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정보 빼먹곤 '나몰라라'…왜 항의 못 했나?

[다시 '국가폭력'을 말하다] '귀순용사' 김관섭은 왜 피켓을 들었나 <3>

탈북자 김관섭 씨. 그는 1978년 대성공사를 나왔다. 북한을 떠난 지 3년 6개월 만에야 비로소 남한 사람이 된 것이다. 김 씨가 대성공사에 갇혀 있는 사이 다른 탈북자들이 몇 명이나 들어왔다 나갔다. 그가 아는 한, 그는 대성공사 최장기 수용자였다. 왜 유독 자신만 이렇게 오래 갇혀있었어야 했는지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는 나서서 따지지 않았다. 항의해서 나갈 수 있는 것이라면 진작 내보내줬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끔찍했던 고문의 기억들도 떠올랐다. (☞지난 회 기사 보기)

'모범수'가 되는 길을 택했다. 조사관들을 대신해 열심히 조서를 썼고, 반공 강연 강사로 불려 나갈 때마다 열심히 '멸북'을 외쳤다. 알아서 기었다. 대성공사에서 지낸 3년 6개월은 그를 이렇게 길들였다.

▲탈북자 김관섭 씨. ⓒ프레시안(최형락)

'남한이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나' 따지고 싶었지만'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국가는 사과 한마디가 없었다. 보상도 없었다. 간첩으로 몰려 죽을 고비를 넘기고 3년 6개월 만에 남한 사회에 풀려난 그를 기다리는 것은 차디찬 홀대였다.

탈북자들은 '귀순 용사'라며 대접받던 시절이었다. 대성공사만 나가면 자신 역시 좋은 대접을 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정착지원금은 다른 탈북자들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었고, '귀순 용사'라며 떠들어대는 언론의 환대도 없었다. 보통 군 출신은 경력을 인정받아 군에 들어갔지만 그는 예외였다.

뒤를 봐줄 것처럼 얘기하던 조사관들도 김 씨를 외면했다. 3년 6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가 아는 북한 정보들을 이미 가져갈 만큼 다 가져간 뒤였다. 조사관들이 먼저 연락할 이유는 없었다. 가끔 본인 경조사 때나 전화를 걸었다.

남한 사회에 풀려 나온 김 씨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나 다름없었다. 태어나서 한 일이라곤 총 드는 일밖에 없던 그가 민간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남한이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느냐'고 수없이 외치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대성공사를 나왔지만, '까딱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여전했다.

"자유민주주의 옹호하는 것과 '간첩 누명'에 항의하는 것은 별개"

맨몸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반공 강연이 겨우 몇 건 들어왔다. 국정 강연이라 벌이가 좋진 못했다. 쥐꼬리만 한 급료 중 일부는 대성공사 직원들이 떼갔다. "우리들이 소개해준 거나 다름 없지 않느냐. 기름값이라도 하자"며 중개료 명목으로 알아서 몇 푼 챙긴 것. 괘씸했지만 백수 처지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일거리가 들어오는 대로 군대, 학교, 촌 동네 할 것 없이 찾아가 외쳤다. '북한은 나쁘다'고.

'북한 인민군 중대장 출신' 꼬리표 덕에 그의 반공 교육은 입소문을 탔다. 대성공사에서 나온 이듬해인 1979년에 했던 강연만 200번이었다. 30년이 흘러 강연 횟수를 헤아려보니 4000회, 수강 인원은 130만 명이 넘었다. 그동안 그의 명함에 찍혔던 직함도 여럿이다.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 국민홍보위원, 통일부 통일교육 전문위원, 민방위소양강사, 한국자유총연맹 통일전문위원…. 안보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 국민훈장을 받기도 했다.

남한이 옳고 북한이 그르다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는 수없이 안보 강의를 하는 동안에도, 고문 당하고 3년 넘게 수용 생활했던 일은 억울하고 분했다고 토로했다.

"제가 남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옹호하는 것과 무고한 사람을 간첩으로 만든 국가에 항의하는 것은 별개의 일입니다. 간첩이 아닌 걸로 밝혀졌을 때 국가가 바로 사과하고 적절한 보상을 했더라면, 죽을 때가 다 된 제가 이렇게까지 하진 않았을 겁니다."

▲1997년 3월 안양 대안 중학교에서 '북한의 실상과 우리의 자세'라는 제목으로 안보 교육을 한 김관섭 씨. ⓒ김관섭

두 번의 결혼 실패, 아들의 가출…간첩 누명이 가져온 불행

고문 후유증, 대성공사 장기 수용 사실은 번번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안보 강사로 자리를 잡을 무렵, 결혼소개소에서 만난 여자와 결혼했다. 당시 귀순 용사는 인기가 좋아 어렵지 않게 상대를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아내는 아들을 낳은 지 4개월 만에 집을 버리고 떠났다. '잘 나가는 다른 탈북자들에 비해 돈을 잘 벌지 못해서 도망갔나' 하는 생각에 한숨이 샜다. 아내가 없으니 당장 아이 키우는 일이 막막했다. 안보 강연에 나갈 때마다 아는 탈북자에게 아이를 맡겼다. 얼마 되지 않던 강연료는 몽땅 보육료로 썼다.

10년 만에 재혼에 성공했지만, 두 번째 결혼 생활 역시 그리 길지 않았다. 처가 식구들은 다른 탈북자들과 달리 수입이 적고 수용 생활이 길었던 그를 수상하게 바라봤다. 그는 아내에게 간첩으로 몰려 고생했던 일을 털어놓았다. 이해와 공감을 바라고 솔직하게 터놓은 이야기는 되려 독이 됐다. 아내와 처남은 김 씨를 진짜 간첩으로 의심했다. 처남은 고등학생이었던 아들에게도 '네 아버지가 간첩인 것 같다'고 했고, 사춘기가 한창이었던 아들은 결국 집을 나갔다.

고문 후유증으로 성 기능도 좋지 못했다. 아내의 불만은 쌓여갔고, 그는 다시 이혼 전철을 밟았다. 자신을 떠난 처자식들이 원망스러웠지만, 한편으론 그들의 선택이 이해가 됐다.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교통사고 당하고도, 병원 대신 안보강연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1998년 어느 날, 김 씨는 여느 때처럼 강연장으로 가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사고 직후 다리가 부러졌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지만, 병원 대신 안보교육장으로 갔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북한 군대에 대해 설명하던 그는 까무룩 정신을 놓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곤봉으로 맞은 후유증 탓에 허벅지 통증을 겪던 그는 지체장애인 판정을 받았다.

나이가 들자 그동안 간간이 들어오던 강연마저 끊겼다. 현재 여든을 넘긴 그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신세로 살아가고 있다. 6평짜리 단칸방에서 혼자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혼자 잠이 든다.

"제 인생이 너무 비참합니다. 북에 있는 가족들과도 생이별하고 왔는데 남한에서도 가정이 파탄 났으니…. 이제 저한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어요. 돈도 없고, 가족도 없고 잘 걷지도 못해요. 이렇게 어렵게 살 거였으면 왜 왔나 후회가 막심합니다. 내가 간첩으로 몰리지만 않았어도 다른 귀순 용사들처럼 대접받고 잘 살았을 텐데…."


- '귀순용사' 김관섭은 왜 피켓을 들었나

<1> "'자유 대한'이 나를 고문했다"

<2> "때려잡았는데, 간첩 아니면 책임질 겁니까?"

<3> 북한 정보 빼먹곤 '나몰라라'…왜 항의 못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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