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희 기고] 악운의 '톱니바퀴'에 걸린 진보당 운명

[고난 속 꿋꿋이 산 사람들·②] 진보당 여명회장 권대복

아주 유명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명도 아닌, 그러면서 고난의 길을 걷기도 하고, 역사에 의미도 없지 않은 인물들이 있다.

때로는 좌절의 인생이기도 하고, 때로는 회색 지대의 인물이기도 하다.

내가 직접 만났고 사귀었던, 그런 흔히 간과되기 쉬운 인물 10명쯤에 조명을 비추어 본다. 전기가 아니고 스케치다. 필자

2000년 세모에 정태영(鄭太榮) 씨가 전화로 권대복(權大福)씨의 별세와 노 혁신정치인 송남헌(宋南憲) 씨의 낙상·입원 소식을 알린다. 자기도 마침 미국에 가 있어 별세를 뒤늦게 알았다는 것이다.
정태영 씨는 서울대 문리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동양통신 외신부(당시 국장 김광섭(金光涉), 부장 심연섭(沈鍊燮)) 기자로 있다가 죽산 조봉암(竹山 曺奉岩) 씨의 진보당(進步黨)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고 나왔으며, 만학으로 50대 후반에 건국대에서 진보당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학구파다.
▲ 권대복 ⓒ 남재희
나는 대학 재학 시절부터 권대복 씨를 알아왔고 그 후에도 고비 때마다 간헐적으로 접촉해온 지기이기에, 평생을 고생만 하다 69세의 이른 나이로 생을 마친 그가 너무도 안쓰러워 그에 대한 추억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권 형을 처음 만난 건 1950년대 중반 자유당정권 시절. 그는 국학대(우석대와 합쳤다가 다시 고려대에 합병) 정치과 학생이고 나는 서울법대 학생으로 신범식(申範植) 씨가 소장으로 있던 사회문제연구소에서다. 신 씨는 경향신문 논설위원, 서울신문 사장 등 언론계와도 인연이 있고 청와대 대변인, 문공부 장관, 국회의원 등 정치 경력도 화려하나, 당시는 국학대와 성균관대에서 정치학을 강의하는 강사였다.
사회문제연구소는 그때 명동극장 뒤편의 골목 안 작은 건물의 2층에 있었는데, 이사진에는 이명영(李命英, 경향신문 논설위원) 박준선(朴準璇, 5대 국회의원) 윤하선(尹河璿, 인하대 교수) 등이 포진했고, 100여 명의 대학생이 회원이었으며 가끔 있는 세미나에는 30~40명이 참석했었다. 학생은 주류가 국학대생, 그리고 성균관대생이 그다음이었다. 국학대에서는 권 형 외에도 김용기(金容基, 고려대 교수)가 나왔고 서울법대에서는 나와 조동원(趙東元, 전 동화통신 편집국장) 씨가 회원이었다.
1957년쯤이다. 신범식 씨는 회원들을 정릉 산기슭에서 있었던 야유회에 초대하였다. 그때만 해도 정릉이 야유회 하기에 적합했다. 80명쯤 참가한 것으로 기억된다. 신 씨는 언덕에 올라 장황하게 연설을 하였다. 요지는 사회문제연구소를 그냥 끌고 가려 해도 자금이 없다는 것, 그래서 자유당 온건파(이재학(李在鶴) 씨 등)와 제휴하여 자금을 받아 전국적인 청년조직을 조직하려 한다는 것, 자유당 온건파의 뜻을 20%쯤 받아주고 연구소의 주장을 80%쯤 관철시키면 성공 아니냐는 것이다.
사회문제연구소는 적당히 진보적인 성향을 보여 왔었다. 신 씨가 경북대 강사로 있을 때 사숙하던 분이 두산 이동화(斗山 李東華) 선생이었으니 그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때 선배에 대한 실례를 무릅쓰고 반대 의견을 말했다. 80% 우리 주장을 관철시킨다고 하나 활동 자금을 받으면 물주의 뜻을 거역할 수 없는 게 현실 아니냐는 이유에서다. 여하튼 나는 나와 버렸고 권대복, 김용기 씨 등은 시기는 모르겠으나 죽산(竹山)의 진보당에 합류하였다. 진보당 일제 구속사건이 일어나고서야 나는 권 형이 진보당 청년학생조직인 여명회(黎明會)의 책임자라는 것을 알았다.

권대복이 만난 조봉암…'요즘 담배 못 피우는 학생이 어디 있나'
하긴 권 형은 좀 뛰어나 보였다. 말도 조리 있게 잘할 뿐만 아니라 조직력도 있어 당시 영등포 학우회장을 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영등포는 서울 중심과는 구별되는 변두리로, 영등포 학우회가 생길 정도의 독자적인 분위기였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다 하겠으나 그때는 지금의 영등포·동작·관악·구로·양천·강서구 등은 영등포를 중심으로 하나의 뚜렷한 별도의 생활권을 이루었다.

권대복 형은 '영원한 정치 지도자의 위상 조봉암'이란 그의 글에서 죽산과 만난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죽산을 만난 것은 1956년 여름이었다. 그해 초여름, 나는 현재 고려대학교 정치학 교수인 김용기 군과 함께 약수동에 있는 죽산 댁을 처음 찾아갔다. 그 당시 나는 대학 졸업반 학생이었다.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처지이기에 정치 상황과 정치운동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 시절에는 많은 정치지도자가 있었지만 그중에서 나에게 강한 매력과 호기심을 안겨준 정치인은 오직 죽산뿐이었다. (중략)

조그만 양옥집 2층으로 안내를 받아 올라갔다. 우리에게 다가온 죽산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묵직한 악수였다. 그의 왼손이 나의 손등을 감싸는 순간, 내 가슴이 뭉클해지는 충동을 느꼈다. 왼쪽 손 새끼손가락과 무명지가 잘려나간 죽산의 손등이 보였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그 사연을 물었다. 일제 당시 왜경의 고문에 의해 손가락 두 개가 잘려나갔다는 것이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말문을 잇지 못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단단한 체구였다. 그렇지만 순간적으로 풍기는 그의 모습은 무언가 강력하게 추구하는 신념과 의지로써 응결된 결정체였다.

침묵이 흐르는 순간, 죽산은 담배를 권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못 피운다고 사양했다. 그랬지만 죽산은 '요즘 대학생 중 담배 못 피우는 학생이 어디 있나' 하시면서 강권하시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못 이기는 체하면서 담배를 받아 입에 물었다. 죽산과 맞담배를 하면서 '아, 권위주의에 빠져있는 어른들과는 너무나 다른 점이 있구나. 정말 소탈한 분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나는 건방지게 담배를 빨면서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께서는 왜 일정 때 공산당운동을 하셨습니까?'

그때 죽산은 '어허, 내가 공산당운동을 했나,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했지' 하면서 웃더니 말문을 이어나갔다. 그 요지는 '미국에 건너간 독립운동가들은 미국의 보호를 받았고, 중국에 건너간 독립지사들은 장개석의 지원과 보호를 받았다네. 그러나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혹독한 강압과 박해 속에서 어쩔 수 없는 극한 상황에 놓여 있었네. 그때 러시아 혁명에 성공한 레닌의 소비에트 정부가 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해 돕겠다고 하기에, 우리나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지리적으로 우리와 가까운 소련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겠다 싶어 그들과 가까이하면서 공산당에 참여한 것이네. 그렇지만 그때 나의 지상 목표는 우리의 독립이지, 공산당운동이 아니었네.'

이 말을 들으면서 소비에트와 공산당을 조국 독립 쟁취의 수단과 방편으로 살아왔다는 전술적 측면을 엿볼 수 있었다."

▲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자금 끊은 자유당 온건파…눈물의 '토사구팽'과 옥고
신범식 씨는 사회문제연구소를 청년문제연구소로 발전시켜 대규모로 전국조직화하였다. 역시 신 씨는 조직의 명수로 지혜롭게도 대학 강사를 포섭대상으로 삼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예춘호(芮春浩)·박규상(朴奎祥)·김호칠(金好七)·정태성(鄭泰成) 등 공화당 국회의원들도 그때 조직된 지식인들이다.
종로 5가 뒤편 이화동에 작은 초등학교 크기의 사무실이 있었다. 사무국, 연수원, 기관지 등의 짜임새인데 회장은 홍진기(洪璡基) 씨가 맡고 신범식 씨가 사무총장·연수원장·<토요평론> 주간 등 이른바 3권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신 씨는 신바람이 나서 중절모를 촌스럽게 눌러쓰고 전국을 누볐다.
그러나 조직이 완료되자 토사구팽이었다. 자유당 온건파가 자금을 끊은 것이다. 그리고 신 씨가 물러나면 계속 돈을 댈 수도 있다고 슬쩍 흘린 모양이다. 거기에는 동지의 의리 따위는 없는 듯, 신 씨는 눈물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청년문제연구소는 아깝게도 신도환(辛道煥) 씨의 반공청년단과 합쳐지고 이어 4·19를 맞는다. 5·16 후 김종필 씨가 공화당의 사전조직을 할 때 청년문제연구소의 가닥이 좋은 광맥이었던 것 같다.
진보당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권대복 씨는 4·19 후 사회대중당(社會大衆黨) 청년국장을 하였으며, 사대당이 분열되고 혁신계가 통일사회당(統一社會黨), 사회당(社會黨), 혁신당(革新黨), 고수파 사대당(社大黨)으로 4분되었을 때는 혁신당에서 장건상(張建相) 씨를 모시고 정책위원장으로 있다가 5·16을 당했다. 그때 민국일보(民國日報) 정치부 기자로 그를 자주 만날 수 있었다. 국회 출입기자단의 일원으로 혁신 정당들을 맡았었다.
그때의 일이 생생하다. 5월 17일 권 형이 내가 근무하던 남대문 근처 민국일보사로 찾아와선 5·16 세력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를 물었다. 독립운동가이며 혁신적인 신숙(申肅) 선생 등도 5·16 지지 성명을 내는 것을 보면 기대할 만도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때 장건상 씨를 비롯한 많은 혁신정객들이 군인들이 그들의 생각과 같이 혁신정치를 할 것으로 착각했던 것 같다.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며 피신할 것을 권유했는데 미적미적하다가 그는 덜컥 구속되어 혁명재판에서 15년 언도를 받고 68년에야 출옥할 수 있었다.

신민당 가담과 탈당, 그리고 세 번째 '악운의' 옥살이
그 당시 권 형의 부인은 동아방송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조선일보 정치부에 있던 나에게 석방 전망을 자주 물어왔다. 정태영 박사 연구소에서 권 형을 회고하다 그 때의 일을 말하니 정 형은 권 형의 정치판단이 좀 느렸다고 예를 들기도 했다.
그 후 공화당 정권이 삼선개헌을 강행하고 야당 진영이 신민당(新民黨)으로 뭉치자 윤길중(尹吉重)·박기출(朴己出)·권대복·정태영 등의 진보당계는 거의 모두 신민당에 가담했다. 자유당의 4사5입 삼선개헌 후 야당 진영이 모두 민주당에 뭉칠 때 죽산도 참여하려 했으나 김성수(金性洙)·서상일(徐相日)씨 등의 찬동에도 불구하고 조병옥(趙炳玉)·김준연(金俊淵)씨 등이 완강히 반대하여 불발에 그치고 진보당을 만들게 된 일에 견주어 생각하면 이들의 신민당 참여는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윤길중 씨는 그의 회고록 <이 시대를 앓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혁신계와는 정치적 견해 차이가 있는 신민당이 삼선개헌 반대투쟁의 중심이 되자, 범재야 세력은 우선 민주주의의 기본을 찾은 다음에 정치투쟁을 해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모두 신민당에 입당했다."
그 후 양일동(梁一東) 씨가 신민당에서 갈라져 나와 통일당을 만들자 권 형은 그를 따라나와 정치위원 겸 조직국장을 맡게 되었다. 양일동 씨가 아나키스트 유림(柳林) 선생의 독립노농당(獨立勞農黨) 고위간부였음에 비추어 의기투합이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 후 권 형은 긴급조치 위반으로 징역 12년을 언도받고 76년까지 세 번째 옥살이를 한다. 나는 그때 '악운의 톱니바퀴'를 떠올렸다. 이 톱니바퀴에 재수 없게 한번 말려들면 계속해서 옥살이를 하는 악운이 따른다는 느낌이었다. 친구인 권 형은 약간의 차로 갈림길이 달라 옥살이라는 운명의 톱니바퀴에 계속 말려들고 있음을 볼 때 참으로 불쌍하다고 느껴졌다.

민추협 지도위원으로 '유종의 미' 거둔 권대복
훨씬 후에 권대복 씨는 비록 미니정당이지만 당수가 되는 운을 가졌다. 5공화국 때 조선일보 논설위원 출신 고정훈(高貞勳) 씨가 만든 미니 혁신정당인 신정사회당(新政社會黨) 당수를 고려대 교수였던 권두영(權斗榮) 씨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잠깐씩 한 것이다.
그래서 고은(高銀) 시인이 착각한 것 같다. 권대복 씨와 권두영 씨는 같은 권씨이고 거의 같은 시기에 둘 다 신사당 당수를 잠깐씩 했기 때문이다. 고은 시인은 그의 <만인보(萬人譜)> 제13권 '권대복'란에 "해직기자 권영자의 오라버니"라고 적고 있다. 동아일보 해직기자의 투쟁위원회 위원장도 맡았었고 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낸 권영자(權英子) 씨는 고려대 교수을 지낸 권두영 씨의 여동생이다.
권대복 형의 정치경력은 YS와 DJ 중심의 민주화추진협의회(民推協) 지도위원을 한 것으로 유종의 미를 거둔다.
그동안 생업으로는 미곡상도 하고, 단청(丹靑) 사업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며 고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면서 일찍이 가톨릭에 귀의, 독실한 신자가 되었으며 그의 강론이 매우 인기 있어서 여러 지방을 돌아다녔고, 해외로는 중국의 조선족을 상대로 자주 왕래했다. 조선족들이 강론을 듣고 싶다고 자주 초청했다는 것이다. 말재주는 타고나는 것 같기도 하다.
그가 시흥성당 사목회장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서로 각각 아는 친구가 대규모 연립주택을 짓고 상량식을 한다고 초청하기에 가게 되었다. 떡, 술, 돼지머리로 고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나는 돼지 귀에 돈을 꽂고 절을 하였다. 그리고 권 형 차례라고 재촉하였다. 그는 시흥성당 사목회장에게 미신인 고사에 절을 하란다고 완강히 거부했다.
나는 다음과 같이 그를 설득하였다.

"돼지머리에 절을 한다고 해서 우리가 거기에 귀신이 있다고 믿고 절을 하는 줄 아느냐. 떡과 술과 값싼 단백질인 돼지고기를 사업장 인부들과 함께 먹기 위함이 아닌가. 돼지나 상량 대들보에 돈을 꽂는 것은 모두 노동자들이 보너스로 나눠 갖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 조상들이 노사 관계를 잘하기 위해 얼마나 지혜롭게 생각해 낸 것인지 이해해야 할 것이다. 진보당을 한 진보적 지식인인 권형이 그런 것을 미신이라고만 부정하니 너무 소견이 좁다."

권 형은 얼른 알아차리고 돼지 귀에 돈을 꽂고는 넙죽넙죽 절을 하였다.
7월 31일 죽산 조봉암의 기일에는 망우리 묘지에서 추모 행사가 있다. 이강훈(李康勳) 신창균(申昌均) 윤길중(尹吉重) 송남헌 강원룡(姜元龍: 일반은 잘 몰랐지만 죽산과 강 박사는 밀접했다) 씨 등 원로들이 나오고 약간 아래 세대로 허영무(許永茂) 황구성(黃龜性) 권대복 정태영 씨 등이 참석한다. 나는 매년 참석해 왔는데 옛 친구인 권대복 정태영을 만나는 것도 즐거움이었다.
'사법살인'된 조봉암과 권대복의 <진보당 : 당의 활동과 사건관계 자료집>

지금은 아주 옛 일이라 한가롭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죽산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처참하게 '사법살인(司法殺人)' 당할 당시는 살벌하고 무시무시했다. 경찰의 철저한 감시 하에 서둘러 장례절차가 진행되었으며 조문객도 통제되고 망우리 산마루에 갖다가 버리다시피 매장이 된 것이다.

최근 <한겨레> 서평에 소개된,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은, 주한 미 대사관이 본국에 보고한 비망록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다.

"김병휘 씨에 따르면, 진보당 간부들은 조봉암의 사형이 집행된 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사형 집행장에는 입회인이 없었다고 함. 김씨는 (...) 조봉암의 사형이 집행된 이튿날 상가에 찾아갔으며, 상가에 들어간 다음에는 경찰이 허락하지 않는 바람에 이튿날 자신의 집에 돌아가지 못했고, 그 이튿날에는 장지에도 갈 수 없었다고 함."

▲ 공판정에 앉아 있는 죽산 조봉암 선생.
김병휘 씨는 진보당 창립 때부터 교육부 간부를 맡았던 사람인데, 그 문서에 따르면 김 씨를 미행하고 감시했던 경찰관이 사형 집행 뒤 그에게 "총 맞을 위험이 있으므로 문상 가지 말 것"을 조언했다고 한다. 게다가 경찰들은 상가 주위를 여러 겹 에워싸고 상가에 들어가려는 사람들 명단을 작성했기 때문에 조봉암의 절친한 친구와 측근 인사만이 위험을 무릅쓰고 상가를 찾았으며 그 수는 고작 '스무 명 남짓'이었다고 한다. (이흥환 지음 <대통령의 욕조> 삼인 펴냄)

그 날

젊은 여자가 혼자서
상여 뒤를 따르며 운다
만장도 요령도 없는 장렬
연기가 깔린 저녁길에
도깨비 같은 그림자들
문과 창이 없는 거리
바람은 나뭇잎을 날리고
사람들은 가로수와
전봇대 뒤에 숨어서 본다
아무도 죽은 이의
이름을 모른다 달도
뜨지 않는 어두운 그날

신경림 시인이 쓴 시다. 내가 정말 우연하게 시 전문잡지를 살피다 보니 신 시인의 글이 있었다. 20대의 신 시인은 독재정권에 의한 죽산의 '사법살인'에 분격하여 이 시를 썼다고 회고하였다. 김광섭(金珖燮) 씨는 신 시인의 시를 두고 "어느 작품에나 오랜 역사에서 빚어진 오늘의 애사(哀史)가 도사리고 있다"고 평하였지만 과연 그런 느낌이다. 내가 그 사실을 귀띔하여 유족 측에서 죽산의 50주기에 신 시인에게 다시금 추모시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죽산이 이용훈 대법원장의 대법원에 의해 무죄가 선고되어 신원된 것은 모두 아는 일이다.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지낸 <한국논단>의 이도형(李度珩) 씨는 내가 현역 노동부 장관으로 추모행사에 참석한 것이 일본 언론에 보도되었더라며 놀란 듯 사실이냐고 묻기도 한다.
죽산은 사법살인이 되어 망우리 공동묘지에 팽개치다시피 매장됐는데 오히려 한강과 강동지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게 그만한 명당이 없는 것 같다. 죽산의 사형집행을 나와 함께 한국일보에 근무하던 김중배(金重培) 씨가 가장 먼저 보도하는 특종을 한 것은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요즘은 잘 쓰지 않는 사족(蛇足)이란 표현이 있다. 그 사족 같은 이야기를 굳이 한 가지 붙여 두어야 하겠다.
진보당에 관한 문헌으로 <진보당 : 당의 활동과 사건관계 자료집>(지양사 펴냄,1985)이 있다. 460쪽의 책으로 진보당 관계 자료집으로는 거의 결정적이라 할 만하다. 그 책에는 '권대복 엮음'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그 후에 이름을 날리는 한홍구(韓洪九) 교수는 그때는 대학원생이었다. 그래서 책을 만들어 놓고 나에게 진보당 관계 인사 한 사람을 소개해 달란다. 그 이름으로 출판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슴없이 친구인 권대복 형을 추천하였다. 그렇게 해서 권 형은 일약 훌륭한 저술가, 학자급 인물이 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 학계를 위해서도 꼭 밝혀두는 게 좋을 듯하여 굳이 기록하여 두는 것이다.

* 이 글은 <관훈저널> 2001년 봄 호에 ‘혁신운동가 권대복에 대한 추억’ 으로 발표한 것을 보완한 것입니다.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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