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도 미국도 멍하게 한 학생 73명의 전격 작전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23> 6월항쟁, 다섯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6월항쟁이다.

프레시안 : 1985년 2·12총선 후 서울 중심부에서 미국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이 일어났다. 세간의 관심을 모았을 뿐만 아니라 광주항쟁 진상 규명을 위한 노력에도 영향을 끼친 이 사건을 짚어봤으면 한다.

서중석 : 1985년 5월 23일 미국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1982년 3월에 있었던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과는 또 다르게 한국 사회에 많은 충격을 주고 화제를 낳았다.

'학생들에게 2·12총선은 학생들이 일으킨 선거 혁명이었다', 조금 과장해서 얘기하면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학생들은 이 선거에 적극 참여했다. 2·12총선은 학생 운동에도 큰 영향을 줬다. 총선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 넘게 지나 4·19를 이틀 앞둔 그해 4월 17일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이 조직됐다. 5월 7일에는 전학련 산하 조직으로 '민족 통일 민주 쟁취 민중 해방 투쟁위원회', 이 시기 학생 운동 단체는 이름이 길어서 부르기가 힘든데, 일명 삼민투가 조직됐다. 미국 문화원 점거 농성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지며 일약 유명해지는 조직인데, 일각에는 그렇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삼민투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점거 농성을 주도했다기보다는 각 대학의 투쟁위원회에서 연합해 투쟁을 진행했다는 주장이다.

하여튼 4·19를 맞아 학생들은 전학련 주최로 독자적인 기념식을 연 후 시위를 벌였다. 이날 집회, 시위를 한 32개 대학의 학생 361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5월에는 1980년 광주항쟁의 진상을 밝히고 학살 원흉을 처단할 것을 요구하는 오월 투쟁이 각 대학에서 전개됐다. 5월 17일에는 전국 80개 대학에서 광주의 진실을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요구하며 시위를 벌일 정도였다. 그런 속에서 5월 23일 미국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이 일어난다.

"광주 학살 지원 책임지고 사과하라"…미국 문화원 기습 점거한 학생들

프레시안 : 점거 농성은 어떻게 전개됐나. 학생들은 무엇을 요구했나.

서중석 : 1985년 5월 23일 자 <동아일보>를 보자. 사회면 사이드 톱으로 이 사건을 다뤘는데, 낮 12시께 100여 명의 학생이 미국 문화원 앞을 지키던 전경들에게 돌을 던지고 순식간에 들어와서 2층 도서실을 점거하고 출입문에 바리케이드를 쌓았다고 보도했다. 100여 명이라고 보도됐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적었다. 미국 문화원을 점거한 사람들은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 서강대 학생 73명이었다.

미국 문화원을 겨냥한 움직임은 그전에도 있었다. 우선 1980년 12월 광주에서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이 일어났다. 1982년 3월에 있었던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은 전두환·신군부 정권에 의한 일방적인 공안 몰이로 TV와 신문에 엄청 크게 보도된 바 있었다. 1983년 9월 22일 밤에는 대구 미국 문화원 정문 앞에서 강력한 폭발물이 터져 1명이 사망하고 4명이 중경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1985년 미국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범인을 잡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면 미국 문화원을 점거한 학생들은 무엇을 요구했느냐. 학생들은 점거 후 '우리는 왜 미 문화원에 들어가야만 했나'라는 유인물을 뿌렸다. 그리고 농성을 벌이면서 "광주 학살 지원 책임지고 미국 행정부는 공개 사과하라", "미국은 전두환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한 지원을 즉각 중단하라", "미국 국민은 한미 관계의 올바른 정립을 위해 노력하라" 등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국민 대토론회를 열자고 제의했다. 또한 주한 미국 대사 면담과 내외신 기자 회견을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 미국 문화원을 점거한 학생들은 "광주 학살 책임지고 미국은 공개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전두환도, 미국 쪽도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프레시안 : 이 사건이 커진 이유는 무엇인가. 전두환의 성격을 봐도 그렇고 광주 학살까지 자행한 전두환·신군부의 특성을 보더라도 바로 진압 명령을 내릴 법한데, 그런 움직임이 없었던 점도 눈에 들어온다.

서중석 : 미국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이 발생하자 국내 신문이 연일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외신 기자들도 몰려와서 크게 보도했다. 그리고 미국 문화원이 이때는 을지로 1가, 그러니까 지금의 롯데호텔 건너편에 있었다. 서울 시내에서도 그야말로 한복판이라고 할 만한 곳 아닌가. 거기서 72시간이나 점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사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 정권으로서는 치안에 커다란 허점을 드러내며 큰 타격을 입었지만, 그렇다고 특공대를 투입할 수도 없었고 달리 손쓸 방법도 없었다. 미국이 특공대 투입 같은 것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으로서도 이 사건이 워낙 큰 뉴스가 돼버렸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아주 큰 약점인 광주 학살 책임을 묻는 것이었기 때문에도, 또 학생들이 들어와서 농성하는 것이었기 때문에도 폭력적으로 대응할 수만은 없었다.

그렇게 되면서 전두환 정권이건 미국 쪽이건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독재자 전두환의 분노는 하늘 끝까지 치솟았지만, 학생들이 미국 문화원에서 나올 때까지 아무런 대응책을 세울 수가 없었다.

그런 속에서 대학가에서는 미국 문화원 점거 농성을 지지하는 시위와 농성이 전개됐다. 24일부터 25일 아침까지 서울대를 비롯한 전국 17개 대학에서 교내·외 시위가 벌어졌고 일부 대학에서는 철야 농성을 했다. 이 중 서울대생 200여 명이 사당동 쪽으로 나와서 화염병을 던져 경찰의 포니 승용차를 전소시켰고, 그러면서 30여 분간 교통이 마비되기도 했다.

미국이 광주항쟁 당시 군 투입을 "사후 승인"했다고 밝힌 이유

프레시안 : 강제로 끌어내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만큼 미국 측은 학생들에게 농성을 풀도록 종용하는 방법을 택했다. 학생들과 미국 측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나.

서중석 : 학생들은 "우리가 반미를 내건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미국의 잘못을 지적하고 사과를 받으려 할 뿐이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광주 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물었다. 학생들은 주한 미국 대사관 정치 담당 참사관 던롭을 만났을 때 '미국이 광주사태를 묵인한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그러자 던롭 참사관은 "미 8군에서는 (1980년) 5월 22일 한국군 참모총장의 요청을 받고 그 사단의", 이건 1980년 5월 20일 광주 투입이 결정돼 21일 아침 광주에 도착한 20사단을 가리키는데, "광주 투입 요청을 사후 승인해줬다"고 답변했다.

전에 광주항쟁을 다룰 때 말한 것처럼 20사단 이동은 미국의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고 그쪽에 통보만 하면 되는 사항이었다. 그런데 많은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광주항쟁 당시 주한 미국 대사였던 글라이스틴도, 주한 미군 사령관이었던 위컴도, 미국 국무부나 국방부도 그 부분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한국 쪽의 20사단 광주 투입 요청을 자신들이 승인 혹은 동의했다고 생각한 것으로 돼 있다고 내가 얘기하지 않았나. 1985년 이때에도 미국 측은 학생들한테 자신들이 "사후 승인해줬다"고 표현했다. (이와 관련, 주한 미국 부대사 클리블랜드는 1985년 5월 24일 이민우 신민당 문제를 만났을 때 이 문제에 대해 "1980년 5월 22일 (…) 광주 일원의 치안 확보를 위해 파견, 광주시 외곽을 경비하도록 허가했다"고 밝혔다. "사후 승인"과 일맥상통하는 "허가"라는 표현을 쓴 점이 눈에 들어온다. '편집자')

학생들은 25일 아침 미국 대사관 쪽과 대화를 마친 후 '24일까지의 회담 결과'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여기서 학생들은 "광주사태에 대해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갖고 있는 한미 연합사령관이 당시 출동 부대의 출동 목적이 광주사태 진압에 있음을 알면서도 출동을 승인한 것은 광주사태에 대한 간접적 지원"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학생들은 점거 농성에 돌입한 후 소금물만 마시면서 계속 단식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농성 3일째인 25일에는 대부분의 학생이 탈진한 상태라고 언론은 보도했다.

점거 농성 계기로 광주 학살 책임자 처벌과 미국의 책임 문제 크게 부각

프레시안 : 학생들이 점거 농성을 푼 계기는 무엇인가.

서중석 : 1985년 5월 27일 자 신문에 1면 톱으로 '북적 대표단, 12년 만에 서울 오다'라고 보도됐다. 남북 적십자 회담을 위해 북한 적십자사 대표단이 온다는 얘기였다.

그 전날인 26일 낮 12시 5분에 학생들은 농성을 풀었다. 농성을 해제하면서 학생들은 "광주사태에 대한 미국 측 책임 인정과 사과를 요구했으나 미국 측의 태도로 보아 미국 문화원 농성을 통한 문제 해결의 한계성을 느꼈고, 27일에 있을 남북 적십자 회담을 고려해 농성을 끝낸다"고 발표했다. 이건 참 잘했다고 본다. 농성을 끝내는 이유를 잘 잡아낸 것이다.

학생들은 미국 문화원에서 나오면서 "광주사태 책임자는 물러가라", "미국은 공개 사과하라", "미국은 현 정권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라"고 외쳤다. 이들이 '독재 타도'라는 문구가 적힌 머리띠를 이마에 두르고 질서 정연하게 나오면서 구호를 외치자, 경찰이 순식간에 학생들을 둘러싸고 버스 쪽으로 밀어붙였다. 학생들은 구호를 외치며 버스에 타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건장한 사복 경찰들이 학생들의 머리를 마구 잡아당기고 팔을 비틀어서 버스에 강제로 태웠다. 학생들은 버스에 탄 후에도 버스 창문을 두드리며 구호를 계속 외쳤다. (학생들을 태운 버스는 일단 병원으로 향했다. 경찰은 이들이 있는 병원의 철문을 닫고 다른 환자들의 출입까지 막았다. 교통사고로 의식을 잃은 중환자를 실은 구급차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다른 병원으로 보내기도 했다. 한편 <동아일보>에 따르면 학생들이 실려 간 병원의 한 간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비상 대기하느라) 간밤에 고생했던 것을 생각하면 화가 났지만, 학생들이 기운이 없고 초췌한 모습을 보니 안됐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밥 많이 주세요'라고 말할 때 가슴이 아팠다." '편집자')

미국 문화원 점거 농성을 한 학생들은 그 후 공판 과정에서도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에 들어갈 때에도, 법정에서 나올 때에도 "독재 타도", 그리고 광주 학살 책임자 처벌 및 광주 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 문제에 대한 구호를 계속 외쳤다.

프레시안 : 미국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은 어떤 영향을 끼쳤나.

서중석 : 이 사건으로 학생 운동에 대한 국민들의 반향이 달라졌다. 그리고 광주 학살 책임자 처벌 문제와 광주 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 문제가 크게 부각됐다. 농성 해제 4일 후인 5월 30일에는 신민당이 소속 의원 103명 전원의 이름으로 '광주사태 진상 조사를 위한 국정 조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어느 것이나 전두환·신군부를 난처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또한 미국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으로 삼민투나 이 사건에서 대표자 역할을 한 함운경의 인기가 높아졌다.

학생들이 자진해서 농성을 풀었으나, 한미 간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돼 난처한 입장에 빠졌던 전두환 정권은 대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농성에 참가한 학생 중 25명을 구속하고 43명을 구류 처분하는 한편 일종의 보복책으로 학원안정법을 구상했다.

▲ 학생들이 미국 문화원 점거 농성을 풀었다는 소식을 담은 1985년 5월 26일 자 동아일보 호외. 사진은 미국 문화원 밖으로 나오는 대학생들. ⓒ동아일보


전두환 정권의 보복책, 학원안정법 구상…박정희 정권의 학원보호법과 닮은꼴

프레시안 : 전두환 정권이 구상한 학원안정법의 주요 내용은 무엇인가.

서중석 : 1964년 굴욕적 한일 회담에 반대하는 6·3 시위가 크게 일어났을 때 박정희 정권은 학원보호법이라는 법을 제정하려다가 각계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혀 보류한 적이 있었다. (당시 공화당이 제출한 법안의 핵심은 학생과 교원의 정치 활동 관여를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법안에 따르면 학생 시위는 물론 정치 문제에 대해 학내에서 토론하는 것도 위법이었다. '편집자') 21년 만에 전두환 정권은 학원안정법이라는 이름으로 그런 일을 또 하려 했다. 박정희 정권 때에 공화당 의원이었고 1985년 이때에는 국민당 의원이었던 이만섭은 학원안정법이 박정희 정권의 학원보호법안과 다를 바가 없었다고 얘기했다.

학원안정법 시안을 보면, 문교부에 학생선도교육위원회를 설치해 학원 안정을 해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학생에게 6개월의 범위 내에서 선도 교육을 실시할 수 있게 돼 있었다. 또한 심사를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에는 선도 교육을 하기 전에 법원이 15일의 범위 안에서 그 학생을 일정한 장소에 보호, 위탁할 수 있다고 돼 있었다. 말이 보호, 위탁이지 이건 재판 없이 15일이나 감금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일정한 기간 동안 삼청 교육과 같은 방식으로 이른바 순화를 시키겠다는 발상에서 나온 법이었다.

미국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에 분노한 전두환 정권이 내놓은 대책, 사실은 보복이었는데, 그러한 대책으로 나온 학원안정법에 반대하는 투쟁이 거세게 일어났다. 유신 체제 때부터 해직 교수의 길을 걸어온 안병무, 김성식, 이효재 등 여러 교수들은 학원안정법 제정 저지 서명 운동을 펴면서 이렇게 절규했다. "제자들의 일부를 수용소에 인계하고 남은 학생들 앞에 우리는 과연 어떻게 설 것이며, 또 가사 '선도'된 학생들이 학원에 돌아왔을 때 우리는 무슨 낯으로 저들을 대할 것인가." (이들과 달리, 1985년 8월 16일 문교부가 주최한 전국 대학 총·학장 회의에 참석한 134명은 '학원안정법의 근본 취지에 원칙적으로 찬동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박수로 채택했다. 그에 앞서 민정당 원내총무 이세기는 8월 7일 "학원안정법은 마치 괴물이나 되는 것처럼 잘못 인식돼 있으나 사실은 순진한 양 떼를 지키는 목동 같은 법"이라고 강변해 빈축을 샀다. '편집자')

각계의 강한 반대에 직면했을 뿐만 아니라 민정당 내부에서도 '이건 문제가 있다'는 의견이 나오자 전두환 정권은 8월 17일 긴급 당정 회의를 통해 일단 이걸 보류하기로 했다. 이러한 학원안정법 사태에 이어 김근태 고문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스물네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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