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가서 '셀카봉'만 들여다보면…탈선하죠!"

[독서통] <스페인 야간비행> 펴낸 정혜윤 CBS PD

요즘 여행을 테마로 한 책은 시즌이 없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형태의 책이 쏟아진다. 단순 여행 정보 책이 다수지만 그 중에는 특정 지역의 음식 이야기, 특정 도시의 역사 이야기, 특정 테마로 본 여행 이야기 등 흥미로운 책도 적지 않다.

방대한 독서량과 이를 소화한 감각적 문체의 글로 고정 팬을 거느린 작가 정혜윤 CBS(기독교방송) PD가 여행 산문집을 냈다. 지난 7월 말 나온 <스페인 야간비행>(북노마드 펴냄)이다. 이 책은 흔한 여행 산문집과 다르다. 여행을 테마로 한 책에 으레 붙기 마련인 사진 한 장 없다. 책을 펼치면 활자만 빼곡하다. 교통편이나 요즘 관심을 끌 만한 맛 집 정보도 없다.

제목에 '스페인'이 들어가긴 했지만, 스페인 여행이 핵심인 것도 아니다. 정작 여정 자체는 필리핀의 보홀 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정혜윤 PD는 왜 이런 '여행 책인 듯 여행 책이 아닌 여행 책'을 펴내게 됐을까? 그가 지금 <스페인 야간비행>으로 한국의 독자에게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프레시안>과 <시사통>이 공동 기획한 저자 인터뷰 '독서통'이 정혜윤 PD를 만났다. 그에게 여행은 무엇인지, 그에게 글쓰기는 무엇인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통해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지를 물었다. 20일 오전 서울 서교동 시사통 스튜디오에서 진행한 정 PD와의 인터뷰를 요약 정리했다.

▲ CBS 정혜윤 PD. ⓒ프레시안(최형락)

돌고래에게서 발견한 빛

독서통 : 10월 20일 '독서통' 시간입니다. 지난주는 '한국의 건강 불평등'을 본격적으로 해부한 진지한 책을 다뤘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는 '여행'을 테마로 한 책을 골라 봤어요. 제목은 <스페인 야간비행>, 부제도 '여행 산문집'입니다. 그런데 찬찬히 읽어보면 여행을 테마로 했다고 해서 결코 가벼운 책이 아니더군요. (웃음)

저자는 CBS의 정혜윤 PD입니다. 팬이 많은 스타 작가이기도 하죠. <스페인 야간비행>은 굉장히 독특합니다. 흔히 사람들이 여행 산문집에 기대하는 화려한 사진, 구체적인 여행 정보, 여행지에서의 소소한 에피소드 같은 것이 전혀 없어요. 오히려 정혜윤 PD의 사유를 담은 책이라고나 할까요? 정혜윤 PD를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정혜윤 : 안녕하세요.

독서통 : 본업이 PD인지 저자인지 모르겠습니다. 책을 몇 권이나 냈나요?

정혜윤 : 잘 모르겠어요. 사실 저는 책이 나오고 나서 1년 정도는 제 책을 펼쳐보지 못합니다. 책을 낼 때 정확히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나? 있었다손 치더라도 책을 낼 필요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때문이죠. 1년 정도 지나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내 책을 볼 수 있더군요. 그래서 책이 나오고 나서는 거리를 두는 편이죠.

독서통 : 이 책이 7월에 나왔어요. 여전히 이 책과 거리를 두지 못하고 있나요?

정혜윤 : 저는 책을 쓰기 전에 생각을 많이 하다가 한꺼번에 쓰는 편이에요. 이 책을 쓸 때 감정이나 생각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제가 여태 낸 어떤 책보다 뜨거웠죠.

독서통 : 그나저나 표지가 참 독특합니다. 표지가 마음에 들었나요?

정혜: 출판사에 띠지라도 바꿔 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그래서 지금 서점에 있는 이 책의 띠지가 두 번째입니다.

독서통 : 띠지라도! 뉘앙스가 의미심장하군요. (웃음)

정혜윤 : 띠지에 딱 한 문장만 쓰고 싶었어요.

"빛으로 휩싸인 채 어둠속을 여행했다."

책에 나오는 문장이죠. 실제 감정이 그랬어요. '아, 내가 어둠 속을 여행하긴 했다. 그런데 혼자 하진 않았다. 빛과 함께 했다.' 그래서 이 책의 핵심이 그 문장에 있어요. 이 문장만 앞에 나온다면 띠지든 표지든 (뭐든) 다 괜찮았어요. 너무 절실했어요. 지금 우리는 실제로 어둠 속을 걷고 있잖아요. 하지만 혼자 하지 말자, 빛과 같이 하자, 이 말을 하고 싶었죠.

독서통 : 본격적으로 책 얘기로 넘어가 보죠. 저희가 앞서 이 책이 통상적인 여행 산문집과 다르다는 얘길 했습니다. 구성이나 내용도 그렇습니다. 제목만 듣고서는 꼭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그라나다, 세비야와 같은 곳의 얘기가 이어질 것 같잖아요? 그런데 정작 책을 펼치면 필리핀의 보홀 섬이 등장합니다.

보홀 섬은 유명한 관광지 세부 바로 앞에 있는 섬입니다. 사실 보홀 섬의 여정이 책의 큰 골격입니다. 보홀 섬에서 정혜윤 PD가 겪었던 에피소드와 스페인의 여러 도시,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의 경험이 교차하면서 책의 내용을 이루죠. 이런 구성부터 독특합니다. 이렇게 교차시킨 이유가 있나요?

정혜윤 : 어떤 의도를 처음부터 가졌던 건 아니에요. 그저 처음에는 야생 돌고래를 보기 위해서 보홀 섬에 간 겁니다.

독서통 : 돌고래요? 왜 하필 돌고래인가요?

정혜윤 : 제가 무의식적으로 돌고래를 선호했던 것 같아요. 저는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굉장히 좋아해요. 그가 엘 그레코란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 "전 제 능력 이상으로 해 봤습니다"란 문장이 있어요. 평생 그 문장을 내가 갖기를 원했어요. 능력 이상으로 해보고 싶었어요. 삶 전체가 그러길 원했죠.

그런데 그 카잔차키스가 좋아하는 동물이 세 가지입니다. 그 중 하나가 날치예요.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물고기. 그 날치 이미지 있잖아요? 그런데 나는 물 위로 팡 튀어 오르는 이미지를 은연중에 돌고래와 연결을 지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언젠가는 꼭 야생의 돌고래를 봐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보홀 섬에 가더라도 야생 돌고래를 볼 확률은 높지 않아요. 돌고래 마음이죠. 또 바다와 날씨 상태 등에 달려 있습니다. 책에서 돌고래를 보기까지의 장면을 굉장히 길게 묘사했어요. 초조함, '나는 안 될 거야'라는 미리 예상해서 실망하기 등. 그런데 어느 순간 빛, 바다에 꽂히는 화살 같은 빛이 보이더니 돌고래가 순식간에 물 위로 튀어 오르는 걸 봤죠.

바로 그 때의 감정을 책에 썼어요. 이렇게요.

"돌고래는 너무나 돌고래여서 돌고래가 아닐 수 없다."

ⓒnationalgeographic.com

나는 너무나 나여서 다른 일을 할 수 없어요. 김종배는 너무나 김종배여서 이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강양구는 왜 여기 있을까.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겠죠. 누구나 고유해져야 한다, 이런 말을 많이들 하잖아요. 그 사람이 그 사람인 이유, 그 생명체가 그 생명체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바로 눈앞에서 본거죠.

돌고래를 보자마자 눈물이 났어요. 너무나 강렬한 생명체를 본 후의 느낌이 뭔가를 쓰게 만들었어요. 애초에 '보홀에 가서 스페인을 써야지'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그 돌고래의 생명력을 보니까 '맞아, 우리 이렇게 살자'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어요. 그리고 그런 생각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었고요. 이 책은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여행, 1 더하기 1은 3이 되는 마술

독서통 : 이 책은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어요. 보내는 사람이 '당나귀', 수신자는 '미스 양서류'입니다. '왜 미스 양서류를 수신자로 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계속 일었는데, 책 맨 뒤에 가서야 그에 대한 설명이 간략히 나옵니다. 그 설명을 보고 나서 무릎을 탁 쳤습니다만, 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 있어요. 양서류는 그렇다 치고, 왜 '미스'입니까?

정혜윤 : '미스코리아'의 미스예요. (웃음) 아름답다는 거죠. 양서류는 분열을 안고 사는 존재예요. 물과 뭍, 두 곳에서 다 살아가는 모습이 그렇죠. '안정 대신 불안정을 사랑하는 너, 아름답구나!' 그래서 미스 양서류예요. 우리가 지금은 혼란을 겪고 있지만 너무 빨리 정리하려 하지 말자, 조금 더 혼란을 끌어안고 있는 너 아름답구나, 이런 겁니다.

독서통 : 미스 양서류와 당나귀는 작가, 그러니까 정혜윤 PD 내면의 두 모습인거죠?

정혜윤 : 네. 제 안에도 미스 양서류가 있습니다. 혼란스럽고, 고민하고, 불안정하고…. 그럼에도 간단히 해결하려 하지 않고 용감하게 겪어내려고 하죠.

독서통 : 미스 양서류에게 편지를 보내는 형식의 이 책을 읽으면서 '정혜윤 PD는 저널리스트가 아니라 작가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사실 책을 펼치자마자 등장한 미스 양서류가 처음에는 독서에 몰입하는데 방해가 됩니다. 낯설어서 자꾸 신경 쓰여요. 독서의 비등점이라고 하죠? <스페인 야간비행>은 정신없이 몰입해서 읽는 데 약간 시간이 걸립니다.

정혜윤 PD가 저널리스트라는 걸 염두에 두면 상당히 놀랍죠. 통상적으로 저널리스트는 독자나 청자와 타협을 하기 마련이죠. 또 대중의 언어로 전달하는 게 덕목으로도 꼽히죠. 그런데 정혜윤 PD는 이 책에서 자기가 만든 의미의 망 안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그런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정혜윤 : 책에도 잠깐 나옵니다만, (<헤로도토스와의 여행>(크림슨 펴냄)에서 리샤르드 카푸시친스키가 언급했던) '마술적 저널리즘'을 염두에 두면 그런 시도가 저널리스트다운 거예요. 저는 숫자 3을 좋아합니다. 항상 1 더하기 1은 3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둘이 만나서 대화하면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디어가 떠올라요. 1 더하기 1이 2가 아니라 3이 되는 거죠.

존재하지 않았을 세계가 둘이 만남으로서 하나 더 생기는 겁니다. 이런 게 바로 마술이죠. 그리고 모든 저널리즘에는 바로 이 '1 더하기 1이 3'이 되는 마술이 있다고 생각해요. 기사를 읽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의 이야기를 몰랐다면 하지 못했을 생각, 행동, 관계 등 어떤 것이 등장하는 거죠.

이런 아이디어를 글쓰기로 시도한 게 <그의 슬픔과 기쁨>(후마니타스 펴냄)이에요. 이 책은 해고 노동자 25명의 이야기인데, 그냥 생각하면 남자1, 남자2, 남자3 식의 인터뷰를 모으면 되잖아요. 저는 그렇게 안 했어요. 25명을 모두 섞어 버렸어요. 제가 보기에 이들의 핵심은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 거였어요. 그래서 전 책에서도 이들을 떨어뜨리기 싫었습니다.

이 책에서 바로 마술적 저널리즘의 세계를 구현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본 게 바로 그것이니까요. 이 책도 마찬가지예요. 자신감이 있어서 이렇게 구성을 한 게 아니라, 이렇게 쓸 수밖에 없었어요. 보홀 섬에서 스페인 쓰기죠. '사이 여행'이에요. 둘 사이에 뭔가 생기는 이야기예요. 하나만 있어서는 결코 생기지 않는 이야기죠.

독서통 : 그래서 이 책의 서술 형식도 독백이 아니라 수신자가 있는 대화군요.

정혜윤 : 그렇죠. 결국은 둘이 새로운 것, 즉 셋을 만드는 마술이었죠.

독서통 : 아무튼 처음에는 생경함이 있는데, 어느 순간 지나면 정혜윤 PD의 그 마술에 빠져듭니다. (웃음)

보통 여행 산문집이라고 하면 여행지 스케치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그런데 이 책에는 그런 내용이 별로 없어요. 정혜윤 PD가 자기 사유의 결과물을 토해내고 있죠. 그런데 아까 단숨에 쭉 써 내렸다고 했죠? 이런 사유의 결과물을 어떻게 한 순간에 쭉 써 내려간 거죠? 그게 가능해요?

정혜윤 : 대부분의 순간에는 불가능하죠. (웃음) 그런데 생각이 폭발해서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순간이 있어요. 이 책이 바로 그 순간의 결과물입니다.

독서통 : 책의 끝 부분에 세월호 참사 얘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프란시스코 고야의 그림이 등장합니다.

정혜윤 : 리스본을 언급하면서 주제(조제) 사라마구를 이야기했습니다. 사라마구는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 하는 부정의 중요성을 간파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아니오'는 제가 최근 2~3년간 가장 많이 들었던 말입니다. 세월호, 밀양, 쌍용차…. 그 현장에서 만난 모두가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저는 잘못 살았어요. 나는 이렇게 살면 안 되는 거였어요."

자신에 대한 부정이에요. '왜 잘못 살았다고 생각하느냐?' 남들의 고통을 자신만은 겪지 않을 줄 알았다고 합니다. 자기만 생각했다는 후회가 이어지죠. 우리가 조금만 고통을 당해 봐도 금방 그 말을 이해해요. 사라마구가 책을 통해 계속 했던 말이에요. 그런 상처받은 사람들이 저에게는 '아니오'라는 말로 다가왔어요.

제가 스페인에 왜 간 줄 아세요? 세월호 참사를 한창 취재할 때, 고야의 그림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가 제 꿈에 두 번 나왔습니다. '눈이 튀어나온 그 거인이 피를 흘리는 자식을 먹는 그림이 도대체 나에게 무엇일까?' 두 번째로 그림을 보러 방문했을 때, 비로소 나는 깨달았어요. 바로 '분노'를 봤어요.

우리는 안타까운 일을 겪고서 안타까워합니다. 슬픈 일을 겪고선 슬퍼하죠. 그런데 사실은 거기서 멈추면 안 되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해' 하고 분노해야죠. 그런데 그런 경우는 드뭅니다. 고야의 그림에서 바로 그런 분노를 본 거죠. 어떤 고통은 절대로 잊지 말고 기억하고, 또 분노해야죠. 돌고래의 생명력과 분노하는 고야가 연결되는 것도 이 대목이죠.

▲ 프란시스코 고야의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wikimedia.org

셀카봉 내리고 틀렸음을 확인하세요

독서통 : 저는 책을 읽을 때 포스트잇을 붙이는 경우는 별로 없어요. 그런데 이 책을 읽고서 굉장히 많은 포스트잇을 붙였습니다. 나중에 시간 날 때 한 번 더 되새기려고요. 그 가운데 한 부분을 이야기해보죠. 돌고래만큼 인상적인 부분이 보홀 섬의 아바탄 강에서 본 반딧불이 대목입니다. 반딧불이는 희망에 대한 은유죠.

반딧불이를 묘사하고 나서, 이야기는 돈키호테로 이어집니다. 현실에 대한 미래의 승리, 가능한 것에 대한 불가능한 것의 승리…. 슬픔과 절망 속에서 희망을 발견해보려 하는 정혜윤 PD의 분투가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반딧불이 여럿이 함께 빛을 내듯이 혼자서 탈출하지 말고, 나와 네가 손을 잡고 '우리'가 되어서 탈출하자는 메시지도 가슴에 와 닿았고요.

정혜윤 : 반딧불이, 잊을 수 없죠. 저는 반딧불이를 보홀 섬에서 두 번째로 봤어요. 더 많을수록 더 좋더라고요. 또 사라진 줄 알았는데 있더라고요.

독서통 : 사라진 줄 알았는데 우리 마음속에도 반딧불이가 있을 거라는 얘기로 들립니다.

정혜윤 : 당연히 있죠. 조금만 아름다운 걸 보면 마음속의 반딧불이가 살아납니다. 저는 반딧불이를 보고 즉각 반응이 오더라고요. '바로 저렇게 살아야 해!' 팅커벨이 제 심장 근처로 날아오더라고요. (웃음)

독서통 : 지난주에 <한국의 건강 불평등> 대표 저자 김창엽 교수를 모시고 얘기를 하다가, 말미에 책 내용을 얼마나 얘기했는지 물어봤어요. 그런데 김창엽 교수는 눈치 없이 '거의 다 이야기했다'고 하셨습니다. 이 방송을 여기서 끊는다면, 정혜윤 PD께서는 책 내용을 얼마나 얘기하셨습니까?

정혜윤 : 거의 못 했죠. (웃음) 만약 하나만 더 이야기하라고 하면, 가장 중요한 두 부분이 빠졌어요. 그걸 아직 안 물어봤어요. 리스본 이야긴데….

독서통 : 페르난두 페소아가 등장하는 대목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정혜윤 : 정확히 그 부분이에요. 그 부분이야말로 일필휘지이면서 일필휘지가 아니기도 해요. 한 번에 그 부분을 다 썼는데, 한 번에 쓰기 위해 정말 긴 시간 동안 생각했어요.

독서통 : 그 부분은 사실 독자를 위해서 일부러 질문을 안 하고 아껴뒀던 건데요. (웃음) 페르난두 페소아를 처음 듣는 이들이 있을 테니, 소개부터 해주시죠.

정혜윤 : 우리가 가끔 '이게 나야?' 할 때가 있죠. 내 안에 여러 명의 내가 있어요. 용감한 나도 있고, 부끄러워하는 나도 있죠. 페소아는 그 하나하나에게 목소리를 준 시인이에요. 자기 안의 누구의 목소리도 억압하지 않고 무시하지 않았어요. 심지어 자기 안의 목소리 하나하나를 작가로 만들었어요.

페소아 자신의 이름으로 글을 썼지만 수많은 작품을 다른 자아의 이름으로 썼습니다. 70명 정도? 중요한 이명(異名)은 네 명인데, 심지어 그 네 명이 모이는 책도 썼어요. 저는 그때 나온 대화들이 좋아요. 이 자리를 통해서 그들 각자가 개성을 갖게 됐어요. 제가 자주하는 표현대로 하면 '양배추 심' 같은 게 생긴 거죠.

페소아의 자아 중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이는 알바루 드 캄푸스입니다. (페소아이자 캄푸스인) 그가 쓴 '최후통첩'이란 글이 <페소아와 페소아들>(김한민 옮김, 워크룸프레스 펴냄)에 나와요. 한 남자가 대서양에 서서 "꺼져버려!" 하고 외쳐요. 그냥 가슴을 쫙 펴고 외쳐요. 누구한테 꺼지라고 하느냐가 중요하겠죠.

캄푸스가 "꺼져 버려" 하고 외치는 사람 가운데는 썩어빠진 정치인도 있지만, 원대한 생각 한번 해보지 못한 사람, 나약함밖에 외칠 구호가 없는 약골들 등 속물이나 다름없는 약해빠진 인간도 포함돼요. 나약한 것도 이 사람에겐 죄인 거예요. 그 꺼져 버려야 할 사람 가운데 저도 포함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싫어하는 그런 모습에 페소아의 캄푸스처럼 최후통첩을 하기로 했죠. 몇 날 며칠을 고민해서 쓴 다음에, 그걸 품에 안고 리스본으로 갔어요. 대서양을 바라보면서 소리치고 싶었죠. "꺼져 버려, 꺼져 버려, 꺼져 버려!" 그렇게 다 토해 낸 다음에 다른 내가 되어서 돌아오고 싶었죠.

독서통 : 거기까지! 리스본에 간 정혜윤 PD가 정말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직접 책을 읽고서 확인해 보기로 하고요. (웃음) 다른 화제로 바꿔보죠. 책에서 약간 신경질적으로 여행의 통속성을 비판하는 부분이 있어요. 셀카봉에 대한 증오가 담긴 부분 말이죠. 그 대목은 여럿이 같이 생각해 볼만한 대목 같아요.

정혜윤 : 증오라기보다 원한이죠. (웃음) 요즘 유럽에 가보면 중국이나 한국 관광객이 정말로 많이 셀카봉을 들고 돌아다녀요. 사진은 찍을 수 있죠. 그런데 요즘엔 아예 사진이 아니라 영화를 찍어요. 내가 주연인 영화요. 거리를 걸어가는 나, 식당에 들어가는 내 모습을 셀카봉을 들고서 찍는 거죠.

셀카봉은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해요. 나를 찍으려면 내가 어떻게 나오는가를 계속 봐야 돼요. 그러다보면 (여행의) 모든 건 그저 다 배경일 뿐이죠.

독서통 : 여행 가면 낯선 경험을 하고, 낯선 사람을 만나고, 낯선 곳에 스스로를 던져보는 게 묘미죠. 그런데 정작 셀카봉을 들고서 여행에 가서도 자기 자신만 주목한다는 거군요.

정혜윤 : 제가 생각하는 여행의 통속성은 알고자 하지 않는 마음이에요. 보통 다른 나라에 가지는 통념이라는 게 있잖아요. "거기 소매치기 많다며?" "거기 밤에 조심해야 한다며?" 하는 말들이요. 저한테는 바로 이게 통속성이에요. 이게 확대되면 사람에게도 그런 태도를 가지게 돼요. "걔 그렇다며?" "연예인 누구 어떻다며?" 하는 거죠. 이게 한 사람의 기질이 되는 거죠.

여행은 바로 그걸 깰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예요. 직접 가 봤더니 내가 알고 있는 게 틀렸던 거죠. 그렇게 통념이 깨지면서 스스로가 달라져요. 셀카봉을 들면 바로 이런 소중한 기회를 놓치는 거예요. 나에게 중요한 뭔가를 알려줄 수 있는 기회를 정작 나를 보느라고 놓치는 거죠.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표현 중에 밤길을 달리는 기차가 나옵니다. 그 기차의 헤드라이트가 어딜 비춰야 하겠어요? 앞을 비춰야죠. 셀카봉을 드는 것은 밤길에 앞을 비춰야 할 헤드라이트가 객실 안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당연히 탈선하게 되죠. 셀카봉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셀카봉을 듦으로써 놓치는 것이 안타까운 거죠.

제가 전에 낸 책 가운데 <여행, 혹은 여행처럼>(난다 펴냄)이란 게 있어요.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요. 여행지에서의 내가 일상의 나보다 더 좋더라고요. 그렇다면, 일상을 여행처럼 살면 왜 안 되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됐죠. 그런데 정작 여행을 다녀와서도 출국할 때와 똑같은 나라면 그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에요.

▲ "우리는 빛에 휩싸인 채 어둠 속을 여행 중입니다." ⓒ프레시안(최형락)

"가장 중요한 것만은 놓치지 말자"

독서통 : 방송을 접고 여행을 가야겠는데요? (웃음) 책 내용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이제 '사람' 정혜윤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보죠. 왜 책을 쓰세요? 직업이 PD니 방송을 통해 세상에 메시지를 던질 수 있을 텐데.

정혜윤 : 저희 부장님이 하는 말씀과 같은데요? (웃음) 단순한 동기는 '나도 생각이란 걸 하며 살고 싶다'는 거였어요. 저는 지금처럼 디지털이 아니라 릴 테이프를 쓰던 시절(1993년)부터 방송했어요. 릴 테이프가 한 바퀴 돌면 방송이 끝나는 거죠. 열심히 일했죠. 나의 열정, 시간이 테이프에 들어갔죠.

그런데 퇴근할 무렵 릴 테이프가 한 바퀴 돌고 나면 허무해지더라고요. 릴 테이프가 한 바퀴 돌고 나면 한 사람의 노동, 한 사람의 진심이 모두 날아가는 거죠. 소진되는 느낌과는 다릅니다. 더 뜨거워지고 싶었어요. 그러다 어느 날 퇴근하다 해지는 모습을 봤어요. '오늘도 이렇게 지나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지금 흘러가는 걸 일부라도 잡아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어요. '다른 것이 다 흘러가더라도 지금 가장 중요한 것만은 놓치지 말자' 하는 욕망이요. 그래서 쓰기 시작한 게 바로 글입니다. 정작 글을 처음 쓸 땐 그런 감정을 표현하지 못했어요. 어느 순간이 되니 보이더라고요. '이게 중요하구나, 이건 사소하구나, 이건 끝까지 움켜쥐자' 이렇게요.

저는 이렇게 살려고 글을 씁니다. 사실 마냥 글 쓰는 게 행복한 건 아니에요. 책을 한 권 낼 때마다 스스로에게 내미는 엄격한 자기비판의 칼날을 도저히 피해갈 수 없어요. 그것 때문에 괴롭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칼날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보는 것도 역시 중요하더라고요.

독서통 : 마이크 앞에 서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요?

정혜윤 : 한 번도 안 해봤어요. 처음부터 PD 교육을 받았기에 제가 말하고 싶은 욕망을 느껴본 적은 없어요. 마이크를 누구에게 줄 것이냐가 항상 중요했어요. 누구의 목소리가 들려야하는 만큼 충분히 들리지 않느냐가 중요했죠. 더구나 우선 말투 자체가 대중적이지 않고 조곤조곤해요. (웃음)

독서통 : 다른 사람의 입을 빌릴 때 받는 갑갑함이 종종 있을 것 같은데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잖아요?

정혜윤 : 그때도 함께 가야죠.

독서통 : 이제 마무리 시간입니다. 책 많이 팔렸습니까?

정혜윤 : 책이 나오면 절대로 얼마나 팔렸는지 알려고 하지 않아요. (웃음)

아까 책을 낸 이유를 물어보셨죠? 어떻게 보면 (저자와) 라디오 PD라는 직업에 공통점이 있어요. 어떤 사람에 대한 상상력이에요. 라디오나 팟캐스트를 하면 누군가는 들을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리고 그 한 명을 우호적으로 상상하죠. 마찬가지예요. 저는 아주 소수의 독자라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마음으로 읽는 분 한 명 한 명이 너무 소중해요.

독서통 : 소설가 김언수가 <캐비닛>(문학동네 펴냄)의 후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책 한 권 값이면 삼 인 가족이 맛있는 자장면으로, 게다가 서비스 군만두도 곁들여서, 즐겁게 저녁을 먹는데" "어렵게 번 돈으로 한 권의 책을 샀는데 그 책이 당신의 마음을 호빵 하나만큼, 붕어빵 하나만큼도 풍요롭게 해주지 못한다면 작가의 귀싸대기를 걷어"올리라고.

정혜윤 : 맞아요. 누군가 내 책을 사서 읽는다면 설레고 두렵죠. 그런데 저는 좀 더 많은 사람이 글을 썼으면 좋겠어요. 특히 요즘 말이 범람하는 시대인데도 정작 말의 가치는 떨어졌죠. 그럴수록 자기 말을 정제하고 정제해서 내가 하려던 말이 이것이었음을 찾아가는 것, 이걸 글로 써보는 경험이 소중합니다.

▲ <스페인 야간비행>(정혜윤 지음, 북노마드 펴냄). ⓒ북노마드
독서통 :
주변에 보면 글은 쓰고 싶은데 막상 쓰려고 하면 머뭇거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일상이 드러나는 게 두렵고, 그로 인해 주변 사람이 상처받는 게 두렵고….

정혜윤 : 저 같은 경우 나 자신을 표현하는 게 큰 관심사는 아니에요. 여태 나에게 없던 면, 몰랐던 세계에 대한 관심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해요. 꼭 일상을 써야 하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바로 그 주저하는 마음을 깨려고 글을 쓰는 거죠. 버지니아 울프의 이야기였나요? 한때 여자들은 집안의 천사로 살아야 했죠. 모든 일을 잘 처리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죠. 글을 쓰려고 하면 천사의 날갯짓 소리가 들리죠. 주변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울프는 바로 이 천사를 떠나보냈습니다. 남들이 원하는 인간이 아니라, 나를 위한 글쓰기를 위해서.

울프가 앞서 했던 고민이 여자에게는 특히 중요합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될까' 하는 고민과 굉장히 연결되는 문제거든요. 사실 우리가 글을 쓰지 않고 또 책을 읽지 않을 이유는 너무나 많아요. 하지만 그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쓰고 읽을 딱 한 가지 이유만 있다면 그 세계(집필)로 뛰어들어보라고 응원하고 싶습니다.

독서통 : 오늘은 정혜윤 PD를 모시고 <스페인 야간비행>을 놓고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또 '정혜윤'을 탐구하고,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습니다. 어땠나요?

정혜윤 : 껌이죠. (웃음) 할 이야기는 무궁무진해요. 책은 아코디언과도 같아서 펼치면 쫙 열리는 빈공간이 있습니다. 그 공간을 독자로서, 청자로서 덧붙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러면 이 방송은 한 시간짜리지만 어쩌면 열 시간, 열흘을 함께 보낼 수도 있어요. 여러분과 오래 같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독서통 : 두 번째 '독서통' 여기서 마무리합니다. 정혜윤 PD, 고맙습니다.

정혜윤 : 네. 감사합니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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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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