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쟁이’에 명예의 전당을 허하라!

[베이스볼 Lab.] 그들을 잊지 말고 '기록'하자

지난 달 뉴욕 양키스가 투수 앤디 페티트를 영구결번시킬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앤디 페티트는 양키스 ‘코어 4(리베라-지터-포사다-페티트)’로 대표되는 상징성은 물론,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거쳐 간 뉴욕 양키스 역사에서도 통산 다승 3위(219승), 선발 등판 횟수 공동 1위(438경기), 탈삼진 1위(2020개) 등 대단한 업적을 남긴 선수. 영구결번이 될 만한 충분한 조건을 갖췄다고 볼 수 있다. 단, 약물 문제를 제외하고 말이다.

앤디 페티트는 팔꿈치 부상을 당했던 지난 2002년 빠른 복귀를 위해 성장호르몬(HGH, Human Growth Hormone)를 사용한 것이 들통 나 미첼 리포트에 오른 ‘약물 전과’가 있는 선수다. 영구결번의 목적은 구단에 큰 기여를 한 사람을 기리기 위해 하는 것인데, 팬들 사이에선 약물 복용이 들통 난 선수를 기리는 것이 올바른 일인가에 대한 찬반논쟁이 일고 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약물 문제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진다.

그런데, 과연 약물을 사용한 선수들만 욕을 먹어야 하는 것일까?

먼저 금지약물이 왜 '금지'되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경기력 강화약물(PED, Performance Enhancing Drug)가 금지된 이유가 '경기력의 향상’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도핑검사가 시작된 이유는 퍼포먼스의 향상 때문이 아니었다. 금지약물 복용으로 인해 실제 선수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 그 이유였다. ‘누가 하나 죽어야 바뀐다.’라는 말이 있는데 스포츠계에도 저 말을 똑같이 적용시킬 수 있다.

사실 건강에는 별문제가 없고 퍼포먼스만 향상된다면 팬들이건 조직에서건 약물을 금지할만한 이유가 딱히 없다. 보는 사람들에게 더 수준 높은 경기를 제공하면서 부작용이 일정 이하라면, 오히려 약물 사용을 장려하는 것이 맞는지도 모른다.

세계 최초로 약물 검사를 실시한 스포츠 조직은 세계 사이클 연맹이다. 왜 하필이면 사이클일까?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경기 도중 사이클 선수가 약물 부작용으로 인해 사망한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68년부터 사이클 연맹은 약물 검사를 실시했으며, 1968년 프랑스 그르노블에서 열린 동계올림픽부터 올림픽에서도 도핑 테스트가 시작됐다. 다른 종목들도 비슷하다. 그 종목에서 누군가가 죽어 희생양이 생기고 이슈가 되어야 약물에 대한 철퇴가 내려진다.

메이저리그에서 본격적으로 스테로이드 등을 제재하기 시작한 시기는 2003년이다. 1990년대 후반 마크 맥과이어와 새미 소사의 홈런 레이스가 국내 뉴스에서도 다뤄지던 시절, 그 둘의 몸은 누가 보더라도 자연적으로 만들어질 수 없는 몸이었다. 그러면 왜 1990년대 후반 진작부터 막지 않고 2003년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약물을 제재하기 시작했을까? 간단하다. 약물로 몸을 키운 선수들의 홈런 경쟁이 큰 인기를 끌고, 돈이 되니까 그냥 방치한 것이다. 그러다 2003년 스티브 배클러라는 투수가 에페드린 과다복용으로 사망하면서 약물에 대한 제재가 시작됐다.

1990년대 중반 파업으로 팬들의 관심이 떨어졌던 메이저리그의 인기는 1990년대 말 ‘야구의 꽃’ 홈런이 뻥뻥 터지면서 수직 상승하기 시작했다. 리그에 약물이 만연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사무국, 구단주, 코칭스태프, 기자들 중 그 누구도 적극적으로 약물에 대해 폭로하거나 제재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없었다. 약물을 통한 경기력 향상이 리그 흥행에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그러다 일이 터지자 약물을 사용한 선수들에게만 온통 비난의 화살이 몰리고 있는데, 이는 참 재미있는 현상이다.

약물 문제는 그 시절 활약한 선수들이 특별히 비양심적이라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1990년대 이전에도 메이저리그에서는 약물이 만연해왔다. 배리 본즈 이전, ‘깨끗한 홈런왕’이라던 행크 애런도 암페타민 복용자이다. 명예의 전당 투표를 할 때마다, 미국에서건 한국에서건 약물 전과가 있는 선수들에게 표를 던져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배리 본즈 ⓒJoelle Wiggins

개인적으로는 약물 전과가 있는 선수들이 'Hall of Fame'에 들어가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Hall of Fame, 한국어로 옮기면 ‘명성의 전당’이 ‘명예의 전당’으로 잘못 번역되었기에 ‘명예’를 따질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도덕성’을 따질 것이라면 메이저리그 최초의 3000안타를 친 선수인 킵 앤슨도 쫓아내야 한다. 그는 재키 로빈슨 이전 이미 존재하던 흑인 메이저리그 선수들을 리그에서 쫓아낸 명백한 인종차별주의자이다. 적어도 금지약물의 사용은 ‘사법적’으로 잘못된 일은 아니기에 이쪽의 죄질이 더 높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미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입성자들의 도덕적인 문제를 나열하자면 책이라도 한 권 써야 할 기세다.

물론 '약물을 한 선수도 다 들여보내주면, 대놓고 이를 밀어주는 것이 아니냐?' 라는 반응이 나올 수도 있다. 한 가지 해결책이 있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면 그 선수의 업적을 적는 동판이 있다. 약물 사용이 적발된 선수일 경우에는 선수가 남긴 성적과 함께 ‘언제 이러이러한 약물을 사용해 들통난 적이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새겨두면 된다.

역사는 시간이 지난 후 후세가 평가하는 법이다. 먼 훗날의 야구 팬들은 우리가 ‘약물의 시대’로 기억하고 있는 시기를 어떻게 기억할까? 지우고 싶은 흑역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과거부터 만연하던 약물을 최초로 단죄하기 시작한 긍정적인 시기로 평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약쟁이’들의 기록을 없애자거나, 그들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보단 그들이 약물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확실히 기록해둬야 다음 세대의 야구팬들이 이를 평가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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