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희 기고] 깨끗한 '선비' 혁신정객 송남헌

[고난 속 꿋꿋이 산 사람들·③] 책 <해방 3년사>로 심산상 수상도

아주 유명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명도 아닌, 그러면서 고난의 길을 걷기도 하고, 역사에 의미도 없지 않은 인물들이 있다.

때로는 좌절의 인생이기도 하고, 때로는 회색 지대의 인물이기도 하다.

내가 직접 만났고 사귀었던, 그런 흔히 간과되기 쉬운 인물 10명쯤에 조명을 비추어 본다. 전기가 아니고 스케치다. 필자

1999년 늦은 봄의 일이다. 경심(耕心) 송남헌(宋南憲) 선생이 유림 대표 격인 독립운동가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옹을 기념하여 만든 심산상을 수상하였다. 제 12회 상이다. <해방3년사> Ⅰ, Ⅱ권은 이른바 해방공간의 귀중한 자료집 같은 책으로 그 기간의 연구에 크게 참고가 되어 왔다. 출판 후 오랜 기간이 지났지만 그 가치가 인정되어 수상하게 된 것이다. 심산이 설립한 성균관대학교에 심산사상연구회가 있고 거기서 주관한다.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시상식은 성대했다. 식후에 옆의 약간 작은 홀에서 축하 파티가 있었다. 거기서 어울려 칵테일을 한 잔 하고 있으니 경심의 절친한 친구 박진목(朴進穆) 씨가 인사동 거리의 <향정>에서 뒤풀이가 있으니 살짝 오란다. <향정>은 예전 민정당사가 있던 건물의 근처 골목에 있는 흔히 밥집이라 하는 한정식집으로 전남 광주의 음식이 수준급이어서 이름이 있는 집이다.

<향정>의 큰 방에는 여성들만 한 방 그득하고 그 가운데 경심이 남성으로는 혼자 '꽃밭'에서 호사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옆의 작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좀 있으니 박진목 씨와 절친한 강신옥(姜信玉) 변호사가 온다. 박진목 씨 등 셋이 거기서 술상을 받았는데 꽃밭인 큰 방에서는 전혀 오라는 소식이 없다. 아마 10명쯤의 중∙노년 마님들이 모인 것 같다. 가장 젊은 여성이 나와 동갑으로 가끔 "동갑네”라고 말하던 홍숙자 여사. 홍 여사는 외무부에서 영사급의 경력을 가졌는데 고정훈(高貞勳) 씨가 만든 혁신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내세워진 적도 있는 활달한 여성이다. 그리고 한 분은 황 여사라고만 알고 있는데 나도 아는 저명 언론인의 자당이다.

여하간 85세쯤의 연세에 저술상을 받고 또한 꽃밭에서 혼자 축하를 받으며 즐기고 있으니 경심의 팔자가 대단한 상팔자 같다. 그런 행운아가 있는가. 옆방에서 나는 강 변호사와 술을 마시며 부럽다는 이야기만 계속했다. 꽃밭에서는 끝내 불러주지 않고.

'선비' 송남헌 선생…5.16 이후 비운의 감옥살이

▲ 항일 독립운동과 민족 통일 운동에 헌신한 송남헌 선생. ⓒ연합뉴스
내가 송남헌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4∙19 후 당시 세계일보가 민국일보로 개편될 때 한국일보에서 민국일보로 옮겨 정치부 기자로 혁신정당을 담당하고 있을 때다. 국회출입기자 5명쯤이 정당들을 담당했는데 정치부 말진인 나는 혁신정당들을 맡았다. 많은 혁신정당들 가운데 그래도 민의원∙참의원 대여섯을 거느린 정당은 통일사회당(통사당)뿐.

통사당의 사실상의 당수는 동암(東庵) 서상일(徐相日)씨였다. 한민당의 8총무 가운데 경북 담당 총무였던 그는 한민당 보수파와 갈라져 자유당정권 말기에 민주혁신당(민혁당)을 이끌었으며, 4∙19 후에는 사회대중당(사대당)을 거쳐 통사당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겸손하게 고문으로 물러앉고 당수격인 정치위원장에는 이동화(李東華)씨를 내세웠다. 그때 송남헌씨는 당무위원장이었다. 많은 원로들이 정치위원으로 있어 서열을 따질 수 없지만, 당 행정 체계상으로만 보면 정치위원장-당무위원장의 제 2서열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아주 점잖은 선비형 정치인이다. 말도 매우 조심스럽게 가려서 점잖이 하고, 행동도 조심조심하며 품위가 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가 대구사범 출신이라는 학교 배경이 중요했던 것 같다.

대구사범이라는 학교는 좀 길게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나중에 5∙16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장군이 대구사범 출신이어서 더욱 그 의미가 커지기도 하였지만 말이다.

일제 때 모든 사범학교는 학비가 면제되고 졸업 후 취직이 보장되어서 취업 기회가 많지 않았던 때라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그 사범학교 가운데 맨 먼저 생기고 유명했던 게 경성사범, 대구사범, 평양사범의 셋이다. 우선 세 학교 출신의 대표적인 인물로 내세워지는 이를 보면 대구사범에 박정희 대통령, 평양사범에 백선엽 대장, 그리고 경성사범에 조병화 시인이란다. (박정희 씨가 남로당 경력으로 위기에 처하였을 때 그를 구해준 게 백선엽 정보국장이라는 게 정설인데, 만주군 장교였다는 동류 의식이 중요했겠지만 참 묘한 출신학교의 인연이다.) 조선일보 주필을 지낸 소설가 선우휘씨도 경성사범 출신이다.

송남헌씨는 대구사범의 제 1기생이다. 그는 1929년 5년제인 그 학교에 입학했다. 경성사범에서는 일인 학생 90명에 한인 학생 10명을 뽑았지만, 대구와 평양에서는 반대로 한인 학생 90명에 일인 학생 10명씩을 뽑았단다.

선생들이 매우 우수했다. 경성제대 철학과를 나온 염정권(廉廷權) 선생,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나온 현준혁(玄俊赫) 선생 등에게 배웠으며 교장은 일본에서 제일로 치는 제1 고등학교 출신이었다니 대단하다. 일류 대학 수준의 선생들이다. 그러니 요즘의 중․고등학교와 비교할 수 없다. 중․고등학교에 초급 대학을 합친 수준이 분명하다. 대구사범 출신은 초급대학 출신의 수준, 아니 그 이상이라는 느낌이다.

5∙16이 나자마자 혁신계 인사들이 쿠데타 세력에 의해 일망타진되어 나는 그 후 송남헌 선생을 만날 수가 없었다. 몇년 후 형무소에서 나온 송 선생을 반도호텔 같은 곳에서 얼핏 마주치기는 하였지만 긴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그는 징역 5년 구형에 3년 언도를 받고 형무소 생활 2년 반 만에 가출옥으로 석방된 것이다.

나는 5∙16의 주역 박 장군이 대구사범 후배이니 선배인 송선생이 그 덕을 보아 얼마간 일찍 출옥했으려니 하고 여겼었다. 그런데 그런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다. 5∙16 전 박 장군이 부산에서 군수기지 사령관으로 있을 때 박 장군의 대구사범 동기로 부산일보 주필로 있던 황용주(黃龍珠) 씨와 황 씨의 친구이던 국제신보 이병주(李炳注) 주필은 모두가 주당이어서 셋이서 함께 어지간히 마신 모양이다. 그런데 5∙16 후 이 씨가 혁신계로 몰려 2년 반쯤 형무소 생활을 하게 된다. 이 씨는 박 장군의 집권 기간은 참았으나 그의 사후에 보복을 하였다. 별 거 아닌 일로 술 친구를 2년 반씩이나 고생시킨 원한이 쌓였던 것 같다. 이병주 씨의 그 후의 소설을 보면 나타난다. 그렇게 보면 송, 이 씨 두 사람 모두 친분의 덕은 못 본 것 같다.

송남헌 씨의 정치인으로서의 언행이 너무도 훌륭하여 나는 마음속으로부터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언론계에서는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오래 했던 조덕송(趙德松) 씨가 마음에 들어 둘을 합쳐 존경의 대상으로 삼았다. "언론 생활을 계속한다면 조덕송 씨처럼, 만약에 정치를 하게 된다면 송남헌 씨처럼.' 그렇게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송남헌 씨와 조덕송 씨는 대단히 친밀한 사이이고, 조 씨는 송 씨를 사회의 스승으로 깍듯이 모셨다.

침송 선생의 <송남헌 회고록 – 김규식과 함께한 길>이란 책이 출판되어 그의 생애를 자세히 알 수 있어 다행스럽다. 심지연(沈之淵) 교수가 대필한 것인데, 심 교수의 우리 정치사 연구 수준이 매우 높아 역사적 맥락이나 사실들이 정확하게 서술되어 있는 듯하다. 아마 틀림없이 심 교수가 학문적 차원에서 많이 보충을 하였을 것으로 본다.


잊힌 독립운동 '단파 방송사건',


옆길로 나가, 아호 이야기를 해야겠다. 경심(耕心)이란 아호가 참 마음에 든다. 마음을 간다, 자기 수양을 계속한다는 뜻일 것인데 운치도 있고 어감도 좋다. 비슷한 아호로 운경(雲耕)이라고 국회의장을 지낸 이재형(李載灐) 씨의 아호가 있다. 구름을 간다, 그것도 신선노름 같지만 경심이 훨씬 윗길이다. 옆길로 좀 더 나가, 이재형 씨는 그의 이름의 형자 한문이 매우 어려워 신문에 한자를 많이 쓰던 시절 가끔 신문사의 교정부에 촌지를 보내기도 하여 화제가 되었었다. 옛날 이야기다.

경심 선생의 생애에서 첫 정치적 사건은 이른바 단파방송사건이다. 대구사범을 나온 경심은 군산보통학교를 거쳐 서울 재동국민학교의 선생이 된다. 서울의 명문 학교 선생이 된 것이 행운이었다. 학부모 등 교제 범위가 대단히 넓어진 것이다. 그리고 아동 문학에 관심을 갖고 문필 활동을 하는 가운데 경성 방송국과 관계를 맺게 되고 그곳 사람들과 친하게 된다. 제 2차 대전 말기의 전황 보도 통제의 상황에서 경성방송국에서 얻을 수 있는 단파방송에서 전하는 정보는 참 귀가 번쩍 띄는 일이었다. 일제가 통제하는 엉터리 전황 소식 말고 연합국 측에서 방송하는 진짜 전황을 들을 수 있었다.

이승만 박사가 한 육성 방송도 들었단다. 1942년 6월 경 샌프란시스코에서 이승만 박사가 흥분한 목소리로 "2500만 동포들이여, 조국 광복의 날이 멀지 않았으니 동포는 일심협력하여 일제에 대한 일체의 전쟁 협력을 거부하고 때를 기다리라'”고 한 연설을 직접 들었단다.

그러고는 정보에 굶주린 지인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친구끼리의 모임도 있지만, 예를 들어 조선인 변호사 사무실 같은 데가 일종의 집합 장소여서 거기에 가서 전파하였다. 특히 김병로, 이인, 허헌 3인의 민족 변호사가 합동으로 청진동에 내고 있는 형사공동연구회라는 사무실은 많은 민족의 지사급 인물들이 모이는 곳으로 중요한 정보의 집산지였다.

그런 정보 전파가 오래 계속되다 보니 일제의 경찰에 걸리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그를 체포한 경찰의 이름까지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경기도 경찰부 사찰계장 사이가 시치로(齊賀七郞)다. 1년 6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전국에서 모두 350여명이 잡혀갔는데, 그 중 11명이 실형을 받았으며, 고문에 못 이겨 죽은 사람이 5명이나 되었다.

서대문형무소, 청주사상범보호구금소, 대전형무소 등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여운형(呂運亨), 김태준(金台俊), 최용달(崔容達), 박금철(朴金喆) 주영하(朱寧河) 등등 해방 후 정치사를 장식하는 이름들이다.

회고록의 다음과 같은 기록이 관심을 끈다.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은 아침에만 햇볕이 조금 들어왔다. 그때 햇볕이 쬐는 쪽을 따라 마룻바닥을 보면 낙서들이 선명하게 보였는데, 그 중에는 '인류의 적(敵) 사회민주주의자를 죽여라'라고 못 조각으로 새긴 글씨도 있었다. 이를 볼 때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 이후 공산주의자들이 상당히 드나들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일제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고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정치관계 서적을 얼마간 읽어 보았지만 일제 때 공산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가 견원(犬猿)지간으로 싸웠다는 이야기는 못 보았다. 스탈린이 트로츠키파를 숙청하고 전 세계 공산운동권에서 아나키스트를 숙청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스페인내란에서의 아나키스트 숙청이 대표적이다.

물론 유럽, 특히 독일에서 마르스크주의자와 베른슈타인파 수정주의자(사회민주주의자)와의 투쟁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일제 때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치열하게 대립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다. 그때 말고 요즘, 그러니까 1980년대 이후의 한국 진보 운동권에서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할 것이냐의 여부를 놓고 이른바 평등파, 자주파 간에 대립이 있음을 읽고 들었다. 앞으로 그런 관계의 연구를 찾아서 읽어보아야겠다.

김규식과의 '운명적' 만남…평양에 간 송남헌

▲ 책 <송남헌 회고록 : 김규식과 함께한 길 : 민족의 자주와 통일의 길>(심지연 지음, 우사연구회 엮음)
<송남헌 회고록>에는 그가 산 시대의 분위기를 묘사한 부분도 많다. 예를 들어 '암울한 시대의 초상'이란 소절이다.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을지로 입구에 있는 납작집에 가서 술을 마셨다. 간판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볼품없이 납작한 초가집이었기에 우리들은 그냥 그렇게 불렀다.

납작집에는 젊은 주모가 앉아서 놋쇠로 만든 커다란 양푼에 물을 펄펄 끓이고 있다가 손님이 술을 달라치면 커다란 사발에 막걸리를 담아 양푼에 띄워 한기를 걸러내서 안주 한 접시와 함께 내주었다. 안주라야 너비아니 한쪽이나 생선 한 토막으로 이렇게 해주고 5전씩 받았는데, 그렇게 맛이 좋을 수 없었다. 주모가 건네주는 술을 두어 잔 마시면 얼큰하게 취기가 돌아 우리는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몇 시간이고 고담준론을 하며 지냈다.

납작집에 갈 때마다 시인 정지용(鄭芝溶)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도 단골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당시 연전(延專)에 강의를 나가고 있던 그는 술잔을 앞에 놓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는 했는데, 아마도 시상을 떠올리고 있을 거라고 나는 짐작을 했다. 가끔 연전 학생들이 그 집에 올 때도 있었다. 그럴라치면 학생들은 저마다 그에게 술을 권했고, 학생들이 권하는 술을 한잔 두잔 받아 마신 정지용이 그만 술에 떨어져 잠을 자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해방 후 경심은 우리 독립운동의 대표적 지도자 가운데 한 분인 김규식(金奎植) 박사와 만나게 되고 김 박사와 함께 가장 중요한 정치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 일은 그의 일생을 결정하는 운명적 계기가 된다. 그 부분이 그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하다.

해방 후 바로 시작된 것이 사랑방 정치였다. 그는 친구 운이 참 좋았던 것 같다. 친구인 한학수(韓學洙) 씨 집을 출입하게 되었다. 한 씨는 대한제국 말기 일제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을사조약을 끝까지 반대한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의 손자다. 거기서 그는 그 집에 머물던 독립운동가 춘곡(春谷) 원세훈(元世勳) 선생을 만나게 되고 그 인연으로 초창기의 한국민주당(한민당) 참여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 후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하게 되고 임정 요인들은 국내 정세에 어둡고 또 국내 정치인들과 연락할 일도 있을 것이므로 젊은이들을 보내어 도와주자고 의견이 모아져 원세훈 씨의 추천으로 경심이 김규식 박사 쪽으로 보내진다. 여기가 운명적 시점이다. 그 부분을 <회고록>에서 옮겨보자.

"원래 김 박사와 원세훈은 중국망명 시절부터 잘 알고 지내던 사이로 두 사람 모두 기존의 임정을 해체하고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창조파로 각별히 가까운 사이였다. 누군가가 이승만 박사 이야기를 꺼냈으나, 윤치영(尹致暎), 변영태(卞榮泰) 등 많은 사람들이 이 박사 주위에 있으므로 달리 사람을 보낼 필요는 없다는 말을 했다. 이처럼 나는 원세훈의 추천으로 생면부지의 김규식 박사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김 박사를 도와 김 박사와 함께 해방 정국의 거친 풍파를 헤쳐나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내가 김 박사 일을 본격적으로 돕기 시작한 것은 1946년 2월 14일 민주의원이 개원되고 김박사가 민주의원의 부의장을 맡을 때부터였다."

요즘도 그렇지만 고위직 주변에 있으면 벼락출세의 길이 열리기도 한다. 경심이 약관에 충청남도 도지사가 될 뻔한 에피소드.

"입법의원의 관선의원은 대부분 좌우합작위원이거나 합작위에서 추천한 사람들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여운형을 비롯하여 일부 인사들이 관선의원 피선을 거부하는 바람에 입법의원의 구성 자체가 좌우의 광범위한 여론을 수렴을 할 수 없는 구조적인 한계를 안게 되었다. 나의 경우는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하여 관선의원 명단에서 누락되었다. 그 대신 충청남도 도지사 자리가 마침 비어 있으니 충남지사를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의가 있었지만 사양했다. (중략) 내가 그 자리를 거부하자 누군가 정일형(鄭一亨)을 대신 추천했고, 그가 수락하여 충남지사가 되었다."

김구가 정말 김일성에게 '과수원'을 달라고 했을까

지난날의 우리나라 혁신계를 보면 크게는 조봉암의 진보당계와 비진보당계로 나뉜다. 경심은 비진보당계다. 조봉암과 송남헌 사이에는 묘한 악연이 있어 같은 정당을 하지 못한 것 같다. 회고록에서 인용한다.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할 때 죽산 조봉암이 주도하고 있는 민주주의 독립전선도 참여했는데, 죽산은 연맹의 중앙위원 자리를 원했다. 일을 하기 위해서는 직책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그 중앙위원을 시켜달라고 직접 김(규식) 박사에게 부탁했다. 죽산이 떠난 후 김 박사는 일부러 나를 불렀다. 당시 나는 민족자주연맹의 비서처장으로 간부들을 전형하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김 박사는 내게 죽산이 공산당에서 전향한 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그에게 중앙위원 자리를 주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말을 했다. (중략) 이 일로 죽산과 가까웠던 김찬, 이명하 등이 벼룻돌을 내게 던지면서 항의를 하기도 했으나, 일단 간부명단이 확정된 뒤여서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경심의 정치 생활 클라이막스는 김규식 박사를 수행해서 남북협상에 참가한 일이다. 평양에서의 일들을 아주 담담하게 말하고 있어 크게 참고가 되는데 다만 한 가지만 인용하고 말겠다. 그것은 근래 국내의 극우파들이 김구 선생이 평양에서 김일성에게 과수원을 요청하는 행태를 보였다고 공격하는 데 관해서이다.

북한의 자료에는 김구 선생이 연석회의의 결정사항을 실현하기 위해 남한으로 가겠지만, 상황이 어려워지면 다시 돌아와서 여생을 보내겠다고 다음과 같이 김일성에게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 곤란하게 되면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제가 돌아오게 되면 안창호가 살던 근방에 있는 자그마한 과수원이나 하나 주십시오. 내 이제 무엇을 하겠습니까. 과수원이나 가꾸면서 여생을 보내려고 합니다."

<회고록>의 각주에 나오는 인용이다. 그리고 본문에 이렇게 쓰고 있다.

"북에서 선전하는 것처럼 백범이 김일성을 만나 고향에서 과수원이나 하겠다는 말을 했다는 것은 내 생각으로는 지어낸 말이라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있던 상황에서 고향 근처에 다시 와보니 감회가 새롭고 푸근한 느낌이 들어 좋다는 식의 발언이 와전된 것이라고 분석된다."

경심의 해석이 맞다고 본다. 얼마 전까지도 우리나라 중앙에서 고위직에 있던 사람들이 물러나고서는 "고향에 가서 농사나 짓고 살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 목가적인 이야기를 하기가 일쑤였다. 백범도 그런 심정에서 혹 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슬아슬하게 모면한 납북…"이런 것을 운명이라 했던가"


경심은 6․25 때 많은 서울시민이 그랬던 것처럼 피난을 못 가고 인공치하에서 살았다. 김규식 박사가 납북될 때 함께 갈 뻔했는데 참으로 아슬아슬하게 북행을 모면하였다. 그 부분을 소개한다.

"첫 번째 차는 최동오, 김진우, 송호성 이렇게 세 사람을 싣고 떠나고, 두 번째 차에 김 박사가 타게 되었다. 차의 앞좌석은 운전사와 내무서원이 앉았고, 뒷좌석에 세 사람이 탔다. 김 박사를 가운데로 하여 왼쪽에 권태양 비서가 그리고 오른쪽에 내가 앉았다. 그 순간 나는 형언할 수 없는 감상에 젖었다.

차가 막 떠나려는데, 김 박사의 부인 김순애(金淳愛) 여사가 뛰어나왔다. 김 여사는, "여보세요. 우리 영감은 환자에요. 누가 곁에서 시중을 들어드려야만 해요"라고 애원하면서 신상봉(申相鳳) 비서가 반드시 곁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너무나도 애걸하는 바람에 내무서원은 나를 내리게 하더니 신상봉을 타게 했다. 내 대신 신상봉이 타자마자 차는 북을 향해 떠나버렸다. 이런 것을 운명이라고 하였던가."


내가 전에 진보당에 관해 글을 쓰면서 죽산 조봉암이 동암 서상일과 손을 잡지 못하고 헤어진 것을 아쉽다고 했었다. 죽산의 초기 참모였던 이영근(李榮根) 씨(그는 죽산이 농림부장관일 때부터 농민 중심의 신당 창당을 꾀하다가 이승만 정권에 의해 간첩사건으로 조작되어 형을 살았고, 진보당 창당 시에는 병보석으로 있었다)는 죽산을 둘러싼 이른바 약수동파가 동암을 배격하여 일을 그르쳤다고 비난했었다. 그 파당은 주로 함경도 출신들을 중심으로 한 것이라 했다.


그런데 송선생의 <회고록>에 그와 관련해서 볼 수 있는 서술이 나온다.

"(4∙19 후) 혁신계가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분파된 것은 일차적으로 진보당 7인 서클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명하, 김기철, 조규희 등 진보당 출신 7명은 하나의 서클을 이루고 사사건건 진보당의 입장만 반영하고 주도하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이들과 몌별하기로 했다. 같은 진보당 출신이어도 박기출, 임갑수, 윤길중 등은 혁신계의 대동단결이라는 취지에 공감하여 함께 행동했는데 7인 서클은 극렬 서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무슨 일에나 진보당만 내세웠다."

여기 나오는 박기출, 임갑수 씨 등은 부산, 경남 출신이고 윤길중 씨는 본래 함경도 출신으로 강원도로 이사해 성장했다. 나는 윤길중 씨도 문제의 약수동파로 착각해왔었다. 원만한 인격자인 윤길중 씨에 대한 오해가 풀린다.


민족통일촉진회 만들며 통일운동의 길로

1970년대 들어 경심은 독립운동가, 원로교수 등과 함께 민족통일촉진회를 만들고 통일 분위기를 고양하는 운동을 하였다. 이인(李仁) 김재호(金載浩), 유석현(劉錫鉉), 이강훈(李康勳) 씨 등과 원로교수인 권오돈(權五惇), 정석해(鄭錫海) 씨도 그 멤버이다. 나도 거기서 내는 <민족통일>이라는 회보에 여러 원로들의 프로필을 소개하는 글을 연재하기도 하였다.

한 때는 박진목 씨가 활발한 추진자가 되기도 하였다. 가끔은 그가 경영하는 '중원'이란 한정식집에 원로들을 초청하여 푸짐한 회식자리를 마련하였다. 통일운동가로 알려진 김낙중(金洛中) 씨도 나중에 참여하여 회보 만드는 일에 열을 내기도.

1975년에는 일본에서 일간으로 <통일일보>(일본어)를 발행하는 이영근 씨가 민족통일촉진회 중심의 독립운동 노선배들을 일본으로 초청하여 융숭하게 대접하는 가운데 관광을 시키기도 하였다. 물론 경심도 참가하였다.

내가 1978년 10대 국회의원 선거에 서울 강서구에서 출마하였을 때, 낙선했던 군소정당의 후보 한 사람이 무슨 모금전을 한다고 연락해왔다. 좀 도와주는 게 도리겠다고 화신백화점 뒤 고대교우회관에서 열리고 있는 모금전에 갔더니 그가 수집해온 서예작품과 골동품이 있다. 마침 송남헌 선생도 들렀기에 "무얼 하나 사주기는 해야겠는데…"하니까 김철수(金錣洙) 씨의 글씨는 소장할 가치가 있으니 생각해 보라고 했다. 그의 말을 따랐다.

김철수 씨는 일제 때 한때 조선공산당수를 지냈다. 일제에 의해 일망타진되면 당이 소멸되고 다시 재건되고 하였으니, 당수 경력자는 여러 명이다. 그런데 해방이 되자 김철수 씨는 공산당에서 발을 뺐다. 공산주의 운동을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했다면 그럴 법도 하다. 김철수 씨는 공산주의 운동가라기보다 독립운동가였던 것이다. 내가 그에 관해 들은 이야기는(전문가들의 증언이 필요한 부분이다) 우리 정부 수립 후 이승만 대통령이 그에게 전국농협(일제 때 금융조합의 후신)의 회장 자리를 제의했다는 것이다. 금융기관이 많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전국농협은 대단히 중요한 기구였다. 그런데 김철수씨는 그 제의를 사양하고 고향인 전북 부안의 농촌에 은거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또는 비슷한 이야기는 일제 때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가 대종교운동으로 방향을 바꾼 충북 청원의 신백우(申伯雨) 씨의 경우다. 대종교운동은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친일은 절대 아니다. 해방 후 초대 농림부장관이 된 조봉암 씨는 신백우 씨에게 농협의 충북지부장을 제의했는데 역시 사양했다는 것. 신백우 씨는 박정희 대통령 때 청와대 대변인을 한 신범식(申範植) 씨의 선친이다.

"雪滿窮巷 孤香特立(설만궁항 고향특립)
花欄春城 萬化方暢(화란춘성 만화방창)"

김철수 씨의 대련(對聯)이 지금도 우리 집에 걸려있다. 연세가 많은 분의 글씨면 몇 세에 쓴 것이라고 연세를 쓰는 모양이다. "甲子初夏 九十二叟 遲耘"이라고 되어 있는데 '92세 서운' 그 글씨가 힘찰 정도가 아니라 웅장하다. 사상운동,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정신뿐만 아니라 기력도 남다른 모양이다.

▲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풍류' 송남헌, <해방3년사>로 심산상 수상


송남헌 씨의 주요 저작인 <해방3년사> Ⅰ, Ⅱ는 1985년에 까치출판사에서 초판이 나왔다. 본인 자신이 보수정당인 한민당에서 시작하여 중간파라 할 수 있는 민족자주연맹에도 참여했으며, 김규식 박사를 모시고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에도 갔다 왔으니 계속 해방공간의 중심부에서 우리 정치를 관찰한 셈이다. 그래서 그 책은 해방 후 정치에 관한 대단히 중요한 자료집으로 크게 참고가 되고 있다.

심산상을 수여한 심사위원회는, 그 책에 대해 한국현대사에 관한 갈증을 풀어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우익뿐 아니라 중간파와 좌익 관계의 자료를 풍부하게 구사하여 해방 3년 정치 전 과정을 서술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평가하고 "민족사의 큰 흐름을 건국준비위원회로부터 시작하여 남북협상으로 끝맺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안목이 돋보인다"고 하였다.

송남헌 씨는 그 경력으로 보아 돈을 벌 기간이 별로 없었다. 4∙19 후 혁신정객이 되면서부터 일종의 낭인 생활이다. 그런데도 옷도 단정히 입고 일상의 활동에 전혀 궁한 모습이 없다. 항상 단정하고 말끔하다. 그래서 나는 자녀들이 부친을 잘 봉양한다고 추측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둘째 아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재웅(在雄) 씨는 서울법대의 나와는 10여 년 차이가 나는 후배다. 그를 칭찬하였다. <회고록>을 받은 것도 그로부터다. 그런데 그가 무심히 한 이야기가 내 마음에 가시처럼 찔렸다. "아버님은 대학공부도 안 하셨는데 정치학의 중요한 저술을 쓰셨습니다. 선배님은 무슨 저술을 하셨습니까?" 그렇다. 나는 겨우 신변잡기나 간단한 신문 논평 정도밖에 쓴 게 없다. 부끄러운 일이다. 송 선생은 대단하다. 송 선생이 대단할 뿐 아니라 대구사범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화의 거리 인사동은 밥집과 술집 골목으로도 유명하다. 그렇게 비싸지도 않고 아주 헐한 집도 많다. 거기에 미스 동이 경영하는 '그리고,'가 있었다. 미스 동은 서울의 주당들에게 유명했던 서린동, 관철동의 비어홀 '낭만' 출신이다. 그때 언론인이자 소설가인 송지영 씨의 인정과 귀여움을 받았다. 그림이나 서예의 감식안이 있다는 것이다. 그 미스 동이 '그리고,'를 여니 그때의 손님도 적지 않게 단골로 온다. 송지영 씨가 별세한 후 박진목 씨는 스스로 "인계했다"면서 단골이다.

나도 가끔 들렀다가 박진목 씨와 송남헌 씨가 맥주를 마시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때 그들의 나이는 분명 80대 중반, 또는 중반을 약간 지난 시기였을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참, 놀랍습니다. 나는 그 연세가 되면 아마 절대로 맥주집 출입을 할 건강이 안 될 것 같습니다. 참 행복하십니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여하간 대단하다.

그런데 더 놀란 것은 그 '그리고,'에서 나의 청주중학 대선배인 90이 가까운 방용구 학장을 마주친 것이다. 이화여대 산하의 국제대학 학장을 지낸 방용구 선배는 애주가다. 아마 술보다는 분위기를 즐겼을 것이다. 그는 청주지방의 대지주 집안 출신으로 평생을 유복하게 살아왔다.

혁신계의 정치운동에서 내가 얼마간의 감동을 느낀 미담은 이동화, 송남헌, 고정훈 3인의 관계다. 그들은 4∙19 후 통사당에서 이동화 정치위원장, 송남헌 당무위원장, 고정훈 선전국장으로 처음 인연이 맺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동지애는, 그리고 그 서열은 평생토록 계속되었다.

그들은 노년 들어 민주사회주의연구회의라는 단체를 만들어 운영하였다. 사교에 능하고 재주꾼인 고정훈 씨가 어떻게 마련하였는지 계속 비용을 부담하였다. 그리고 서열을 존중하여 이동화 씨를 의장, 송남헌 씨를 부의장으로 추대하고, 자기는 실무 책임자인 이사장을 맡았다. 이들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바늘 가는 데 실 가는 격으로 서로 연결되어 살았다. 혁신계의 미담일 뿐만 아니라 인생살이에서 보기 드문 아름다운 인간애며 동지애다.

두산(斗山) 이동화 씨는 일제 때 동경제국대학에서 정치학을 배우며 사회민주주의자가 된 듯하다. 그리고 진보당 등에 '사회적 민주주의'를 입력했으며 평생을 그 신념으로 살았다.

경심 송남헌 씨는 정치 출발은 한민당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보수적인 정당에서 시작했다. 그러다가 김규식 박사와 인연을 맺어 이른바 중간파가 되었으며 4∙19 후부터는 혁신정객으로 일관했다.

고정훈 씨는 해방 후 북한에서 러시아군 통역을 하다가 월남하여 정보장교로 육군중령의 대접을 받았으며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4∙19후 혁신정객이 되었다. 경력이 다채롭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혹시 정보기관의 끄나풀은 아닌가 보고 의심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생의 말년을 민주사회주의자로 마침으로써 가짜가 아님을 입증한 셈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믿는다.

진보정당의 중요성…비례대표 100석은 되어야

나는 혁신(또는 진보) 정치운동에 관심을 가져 대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그 발전양상을 지켜보고 있으며 또 그 중요 정치인들을 만나기도 하고 사귀기도 해왔다. 그러나 직접 참여한 적은 없다. 남이 듣기에 이상한 이야기일 것이다. 진보운동에 관심은 많고 진보정치인과 친밀히 사귀면서도 진보정치에 참여는 안 한다?

나는 다만 그동안 모든 시대에 걸쳐 진보운동을 언급할 때는 우리나라에서도 진보정당이 국회에서 원내교섭단체까지는 구성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래야만 그 원내 진보정당의 자극이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 정치가 발전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정치발전의 변증법적 역학이다. 변증법의 논리를 철칙으로 믿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발전의 양상을 생각해보면 대개가 변증법적 역학에 따라 발전 또는 변화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진보정당의 팩터(factor)가, 또는 안티테제가 꼭 있어야 발전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기 위한 조건으로 비례대표 의석이 확대되어야 한다고 꾸준히, 쉴 새 없이 주장해 왔다. 요즘은 독일처럼 비례대표가 국회의석의 2분의 1이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3분의 1인 100석까지는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주장한다. 지금 54석인데 많이 늘려야 한다. 그런데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른 여야의 협상과정에서 지금의 54석마저 오히려 줄어들 위험마저 있는 형편인 것이다. 대통령 선거에 있어서의 결선투표제도 필요하다. 대개 모든 후보가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하는 형편에 그래야만 과반수 득표를 위해 두 정당, 또는 세 정당 간의 연합 협상이 있게 될 것이고, 그런 연합 협상의 축적을 통해 먼 장래에 있을 내각책임제 하의 정당 간 연합 협상의 훈련도 쌓아나갈 것이 아닌가.

진보정당을 애정을 갖고 관찰하던 가운데 대표적 이론가인 이동화 씨가 팔순을 맞았을 때는 곤궁한 생활을 해온 노정객을 위해 잔치를 마련해주기로 마음먹었다. 20여 명쯤에 50만 원씩을 모금하여 김학준 박사에게 약간의 원고료를 주고 평전을 집필, 간행토록 하는 한편 팔순 잔치를 해드렸다. <이동화 평전>은 민음사에서 나왔고, 팔순연은 팔레스호텔 덕수홀에서 있었는데, 김상협(金相浹) 전 총리 등 동경제대 동문들도 나와 성황이었다. '중원' 에서 성금을 낸 사람들의 뒤풀이도 하고 그래도 돈이 얼마간 남아 두산 선생 댁에 드리기도 하였다. 이 모든 일은 내가 추진했음에도 내 이름은 아예 감추고 모든 행사는 송남헌 선생 이름으로 주재했다. 그때 김수한(金守漢) 전 국회의장, 고건(髙建) 전 총리, 신범식(申範植) 전 청와대 대변인 등이 적극 호응해 주었다.

정치에서는 흔히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만이 훌륭한 사람은 아니다. 실패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도 훌륭한 사람이 많다. 하기는 정치에 있어서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무엇인가. 세속적 기준은 현직(顯職)을 차지했느냐의 여부일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기준은 국민의 복리를 위해, 나라의 향상을 위해 얼마나 기여했느냐일 것이다.

그러므로 세속적 기준에서는 비록 실패했다 하더라도 진정한 인재를 알아보고 그 훌륭함을 인정하는 데 인간의 구제가 있고, 역사의 올바름이 있는 게 아니겠는가. 나는 실패한 정치인 가운데서 오히려 자주 진실된 정치인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들 가운데서 오히려 인간적인 면을 느끼기도 하고, 인간의 길을 보기도 한다. 이상한 성향이라고 할까.

■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의 '고난 속 꿋꿋이 산 사람들' 연재

① 혁신정객 김철 <상> : 그는 매우 끈질겼다

① 혁신정객 김철 <중> : 라이벌 혁신 정객, 김철과 고정훈

① 혁신정객 김철 <하> : 1950~60년대의 혁신 정치

② 진보당 여명회장 권대복 : 악운의 '톱니바퀴'에 걸린 진보당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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