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세동점'의 해소, 다른 백 년을 가져온다 ②

[백년포럼] 동아시아 근대현대사의 흐름

오는 11월 26일 저녁 7시 30분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열리는 '백년포럼'에서 발표될 역사학자 김기협 선생의 발제문 '서세동점의 해소, 다른 백년을 가져온다'의 두 번째 글을 싣는다. 이번 '백년포럼'에서는 김기협 선생의 발제에 이어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가 토론을 할 예정이다. 발제문의 3회분은 25일에 게재될 예정이다. 편집자

(2)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흐름

아편전쟁의 원인


1793년 조지 매카트니가 영국왕의 사절로 중국에 왔을 때 황제에게 고두(叩頭, kowtow)의 예를 거부해서 국교 수립을 거절당했다고 하는 것은 낭설이다. 이듬해 베이징에 온 네덜란드 사절단은 고두의 예를 행했지만 역시 국교 수립에 실패했다. 청나라 황제와 조정은 중국이 오랫동안 외국을 대해 온 방식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건륭제가 매카트니에게 들려 영국왕에게 보낸 국서에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그대 나라 사람 하나를 천조(天朝)에 보내 그대 나라를 대표하게 하고 그대 나라와의 교역을 감독하게 해달라는 그대의 요청은 모든 관습에 어긋나는 것이고 들어줄 수 없는 것이오. 천조에 봉사하는 유럽인들이 북경에 살도록 허락받아 온 것은 사실이오. 그러나 그들은 중국 복장을 입어야 하고 지정된 장소에서만 활동할 수 있으며 제 나라로 돌아갈 허락을 받는 일이 없소. 그대도 관습을 잘 알 것이오. 그대가 보내려 하는 사절에게 북경의 유럽인 관리들과 같은 위치를 부여할 수도 없으며, 자유로운 활동이나 본국과의 연락을 허용할 수 없소. 그러니 그가 이곳에 있더라도 그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오.

내가 뜻을 두는 것은 오직 훌륭한 통치를 행하고 천자의 직무를 잘 수행하는 것뿐이오. 진기한 물건이나 값비싼 물건에는 관심이 없소. 그대가 보내온 공물을 내가 가납하는 것은 머나먼 곳에서 그것을 보내온 그대의 마음을 생각해서일 뿐이오. 이 왕조의 크나큰 덕은 하늘 아래 어디에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서 모든 왕과 부족들이 육로와 수로를 통해 귀한 공물을 보내오고 있소. 그대의 사신이 직접 보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없는 물건이 없소. 나는 기이하고 별난 물건에 관심이 없으며 그대 나라 출산품을 필요로 하는 것이 없소."

16세기 초 동양항로 개척 이래 유럽 전체가 중국과의 교역에서 심각한 무역 역조를 겪어왔다.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채굴한 막대한 양의 은이 유럽인의 손을 거쳐 중국으로 흘러들었다. 더 이상 은의 채굴을 늘리기 어려워진 18세기 말에 이르러 영국 등 산업혁명의 성과를 거두기 시작한 유럽국들은 공산품의 수출로 이 역조를 메울 방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무역 확대를 위해서는 국교 수립이 필요했기 때문에 사절단을 보냈지만, 중국 측에게는 종래의 관습과 제도를 바꿀 뜻이 없었다.

영국은 18세기 말부터 대 중국 무역 역조를 극복하기 위해 아편 수출정책을 추진했다. 인도를 통치하던 동인도회사가 아편을 대량생산해서 콜카타에서 경매로 팔면, 중국의 금령을 뚫고 가져가 파는 것은 상인들의 몫이었다. 아편 사업은 대박이었다. 18세기 말 연간 약 1000상자(한 상자는 60kg 남짓)에서 1830년대에는 연간 3만 상자까지 늘어나, 중국의 가장 큰 수출 품목인 차의 수입액과 맞먹게 되었다. 여기에 제1차 중영전쟁(1840-42)의 원인이 있었기 때문에 '아편전쟁'이란 이름이 붙은 것이다.

개항의 압력

아편전쟁은 물론 중국에 큰 충격을 안겼다. 그러나 제2차 중영전쟁(1856-1860)의 충격만은 못했다. 오랑캐가 변경을 침범해서 국토 일부를 유린하는 정도의 사태는 역사상 꽤 자주 있던 일이었다. 그러나 수도를 점령당하는 사태는 그와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동아시아의 '서세동점' 현상은 제2차 중영전쟁을 계기로 본격적 단계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 서양 문물을 적극 도입하려는 '양무(洋務)운동'이 일어났을 뿐 아니라 조선과 일본에도 그 여파가 크게 미쳤다.

1853년 페리 제독의 무력시위에 따라 이듬해 일-미 화친조약을 맺음으로써 일본의 '개항'이 이뤄진 것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1854년의 화친조약은(시모다와 하코다테 두 항구를 미국 선박의 피난 정박과 필수품 공급지로 개방한다는 내용으로, 일본은 이 해 러시아, 영국과도 같은 내용의 협약을 맺었다.) 하나의 고식책일 뿐, 쇄국정책의 폐기가 아니었다. 진정한 개항은 1858년 미국-네덜란드-러시아-영국-프랑스 5국과의 수호통상조약으로 이뤄졌다.

1858년의 수호통상조약이 미국 영사 타운젠트 해리스의 설득에 따른 것으로 한 때는 알려졌지만 근래의 연구를 통해 도쿠가와 막부 내에서 1857년 초부터 '개국' 정책이 검토되고 있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1854년의 조약은 페리 함대의 위협 앞에서 당장 전쟁을 피하기 위한 고식책이었다. 그런데 3년 후 적극적 개방 정책을 스스로 모색하게 된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제2차 중영전쟁이 불러일으킨 위기의식을 배제할 수 없다.

조선에서는 1863년 고종의 즉위와 대원군의 집정이 세도정치의 양상을 바꾼 원인에 대한 고찰이 아직도 미흡하다. 안동 김 씨의 세도는 당시 절정에 올라 있고 쇠퇴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때 정국 운영에 어려움을 느껴 대원군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안동 김 씨는 헌종 때도 실력을 지키고 있는 채로 풍양 조 씨를 전면에 내세운 일이 있었다. 내우외환 때문에 정국 운영에 어려움을 느꼈다면, 서양 세력이 중국을 꺾고 동아시아 지역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것이 원인의 일부일 수 있다.

1861년 초, 열하(熱河)로 피신한 황제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북경에 사행으로 갔던 박규수(1807-1877)가 귀국 직후 박원양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전쟁의 충격을 줄여서 보려는 안간힘이 느껴진다.

"서양 오랑캐가 요구하는 바는 곧 배상금 독촉과 시장 개방 등의 일에 불과했다. (...) 군주란 멀리 도피해서는 안 되는 법이지만 어쩔 수 없이 주화파에게 이끌려 잠시 그 예봉을 피하면서, 한편으로 화의를 허락하고 조약 체결을 허락한 것이다. 그러자 오랑캐가 곧 철군하여 모두 떠나가고, 남아 있는 자들은 약간의 상인 무리이다."

북경 체류 중 비변사에 보낸 장계에서도 "서양 오랑캐는 그 의도가 토지에 있지 않으며, 통상과 포교에 전력할 따름"이라 하여 위기의식을 축소하는 논조였다. 그러나 그 후 그가 청나라의 양무운동을 도입하는 데 힘을 쏟아 '개화파'의 영수 역할을 맡은 것을 보면 그의 낙관적 견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일찍이 <해국도지>를 살펴보며 정세 변화에 민감하던 그로서, 서양 오랑캐의 북경 유린이라는 경천동지할 사태가 조선 민심에 너무 큰 충격을 주지 않도록 애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대원군, 하면 조건반사처럼 떠오르는 말이 '쇄국'정책이다. 일본에서 많이 쓰인 이 말을 그대로 옮겨 쓰는 데는 문제가 많다. 대원군 집정기의 대외정책은 아편전쟁 전의 청나라와 마찬가지로 전통적 대외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일본과도 종래의 통신사 관계를 지키려 했다. '만국공법'의 기준으로 봤을 때 '쇄국'인 것이고, 만국공법에 따른 대외관계, 즉 '개항'의 압력이 발생했기 때문에 '쇄국'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한-중-일 운명의 교차

일본이 일찍 자발적으로 개화에 나서서 근대화-산업화에 성공한 반면 중국과 조선은 개화를 거부하고 있다가 열등한 위치에 빠졌다는 통설이 있다. 큰 의미가 없는 비교다. 같은 평면 위에서 비교할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선과 일본을 우선 비교한다면, 일본은 서양세력이 접근하기 쉬운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일본은 개항 전에도 은의 수출 등 서양세력이 주도하는 교역체제에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19세기 중엽 대형 증기선으로 해군력을 확장한 서양세력이 일본 개항에 나선 것은 일본의 전략적 가치가 어느 정도 확인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반면 조선에 대해서는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등 소규모 도발이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을 때도 더 큰 함대를 동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일본이 함포외교에 굴복해 형식적 개항을 한 후에도 메이지유신(1868)으로 본격적 개화에 나서기까지 15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 15년간 일본 내에서 온갖 곡절이 일어나는 동안 적극적으로 개입할 강한 동기를 느끼는 서양 열강이 없었다. 반면 조선은 강한 '진출' 의지를 가진 일본에게 개항을 당했고, 일본은 자기네가 누린 시간 여유를 조선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중국과 일본의 비교에서는 고려할 사항이 매우 많은데, 서양 열강들에게 동양 침략의 궁극적 대상이 일본 아닌 중국이었다는 점을 무엇보다 지적하고 싶다. 서양인이 16세기 중엽 동아시아 교역에 끼어든 이래 중국은 그들이 원하는 온갖 재화를 무궁무진하게 공급할 '엘도라도'로 보였다. 일본은 중국 침략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서양 열강들 중에 자기편으로 삼으려는 나라가 있을 수 있었다. 반면 중국의 저항력을 약화시키는 데는 모든 열강이 이해를 함께 했다. 청일전쟁(1894-95) 시점에서 일본은 서양 열강의 사냥개 역할이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친 제국주의 경쟁에서 열강의 최대 표적은 중국이었다. 러시아가 아관파천(1896)으로 조선에서 유리한 기회를 쥐고도 일본에게 양보한 것은 중국으로 진출할 통로인 만주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러일전쟁(1904-05)은 일본이 만주의 러시아 이권에 도전한 결과였다. 전쟁의 표적은 조선이 아니라 만주였다.

산업화 수준이 아직 낮은 단계에 있으면서 근대화 열망이 높은 일본은 유럽의 1류 열강들에게 하위 파트너로서 인기 있는 존재였다. 세계체제론에서 말하는 반(半)주변부에 있던 일본은 1류 열강과 합작할 때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맡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최대 표적인 중국 가까이 있어서 중국 침략을 염두에 둔 동맹의 가치도 컸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일본은 연합국의 하위 파트너로 참여해 중국에서 독일의 이권을 넘겨받는 등 이익을 챙겼다. 이때까지 일본의 상위 파트너 역할을 주로 맡은 것은 영국이었다. 그런데 1차 대전을 계기로 국력이 급성장한 미국이 일본의 길을 가로막는 위치에 섰다. 태평양 건너편을 바라보는 미국의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은 일본과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어울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일본은 반주변부에서 중심부로 발돋움하려 하고 있었기 때문에 종래와 같은 하위 파트너 역할로 만족하지 못하는 단계에 와 있었다.

1차 대전이 '유럽대전'에 그친 반면 제2차 세계대전에는 '태평양전쟁'이 겹쳐져 있었다. 유럽의 기존 열강들이 뒤얽혀 기력을 소진하는 동안 태평양 양안의 두 신흥 강국이 '태평양시대'의 주도권을 놓고 부딪친 이 싸움에서 승리한 미국은 일본이 자기 하위 파트너 역할을 맡도록 개조했다. 그 개조의 핵심 내용이 군사력 제거였다. 그로 인해 '불구(不具)국가'가 된 일본은 과거사의 반성에조차 제약을 갖게 되고, '보통국가'가 되려는 열망조차 자연스러운 표현방법을 찾지 못하는 상태에 지금까지 빠져 있다.(베트남전 참전에 대한 반성을 제대로 못하는 우리 사회도 '불구국가'의 특성을 일본과 공유한다는 점을 놓고 보면 한일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떠올릴 여지가 있다.)

냉전시대를 거쳐

2차 대전을 통해 제국주의체제가 냉전체제로 바뀌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래의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근본적 변화를 겪지 않은 것으로 본다.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세계체계론)에서 냉전시대의 공산주의체제를 자본주의체제의 하위체제로 보는 데 나는 동의한다. 소련의 진영 내 헤게모니는 미국의 헤게모니가 세계를 이끌어 가는 틀 속에서 부속적인 역할을 맡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모순이 제국주의체제에서 민족 모순의 형태로 불거지는 동안 계급 모순이 자라나 냉전체제의 배경이 되었다. 민족 모순은 산업화 이전 시대에서 유래하는 것이므로 먼저 나타난 반면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심화되는 계급 모순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화될 것이 예상되었다. 2차 대전은 표면상 민족 모순을 둘러싸고 진행되었지만 바닥에는 계급 모순을 둘러싼 대립이 잠재해 있었다. 따라서 미국과 영국에게 공식적인 적은 일본과 독일이었어도 숨겨진 더 큰 적은 소련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이 잠재적 적대관계가 표면화되어 냉전체제를 빚어낸다.

2차 대전이 끝나자 한-중-일 3국은 냉전체제에 바로 편입되었다. 일본은 미국 점령 하에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교두보로 개편되었고 한국은 남북으로 쪼개져 냉전의 첨병이 되었다. 중국은 공산화되어 동아시아는 자본주의진영의 일본-남한과 공산주의진영의 중국-북한으로 갈라졌다. 겉보기로는 완전한 대칭 상황이었지만, 일본과 중국의 위치에 차이가 있었다.

일본은 모든 면에서 완전히 미국에 예속되었다. 반면 중국의 소련에 대한 종속은 확실하지 않았다. 전쟁 후 소련은 동유럽의 공산권 구축에 전념하면서 중국 공산당을 지원하지 않았고, 중국 공산당은 자력으로 대륙을 석권했다. 초기의 공산중국은 소련의 도움을 필요로 했지만, 정권이 안정되자마자 소련에 대한 종속관계에서 벗어났다.

이 차이가 1970년대 데탕트 상황에서 한층 더 분명히 드러났다. 소련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의도에 편승해 중국이 국제무대로 복귀하면서 냉전체제의 중요한 변수로 부각된 것이다. 중국이 겪은 정치적 곡절을 나는 세밀히 알지 못하지만, 소련 해체와 공산권 붕괴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수십 년에 걸쳐 큰 국력 신장을 이룬 배경을 냉전기 중국의 독자적 정책 추진에서 찾는 원톄쥔(<백년의 급진>)의 관점을 그럴싸하게 받아들인다.

중국이 독자적 정치노선을 펼치는 동안 일본은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뤘고, 그 효과가 남한을 비롯한 동아시아-동남아시아 여러 국가로 확산되었다. 서양에서 만들어진 냉전체제의 제약 안에서 동양인은 나름대로 역량을 발휘한 것이다. 그 결과 '아시아적 가치' 논의가 1990년대에 일각에서 나오기도 했다. 20세기 말까지 '서세동점'의 상황이 틀을 지켰지만, 19세기 중엽에서 20세기 후반까지 서양세력이 보인 압도적인 힘은 이제 상대적 위치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리고 21세기 들어와서는 중국을 비롯한 동양의 힘이 상승하는 추세가 더 뚜렷해졌다. (25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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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40세 나이에 교수직을 그만둔 후 20여 년간 독학으로 문명교섭사를 공부해 온 역사학자.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 입학 뒤 사학과로 전과한 독특한 이력이 있다. 프레시안 장기 연재를 바탕으로 <해방일기>, <뉴라이트 비판>, <페리스코프>,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등의 책을 썼다. 프레시안 창간 때부터 거시적 관점에서 역사와 한국 사회를 조망하는 글을 꾸준히 쓰고 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부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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