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고문한 자의 모친상에 다녀왔습니다"

[나는 간첩이 아닙니다 ③] 때려잡아 간첩 맞으면 좋고, 아니면…

"살려고 남한에 내려온 건데…죽느니만 못한 생활을 할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1974년 남한에 내려오자마자 간첩 누명을 쓰고 약 3개월간 고문을 당한 김관섭 할아버지. 그는 "후회한다"고 말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남한에 내려온 걸 후회하느냐'고.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습니다.

"아니요. 남한에 온 걸 후회하는 게 아닙니다. 고문이 아무리 힘들어도 버틸걸. 제가 잘못했죠. 왜 위증을 해서…"

▲김관섭 씨. ⓒ프레시안(서어리)

다시 물었습니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면, 고문을 다 버텨낼 자신이 있느냐'고.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아니요. 사실 자신은 없습니다. 매일 얻어맞고 잠 못 자고 물고문당하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는 아마 겪어본 사람만 알 겁니다."

마지막 죽을 고비를 넘기다

(전편에 이어서. ☞바로가기 : "박정희를 암살하러 왔습네다")

"대한민국 만세, 만세, 만세!"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심정으로 소리를 내질렀습니다. 심문관들이 그를 어떤 방으로 데려갔습니다. 난롯불이 켜있었습니다. 11월 초겨울 날씨에 땡땡 언 몸 위로 훅 더운 김이 끼쳤습니다.

'이제 산 건가.'

북한을 떠난 후로 몇 번이고 죽을 위기에 처했던 터라, 긴장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눈치를 슬슬 보고 있으려니, 누군가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고춧가루 물고문을 했던 이들 중 한 명인 김 모 심문관이었습니다. 김 심문관은 삿대질을 하며 벼락같이 호통쳤습니다.

"야, 김관섭이 너, 진짜 간첩 맞지?" 간첩이 아니라면 그렇게 맞았는데도 '대한민국 만세'라는 말이 나오겠어?"

'아차'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헌병이 시키는 대로 말했다'고 답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뒤,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정말로 대한민국이 좋아 그리 말했습니다."

대충 얼버무린 답변이었습니다. 김 모 심문관이 세모꼴 눈으로 한참을 노려본 뒤 자리를 떴습니다.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왜 욕을 하지 않고 만세를 외치느냐'며 심문관이 캐물었지만, 간첩 의심은 이미 풀린 상태였다는 걸.

▲대성공사. ⓒ프레시안(최형락)


"때려잡아서 간첩 맞으면 좋고, 아니어도 책임지지 않는다?"

3개월간의 고문이 끝났습니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다시 5일간 신문을 받긴 했지만, 예전 같은 가혹 행위는 없었습니다. 간첩이 아닌 귀순자임을 드디어 인정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여지가 충분했습니다. 대성공사에 수용된 탈북자들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받아 화장실 가는 것조차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대성공사 직원들은 어느 순간부터 목욕탕이나 화장실에 그를 혼자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무고함이 밝혀졌으니, 당연히 대성공사 바깥으로 나갈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이 지나도록 내보내겠단 얘기는 없었습니다.

이유가 뭘까,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설명해주는 이가 없어 짐작만 할 뿐이었습니다. 의심이 풀렸는데도 여전히 신문이 끝나지 않는 상황이라면, 그에 대한 답은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진급' 문제였습니다.

그가 귀순하기 열흘 전 일어난 '육영수 저격사건'으로, 정부의 관심은 온통 '간첩 잡기'에 쏠려있었습니다. 민간인 간첩 신고자에 대한 포상도 후했으니, 정보부 직원들에 대한 공치사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윗선에다가 날 간첩이라고 보고한 마당에 이제 와서 '김관섭이 귀순자요' 할 수 없으니까 끝까지 간 거죠. 진급에서 밀려날까 봐 그냥 입 다물고 있던 겁니다.

간첩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때려잡아서 간첩이 맞으면 상을 받습니다. 그건 좋다 이겁니다. 남북 대결이 심한 때였으니,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반대 경우엔 책임이 따라야 하는 것 아닙니까. 때려잡았는데 간첩이 아니면 책임을 져야지요. 간첩이 맞으면 좋고, 아니어도 책임질 일이 없으니, 이런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대성공사에 드나드는 국가정보원 직원들. ⓒ프레시안(최형락)

'목숨줄' 틀어쥔 심문관들과 친해지다

남한에 온 지 1년이 다 된 1975년, 귀순용사 환영행사를 했습니다. 목에 화환을 걸고 남한 주민들에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정보부 사람들이 사진도 찍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귀순 환영식은 다른 귀순자 때와는 달랐습니다. 일반적으로 환영행사 식순에는 기자회견이 포함돼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환영식에선 회견이 쏙 빠져있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언론에서 그의 소식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환영식 후 대성공사를 나와 민간 생활을 시작하는 다른 귀순자와 달리, 그는 민간인이 될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다시금 정보부 직원들의 감시를 받으며 대성공사에 들어갔습니다.

빠르게 현실을 받아들였습니다. 어차피 그의 운명은, 그의 목숨은 남한 정부와 정보부 직원들에게 달려있었습니다. 언제 다시 간첩이라고 몰아세우며 방망이로 두들겨 패고 물고문을 할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잘만 하면 정보부 직원들이 좋은 집도 얻어주고, 직업도 구해준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자신의 목숨줄을 쥔 그들에게 잘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어보고 싶은 것, 억울한 일 모두 다 속에 묻었습니다.

▲1975년 귀순 환영식 사진. ⓒ김관섭

그를 고문했던 심문관들도 그를 전처럼 막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인간 대우를 받으니 그래도 좀 살만했습니다. 심문관들은 가끔 밖으로 그를 데리고 나가 맛있는 음식을 사줬습니다. 술도 사주고, 윤락 여성이 있는 자리에 초대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가까워지면서 심문관들과의 관계는 점점 협력적 관계로 변해갔습니다. 북한군 전방부대 지휘관 출신이었던 그가 대성공사에서 주로 한 일은 북한군 정보 제공이었습니다. 그가 넘긴 북한 정보만 500여 건, 이 가운데 129건이 군 당국에 의해 고급정보로 채택됐습니다. 당시만 해도, 북한군 전방부대 지휘관이 남한으로 넘어온 사례가 극히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남한 정보당국이 보유한 북한 정보는 턱없이 부족했던 터였습니다.

"그때 남한에선 북한군에 대한 정보가 거의 바닥 수준이더라고요. 북한 군인들은 '승리' 담배를 피웠어요. 남한 군인들이 피우는 '청자' 담배보다 맛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나를 고문한 심문관들은 북한 담배 이름도 모르더라고요."

장교 출신인 그는 서류 작성에 익숙했습니다. 바쁠 때면, 심문관들이 할 일을 대신해주기도 했습니다. 심문관들보다 일을 더 잘한다는 자부심을 느낄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조서 쓰는 걸 보니 영 시원치 않더라고요. '어이, 양반들, 내가 할 테니 다 쉬시오' 하고 내가 조서를 싹 다 가져가서 써줬습니다."


▲대성공사 심문관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김관섭 씨(오른쪽에서 두 번째). ⓒ김관섭

"북으로 가지 말고 나와 함께 남한에 삽시다"

다른 '귀순자'들을 회유하는 일도 했습니다. 귀순한 이들 중엔 다시 북한으로 가고 싶어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심문관들은 족족 '김관섭 선생'을 찾았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북한어선 부선장이었던 오모 씨입니다. 오 씨는 선원 8명과 함께 고기잡이 어선에 올랐다가 안개 탓에 남쪽으로 항로를 이탈해 결국 남한 군함에 나포됐습니다. 남한에 남기로 한 8명 선원들과 달리 오 씨는 북으로 가겠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그런 오 씨를 잘 설득해 남한에 정착하도록 했습니다. 당시 언론에서는 오 씨의 귀순을 대서특필했습니다.

심문관들의 고압적인 태도에 반발하는 탈북자들을 달래는 것도 그의 몫이었습니다.

"한강 하류를 헤엄쳐 내려온 어떤 아이가 있는데, 심문관들한테 북한 정보도 안 주고 그래서 매를 벌었어요. 몽둥이로 맞고 욕 듣고 그럴 때마다 '내가 죄인이냐'고 씩씩거려서, 제가 몇 번을 잘 얘기했어요. '대한민국 왔으니 여기 사람 말을 들어야 할 것 아니냐'고요."

그는 대성공사 시절 자신이 한 일들에 대해 "보람 있었다"고 했습니다. 북한을 탈출한 이상, 그가 협조해야 할 곳은 북한이 아닌 남한이었습니다. 그러니 남한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건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해 그가 느끼는 감정은 양가적입니다. 대한민국은 비록 그를 고문했지만, 어쨌거나 그가 증오한 북한의 대치 국가이며 앞으로 발붙이고 살 새로운 조국이기도 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남한에 대한 애국심은 언제부턴가 그 안에 자리 잡았습니다. 수개월 동안 당했던 끔찍한 고문을 '조국을 위한 희생'이라고 여겼습니다.

▲오른쪽이 나포어선 부선장 오모 씨. ⓒ프레시안(서어리)

"그래도 인간이니까…"

심문관들에 대한 감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온갖 고문에 시달리던 지옥 같은 시절, 자신에게 소소한 친절을 베풀었던 심문관이나 헌병에 대해서는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따지고 보면 그들 역시 가해자임에도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대성공사를 나온 뒤에도 심문관들의 관혼상제를 꾸준히 챙겼습니다. 자신을 무지막지하게 고문했던 허모 심문관의 모친 상가에 갔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정보부 사람들이 많이 왔더라고요. 그래서 오래 있을 수가 없어서 '허 선생님, 나 갑니다' 하고 나왔어요. 그랬더니 그자(허 심문관)가 나를 계속 따라 나오는 겁니다. 모습을 보아하니, 나한테 무척 미안해하는 것 같았어요."

어쩐지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악연이었어도 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따뜻한 체온을 지닌 '인간'이니까.

ⓒ프레시안(최형락)

사람들이 묻습니다. 내내 조용히 지내다 왜 이제 와 다 지난 일을 쑤시고 다니느냐고 말입니다. 그는 한마디로 말합니다.

"인간이니까."

인간이라서 심문관들에게 친밀함도 느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이기 때문에, 고문받으며 존엄성을 잃어가던 그때의 기억을 잊을 수 없습니다. 함께 웃고 밥 먹고 술 마신 세월로도 씻을 수 없는 분노가 그의 가슴 속에 응어리져있습니다.

"내가 인간인데, 인간 대접을 못 받았었지 않습니까.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다 털어놓고 싶었습니다. '내가 왜 고문을 받아야 했느냐'고. '망가진 내 몸과 마음을 누가 책임질 것이냐'고요. 이렇게 소리라도 질러야지 내 여생 길이 편안해지지 않겠습니까."

* 이 기사는 미디어 다음과 공동 게재합니다.
(☞바로 가기 : "나는 간첩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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