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에 달 가듯' 산 언론인, 송지영

[고난 속 꿋꿋이 산 사람들·⑥] '민족일보 사건'으로 억울한 옥살이

송지영 선생과 명동 순례를 가끔 했다. 최불암 씨의 자당이 경영하던 '은성'은 문화인들의 집합 장소가 되어 지금까지도 전설처럼 전해오는데 그 '은성'도 들린 것 같다. 은성에는 기자 초년생 때부터 들렸었는데 우인(雨人) 송 선생과 함께 간 것인지는 확실치가 않다. 물론 우인은 옛적부터 은성의 단골이다.


거기서 샹송 조의 유명한 노래 '세월이 가면'이 탄생한 게 아닌가. 그때는 소주가 유행하지 않았고 주로 약주와 막걸리였다. 안주로는 북어포가 선호되고…. 이봉구(李鳳九) 씨가 <명동야화>라는 책으로 당시의 풍경을 묘사했지만 (이봉구 씨는 '명동백작'이라는 명예 칭호로 통한다.) 그때의 명동은 이른바 '낭만의 거리'였다. 은성에는 시인·소설가·기자들이 주로 모였다.


박인환(朴寅煥) 시인이 담배 갑 종이 뒤의 백지에 흥얼흥얼하며 시를 쓴 것이 '세월이 가면'의 가사라고 전해지기도 했다. 그것을 이진섭(李眞燮) 씨가 가지고 가 며칠 후 곡을 붙여 내놓았다는 것이다. 노래의 초창은 영화 <백치 아다다>로 유명해진 나애심(羅愛心) 씨.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네 /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면 /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에 / 밤을 잊지 못하네 /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 그 벤치 위에 / 나뭇잎은 떨어지고 / 나뭇잎은 흙이 되고 / 나뭇잎에 덮여서 / 우리들 사랑이 / 사라진다 해도 / 내 싸늘한 가슴에 있네"


'세월이 가면'에 관해서는 <한겨레>의 최재봉 기자가 칼럼도 썼는데 그 결론은 다음과 같다.


박인환과 이진섭이 어느 날 "명동을 후줄근히 적실" 샹송풍 노래 하나를 만들기로 의기투합한 뒤 인환이 바로 다음 날 시를 써 오자 그로부터 열흘 뒤에 이진섭이 곡을 완성했다는 것. 유성호 한양대 교수 등의 선행 연구를 참조한 결론이다. <세월이 가면>이 천재적 예술가들의 즉흥 작업에서 빚어졌다는 아름다운 신화는 비록 탈색되었지만, 노래 자체의 매력도 덩달아 빛이 바래는 것은 아닐 테다.


송지영 씨도 <주간 희망> 1956년 3월 12일 치에 쓴 '명동의 샹송'이라는 글을 남겼다는 것. 나를 끌고 명동에 나선 송 선생은 반드시 '뚜리바(상아탑이란 뜻)'로 간다. 명동 중심에서 충무로 길로 한 블록쯤 가면 있는데 '뚜리바'는 나애심 씨 자매가 경영하는 카페다. 거기서 적당히 팔아준다. 그리고 마지막에 우인이 나애심 씨를 불러 정중하게 한 곡을 부탁한다. 예의범절이 순서가 있고 깔끔하다. 마침내 나애심 씨가 초창한 '세월이 가면'이 파리에서 듣는 샹송처럼 퍼진다. 샹송보다는 좀 힘찼던 것 같다. 짐작건대 그런 예의를 갖추는 절차 없이 아무나 가서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우인 때문에 나는 호강을 했다.


마침 각도 정치인들이 모여 흥겨운 파티가 열렸을 때다. 파티 끝 무렵에 누가 노래를 제의했다. 맨 먼저 부산 친구가 '돌아와요 부산항'을 불렀다. 전남 친구는 '목포의 눈물'이 부르기가 꺼려진다면서 영산강에 관한 노래를 부른 것으로 기억한다. 서울인 내 차례가 되었다. '서울 찬가'는 자리에 안 맞고 좀 유치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욱 샹송 조로 '세월이 가면'을 선사했다. 모두 대단한 박수. 아마 처음 들어보는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유래도 설명했고 마지막에 '뚜리바'의 나애심 씨 이야기도 했다. '뚜리바'가 어디 있느냐고 묻기도 한다.


4·19 맞은 조선일보 편집국장 송지영 "학해는 해일"

송지영 씨를 처음 만난 것은 내가 대학 4학년 때다. 시골 출신이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이자 자유당 정권 2인자인 이기붕 국회의장의 실자인 이강석 군의 서울법대 부정 편입학을 반대하는 동맹 휴학을 덜컥 주도하고 난 후다. 앞길이 얼마간 막막하였다. 그래서 신변보호도 할 겸, 신문사가 어떨까 하여 마침 청주중학교 9년 선배로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있던 천관우(千寬宇) 씨를 찾아갔다. 지금은 헐어 없어진 구(舊) 사옥 3층 편집국 옆에 작은 방인 논설위원실이 있었다. 천 선배에게 상의하니 갑작스러운 일이라 그는 덤덤하니 그저 그렇다. 자세히 나를 모르는 처지에서 어떻게 조언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옆자리에 앉아있던 반쯤 머리가 흰 조그마한 체구의 논설위원이 일어나서 방을 왔다 갔다 하며 나 들으라고 독백처럼 말한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는 데는 100년 가까운 사태의 축적이 있고 움직임이 있어 이루어진 것인데, 요즘 학교에서는 그것을 기껏 두서너 시간쯤에 가르치고 마니 큰일이야. 모든 게 그렇게 쉽사리 되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게 아니겠어."

1958년 초의 일이다. 자유당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고조된 상태다. 그리고 내가 학생운동 출신으로 여겨져 그로서는 좋은 충고를 한 셈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우인 송지영 논설위원이었다.

송지영 씨는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 4.19를 맞았다.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홍수처럼 시가지를 메우는 것을 보고 그는 "學海는 海溢(학해는 해일)"이란 제목을 직접 뽑아 초특호 활자로 1면에 머리띠처럼 둘렀다. 배너 헤드라인(Banner Headline)이란 것이다. 얼마간 한문 공부에서 나온 듯하기는 하지만 그 제목은 두고두고 화제가 되었다.

나는 그때 한국일보 기자였기에 송지영 국장을 직접 경험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내가 학생 때 방문하여 만났던 조선일보의 두 논설위원인 천관우, 송지영 씨가 공교롭게 잇따라서 편집국장을 맡는 것이다. 짐작건대 천 국장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국장이었을 것이고, 송 국장은 수동적이고 조용한 인화 위주의 국장이었을 것이다. 둘 다 한학에 뛰어나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듣던 사람들이다. 그런 기록도 있다 한다. 아마 한학에 있어서는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성격은 매우 대조적이었다.

송지영 씨의 옥중기 <우수의 일월>을 보면 그때그때 중요한 시사 문제에 관한 그의 간단한 논평이 나온다. 옥중에서의 것이지만 그의 논평들은 건전한 사회 상식에 뒷받침된 것이어서 전혀 어색하지 않고, 또한 이론(異論)을 말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런 데서 판단할 때 편집국장으로서 매우 건전하게 매일 매일의 사건이나 사태를 판단하였을 것 같다.

특히 월남전의 이른바 텟(Tet), 그러니까 구정 공세는 그때 당시 사태가 혼미스러워 판단이 어려웠다. 그런데 옥중기에 나오는 구정 공세에 관한 그때의 평가는 매우 균형이 잡힌 것 같다. 나는 그때 미국에서 그 사태를 주시했고, 그는 형무소 안이었지만 그와 같이 비교적 정확한 평가를 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는 꾸준히 <뉴스위크>, <타임>, <아틀란틱> <맨체스터 가디언>(나중에 <가디언 위클리>) 등등을 정독하였기에 그런 균형 있는 뉴스 평가가 가능했을 것이다.

수감 생활 7년여 기록한 옥중기 <우수의 일월>

송지영 씨를 두 번째로 만난 것은 안양 교도소에서다. 조선일보 정치부 차장이던 나는 선우휘 편집국장과 함께 정권에 찍혔다. 그때는 한·일간 국교 정상화 교섭이 진행될 때이고, 학생들과 야당이 '굴욕적인' 한·일 교섭에 반대한다는 투쟁이 치열할 때이다.

선우 국장과 나는 한 달쯤 피신했다. 잠잠해진 후 서로가 연락을 해서 회사에 나타나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하다. 군인들이 하는 조치는 법치주의에 따른 절차가 아니고 군대의 기합(氣合)과 같은 것이어서 그때만 지나면 된다는 것이다. 기합은 그때 당장을 피하고 보면 끝난다.

▲ 우인 송지영 씨가 7년여의 옥중 생활을 담은 <우수의 일월> 표지. ⓒ융성출판

그래서 문화부장으로 옮겨 앉았는데 하루는 선우 국장이 안양 교도소에서 형을 살고 있는 송지영 씨를 만나러 가잔다. 옥중에서의 신문 연재소설을 부탁하자는 것이다. 청의(靑衣)의 송 선생을 면회실에서 만났다. 나는 듣기만 했다.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선우 국장의 노력은 법무부의 제동으로 성사가 안 되었다.

<우수의 일월>을 보면 그때의 만남을 아주 간단히 기록하고 있다.


"1965년 5월 5일.낮에 신문사의 선우(鮮于) 형이 문화부의 책임을 맡아보는 남(南) 형과 함께 찾아 주었다."


<우수의 일월>은 그의 9년 반의 감옥살이에서 초기 2년쯤만 빼고 나머지 기간을 꼼꼼히 기록한, 촘촘한 인쇄로 10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옥중 기록이다. 앞으로 어느 누군가가 그것을 연구 자료로 쓸지도 모를 일이다.


그 옥중기를 읽고 알게 된 일이지만 정치범들은 독서와 집필이 자유롭다. 안양 교도소에서 정치범들은 독방에 기거하면서 그룹, 그룹 반(半) 자치적인 생활을 해왔다. 공동으로 취사도 하며 생활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이다. 권대복(權大福), 류근일(柳根一) 씨도 오랫동안 함께 있었다.


면회 와서 부탁하는 원고를 써서 내보내기도 했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외부 간행물에 그 글을 게재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중앙일보도 옥중 소설 연재를 시도했으나 법무부의 제동에 걸렸단다.

백발홍안에 작은 체구, 점잖은 주당 송지영

형을 마치고 조선일보 측의 각별한 배려에 따라 논설위원이 된 송 선생은 곧 몇몇 논설위원들과 술집 나들이를 시작했다. 최석채 주필과 송건호, 이어령 씨는 술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빠지고 주당인 조덕송, 김성두 그리고 내가 주로 상대가 되었다. 조덕송 씨는 전날에 송 선생이 조선일보 간부로 있을 때 채용한 관계라 둘 사이는 사제관계 같았다. 그런데 시일이 지날수록 우인의 술집 동행은 점차 나 하나로 압축된 것 같다.

일과가 끝나고 가끔 "남형, 오늘 약속 있어" 한다. 그러고는 술집 행차다. 아마 한 달에 두 번쯤은 동행한 게 아닌가 한다. 두 코스가 있다. 한 코스는 관철동의 비어홀 '낭만', 그리고 뒤의 '사슴'이다. 수준급 아가씨들이 반듯이 서서 예의 바르게 서비스를 하는 그 비어홀들은 그 당시 주당들 가운데 인기 있는 명소였다. 백발홍안에 작은 체구의 우인이 점잖고도 정답게 처신하며 술은 약간 하지만 팁은 두둑이 주니 인기일 수밖에 없다. 다른 손님들보다 그런 우인이 믿음직스러워 의지하고 싶어졌을 것이다.

아가씨들이 점차 신상 문제도 상의하게 되고, 사회 활동에 의문 나는 것들을 묻기도 한다. 돈을 저축하여 자기 비어홀을 차리게 된 아가씨들은 옥호를 무엇으로 할지를 상의한다. 미스 동은 유식하게 값나가는 서예, 골동에 관심을 가져 우인에게 이것저것 배운다. 우인은 미스 동이 안목이 있고 수준이 있다고 특별히 귀여워한다.

아가씨들이 퇴근할 무렵까지 혹시 있게 되면 우인은 자기 집에 들렀다 가라고 아가씨들을 초청하기도 한다. 나는 한 번도 같이 간 적이 없지만 몇몇 아가씨가 우인 댁에 갔다 온 모양이다. 그런 일이 고은 시인에게도 알려져 고 시인은 <문학사상>에 연재한 그의 일기에 그런 이야기를 썼다. 그리고 드디어는 '낭만' 아가씨들이 자기 집도 찾아 왔었다고 그 일을 자랑삼아 써놓았다. 신상 상담이었던 것 같은데 양주를 한 병 갖고 오기도 했다나…. 여하간 '낭만' 아가씨가 집까지 온 점에서는 우인과 동급이 되었다고 고은 시인은 무척 자랑스러운 모양이다.

당대의 유명 여배우 윤정희 씨를 만난 것도 '낭만'에서다. 우인이 오라고 해서 갔더니 윤정희 씨가 있어 합석해서 마시는 영광을 가졌다. 여기서 꼭 말해 둘 것은 그때 우인의 나이는 50대 초반이다. 완전 백발에 작은 체구여서 한 70대 중반쯤의 노인으로 보여 아무도 그와 함께 있는 여인들을 혹여라도 달리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꼭 할아버지와 손녀 사이쯤으로 보게 되어 있다.

그 후 윤정회 씨가 여의도에 있는 부모 집으로 초대한다고 송지영 씨가 나보고 가잔다. 나도 초청했다는 것이다. 여의도의 아파트에 가니 부모님이 계셨는데 성은 윤이 아니고 손 씨인 것이다. 잘 대접을 받았다.

그 후의 이야기인데, 윤정희 씨가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와 약혼을 했는데, 그 프랑스 파리에서의 약혼은 송지영 씨가 중매한 것으로 소문이 났다. 송지영 씨는 여행을 좋아해서 특히 파리에 자주 갔다. 거기에 절친한 친구인 화가 고암 이응로 씨가 있어 둘이 만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이응로 화백이 이른바 동백림 사건으로 독일에서 납치되어 형무소 생활을 했을 때 우인은 안양 교도소에서 얼마 동안 고암과 함께 지내기도 했다.

내가 광주의 호남대학 객원교수로 출강을 할 때 김포공항에서 윤정희·백건우 부부와 마주친 적이 있다. 그때 사교성이 모자라는 나는 윤정희 씨에게 인사를 하였을 뿐, 백건우 씨에게도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하는 기회를 놓쳤다. 아차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우인 송지영 씨 술집 순례의 또 한 코스는 강남이다. 택시를 타고 함께 간다. 그런데 특색이 있는 것은 반드시 카운터에서 칵테일을 한두 잔만 한다는 것이다. 한 시간쯤이면 옮겨 보자고 한다. 그리고 팁을 두둑이 놓고 떠난다. 두 번째 집에서도 카운터다. 그리고 칵테일을 한 잔쯤. 그리고 두둑한 팁. 끝이다. 여하간 팁이 두둑하니 아가씨들이 이 백발의 노신사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아가씨들에게 인기가 있는 우인은 술집 이름을 많이 지어주었다. 한 번은 나에게 지어보라고 한다. 몇 시간을 궁리하여 지은 이름이 '카타리나.' 실패다. 우인은 '아람'이라고 지어주었다. 중학동 옛 한국일보 뒤에 있던 '아람'은 인기 있는 살롱이 되었다. 그가 지은 이름으로 내가 아는 것은 '해바라기', '바나실(바늘과 실의 합성어인 고어)', '사슴', '하향(霞鄕: 남산 순환도로 높은 데 있었는데 안개의 고향이라나)', '가을(순천향병원 앞쪽의 하우스와인 전문집) 등등이다.

<수호지> 송강 닮은 '통 큰' 송지영

우리가 잘 아는 <수호지>의 큰 인물은 급시우(及時雨) 송강(宋江)이다. 내 생각에 송지영 씨도 송강의 인간상을 은근히 부러워하고 마음에 두었던 것 같다. 공교롭게 같은 송 씨다. 그래서 아호를 급시우에서 한 자 따서 우인(雨人)이라고 한 것으로 짐작하여 보는 것이다. 거의 틀림없는 추리일 것이다. 及時雨 宋江, 雨人 宋志英(급시우 송강, 우인 송지영). 그럴 듯하다.

송지영 씨를 사귄 사람들은 대개 동의하겠지만 그는 송강과 비슷한 면이 있다. 우선 통이 크고 덕망이 있다. 그 작은 체구에 어떻게 그리 통이 큰지 모르겠다. 부자는 전혀 아닌데 참으로 후덕하고 씀씀이가 헤프다.

그의 장편 신문 연재소설 <천풍(天風)>에서 예를 들어보자. 짐작에는 중국의 것을 번안하여 작품화한 것 같은데 거기에 나오는 주인공 생활태도나 씀씀이가 꼭 송강이나 송지영 씨 같다. 가령 돈이 필요하다든가 귀한 물건이 필요하다든가 할 때 주인공은 종이에 그것을 써넣고 돌에 말아 주문을 외며 멀리 던진다. 그러면 마술처럼 돈이고 귀한 물건이고 발 앞에 당도한다. 참 편리하게 산다. 그런 중국 대륙적인 환상과 허풍과 기적의 세계를 아무 거리낌 없이 서술하는 게 송지영 씨다. 그리고 그렇게 산다.

어떻게 그렇게 공상 소설의 세계와 같은 여유와 편안함의 세계에서 살 수 있는가. 내가 옆에서 오래 지켜보았기에 비교적 자신 있게 증언할 수 있다. 송 선생은 한학에 능할 뿐만 아니라 서예 수준도 보통을 넘는 상급이다. 절친한 청곡 윤길중 씨의 붓글씨는 높이 평가를 받고 있는데 그와 서로 농을 할 때는 "청곡, 그게 무슨 글씨라고!"하며 낮추어 말한다. 아는 사람이 간청을 하면 서슴없이 작은 액자용 붓글씨를 써준다. 두방이다. 옆에서 보기에 그럴싸하다.

서예에 뛰어날 뿐 아니라 고미술 감식안도 인정받고 있다. 중국 대륙에서 많이 보아온 안목이다. 그래서 그에게 고미술을 감정해 달라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감식안만 높으면 반쪽이다. 나머지 반쪽은 구매자가 있어 거래가 이루어져야 한다. 우인은 언론계, 문단, 혁신계, 특히 족청계를 통해 매우 폭넓은 인맥을 갖고 있다. 족청계는 재력도 있다. 그러니 감식과 거래가 연결되는 것이다.

우인은 재력 있는 지인에게 힘도 안 들이고 말한다. "사장, 내가 보기에 훌륭한데 소장한다고 해서 손해는 안 될 거야." 인격이 겹치는 이야기다. 거래는 곧잘 이루어진다. 그럴 경우 이른바 커미션(수수료)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여하간 송 선생의 주머니에는 두둑한 용돈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 밤에 술집 행각이라면 팁을 넉넉하게 주는 게 아닌가.

내가 잘 아는 소설가 이병주 씨는 국제신보 주필을 하다 5·16 때 혁신계로 몰려 2년 반 형무소 살이를 하였다. 그는 감옥에서 나온 후 최고의 사치와 낭비를 계속했다. 내가 지나친 게 아니냐고 물었더니 "형무소에서 고생할 때 나가면 최고의 사치를 하고 살기로 맹세를 한 게 아니겠어"라고 한다. 혹시 송 선생도 8년여의 억울한 형무소 살이 때문에….

이병주 씨와 송지영 씨는 5.16 후 형무소 생활 초기에 얼마동안 서대문 형무소의 같은 방에 있었단다. 참 우연치고는….

둘의 술집 사치인지 낭비인지는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다. 그만한 재주, 특히 돈 만드는 수완을 겸비하고 있으니 되는 일이다.

▲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옥중 5000여 권 독서…마실 가듯 한 형무소 살이

나는 평소에 송지영 씨가 한학에 천재 소리를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어왔다. 옛날엔 신동(神童)이라고 했다. 송지영 씨는 언론인, 소설가, 한학자 등 여러 타이틀을 갖고 있다. 그 중 소설가의 경우만 말해보면, 미안한 이야기지만 중국 소설을 번안하는 그런 영역이고 수준 같다.

그런데 이번 <우수의 일월>을 나를 아껴주는 선배에 대해 새삼 미안한 마음과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알뜰히 탐독하면서 여러 가지 다른 면을 발견하였다.

우선 한학을 같이 공부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대학(남경중앙대학) 공부를 한 송지영 씨의 한학의 세계, 대륙적 세계를 부럽게 느낀다. 그는 9년 2개월의 옥중 생활을 도통한 사람처럼 보냈다. 세속을 초월한 도인(道人)처럼 말이다. 나 같으면 도저히 상상도, 생각도, 느끼지도 못할 경지다. 그는 이웃집에 마실 가듯 형무소 살이를 끝냈다. 그리고 대범하다.

<우수의 일월>은 4.19 공간의 혁신계를 옥중에 옮겨놓은 것 같다. 내가 취재했던 반쯤의 혁신계 인사들이 그 속에 나온다. 나로서는 4.19 후 혁신계 인사들의 5.16 속편 생활상을 보는 것 같다. 송지영 씨는 옥중에서 대학을 몇 개나 나온 셈이다. 그의 말로 5000여 권의 책을 읽었다니 말이다. 물론 거기에는 잡지도 포함된 듯하다. 나는 그의 한학 실력을 미리 알고 있었지만 이번 옥중기를 읽고 그의 영어 실력에도 놀랐다. 대부분의 외국 책을 몇 가지만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De Profundis(데 프로푼디스·깊은 곳에서)> - 한국에는 <옥중기>로 번역 출간.

밀로반 질라스(Milovan Djilas)의 <Conversation with Stalin (스탈린과의 대화)>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의 <Cannery Row (캐너리 로우)> - 한국에는 <통조림공장 골목>으로 번역 출간됐다.

아서 밀러(Arthur Miller)의 <After the Fall (추락 이후)>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의 <Another Country(또 하나의 나라)>

펄 벅(Pearl Buck)의 <The Living Reed (살아있는 갈대)>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의 <Power(권력)>

아널드 조셉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의 <Study of History(역사의 연구)>

미하일 숄로호프 (M.l Sholokhov)의 <And Quiet Flows the Don(고요한 돈강)>

헨리 브룩스 애덤스(Henry Brooks Adams)의 <Democracy: An American Novel(민주주의)>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의 단편집. (일어판·영어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Search for Method(방법을 찾아서)>

솔 벨로(Saul Bellow)의 <Herzog(헤어초크)>

잭 런던 (Jack London)의 <The Sea-Wolf(바다의 이리)>

플라톤(Plato)의 <Apology(변명)>, <Crito(크리톤)>

이 밖에도 귄터 그라스(Gunter Grass), 어니스트 헤밍웨이 (Ernest Hemingway), 딜런 토머스(Dylan Thomas), 블라디미르 나보코프(Vladimir Nabokov), 토마스 만(Thomas Mann), 조셉 콘래드(Joseph Conrad), 에드먼드 윌슨(Edmund Wilson),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August Strindberg), 도스토옙스키 (Dostoevskii) 등등 많다.

그 밖에 그가 애독하던 중국 서적을 일기에 다음과 같이 열거해 놓았다. 크게 참고가 된다.

근사록(近思錄), 왕양명(王陽明) 전집, 논어(論語), 맹자(孟子), 장자(莊子), 당시(唐詩), 루쉰(魯迅)

언론계·문인 넘나드는 광범위한 인맥

<우수의 일월>은 그의 교제 범위를 말하여 준다. 언론계 인사도 많지만 문인들은 그때 당시의 문인 인명록을 쓸 정도로 등장한다. 그 중 특히 시인 김수영 씨 관계만 소개하여 보자. 송지영 씨는 김수영 시인으로부터 편지가 왔을 때 그를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훤칠한 모습, 깊숙이 빛나는 눈자위를 어느 한 군데 영원의 모습에 못 박고 시니컬한 웃음을 지으며 술잔을 드는 김 시인의 풍모를 잠시 연상해 보며 그의 느껴움에 젖은 말을 되씹어 보았다."


김수영 시인에게서 온 편지는 다음과 같다.


"宋 선생!그렇게 오랫동안 가 계신대도 한번 찾아가 뵙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노상 소식은 듣고 있고 가 뵙지도 못해도 간다 간다 하고 벼르기는 벌써 수없이 했을 겁니다. 그러다가 아시겠지만 利錫(이석)) 兄도 鎭壽(진수) 兄도 그렇게 됐으니 생각하면 세상일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利錫 兄 하고 宋 선생하고 명동에서 정종을 마시던 것이 엊그제 일 같습니다만, 그 大喪을 치른 지도 벌써 2년이 지났나 봅니다. 石榮鶴(석영학), 李鳳九(이봉구), 沈練燮(심연섭), 金光洲(김광주), 柳呈(유정)하고는 노상 만나고 있고, 머지않아 꼭 한 번 가뵈올 작정입니다. 그래도 ‘맨체스터 가디언' 지의 詩 作品을 오려 보내주실 만한 여유가 있으시니 안심했습니다. 그 전에 비해서 달라진 것이 현저히 바빠졌다는 것입니다. 무슨 뾰족한 일이나 제대로 문학이라도 해서 바빠진 게 아니라 지저분하게 바빠졌어요. 明洞에 나가도 아는 얼굴이 거의 없어요. 겨우 李鳳九 정도가 하얀 머리에 얼굴을 빨갛게 해가지고 앉아있지만 무슨 주고 을 얘기가 있어야지요. 光化洞에는 光 洲 氏가 나오고, 石 兄이 가끔 술을 마시러 나오고, 沈練燮은 몸이 좋지 않아서 술을 끊은 지 오래입니다. 宋 선생의 편지 받는 얘기를 친구들에게 전했더니 모두 깜짝 놀라면서 반가워해요. 그래도 어서 빨리 나오셔야지. 저는 나이 먹은 世代가 쓸쓸하게 되어가는 요즘도 예나 다름없이 왕성하게 마시고 있습니다. 곧 한 번 뵈러 가겠습니다. 몸조심하세요. 1967년 11월 26일 金洙暎. "


우인 송지영 씨의 고향은 본래 평안북도 박천군이었다. 아마 집안이 한학을 하고 정감록에 심취했던 것 같다. 그래서 우인이 열두 살 때 온 가족이 난시의 피난지라고 하여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읍으로 이사를 하였다. 정감록을 믿는 동네 사람들이 대거 집단 이주했다. 예를 들어 국회의원을 여러 번 지냈던 박용만((朴容萬) 씨와 그의 형 음악가 박용구 씨도 그 정감록파의 일행이다. 여하간 집단으로 이주하였는데 그럴 경우 대개는 재력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경북 사람들은 풍기를 인삼과 비단의 명산지라고 말한다. 그것은 자본의 축적이 있었으니 다년생인 인삼을 재배할 수 있었고 비단 공장을 세울 수 있음을 의미한다. 여하간 정감록을 믿는 부자들이 평북에서 경북으로 집단 이주한 것 같다.


정감록을 믿었으니 한학을 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송지영 씨는 열대여섯 살 때 벌써 산속에 초막을 짓고 제자백가(諸子百家) 등 한학을 공부했다 한다. 할아버님과 아버님이 항일 의병을 따라다녔기 때문에 신학문을 허용치 않기 때문도 있다고 한다.


여하간 그렇게 해서 한학의 신동 소리를 듣게 되고 동아일보의 작품 모집에 당선되기도 하여 드디어 1935년 동아일보에서 언론인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입사 2년 만에 사설과 칼럼 '횡설수설'을 쓰게 되었다니 대단한 속성이다. 1939년 일제에 의한 동아일보 폐간으로 만선일보(滿鮮日報)로 옮기고, 이어 중국 상해로 가서 중국어신문 상해시보(上海時報)에서 기자 생활을 하게 된다. 1940년 남경중앙대학에 입학하여 대학생활을 하였는데 건국대학 교수와 국회의원을 지낸 조일문(趙一文) 씨가 대학 동기다.


1942년에 중경에 있는 우리 임시정부와 연락을 하여 상해·남경지구의 비밀공작을 하였다 하여 구속되었고, 상해 일본 영사관 법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 언도를 받고, 일본 큐슈에 있는 나가사키 형무소로 이감이 되었다. 그리고 일제 패망과 함께 풀려나 9월 말에 유명한 소설가 김학철(金學鐵) 씨와 함께 귀국하게 된다.


김학철 씨는 원산 태생이지만 간도에서 활약한 소설가로 유명한데 그는 중국 태항산(太行山) 전투에 조선의용군으로 참전하였다가 다쳐 포로가 되어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복역하고 있었다. 송지영 씨는 김학철 씨와 함께 귀국하여 우선 풍기 고향으로 함께 가서 며칠을 묵었다가 김학철 씨를 간도로 떠나보내게 된다. 둘 사이의 우정은 일화와 함께 대단한 미담으로 전해진다. <우수의 일월>에는 간간이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고생한 일에 관한 회상이 나온다.


해방 후 귀국해서의 우인의 경력은 주로 여러 언론 기관에서 논설위원·편집국장·주필을 맡는 등 언론 활동을 하고 <청등야화>등 소설을 쓰는 등 문학 활동을 한 것이다. 특별히 말해야 할 것은 그가 "국무총리실과 국방부 정훈국 촉탁으로 총리와 장관의 발표문들을 다수 집필하였음"이라고 경력에 쓰고 있는데 일반에 알려지기는 철기 이범석 장군이 총리 겸 국방부 장관으로 있을 때 연설문 작성자로 활약하였다는 것이다. 그가 중국 대륙에서 활약했고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렀으니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한 철기 장군과 연결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래서 우인을 민족청년단 계통, 족청계로 분류하는 사람들이 많다. 족청계는 이승만 대통령 집권 초기의 실권 세력이다. 따라서 그 세가 엄청나게 크다. 그 이야기는 우인의 명사들 교제 범위가 무척 넓다는 말이 된다. 사실 우인과 가까이 지내다 보면 언론인·문인으로서 경력만으로 그만큼 폭넓은 인맥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간다. 거기에 족청계 요인들을 합쳐볼 때 그의 인맥 지도를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자면 그는 족청계 출신의 여걸인 김정례 씨와 마치 오누이처럼 친밀하다. 역시 족청 출신인 김대중 씨 부인 이희호 여사와도 통하고. 우리나라 정치를 살펴봄에 있어서 각계에 퍼져 있던 족청계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 5·16 쿠데타 이후 민족일보 사건으로 재판받는 조용수 사장과 송지영 씨 등. 피고인석 왼쪽에서 세 번째 (앞줄 두 번째)가 우인 송지영 씨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5·16 쿠데타와 건국 이후 최대 언론 탄압 '민족일보 사건'

5·16 군사 쿠데타 후 혁신계 인사들을 일망타진하여 혹은 사형시키고 대부분은 장기간 감옥에 가둔 것은 법률과는 관련 없는, 완전히 법을 떠난 조처였다. 그러기에 오랜 세월이 지나 민주화된 후 억울하게 사형된 민족일보의 조용수 사장은 재심에서 무죄가 되었고 보상을 받았으며 대부분의 혁신계 인사들도 재심에서 무죄, 보상을 받기에 이르렀다. 쿠데타 때 무법천지와 같은 만행이 저질러진 것이다.

송지영 씨도 처음에 사형이 언도되었는데 마침 송 씨가 '펜 클럽'의 회원이라 국제 펜 클럽의 노력으로 무기로 감형되었으며 결국은 8년 2개월의 형을 살게 된 것이다. 송 씨도 사후에 유족들이 재심을 요청하여 무죄가 되고 보상을 받았다고 신문에 보도되었다.

따라서 지금 와서 송지영 씨가 무슨 죄목으로 형을 살았느냐고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쿠데타 세력이 무슨 이유를 걸어 잡아넣었느냐고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송 씨 자신의 기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되어있다.

"기소장이나 판결문을 보면 '민족일보 사건' 관련자로 되어있다. 그러나 나는 민족일보 사에 단 한 번도 가본 일이 없을 뿐더러 그 당시 나는 조선일보의 편집국장으로, 민족일보와는 일체의 관련이 없었다. 억지로 두드려 맞추기를 '너는 민족일보에 자금을 대어준 사람과 친구요, 그 친구로부터 텔레비전 회사의 신설 자금을 빌려 썼으니 모두 한 줄기가 아니냐'는 기막힌 억지였다. 그런 일이 있기 반년 전, 나는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전국 네트워크를 갖춘 텔레비전 방송국을 만들기 위하여 일본의 미쓰이 회사 사장과 교섭 끝에 6백만 달러의 차관을 얻기로 계약을 맺었었고, 5·16이 나던 무렵에는 미쓰이에서 파견한 기술진들이 와서 전국을 답사하여 앞으로 송신탑 세울 자리를 찾던 중이었다. 그처럼 엄연한 사실들을 일체 무시해버릴 뿐만 아니라 몇 해에 걸친 나의 모든 행적을 '북쪽에 고무 동조하였다'고 몰아붙이니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을 밖에."

여기서 거론되는 '민족일보에 자금을 대어준 사람'도 죽산 조봉암 씨의 수석 참모로 일본에 망명하여 통일일보를 발행하고 있던 이영근 씨다. 재일교포 출신으로 통일일보 사장이 된 조용수 씨에게 이영근 씨는 얼마간의 돈을 지원하였고 그것이 5·16 후 조총련 자금일 것이라고 문제가 되었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조용수 씨는 재심에서 무죄가 되었고 이영근 씨는 사후에 우리 정부에서 주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아 모든 일이 분명하게 깨끗이 밝혀진 셈이다. (☞ 관련 기사 : 박정희 거듭 구한 은인, 제대로 뒤통수 맞다)

아무튼 조선일보 편집국장이던 송 씨가 일본의 대기업인 미쓰이와 손을 잡고 그 차관을 얻어 텔레비전 방송국을 세우려 했으니 그 통도 크고 역량도 대단했다. 놀라운 이야기다.

말년 출세…고난 속 '구름에 달 가듯' 살다

형무소 살이를 하고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복귀한 우인과 나는 같은 논설위원실에서 3년여 동안 가까이 지냈으나 내가 신문사를 옮기는 바람에 자연히 멀어졌다. 그래서 그의 말년의 출세 가도에 관해서는 그 과정을 모른다.

우선 그는 1979년 문화예술진흥원장이 된다. 그를 가두었던 박정희 대통령 정권에 의한 깜짝 발탁 인사다. 유능하고 덕망 있는 인사를 까닭 없이 고생시켰으니 뒤늦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혹시 보상하는 뜻에서 한 인사일지도 모르겠다. 짐작일 뿐이다. 혹은 이런 생각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1979년 당시의 청와대 비서실장이 육군대장 출신인 김계원(金桂元) 씨다. 김 씨는 우인과 풍기 동향이고 집안이 평북에서 이주해왔다는 이야기가 있기도 하다. 혹시?

더 놀라운 것은 신군부 쿠데타 이후 그가 입법회의 의원이 되고 민정당의 발기인으로 제11대 국회의원(전국구)이 되었으며, 그 후 한국방송공사(KBS) 이사장까지 취임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증언해 줄 사람이 많이 있으나 아직 듣지는 못했다.

추리는 이렇다. 우선 박정희 체제는 독립운동 세력을 멀리했으나 친일하고는 관계없는 전두환 체제는 오히려 독립운동 세력을 전면에 내세웠다. 독립운동의 원로인 유석현 씨를 민정당 창당 준비위원장으로 내세우고, 항일의 상징처럼 되어있는 최익현 선생의 현손인 최창규 교수를 국회의원으로 지역구 공천을 하고,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송지영, 조일문 씨 등을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내세웠다.

전두환 체제는 박정희 체제에서 수난당한 혁신계도 대폭 포용했다. 혁신계 최고 거물 윤길중 씨를 영입하여 국회부의장으로 하였으며, 광의의 혁신계라고 볼 수 있는 김정례 여사를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내세웠다. 송지영 씨는 독립운동·혁신계 양쪽에 걸친다.

또한 혁신계의 쟁쟁한 인사인 김철 씨를 입법회의에 끌어넣었으며, 역시 대단히 유명한 혁신계 인물 고정훈 씨로 하여금 민주사회당을 만들게 하고 국회에 진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런 넓은 맥락에서 송지영 씨의 '출세'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인 인간관계의 맥락이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점은 아직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나는 전에 우인에 관하여 글을 쓰면서 박목월의 유명한 시구를 인용하여 '구름에 달 가듯 가는'이란 표현을 쓴 일이 있다. 그렇게 그는 대범하다 할까, 초연하다고 할까. 아무튼 광대하기만 한 대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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