용어의 혼란이 시작되었다. 19세기 중엽에는 원자론이 유럽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원자론에 반대하는 사회주의가 입지를 잃고 공산주의에 휘말리게 된 것이라고 나는 본다. 유기론적 질서를 중시하던 초기 사회주의는 '공상적 사회주의'로 몰려 유럽 사상계에서 배제되었다.

20세기 들어 원자론과 개인주의의 지배가 확립되어 있지 않은 '제3세계'에 서양 정치사상이 들어왔을 때 '사회주의'에 대해 어떤 반응이 일어났는지 궁금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오염되기 전의, '반 개인주의'로서 원래의 사회주의를 찾는 경향도 나타나지 않았을까? 이 주제에 관한 연구 성과나 논설을 아직 접하지 못했는데, 관련 학계의 검토를 권하고 싶다.

1946년 8월의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70%가 선택한 '사회주의'에는 '반 개인주의'의 의미가 어느 정도 얹혀 있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당시 조선인의 대다수가 지키고 있거나 기억하고 있던 '전통질서'는 유기론적 원리에 따른 것이었고, 일본 통치자들이 제시한 새로운 사회 조직방법에 가장 강한 반발을 보인 것이 그 원자론적 원리였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후쿠야마의 글 또 한 대목에서 비슷한 상황을 읽을 수 있다.

전체주의의 가장 근본적 실패는 사상을 콘트롤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구 소련의 시민은, 지금에 와서야 알게 된 일이지만, 혼자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줄곧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부의 오랜 기간 동안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그 정부가 자신들을 기만하고 있다는 것을 대부분의 시민은 알고 있었다. 스탈리니즘 이래 견뎌온 개인적인 고통에 대해서 사람들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갖고 있었다. 사실상 모든 가정이 농업집단화 과정에서, 또는 1930년대의 공포정치 하에서 육친이나 친구를 잃게 되었고, 전쟁에서 치른 희생은 스탈린의 외교정책의 실패로 인해 더더욱 크게 되었다. (...) 사람들은 말로는 계급이 없다는 자신들의 사회에서 새롭게 계급제도가 대두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역사의 종말> 65쪽)

이름을 잃어버린 유기론적 원리를 찾아

2008년 가을 <뉴라이트 비판>을 쓸 때, 정치적 입장을 대충이라도 밝힐 필요를 느꼈다. 여러 모로 생각한 끝에 나 자신을 '보수'로 판정했다. 개별 사안을 놓고는 '진보' 쪽 주장에 공감하는 것이 많았지만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나 세상에 대해서나 있는 그대로 대충 만족하는 사람이다. 물론 향상을 위한 노력은 필요하지만 점진적 향상을 바란다. 근본까지 바뀌거나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옮겨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몇 해 동안 이 판정에 스스로 만족하고 지냈다. 그런데 '사회주의'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이 판정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선택지가 '진보'와 '보수' 둘 뿐이라면 보수가 맞다. 그런데 이 양자택일이 과연 충분한 의미를 가진 선택일까?

몇 해 전까지 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이 사회의 지식인들은 환원론적-원자론적 사고방식에 깊이 물들어 있어서 그 사고방식을 벗어나는 선택지를 떠올리기 힘들다. 원자론을 벗어난 원리에 따른 사회 조직방법이 가능하다면, 그 조직방법을 추구하는 정치적 입장을 세울 길이 있는 것이라면, 나는 그 입장에 설 것이다. 그것을 '사회주의'란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사람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데는 '개인'을 앞세워야 하는 측면도 있고 '사회'를 앞세워야 하는 측면도 있다. 개인을 앞세우는 개인주의와 사회를 앞세우는 사회주의는 꼭 이름을 붙이지 않고도 인간사회 속에서 서로 어울리며 작동해 왔다. 그런데 19세기 유럽에서 개인주의에 일방적으로 경도되는 풍조가 일어나 세계를 휩쓸고 오늘에 이르렀다.

개인주의에 대칭되는 원리는 이름조차 제대로 갖지 못하는 지경에 와있다. '사회주의' 외에도 '전체주의'(totalitarianism), '집체주의'(collectivism) 등 개인주의에 맞설 만한 이름이 모두 특정한 정치체제에 이용당하다가 좁고 부정적인 의미에 갇히게 되었다. 유기론적 사회조직 원리는 근대 정치학에서 제대로 검토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쓴웃음을 금할 수 없는 한 가지 사례. 브루스 커밍스는 북한 체제를 'corporate state'로 표현하는데 이것을 '기업국가'로 번역한 책을 두 권 봤다. 'corporatism'은 유기체론의 한 형태인데 이런 개념이 이 사회 정치학자들에게 얼마나 낯선 것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해방일기> 작업을 통해 해방공간에서 만난 민족주의자 대부분이 '중간파'의 길을 걸었다. 1946년 10월에 그들이 빚어낸 좌우합작 7원칙 중 토지에 대한 '체감(遞減)매상 무상분배' 원칙은 일견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원칙의 절충처럼 보인다. 그러나 거기에 당시 인민의 70%가 원하던 '사회주의' 원칙이 반영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 후 수십 년간 환원론적-원자론적 사고방식에 길들여진 지금 사람들에 비해 그들은 유기론적 정치 원리에 대한 감각을 아직 지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들을 좌절시킨 외세의 압력을 이겨낼 때, 이 사회가 그들이 서 있던 자리를 출발점으로 삼기 바란다.

'서세동점의 해소'가 바로 '동세서점'은 아닐 것이다. 동양 세력이 힘을 키워 서양 사회에 불평등조약을 강요하고 착취의 대상으로 삼는 광경만을 그려서는 진정한 해소를 바랄 수 없다. 서세동점의 본질적 요소들을 극복하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 나는 원자론적 조직방법과 사고방식을 그 핵심으로 본다. 유기론적 원리가 복원되어 원자론적 원리와 적절한 방법으로 어울리게 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서세동점의 해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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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40세 나이에 교수직을 그만둔 후 20여 년간 독학으로 문명교섭사를 공부해 온 역사학자.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 입학 뒤 사학과로 전과한 독특한 이력이 있다. 프레시안 장기 연재를 바탕으로 <해방일기>, <뉴라이트 비판>, <페리스코프>,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등의 책을 썼다. 프레시안 창간 때부터 거시적 관점에서 역사와 한국 사회를 조망하는 글을 꾸준히 쓰고 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부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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