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국왕은 아직도 중남미 제국의 황제인가

김영길의 '남미리포트' <286> 차베스-스페인 국왕 설전의 진실

스페인 후안 카를로스 국왕과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서로 삿대질을 하며 막말까지 주고받은 설전 해프닝이 중남미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10일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폐막된 제17차 이베로-아메리카 정상회담은 스페인 국왕 및 총리를 비롯한 정부대표들과 볼리바리안동맹국가(ALBA: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니카라과, 쿠바) 대표들간의 극한 대립국면을 연출하면서 패싸움 양상으로까지 번지는 험악한 장면을 보여줬다.

각종 공식석상에서 막말을 서슴지 않는 차베스가 이번에도 사고(?)를 쳤다. 차베스는 지난 2002년 자신을 몰아내기 위한 쿠데타 발생시 쿠데타세력들을 공개 지지한 스페인 정부를 성토하면서 당시 총리였던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를 파시스트이자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몰아세웠다. 차베스는 한술 더 떠 "파시스트들이나 인종차별 주의자들은 뱀보다 더 못한 인간들"이라고 악담을 퍼부었다.
▲ 스페인 총리의 발언을 듣다 못해 반박 발언을 신청하고 있는 차베스 대통령 ⓒ로이터=뉴시스

스페인 정부를 향한 차베스의 거침없는 공격에 분을 삭이고 있던 호세 루이스 사파테로 총리는 폐막연설에서 차베스 대통령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면서 "아스나르 전 총리에 대한 비난에도 원칙이 있다"면서 체통을 지키라고 쏘아 붙였다.

이에 차베스가 손을 번쩍 들고 긴급발언을 요청했다. 자신 앞에 놓인 마이크가 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간 차베스를 노려보던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이 "그 입 좀 닥칠 수 없는가"라고 고함을 버럭 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회담장을 떠나버렸다.

그러나 차베스는 "(카를로스) 국왕은 스페인 국왕일 뿐"이라면서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 선출된 국가원수인 나를 향해 어떻게 입을 닥치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할 수 있는가"라고 핏대를 세웠다.

그는 이어 베네수엘라는 어떤 종류의 경제·군사적인 침략행위에 저항할 권리가 있다며 스페인 국왕은 중남미를 아직까지도 자신의 식민지로 여기고 있는 것 아니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차베스를 비롯한 ALBA국가들과 스페인 정부대표들과의 대립은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이베로-아메리카 정상회담을 스페인이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남미 좌파정권들로부터 불만을 사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이 사사건건 이 회담의 상전 노릇을 하고 있는 것도 상당수 국가들은 못마땅해 하는 점이었다. 이 회담을 통해 중남미가 다시금 스페인 제국의 그늘 밑으로 모이는 형국이라는 점 때문이다. 이베로-아메리카 정상 회담이 카를로스 국왕에 의해 창설되었다는 것부터가 남미를 다시 지배하려는 스페인의 숨은 의도라는 말도 나왔다.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은 지난 1991년 영어권 국가를 제외한 중남미 20개국과 스페인, 포르투갈을 중심으로 라틴권 국가들의 외교, 정치, 경제, 사회 등의 상호 연대와 협력을 꾀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이 회담의 창설을 주도했다.

그러나 중남미 좌파정권들은 이베로-아메리카 정상회담이 스페인 국왕과 총리 주도로 매년 22여 개국 정상들이 모여 수십 가지의 선언문을 채택하지만 실효성은 별로라는 공개적인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
▲ 스페인 국왕(오른쪽)이 차베스의 발언에 '입을 닥치라'고 말하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지난해 제16차 회담인 우루과이에서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은 스페인 대표들을 향해 "당신들은 지난 500년 동안 우리를 착취한 것도 부족해서 오늘날까지 먹고 살기 위해 조국을 등지고 스페인으로 이주해 일자리를 찾고 있는 가련한 볼리비아인들을 착취하고 있다"고 공개적인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관련 기사 : "룰라, 이베로아메리카 정상회담 불참한 진짜 이유" 참조)

그러다가 이번 칠레 회담에서는 차베스가 스페인 성토의 선봉장 역을 맡은 셈이다. 차베스는 지난 8일 산티아고 도착 성명에서부터 스페인 정부를 겨냥해 "일부에서는 중남미 사회통합을 거론하고 있는데 중남미는 사회통합이 필요한 게 아니라 사회개혁과 혁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해 카를로스 국왕과 스페인 대표들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이날 차베스는 자신을 취재하기 위해 공항에 모여든 내외신 기자단을 향해 "살바도르 아옌데의 조국에 다시 오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며 "라틴 아메리카는 깨어나고 있다. 이는 아무도 막을 수 없는 대세다. 중남미는 이제 한 국가나 개인에 의해 움직이는 역사의 시대는 지나갔다. 수천만의 토착원주민, 여성, 농부 등 지금까지 소외되었던 계층들에 의해 새로운 역사가 다시 써지고 있다"며 스페인 정부의 중남미 간섭을 못마땅해 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차베스는 이어 "이 자리에는 볼리바리안 혁명을 두려워하는 세력들이 있다"며 새삼 스페인 제국과 중남미 해방영웅 시몬 볼리바르 장군과의 악연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 칠레에서 개최된 제17차 이베로-아메리카정상회담 공식로고 ⓒ김영길

스페인 정부 대표들을 향해 볼리바르 장군의 이상을 이어받은 자신을 싫어하는 세력들이라고 단정지은 차베스는 칠레 출신 팝 가수 마리아 호세 퀸따나쟈가 부른 '나는 금화(金貨)가 아니에요(No soy monedita de oro: 나는 모든 사람들이 갖고 싶어하는 금화가 아니에요.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든 좋아하든 그것은 그들의 자유이며, 나 또한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나의 길을 갈 거에요 아빠.....)'라는 노래의 가사를 인용, 우익세력들을 대표한 제국주자들이 자신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자유지만 자신은 볼리바리안 혁명의 길을 갈 것이라고 호언했다.

장외에서부터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을 비롯한 스페인 대표들을 자극하기 시작한 차베스는 개막 및 폐막연설에서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스페인 전 총리에 대한 인신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카를로스 국왕이 500여명의 내외신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잠시 이성을 잃고 불같이 화를 낸 데에는 이같은 배경이 있던 것이다.

차베스와 ALBA국가대표들이 스페인 정부 공격에 합세해 패싸움 양상이 된 제17차 이베로-아메리카 정상회담은 중남미지역의 경제발전과 사회통합을 전체국가들이 정치적인 우선과제로 삼자는 것과,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주권 회복에 대한 선언을 지지한다는 등 24개 항목의 선언문을 채택하고 서둘러 폐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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