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위 노조 제명과 탈퇴가 무슨 '일대사건'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 현중노조가 민주노조운동사에서 가지고 있는 상징적 위치와 금속연맹 산하 단위노조 가운데 세 번째로 큰 사업장이라는 물리적 영향력을 감안하면 '일대사건'임이 분명하다.
***현중노조, 그 자랑스런 역사**
현대중공업은 1987년 노동자의 분노가 폭발하던 바로 그 때, 폭발의 최선두에 있었던 사업장이다. 1988년에서 89년까지 1백28일간의 파업투쟁과 90년의 '골리앗투쟁'은 현중노조의 강고한 투쟁의지와 전투력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특히 1987년 가을 최초로 현중 노조 출범을 선언한 뒤, 수만명의 노동자들이 현중사업장에서 울산 시내까지 수킬로미터 걸쳐 논밭 사이를 장사진을 이루며 행진하는 모습은 전국 노동자들에게 '감격' 그 자체였다.
1989년 현중 노조 간부들이 회사의 사주를 받은 제임스 리의 '식칼 테러'를 당했을 때 전국의 모든 노동자는 내 일처럼 분노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개발연대에 사업장에서 노동을 팔면서도 비인간적 대우와 멸시를 온몸으로 받던 동시대 모든 노동자에게는 현중노조는 희망이요, 목표였다.
또한 초기 현중 노동운동 지도부는 확고한 '노동자 연대의식'으로 중무장하고 있었다.
초창기 현중노조 설립 및 투쟁을 주도했던 권용목 초대 노조위원장 같은 경우는 단지 노동운동을 울산에 그치지 않고 울산-부산-마산 등 이른바 '3산 연합'으로 발전시킨다는 장대한 플랜도 갖고 있었다. 한국 산업생산의 절반을 차지하는 이들 세 지역을 엮어 노동운동의 강고한 기지화한다는 거대한 구상이었다. 이 구상은 그후 노동계에 승계돼, 최근 총선과정에 민주노동당의 '진보벨트' 구상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그러했기에 오늘날 현중노조의 모습은 더욱 안타깝다. 이 땅의 노동자의 희망이었던 현중노조가 '어용노조'라는 비난의 화살을 온 몸에 맞고 있기 때문이다.
현중노조가 추구하는 새로운 운동노선, 즉 '합리적이고, 실리적인 노조활동'에 대해 굳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현중 노조원들은 이같은 노선을 표방한 현 집행부를 민주적 절차를 통해 선택했고, 따라서 집행부는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그러나 작금의 사태가 현중노조의 그같은 '노선'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는 점이다.
***현중노조의 실수**
현중노조는 박일수씨 분신 직후부터 "박씨는 열사가 아니다" "현대중공업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박씨는 만취상태에서 분신을 했다" "박씨는 가정문제 때문에 자살을 했다"는 주장을 했다. 하지만 "하청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박일수씨 절규와 현중노조 주장 사이의 간극을 일반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다. 더구나 현중노조의 주장은 '공교롭게도' 현대중공업의 주장과 일치했다.
또 현중노조는 박일수씨 분신사태해결 과정에서 가장 직접적 이해당사자인 유족과 사내하청노동자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노조에 가장 불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민주노총도, 금속산업연맹도 아닌 바로 이들이다. 유족은 현중노조에 대해 "상종을 못할 사람들"이라고 분노하고 있다.
이렇듯 강한 불신은 현중노조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설마설마하던 우려는 2월말, 3월초 박일수 씨 빈소가 마련된 영안실 앞에서 벌어진 폭력 충돌로 말미암아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깊은 늪에 빠져들게 되었다.
또 현중노조는 지난 29일 박일수씨 분신사태에 대해 '완전히 손을 떼겠다'고 밝혔다. 그 이유로 "박씨 분신사태가 무려 40여일이 넘도록 해결되지 않아, 현중노조의 최대현안인 주5일제 협상과 2004 임-단협에 막대한 차질을 발생시켜왔다.조합원들의 권익이 철저히 유린당하는 현실을 노조로서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현중노조 기관지 29일자<민주항해>)며 조합원의 권익 유린을 들었다.
조합원의 권익과 같은 사업장에서 일하는 하청노동자들의 권익은 다른 두 가지가 아니다. 박일수 씨의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절규는 하청노동자 모두의 목소리이다. 신자유주의 앞에서 정규직-비정규직이 다를 수 없다는 이치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을 현중노조집행부가 하청노동자의 처지를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현중노조, 이젠 전향적으로 검토할 때**
사태해결은 더욱 혼미해지고 있다. 현중노조는 제명위기에 처해있고, 분신대책위 간부는 구속되었다. 현장동력은 점차 바닥이 나고 있고, 언론도 처음과 달리 관심이 떨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은 현중노조도, 분신대책위도, 하청노조도, 유족들도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다. 특히 온 몸에 불을 질러 산화한 박일수씨의 바람은 더더욱 아닐테다.
하청노조관계자에 따르면, 박일수씨는 생전에 사측의 부당노동행위를 상의하기 위해 탁학수 현중노조 위원장을 찾아갔다고 한다. 과거 민주노조운동의 선봉에 섰던 탁학수 위원장은 뭔가 달라도 다를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라고 한다.
탁학수 위원장을 찾아 나설 때의 박일수 씨가 가졌음직한 절박함은 현재 노동계가 현중노조에게 가지는 절박함과 같은 무게를 지닌다. '골리앗투쟁'의 자랑스런 역사를 지닌 현중노조는 '달라도 뭔가 다를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제명여부를 최종 결정짓는 금속산업연맹 대의원대회가 5월말-6월초로 예정돼 있다. 앞으로 2달 남짓 남은 셈이다. 이 기간을 현중노조와 금속연맹의 갈등과 불신으로 채울 것인지, 아니면 노동자의 단결을 다시금 되새기는 전환점이 될 지는 오로지 이들의 두 손에 달렸다.
현중노조는 노동계에 대한 잠시 불만을 접고, 과거 '골리앗투쟁'이 현중노조만을 위한 투쟁이 아니었듯, 대의에 따라 박일수씨 분신사태 해결을 위한 접근을 전향적으로 검토할 때다.
현중노조 초창기의 장대한 '3산 연합' 정신을 진지하게 되새겨볼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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