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세동점'의 해소, 다른 백 년을 가져온다 ①

[백년포럼] 150년 이어진 서구 중심의 '상식', 여전히 유효할까?

지난 10월에 이어 두 번째 '백년포럼'에서 발표될 역사학자 김기협 선생의 발제문 '서세동점의 해소, 다른 백년을 가져온다'를 세 차례로 나누어 싣는다. 11월 26일 저녁 7시 30분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열리는 이번 '백년포럼'에서는 김기협 선생의 발제에 이어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가 토론을 할 예정이다. 이번 발제문의 2회분은 23일에 게재될 예정이다.

서세동점의 해소, 다른 백 년을 가져온다.

(1) 한국인의 경험

1970년, 학부 3학년 때 국사연구실에서 동양사연구실로 자리를 옮겼다. 서울대 ‘사학과’ 68학번은 세 학과로 나눠지기 전의 마지막 학번이어서 임의로 전공을 택할 수 있었다. 나는 한국사에 마음이 있었지만, 사상사를 폭넓게 공부할 생각으로 동양사를 선택한 것이다.

중국과학사 중심으로 공부를 이어가다가 1980년대 말 박사학위 논문 주제를 마테오 리치의 선교활동으로 잡은 후 동서교섭사를 중심으로 문명사 공부를 진행했다. 그러다가 2008년에 이르러 한국사를 개관하는 책 <밖에서 본 한국사>를 내게 되었다.

<밖에서 본 한국사>는 그동안 문명사 공부의 소득을 한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보태도록 제안하는 의미로 쓴 것이다. 그 책에 이어 동양사와 세계사를 개관하는 책들을 시도할 생각이었고, 한국사에 깊이 들어갈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 당시 고개를 들고 있던 '뉴라이트' 역사관을 알게 되면서 이를 반박할 필요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몇 해 동안 들여다보게 되었다.

▲ 역사학자 김기협 ⓒ홍익표 의원실

2009년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작업을 시작해 2010년 7월에 냈다. 식민지로 전락한 지 100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망국의 원인에 대한 냉철한 판단이 이 사회에 아쉽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작업에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상황을 부각시켰다. 선악(善惡), 충간(忠奸)의 차원을 넘어 '문명의 위기'라는 거시적 배경을 설명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이다.

역사 해석의 틀을 외인론과 내인론으로 갈라서 본다면 나는 한국근현대사에서 외인론을 앞세운다. 사회 내부의 노력이 외세의 야욕 앞에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던 당시 상황을 놓고는 시각의 큰 틀을 외인론으로 짜는 것이 자연스럽다.

조선의 망국에는 (1) 왕조의 멸망, (2) 이민족 지배, (3) 전통의 단절, 세 개 층위가 겹쳐져 있다. 조선 왕조의 멸망을 위한 조건은 내인론으로 대충 설명된다. 그러나 내부의 왕조 교체에 그치지 않고 이민족 지배를 받게 된 이유는 내인론으로 부족하다. 나아가 전통의 단절이란 민족사 초유의 상황은 거의 전적으로 외부 조건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망국의 세 개 충위 중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가장 여파가 큰 것이 바로 전통의 단절이다. 그래서 외인론에 더 큰 비중을 둘 필요를 느낀 것이다.

<망국의 역사> 작업을 끝내면서 작업을 시작할 때보다도 더 큰 아쉬움을 느꼈다. 망국의 상황을 설명했는데, 그로부터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복국(復國)이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한 상황을 설명할 필요가 더 크게 느껴진 것이다. 그래서 바로 <해방일기> 집필 작업을 시작했다.

식민지로 전락한 지 35년 만에 '광복'을 맞았다고 하는데, 민족국가를 회복하지 못한 까닭이 무엇인가? 왜 분단건국과 전쟁이라는 최악의 진로로 접어들게 되었는가? 망국 자체보다도 더 설명하기 힘든 문제다. 그래서 1945년 8월에서 1948년 8월까지 3년간의 '해방공간'을 일기 형태로 면밀하게 복원하는 작업을 2010년 8월부터 2013년 8월까지 3년간 진행했다.

<해방일기> 작업에서 해방의 상황이 망국의 상황과 '서세동점'이란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은 것임을 확인했다. 서세동점이란 19세기 중-후반에 걸쳐 산업혁명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부국강병을 이룩한 서양 열강의 압도적인 위세 앞에 동양의 전통사회가 '굴복이냐, 파괴냐'의 양자택일에 몰린 역사적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20세기 들어 일본이 열강의 대열에 진입한 상황에서는 서세동점이 일단락된 것으로 흔히 본다.

그러나 나는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의 상황을 살펴보면서 '서세동점'의 의미를 넓혀 볼 필요를 느꼈다. 일본의 열강 진입은 동양의 한 모퉁이에 ‘서세’가 내면화한 결과로, 서세동점의 큰 틀이 바뀐 것이 아니었다. 제국주의 일본은 '서세'의 한 부분이 되어 '동점' 현상을 더욱 격화시키는 첨병 노릇을 맡았던 것이다. 일본의 러-일전쟁(1904~05) 승리에 안중근, 량치차오 같은 조선과 중국 식자들이 환호한 것은 일본을 서세동점에 대한 저항의 주체로 본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변질이 확인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1907년에 고종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냈고 1919년에 임시정부는 파리 평화회담에 대표단을 보냈다. 그러나 두 번 다 참석 자격을 얻지 못했다. 서세동점의 구조적 발판인 제국주의체제는 지속되었고, '민족자결' 원칙은 패전국의 영토와 식민지에만 적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치열하게 진행 중이던 1943년 11월 미-영-중 정상회담에서 나온 카이로선언이 조선 독립에 대한 첫 국제적 지지였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인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략적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직전에 나온 모스크바선언의 오스트리아 독립 방침과 함께 카이로선언의 조선 독립 방침은 독일제국과 일본제국에 균열을 일으키는 데 뜻을 둔 것이었다. 종전 후 두 나라의 독립에 10년과 5년의 신탁통치를 부과한 데는 두 나라가 연합국의 의도에 부응하지 못한 데 대한 벌칙의 의미가 있었다.

일본 항복 후 연합국은 카이로선언에 따라 조선 독립을 추진했지만, 독립 자체보다 일본제국의 약화를 위한 부수적 조치였을 뿐이다. 따라서 진정한 독립을 도와주기보다는 점령국인 미국과 소련의 국익을 확보하는 데 더 급급했다. 그 결과가 분단건국과 내전이었다.

여기서 나는 다시 외인론에 치중할 필요를 느낀다. 망국 당시에도 해방 당시에도 이 사회에서는 사회의 보호와 발전을 위해 어느 사회에 못지않은 노력이 있었다. 매국노-반역자의 준동 역시 어느 때 어느 사회에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사회의 건전한 노력이 빛을 보지 못하고 매국노-반역자의 책동에 휩쓸리게 된 것은 외세의 힘이 압도적이던 서세동점의 상황 때문이었다. 망국 때나 해방 때나 조선사회를 불행의 길로 몰고 간 것은 매국노-반역자의 힘이 아니라 그들이 등에 업은 외세였다.

<해방일기>에 이어 <냉전 이후> 집필 작업을 진행했다. 1990년을 전후한 공산권 붕괴는 분단건국 이후 냉전의 첨병 노릇에 묶여 있던 한민족에게 민족의 진로를 다시 세울 반세기만의 기회였다. 2000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은 민족사의 큰 전환점이 될 것 같은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10여 년이 지난 이제 당시의 희망은 사그라지고 냉전 시대 못지않은 긴장상태로 돌아와 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을 찾은 김대중 대통령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영접하는 모습. ⓒ연합뉴스

<냉전 이후> 작업에서 나는 1990년대 10년 동안 남북관계를 되돌아보았다. 2000년의 정상회담이 10년 전 공산권 붕괴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면 그 후의 진행이 순조로워야 했다. 실제로 이 10년 동안 일어난 일을 되짚어보면, 민족사회의 복원(復元)이라는 대세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도처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 장애물은 지금도 작용하고 있다.

1990년대 남북관계 전개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뒤얽혀 나타났지만, '서세동점'이라는 기반조건이 아직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100년 전의 망국 단계나 50년 전의 해방 단계와 다른 점은 '서세'가 남한 사회에 깊숙이 내면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남한 사회 내에 '외세'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100년 전이나 50년 전에 비해 민족사회의 의미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퇴화되어 있는 것은 이 '내부의 외세' 때문이다.

70년 전 '해방' 때 해방의 주체는 분명했다. 조선 인민의 대다수는 일본 통치자들이 강요한 '근대화'에 물들지 않고 있었다. 새로운 활동방식과 생활방식을 마지못해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좋다는 생각이 별로 없고, 왜놈들에게서 언제고 '해방'이 되기만 하면 원래 방식으로 돌아갈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새로운 방식을 이롭게 받아들인 사람들은 소수였고, 그들에게는 '친일파'의 딱지가 붙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런 친일파 중에 진짜 악질분자는 극소수였다. 대다수는 보통사람들이었다. 친일파로 몰린 지주들 입장을 보면, 일본 통치에 따른 소유권 절대화가 그들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었다. 소작인의 권리를 무시하고 지주의 이익 극대화를 보장해준 이 제도는 농업사회를 파괴해 인구의 3분의 1을 유랑의 길로 몰아넣었지만 대다수 지주들은 그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것을 자기 권리를 지키고 행사하는 것으로 여겨 아무 죄의식 없이 이에 호응했다. 잘못된 정치가 보통사람들을 반사회적 행동으로 이끈 것이다. 일본인 통치자들은 조선사회의 장래보다 자기네 이익을 앞세웠기 때문에 이런 잘못된 정치를 조선에서 행했던 것이다.

잘못된 정치가 보통사람들을 반사회적인 길로 이끄는 상황은 해방 후 남한에서 계속되었고, 이 흐름에 휩쓸리는 범위가 크게 넓어졌다. 해방 전의 외세였던 일본에서는 1백만 명 가까운 군인, 관리와 민간인이 건너와 통치체제의 수혜자 자리를 차지한 반면 해방 후의 외세인 미국에서는 건너온 사람이 적었고 직접 수탈의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더 많은 한국인이 특권층에 편입될 수 있게 되었고, 일반 대중의 물질적 혜택도 커진 것이다.

해방 1년 후인 1946년 8월 미 군정이 실시한 여론조사 중 원하는 체제를 묻는 문항에 대해 응답자의 70%가 '사회주의'를 택했다. '공산주의'는 7%, '자본주의'는 14%였다. 70%의 응답자가 사회주의를 좌익으로 생각해서 선택한 것은 아닐 것이다. 소유권을 절대시하는 자본주의나 전면 부정하는 공산주의보다 제한된 범위의 소유권을 존중하는 체제로 사회주의를 생각하고 지지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1990년대에 남한 민심은 자본주의에 압도적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1980년대를 전후한 경제발전과 그에 따른 물질적 풍요에 국민 대다수가 도취해 있었다. 자본과 권력을 쥔 기득권층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도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철석같은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이 믿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베트남전 참전의 문제점에 대한 사회의 무감각이었다. '잘 살아보기' 위한 어떤 행동도 정당화하는 풍조가 윤리의식과 정의감을 압도하는 사회였다. 다른 민족의 고통에 무감각한 사회가 내부의 고통에 민감할 수 없다. 1990년대 남한 사회에는 자본주의에서 파생된 개인주의와 배금주의가 팽배해 있어서 북한 봉쇄정책을 원하는 미국 네오콘 세력이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해방 후 50여 년간 자본주의 정신을 꾸준히 내재화해 온 남한 사회에 뚜렷한 의식 변화가 시작된 계기는 1997~98년의 IMF 사태였다. 무한한 경제성장의 꿈에 금이 가고 다수 국민이 '풍요 속의 빈곤'을 경험하게 되면서 그동안 무뎌졌던 다양한 가치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IMF 사태 이후 10년간 기득권층의 권력 독점이 얼마간 풀어진 동안 개인주의와 배금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21세기 들어 남한 정치의 쟁점이 '민주화'와 '산업화'의 단순대결 양상에서 벗어난 것도 국민의 의식 확장에 따른 것이다. 진취적 정치활동이 평화, 환경, 복지, 안전 등 종래 경시되어 온 가치를 중심으로 확대되었다. 수십 년간 '민주화' 간판에만 매달려 온 제1야당이 2010년대 들어 지리멸렬한 양상에 빠져 있는 데서 이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변화에는 외부 정세의 변화로 촉발되는 측면이 크다. 대표적인 예가 중국과의 관계 확대다. 수십 년간 '중공 오랑캐'로 욕하며 멀리하던 중국을 갈수록 가까이 하고 더 잘 알게 되면서 냉전시대의 '반공' 의식은 소수 노인네들의 전유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미국 패권의 퇴화 현상도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이라크전쟁 실패에 이어 2008년의 금융공황으로 미국이 이끄는 세계체제의 파탄이 다각적으로 드러났다. 이에 따라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문제점과 한계를 논하는 '세계체제론'이 각광을 받으며 발전해 나가고 있다.

1970년대 이래 제기되어 온 자원, 환경, 경제구조, 정치구조 등 여러 방면의 문제들이 21세기 들어와서는 미래의 위험이 아닌 현실의 문제로 심화되고 있다. 이 문제들을 개별적으로 파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종합해서 변화의 큰 흐름을 떠올릴 단계에 와 있다. 나는 이 흐름의 한 측면이 150년간 지속해 온 '서세동점' 현상의 해소라고 본다.

서세동점의 해소란 동양 국가의 국력이 서양 국가에 대한 열세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체제의 지속적 확장이 그치는 데 서세동점 해소의 본질적 의미가 있다. 20세기 내내 많은 동양인의 의식을 지배해 온 계몽주의적 가치관을 극복하는 것이 또한 서세동점 해소의 중요한 과정이 될 것이다.

'근대화'가 절대적 과제로 제기된 개항기 이래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온 사실과 가치들을 다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150년간 익숙하던 '상식'만으로는 장래를 내다보는 데 심각한 한계가 있는 상황이다. 망국과 분단과 대립을 강요해 온 '서세'가 물러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 우리 사회가 가진 정보와 정보처리방법으로는 확실한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문제다. 그러나 그렇게 볼 만한 근거가 다르게 볼 근거에 못지않은 단계에 와있다. 서세동점의 해소가 진행되고 있다는 내 관점에 아직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이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에는 동의할 것으로 믿는다. (23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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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40세 나이에 교수직을 그만둔 후 20여 년간 독학으로 문명교섭사를 공부해 온 역사학자.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 입학 뒤 사학과로 전과한 독특한 이력이 있다. 프레시안 장기 연재를 바탕으로 <해방일기>, <뉴라이트 비판>, <페리스코프>,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등의 책을 썼다. 프레시안 창간 때부터 거시적 관점에서 역사와 한국 사회를 조망하는 글을 꾸준히 쓰고 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부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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