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희 기고] 민간 통일 운동가로 한평생, 박진목

[고난 속 꿋꿋이 산 사람들·④] 한국전쟁 중 평양에 가 이승엽을 만나다

아주 유명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명도 아닌, 그러면서 고난의 길을 걷기도 하고, 역사에 의미도 없지 않은 인물들이 있다.

때로는 좌절의 인생이기도 하고, 때로는 회색 지대의 인물이기도 하다.

내가 직접 만났고 사귀었던, 그런 흔히 간과되기 쉬운 인물 10명쯤에 조명을 비추어 본다. 전기가 아니고 스케치다. (필자)

일본의 유명한 추리소설가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淸張)가 쓴, <북의 시인>이란 시인 임화(林和)에 관한 소설이 신문기자들 사이에 많이 읽혀 나도 읽어보았다. 일본에서 문고판으로는 1974년에 나왔는데 그에 훨씬 앞서 일본의 <중앙공론>에 연재되었던 모양이다. 임화는 해방 후 서울에서 가장 이름을 떨친 시인으로 월북했다. 그 소설 말미에 북한 정권의 남로당 관련 이승엽, 임화 등의 재판 기록이 전재되었는데 거기에 이런 부분이 있다.

"피고 이승엽(李承燁)은 () 절단된 노블과의 스파이 연락선을 다시 회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최익환(崔益煥), 박진목(朴進穆)을 활동시킨 결과, 박진목이 1951년 7월 피고 이승엽에 전달하는 노블의 새로운 지령을 받고 입북하였다."


그에 앞서 이런 설명이 있다.

"피고 이승엽은 1947년 5월부터 미국 국무성의 촉탁, 당시는 남조선 주둔 미군 사령관 존 R. 하지의 최고 정치고문인 노블과 직접 연계되어 그 후 그의 지시에 따라 스파이 활동을 계속하였다."


6·25 전란 중 평양에 가서 북한의 거물 이승엽을 만나 정전협상을 논의하고 왔다는, 평화통일운동가로 유명한 박진목 씨를 알고 친하게 된 때 나는 이미 <북의 시인>을 읽은 후라 그가 결과적으론 김일성의 남로당계 숙청에 구실을 제공해주는 역할만 한 것이 아니냐 하는 약간 비판적 또는 회의적 입장을 가졌었다. 그러기에 그의 민족 정신을 존경하면서도 100% 빠져들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지냈다.


서두에 이렇게 일정한 거리를 두는 말을 한다고 하여 그가 훌륭한 인물이고, 또한 파란만장, 흥미진진한 일생을 살아온 인물임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내 조국 내 산하>라는 두꺼운 자서전을 먼저 펴냈다. 전란 중에 북으로 넘어가 이승엽을 만나 정전협정 체결을 촉구하고 돌아온 것이 그 클라이맥스이지만 그의 일생은 민족운동, 평화운동 그리고 진보 정치운동으로 계속된 감동적인 이야기의 연속이다. 그 후 <내 조국 내 산하>의 축소본을 <민초(民草)>라는 약간 얇은 책으로 냈다. <민초>의 출판기념회가 1980년대 초 종로통 어느 장소에서 있었는데 가봤더니 김영삼, 김대중 씨 등 정치 거물들이 나와 있어 약간 놀랐다. 박진목 씨의 사회 교제가 매우 넓다는 이야기다.

<내 조국 내 산하>를 아주 재미있게(참담한 이야기에 실례되는 표현이다) 읽었기에 <민초>는 축소판일 것이라고만 여겨 방치했었다. 그런데 요즘 찾아서 읽어보니 평양에 가서 이승엽을 만난 이야기는 보다 자세하게, 실감나게 서술되어 있어 오히려 <민초>가 더 중요한 게 아닌가 하고 여겨진다.


내가 아는 박진목 씨의 직계 인맥은 이기택(李基澤), 강신옥(姜信玉), 김도현(金道鉉) 씨 3인이다. 마치 무슨 혈연이나 되는 것처럼 끈끈하다. 국회 다선 의원이고, 조그마한 당의 당수도 했던 이기택 의원을 그는 "기택아, 기택아"라고 부른다. 오히려 내가 미안한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서 한번은 "동주(東洲·그의 아호) 선생, 그렇게 부르지 마시오. 그래도 한 정당의 당수급 인물인데 그렇게 아해 부르듯 하면 되겠습니까"하고 주의를 주었다. 여하간 그런 형제 같은 친밀한 사이다. 강신옥 변호사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변호를 맡아 유명한데, 박진목 씨는 그를 자기 통일운동의 후계자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자기가 주도하던 민족정기회인가 하는 단체를 강 변호사에게 맡겼다.

김도현 씨는 한일협정을 반대한 6·3 학생 데모 때의 서울 문리대 주동 트리오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꼭 부자 관계 같다. 그러니까 김도현 씨가 박진목 씨를 의부(義父)처럼 모신다는 이야기다. 세월이 좀 지난 다음에 그 내력을 들었다. 학생운동을 하던 김도현 씨는 취직이 안 되었다. 그래서 젊은 층의 형님격인 백기완 씨에게 취직 알선을 부탁했다. 백기완 씨는 박진목 씨가 발이 넓은 것을 알고 그에게 의뢰를 하고. 그래서 김도현 씨는 박진목 씨가 관계하던 대구의 <영남일보>에 취직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처음에는 문화부 간부로, 그리고 논설위원으로 오래 근무했다. 그게 김도현 씨의 주된 직장 생활이다. 그런 은인이니 아버님처럼 모시게 된 것 같다.


내가 박진목 씨와 자주 만나게 된 것은 민족통일촉진회에서다. 유석현, 김재호 씨 등 독립운동의 노선배와 권오돈, 정석해 씨 등 노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민족통일운동을 고양한다는 그 단체는 낙원동께 있었는데 한때는 박진목 씨가 주동인물 역할을 했다. 가끔 그가 경영하던 중학동의 한정식집 <중원>으로 노선배들을 초청하여 푸짐하게 대접하기도 하고 경비를 일부 충당하기도 하였다. 나는 거기서 내는 <민족통일>이란 간행물에 노선배들의 간단한 전기를 연재하기도 하였다.

박진목 씨 생애의 클라이막스인 이승엽과의 만남에 관해 자세히 이야기할 차례다. 남로당을 했지만 둘은 서로 모르는 사이다. 박진목 씨가 독립운동의 거물인사인 최익환(崔益煥) 씨와 함께 정전운동을 한다고 하자 인민군이 1차 서울을 점령하였을 때 서울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인 이승엽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와서 시 인민위원회가 쓰고 있던 보성중학교 입구의 어느 건물에서 만나 술대접을 받게 된다. 거기서 이승엽은 정전협상을 하려면 이승만 대통령이나 미국 측의 신임장을 얻어가지고 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때는 정식 정전협상이 시작되기 전이다. 이 신임장 문제는 그 후로도 계속 제기된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민간운동을 하는 박진목 씨 등은 그런 것을 몰랐다.


그들은 부산으로 내려가 우리 정부나 미국 측을 접촉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소문도 퍼지고 하여 결국 만나게 된 것이 이용겸 씨다. 이 씨는 최익환 씨가 민주 의원으로 있을 때 미 군정의 하지 사령관의 보좌관으로 민주 의원을 내왕했기에 최익환 씨를 알고 있는 사이이다. 이용겸 씨를 통해서 미국 측 인사와 연결이 되었는데 자서전은 그 미국측 인사가 "외교관이나 정치인은 아닌 것 같기도 했다"고 쓰고 있다.

그들 미국인이 최익환 씨나 박진목 씨가 평양에 다녀올 수 없겠느냐고 제의했다. 이승엽과의 서울 만남에 비중을 둔 듯하다. 여기서 서두에 인용한 북한의 재판 기록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자. 북한의 주장은 '미군사령관 존 R. 하지의 최고정치고문'인 노블이라고 했다. 박진목 씨는 외교관인지 정치인인지 모른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단 미국의 정보 기관에서 북의 의도를 탐색해보려는 의도였을 것이라고 추리할 수 있다. 북에 보내 보았다고 득이 되면 되었지, 손해날 일이 없는 공작이 아닌가. 더구나 그때는 양측이 정식으로 정전회담을 하고 있을 때다. 1951년 7월 28일 미군 대령이 길잡이를 해주고 미군 장교가 운전하는 지프차를 타고 일선으로 갔다. 그리고 박진목 씨는 혼자서 양측이 대치하고 있는 경계선을 넘어 북으로 향했다. 북측 군인들에게 이승엽과의 약속을 내세웠다. 그래서 평양에 안내되어 수십 일 지체 끝에 이승엽을 만나게 된 것이다. 박진목 씨가 평양에 있을 동안 본 것 중 미군 포로들 이야기가 흥미있다.


"내가 머물고 있는 화리 마을은 그 위치 관계로 해서 폭격이 딴 곳에 비해 덜한 곳이라고들 했다. 그래서 고아들과 몇 사람의 장교급 미군 포로가 와 있었다. (중략) 이곳에 수용돼 있는 미군 포로들도 비행기 소리만 나면 쩔쩔 매는 것은 매일반이었다. 그들은 폭격이 있으면 땀을 많이 흘린다고 했다. (중략) 그들 포로는 그 동리 안에서만은 자유롭게 다니고 있었다. 얼굴색이 다르고 말이 통하지 않으니 달아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수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승엽은 역시 이승만 대통령이나 미군사령관의 신임장을 가지고 왔느냐고 물었다. 배석했던 사회안전성 간부는 "미국 정보기관원이 마치 미국 대사관원인 것처럼 속여 보낸 것이 아니냐"고 묻기도 하였다. 이승엽은 남으로 가서 더 노력하고 합의가 되면 10일 이내에 판문교에서 기를 흔들라고 말했다. 그리고 북으로 간 지 40일 만에 판문교를 건너 남으로 내려왔다. (이승엽으로서는 대단한 실수를 한 셈이다. 정상적인 판단으로는 그럴 경우 박진목 씨를 남으로 되돌려 보내지 말고 억류했어야 했을 것이다.)

▲ 정전협정 문서. ⓒ연합뉴스


남으로 내려온 후 미 수사기관 705 CIC, 우리 특무대, 군법회의, 민간재판 등 수난의 연속이다. 박진목 씨는 자기의 교육 배경에 관해 일체 밝히지 않고 있고, 또 물어본다는 것도 이상하여 그냥 지내왔는데 대학교육은 안 받은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설득력 있게 말을 잘 할 수가 없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흔히 쓰는 유식한 개념어는 일체 안 쓴다. 구수한 우리 서민들의 일상어를 그렇게 재치 있게 구사한다. "우리 옛이야기를 하며 삽시다" "알뜰히 보았다" 등등. 그와 한두 시간 이야기하다보면 그의 생각에 동조 안 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그렇다면 그의 머리가 비상하다는 이야기다.

그의 형 시목(詩穆)씨는 일본의 상지대학 철학과를 나와 본격적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중국으로 망명 활동하였다. 박진목 씨는 형과의 연락을 위해 중국을 드나들다 걸려 일제 말에 1년 2개월간의 옥중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게 되고 남로당의 간부가 된다. 경북 의성 출신이지만 달성에 연고가 있어 달성군의 군 책임자를 했고 경북도당의 간부를 했다는 것이다. 도당 특수재정 책임자도 되었었다. 그러다가 폭력투쟁으로 나가는 남로당의 방침에 회의가 생겨 당을 이탈했다는 이야기인데 이 부분이 그의 저서에서도 애매하게 처리되어 있다.


대구를 중심으로 한 남로당의 경북도당은 막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친형(박상희)은 그 간부로 이른바 대구폭동 때 희생되었다. 쌍용그룹의 총수였던 김성곤 씨도 간부였는데 그 지역 군 수사기관 책임자의 도움으로 무사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김성곤 씨가 나중에 공화당의 간부가 되어 중앙정보부의 이른바 존안자료에 있는 그의 경력을 말소하려 노력했으나 실패했다는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가 그때 언론계에 퍼져 있었다.


그런데 비슷한 급의 남로당 간부였던 박진목 씨가 어떻게 무사하게 되었는지에 관한 분명한 설명을 못 들었다. <내 조국 내 산하>에도 없던 것 같다. <민초>에는 잘 아는 경찰 간부가 선처해 주었다고 간단한 설명이 나온다. 그 정도로는 고위급 남로당 간부에 관한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한 번은 박진목 씨와 절친한 강신옥 변호사에게 그 점이 궁금하다고 말하였다. 그랬더니 그 후 어느 날 박진목 씨를 모시고 나와 셋이 저녁을 하는 자리에서 강 변호사가 불쑥 "남 선배, 선생님이 어떻게 전향한지 물어보시오. 매사는 직접 물어보는 것이 최선입니다" 한다. 그러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박 씨는 "남 선생, 내 뒷조사나 하는 사람이요!"하고 노발대발했다. 수습할 길이 없었다. 동주 선생이 떠나고 난 후 나는 강 변호사를 나무랐다. "그런 일은 조심스럽게 뒤로 알아보아야지, 그렇게 직접 대놓고 물어보면 어떻게 합니까." 그는 법정에 익숙한 변호사다. "모든 일은 직접 물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굽히지 않는다. 나의 대학 후배인 그와 나는 그 후로 서먹해졌다. 물론 동주와도 거리가 생기고.


박진목 씨가 머리가 좋고 말솜씨가 대단하다는 것 말고, 경북지방 사람들의 인맥이 특이하게 튼튼하다는 느낌을 말하여야 하겠다. 특별히 연구한 것은 아니지만 아마 전국의 지방 인맥 가운데 경북지방의 인맥이 가장 강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첫째로 경북지방은 우리나라에서 유교문화의 전통이 가장 강한 곳이고 지금도 많이 남아있다. 또 대지주나 소작인들은 많지 않고 자영농 중심의 안정된 생활권이었다. 그러니 그 지방의 어지간히 잘 사는 사람들 사이에는 안정된 교우관계가 형성되고 강화되었을 것이다. 누가 한번 연구해 보았으면 한다.


박진목 씨는 그 경북 인맥들을 중심으로 사통팔달이다. 일에 부닥치면 쉽게 인맥을 찾아내어 도움을 받아 해결한다. 유교적 인간관계가 바탕일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민족운동의 인맥, 건준의 인맥, 남로당의 조직선이 추가된다. 아무튼 그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또 평소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그의 인맥은 대단하다. 물론 경북 중심이다. 그러니 그가 남로당을 한 여파로 고생을 하고, 평양을 갔다가 형무소살이를 하고, 진보적인 통일운동을 계속하는 등 돈벌이에 별로 열중하지 않았어도 그는 여하간 평균 수준의 생활을 평생 영위해온 것이다. 그래서 간혹은 혼자 나름대로 막후의 지원자가 혹시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동주는 죽산 조봉암 씨와 가까웠다. 자서전을 보니 죽산이 국회부의장일 때 부산에서 무조건 찾아가서 친해졌다 한다. 대단한 붙임성이다. 물론 그가 평양에 가서 이승엽을 만난 것은 유명한 일이고 보면 죽산과 이승엽이 같은 인천권의 공산당 동지였으니 죽산이 박진목 씨의 평양 방문에 관심을 가졌을 것은 물론이다. 죽산은 이승엽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 궁금했을 것이다.


죽산의 수석 참모였던 이영근 씨도 우연하게 만나 절친 관계가 된다. 병보석으로 병원에 있는 그를 어느 소개로 방문해서다. 그리고 신익희 씨와 조봉암 씨가 대통령 후보로 경합했을 때 그 단일화를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민초>에 신익희 씨와 조봉암 씨 간의 단일화 협상에 관여한 이야기도 나온다.


"하루는 노애국자이신 방주혁(方周赫) 선생을 모시고 나는 신익희 선생 자택으로 찾아갔다. 해공 신익희 선생은 방선생과 나를 안방으로 안내하였다. 김재호(사위), 신하균(아들) 두 동지도 자리를 같이 했다. () 나는 해공선생에게 진보당 내 사정을 말하고 협상이 되도록 해공선생께서 더 노력하실 것을 말씀드렸다. 그리고 서상일 선생이 민주당을 믿을 수 없으니, 해공선생의 각서나 녹음을 받아두어야 된다는 말씀을 하시더라고 하였다."


그 관계 이야기는 이영근 씨가 남긴 글 '진보당 조직에 이르기까지 - 그 업적을 되돌아본다'에도 나온다.


"그 때 나는 그 해의 3월 병보석이 허가되어 서울 중심지에 있는 신용균(申容均) 내과의원에 입원 중이었는데 내 병실을 통해서 조봉암 선생, 서상일 옹과 신익희 후보와의 사이에 교섭이 빈번히 있었다. 조, 서측으로 나와 송기영(宋基榮)씨가, 그리고 신 씨측에 신 씨의 사위 김재선(金在銑) 씨와 영식 신하균(申河均) 씨, 그 사이의 연락에 박진목(朴進穆) 씨와 이종률(李鍾律) 씨가 들어 조정을 시도했다."


박진목 씨는 이영근 씨와의 친분으로 이영근씨가 일본에서 일간으로 발행하는 일본어 <통일일보>의 서울지사장을 맡았다. 지사라고 해야 광고 업무, 국내 구독자에게 신문을 발송하는 업무 정도다. 인사동 어느 건물 2층에 사무실이 있었는데 거기에 가면 거의 틀림없이 소설가 이병주(李炳注) 씨가 진을 치고 있다. 이병주 씨에게는 박진목 씨의 그 파란 많았던 경력이 취재의 보고이다. 끊임없이 이야기를 듣고 적어 놓았다가 그것을 그의 소설들에 적절하게 반영한다. 박진목 씨뿐만 아니라 역시 김규식 박사의 비서실장으로 남북협상에 참가했던 송남헌 씨도 그런 취재 대상이다. 이병주 씨가 현명했다고 본다. 나도 한번 철저히 취재할 것을 그랬다.
이병주씨는 <민초>에 다음과 같은 추천사를 썼다.


"라틴어에 에케 호모(Ecce Homo)란 말은 '여기 이 사람을 보라'는 의미다. 동주 박진목 형을 볼 때마다 나는 이 말을 연상한다. 그는 어느 모로 보나 성공자도 아니고 승리자는 더구나 아니다. 그럼에도 이 사람을 보라고 하고 싶은 데는 절실한 심정이 있다. 그의 과오 또는 실수까지 합쳐 민족의 애환을 체현하고 있는 것 같은 인간으로서의 그릇과 체취가 그런 매력을 풍긴다. 그는 해방 전후, 6·25 동란 때 줄곧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 항일투쟁 중 옥사한 실형의 뜻을 같이한 탓으로 갇히는 몸이 되었고, 해방 후는 격동하는 조국의 산하와 더불어 역사의 한복판에 있었다. 동족상쟁에 눈물짓고, 단신 죽음의 땅에 들어가 평화를 모색할 때 그는 역사의 최전선에 있었다.

그의 정열과 모험은 언제나 좌절로 끝난 것은 비극이지만 하나의 인간을 형성하는 데는 중요한 작용을 했다. 숱한 고난에도 정렬과 의욕을 꺾이지 않았고, 거듭된 좌절도 그에게서 훈훈한 인간성을 빼았지 못했다. 과오를 뉘우치는 데 그처럼 철저하고 역경을 극복하는 데 그처럼 늠름한 인간은 드물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며 비상한 감동을 받았다. 우리는 여기서 정열의 의미, 좌절의 의미, 애국의 의미, 정의의 의미와 함께 역사란 무엇인가에 관한 계시를 읽을 수 있다. 참으로 귀중한 것은 인간에 있어 승리란 무엇이냐 하는 문제다. 나는 이 문제에 관한 모색으로서 이 글을 음미한다."


나는 일종의 호사 취미가 있다. 박진목, 김낙중(金洛中), 김영작(金榮作) 세 사람을 함께 만나도록 주선한 것이다. 박진목 씨는 설명한 대로 6·25 전란 중 평양에 갔다 왔다. 김낙중 씨는 휴전 후 대학생 때 고향인 문산에서 임진강을 공기 매트리스를 타고 건너 북녘으로 갔다. 남북청년공동체를 구성하여 통일을 이루어 나가자는 제안을 갖고 갔다 입원 등 1년쯤 평양에 있다가 되돌려져 왔다.


김영작 박사는 일본 동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일본 국제기독교대학 교수로 있을 때 조총련 측에서 6·25 때 납북된 아버님을 만나게 해 준다고 꾀어 밀선으로 북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 김일성도 만났단다. 그런데 아버님 상봉은 안 되고 일본에서의 첩보활동 지침, 난수표, 돈을 주어 보내면서 그 과업이 성공하면 두 번째 올 때 아버님을 만나게 해준다고 하여 배반감을 느껴 돈을 돌려주고 난수표는 폐기했단다. 그리고 본인은 아무 일도 없는 양 잊어버렸는데 그 후 한국에 세미나 차 왔다가 구속되어 형을 살았다.


이 세 사람이 공교롭게 모두 나와 친한 사이여서 그들의 합석을 주선하였다. 묘한 호사 취미인가. 그런데 이 세 사람의 모임에 뒤에 허근욱(許槿旭) 여사가 합석도 했다. 허근욱 여사는 북에서 김일성대학 총장을 했고 한때 남로당의 당수였던 허헌의 따님으로, 6·25 후에 월남하여 내 고향인 청주에 오래 거주했다. 그래서 공통의 친구를 통하여 나도 알게 되었다.


박진목 씨가 팔순을 맞았을 때 후배들이 추렴하여 '코리아하우스'에서 잔치를 해드렸다. 본인은 매우 흐뭇해했다. 그리고 그가 가장 아끼는 이기택, 강신옥, 김도현 씨를 연신 불렀다. 이때 허근욱 씨도 참석하고 여류 소설가 구혜영 씨도 왔다. 술에 취한 박진목 씨는 구혜영 씨와 내가 특별한 관계인 것으로 착각을 한 듯 엉뚱한 실례의 말을 하기도 하고. 혹시라도 전향 과정에 의문을 제기한 전날의 일에 대한 서운함이 잠재해 있었던 것은 아닌지.


한번은 자기의 가까운 집안 조카인 3군사령관 박희동(朴熙東) 대장의 관사에 놀러가자고 한다. 그가 마련한 차를 타고 언론인이자 소설가인 송지영(宋志英) 선생과 함께 용인 근처라 생각되는 사령관 관사에 갔다. 박 대장은 호인으로 진으로 칵테일한 술을 중심으로 하여 융숭하게 우리를 대접해 주었다. 박진목 씨 집안은 벌족으로 당시 문공부의 실세국장인 조카도 있고 세가 좋았다. 정치 쪽도 경상북도를 중심으로 발이 넓었다. 특히 신도환(辛道煥) 씨와 아주 가까웠다. 혁신계 정객들은 사통팔달. 죽산 조봉암 씨를 잘 알고, 대구의 서상일 씨와도 잘 통하니 나머지는 그대로 통한다. 특히 그가 6·25 동란 중 북에 가서 이승엽을 만난 일대 모험담이 화제가 되어 그 하나만으로도 누구나 만나서 친해지기를 원했다. 거기에 그 특유의 친화력과 대단한 화술 - 모든 단체나 장소에서 세를 잡는다. 그러다 보니 모사꾼, 장난꾼이란 모략도 받았다. 무엇을 위한 것이냐는 것이다. 특히 그가 KCIA 등 정보계통에도 잘 통하니 혹시나 에이전트가 아니냐, 정계교란자가 아니냐 라는 오해도 샀다. 나도 그런 각도에서 관찰을 게을리하지 않은 적도 있다. 그런데 정보계통과 잘 통하는 것은 자기의 문제 많은 과거에 비춘 생존본능에서의 조치로만 여겨졌다.


서울 시내에서 활동하던 박진목 씨는 가끔 휭하니 남한산성에 간다고 했다. 남한산성 안에 얼마간의 임야와 농지, 그리고 농가(그는 농막이라 했다)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한번은 여름에 야유 겸의 초청을 받고 가보니 산허리에 농가가 두 채로 괜찮았다. 그리고 옆에 돌무더기로 탑을 쌓아놓고 '통일탑'이라 했다. 평생을 통일운동이니 그것을 기원하는 뜻에서 통일탑을 모을 만하다. 그리고 통일운동의 모임으로 '민족정기회'도 주도한다. 또 특이한 것은 5·16 후 '사법살인'을 당한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씨의 묘도 근처에 마련했다 한다. 정말 지극정성이다.


그는 친한 사람들에게 임야를 사놓게 권유하여 몇몇 유명 인사들이 그렇게 한 모양이다.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런 데는 관심이 없어 무심하게 넘어갔다. 아마 통일탑은 지금도 여전할 것이다.


80세 중반에도 송남헌 씨 등 친구와 인사동의 맥주집을 출입하던 박진목 씨는 노쇠하기 시작하니 빨랐다. 중학동 한국일보 뒤에 있던 한정식집 <중원>도 정리하고 양천구 신월동의 연립주택으로 이사했다. 한번 인사차 들렀더니 약간 쓸쓸한 느낌이다. 그 후 오래 지나 김도현 씨로부터 그의 부음을 들었다. 하남에서 남한산성 쪽으로 변두리로 갔더니 화장터 겸 장례예식장이 있다. 서울 시내에서 가려면 좀 불편한 거리다. 남한산성 안에 있는 농가에 아드님이 살고 있어 거기로 가서 운명한 모양이다. 연속 이틀 조문을 갔더니 경북지방에서 연세 많은 문상객이 얼마간 와 있다. 역시 경북지방의 인맥이 중요했다.

그런데 신문에 그의 부음 기사가 안 난다. 6·25 전쟁 중 북에 가서 이승엽을 만나 정전협상을 촉구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록에 남길 인물인데…. 더구나 그를 의부(義父)로 여기는 김도현 씨는 문체부 차관도 하여 언론통이 아닌가. 할 수 없이 내가 <한겨레>의 김효순 대기자에게 말했다. 김효순 형은 박진목 씨에 관해 잘 알고 있지만 하남의 장례예식장도 방문하여 꽤 긴 부음 기사를 <한겨레>에 실었다. 아드님도 김 형이 나의 연락으로 알았다고 말하여 내가 주선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생시에 어떻게 남로당 간부가 무사히 전향하였느냐는 문제로 그의 노여움을 샀었는데 사후에나마 그 노여움을 얼마간 풀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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