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범경기 홈런왕이 마이너리그로 내려간 이유

[베이스볼 Lab.] 최상의 경기력과 구단 운영 사이의 딜레마

21세기 이후, 메이저리그 스프링트레이닝에서 홈런왕을 차지한 선수가 개막 로스터에 들지 못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무리 시범경기 성적이 무의미하다고는 하나, 스프링트레이닝에서 홈런왕을 차지할 정도의 선수라면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들 정도의 재능은 있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엔 마침내 그 전통 아닌 전통이 깨질 것으로 보인다. 시카고 컵스가 팀 최고 유망주 크리스 브라이언트를 마이너리그 트리플A에서 시즌을 맞이하게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베이스볼 아메리카>가 선정한 현 메이저리그 최고의 유망주이자, MLB.com에서 선정한 전체 유망주 랭킹 2위에 오른 브라이언트가 메이저리그에서 뛸 준비가 되었다는 사실은 세상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스카우트들은 선수를 20-80점으로 평가하는데 브라이언트의 파워는 여러 스카우트들이 입을 모아 80점 만점의 파워라 평한다. 이미 지난 시즌 더블A와 트리플A에서 138경기에 나와 .325/.438/.661이라는 압도적인 타격 슬래시 라인과 함께 43개의 홈런을 때려냈다. 스프링캠프 9경기 23타수 6홈런 홈런 1위의 성적이 -2위 그룹은 3홈런으로 브라이언트 홈런의 절반밖에 안 된다- 주사위를 굴려 나온 우연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AP=연합뉴스

컵스의 기존 3루수가 대단한 슈퍼파워 스타라면 브라이언트를 마이너리그로 보내기로 한 결정을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작년 컵스의 3루수들은 모두 합쳐 .227/.304/.422를 치는데 그쳤다. 브라이언트 대신 올 시즌 주전 3루수로 개막전 로스터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은 선수는 토미 라 스텔라(2014년 .251/.328/.317)와 마이크 올트(2014년 .160/.248/.356)다. 브라이언트가 아무리 메이저리그 적응에 고전하더라도 저것보다는 나은 성적을 기록할 거라는 예상이 대부분일 만큼, 애초에 그릇이 다른 선수들이다. 실력만 놓고 보면, 브라이언트가 빅리그에서 시즌 개막을 맞이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결정처럼 보인다.
그러나 컵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브라이언트를 마이너리그로 보냈다. 컵스 팬들은 ‘팀의 승리에 반하는’ 이 결정에 불같이 화를 내고 있을까? 아니다. 컵스 팬들도 이 결정은 ‘현명한’ 결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오히려 브라이언트가 개막 로스터에 들어있었더라면 화를 내는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비슷한 예가 있다. 2013년 당시 보스턴의 중견수 유망주 재키 브래들리 주니어의 봄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브래들리 주니어는 이미 전년도 트리플A에서 .419/.507/.613의 맹타를 휘두르며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던 상황. 이에 브래들리가 개막일 로스터에 들지 여부가 이슈로 떠올랐다. 그런데 메이저리그 규정에 해박한 이들 사이에서는 브래들리가 시즌 시작을 마이너리그에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그게 오히려 팀에 이익이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다면 왜 재능 있는 어린 선수가 시즌을 마이너리그에서 시작하게 하는 것이 팀에 더 이익이 되는 것일까? 바로 ‘서비스타임’ 개념 때문이다. 메이저리그에서 FA 자격을 얻으려면 서비스타임을 6년 채워야 한다. 서비스타임 1년은 172일인데, 쉽게 말해 로스터에 172일 등재되어 있어야 1년을 채운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만약 컵스가 개막 12일 이후 브라이언트를 로스터에 등재한다면, 올 시즌에는 서비스타임 172일을 채울 수 없어 그의 FA 취득 시기를 1년 미룰 수 있게 된다. 컵스는 개막 이후 12일 동안 9경기를 치르는데, 최고의 유망주를 9경기 덜 늦게 메이저리그로 올린다면, FA를 1년 늦춰 나중에 162경기를 더 기용할 수 있다는 소리다.
당연히 선수들의 FA 취득을 1년 늦추기 위해, 구단들은 이런 ‘꼼수 아닌 꼼수’를 항상 사용해왔다. 특급 유망주를 개막일부터 로스터에 넣는 경우는 오히려 예외라는 말을 듣는다. 작년에도 휴스턴 애스트로스가 조지 스프링어를 로스터에 넣느냐 마느냐를 두고 이야기가 나왔었지만 결국 스프링어는 개막전 로스터에 포함되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FA 자격 취득이 미뤄진 선수들도 많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투수인 릭 포셀로는 서비스타임에 단 ‘2일’이 모자라 FA 자격을 얻지 못했으며,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데이비드 프라이스는 서비스타임 ‘8일’이 모자라 올 시즌까지 마쳐야 FA로 풀리게 된다.
구단 입장에서야 FA를 늦추는 것이 이익이지만 선수와 에이전트는 그렇지 않다. 얼마 전 선수들의 권익을 대표하는 선수노조의 대표인 토니 클락은 브라이언트와 시카고 컵스를 주시할 것이라는 말을 남겼으며, 브라이언트의 에이전트 스콧 보라스도 컵스가 브라이언트를 마이너리그로 보내기로 결정하자 맹렬히 비난하고 있다.
그나마 FA를 1년 미루기 위해 보름 정도 지난 후 특급 유망주들을 콜업하는 것은 양반에 속한다. 브라이언트도 인터뷰에서 구단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고 있다. 당사자들도 이미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경우는, ‘슈퍼2’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콜업을 늦출 때다.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서비스타임 3년(172일 * 3 = 516일)을 채우고 나면 연봉조정자격이 주어진다. FA를 취득했을 때처럼 ‘떼돈’을 버는 것은 아니지만, 마침내 최저연봉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단 며칠이 모자라 이 서비스타임 3년에 살짝 못 미치는 선수들을 구제하기 위한 제도가 바로 ‘슈퍼2’다. 서비스타임 2년 이상을 채운 선수 중, 서비스타임이 상위 22%에 드는 선수들에게 연봉조정자격을 부여해주는 것이다.
구단들은 이 연봉조정자격조차 늦게 주기 위해 당장 메이저리그에서 뛰어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는 유망주들을 일부러 6월 이후에 메이저리그에 올리기까지 한다. 마이너리그에서 아무리 잘하더라도 콜업은 항상 6월 전후에 이뤄진다. FA를 늦추기 위해 보름 동안 유망주를 마이너리그에서 숙성시키는 것과, 슈퍼2를 피하게 하기 위해 두 달 넘도록 마이너리그에서 묵히는 것은 아무래도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다.
팬들은 최상의 경기력을 볼 자격이 있다. 구단이 일부러 더 약한 전력의 팀으로 경기를 치르는 것은 지양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는 일방적으로 구단을 비난할 수도 없는 문제다. 올해만 야구 할 것도 아니고 장기적으로 구단 운영을 하는 데 있어서 언제 유망주를 메이저리그에 올리느냐는 매우 큰 영향을 가지기 때문이다.

2016년 메이저리그 선수노조와 구단주들은 새로 CBA(Collective Bargaining Agreement), 이른바 노사협약을 새로 갱신해야 한다. 꾸준히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만큼 조만간 서비스타임 문제에 대해서도 서로 이야기를 나눌 가능성이 크다. 과연 그때쯤에는 크리스 브라이언트급의 선수가 마이너리그에서 시즌을 시작하는 촌극이 사라질 수 있을까? 그렇다 해도 선수들에게 더 좋은 일이 되리라고 장담하기는 이르다. 새로운 룰이 생기더라도, 구단들은 꼼수를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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