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에 들어서면서 그동안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리비아 공습으로 야기되었던 리비아사태에 대한 중국의 외교정책 변화가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Ⅰ
지난 2월 중순부터 리비아 정국은 대혼란이 발생하였다. 카다피(Qathafi)가 이끄는 중앙정부와 벵가지를 근거지로 하는 반정부 세력 사이에 무력충돌이 발생하였다. 리비아의 국내정세의 변화를 틈타 미국, 프랑스, 영국 등 서방 대국들은 계속하여 몽둥이를 휘둘렀고 강력하게 리비아의 내정에 간섭했다. 외국 간섭세력의 도움 하에 리비아 정세는 혼란을 거듭하였다. 심각한 소요로 '동서 대치 상태'의 내전이 발발하여 심지어 수도 트리폴리 부근에서도 격전이 격화되었다. 반카다피 세력은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카타피의 즉각적인 하야를 요구하였다.
리비아에서 발생한 내전은 리비아에 거주하는 수 만 명의 중국 교민의 안전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였다. 중국과 리비아는 1978년 8월 9일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양국은 외교관계 수립 이후 다양한 분야에서 빠르게 발전을 거듭하였다. 21세기에 들어선 이후 양국은 정치적으로 양호한 관계를 유지하는 바탕 위에 경제 무역, 대형건설 분야에서 합작은 더욱 폭넓고 광범했다. 2010년 말을 기점으로 리비아에 거주하는 중국 교민은 약 35,000명에 달하였다. 사태 이전에도 종종 중국 교민들은 무장한 괴한들에게 습격과 강탈을 당하기도 했었다.
2월 22일 카타피 대통령은 전국적인 TV연설에서 마지막 한 방울의 피가 남을 때까지 전투를 계속하겠다고 경고하고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정권을 보위하기 위해 항의자들에게 반격을 하라고 촉구하였다. 리비아의 내전은 피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중국정부는 긴급히 리비아의 전체 교민들을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2월 22일을 전후해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리비아 주재 중국교민들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보장하는데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하였다. 후진타오 주석과 원자바오 국무원 총리는 즉각 긴급지휘부를 설치하도록 했다. 국무원은 장더지앙(張德江) 부총리를 책임자로 하는 긴급지휘부를 설치해 리비아에서 철수하는 교민들의 관련 업무를 담당하였다. 국무원은 긴급지휘부의 전면적인 배치 하에 먼저 교민들을 안전하게 철수시킬 수 있는 긴급 조직을 운영하여 해상, 육상, 공중으로, 또한 여러 국가를 거치는 방안, 여러 지점을 지정하는 등 입체적으로 철수 방안을 마련하고 즉각 실시에 들어갔다. 27일에 이르러 약 2만 명의 리비아의 중국 교민들이 이미 철수를 마쳤다. 3월 초에 이르러 리비아의 전체 중국 교민 35,000명이 모두 안전하게 철수를 마쳤다. 그 가운데 15,000명은 선박을 통해 그리스로 이동한 뒤 비행기로 귀국하였다. 나머지 20,000명은 리비아에서 비행기로 귀국하거나 혹은 육로로 튀니지나 이집트로 이동한 뒤 비행기로, 혹은 선박을 통해 말타로 이동한 뒤 비행기로 귀국길에 올랐다. 이때까지 리비아에 남아 있는 인원은 대사관 직원 이외에 일부 기자와 10여 명의 교민들뿐이었다.
3월 중순 유엔안보리는 리비아 정세를 논의했다. 특히 미국, 프랑스, 영국 등 서방대국들의 리비아의 카다피 대통령의 하야를 집중 토론하였다. 17일 유엔 안보리 가 결의안 1973호를 통과 시키고 리비아에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했다. 유엔안보리 의 5개 상임국가 중, 미국, 프랑스, 영국은 찬성표를 던지고, 중국과 러시아는 기권하였다. 유엔안보리는 리비아의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킨 뒤 몇 시간 뒤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전투기는 곧바로 카다피 정권에 대한 공습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21세기 이후의 10년 동안 중동지역에서 세 번째 국제적인 군사충돌이 발생한 것이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전투기들이 카다피 정권에 대한 공중 공격을 가했지만 결코 강력한 군사압력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3, 4개월에 걸친 대결을 거쳤지만 리비아전쟁은 여전히 교착 상태에 처해 있다. 거꾸로 서방국가의 내부에서는 서로 다른 행보가 나타나고 있다. 아프리카연합(African Union)과 여러 국가들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리비아의 위기를 해결해야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Ⅱ
리비아에 대한 중국정부의 정책은 계속하여 국제사회의 관심을 받아왔다. 중국정부는 지난 2월부터 리비아 국내 위기가 발생한 이후부터 리비아 국내 정세에 대한 내정간섭적인 성명을 발표하지 않았다. 중국정부의 대규모적인 교민들의 철수업무도 리비아정부 및 반정부 측의 협력으로 이루어졌다. 중국정부는 서방국가들이 유엔 안보리 결의안 1973호 결의안에서 정한 비행금지구역의 범위를 이탈하거나 군사타격의 행동을 확대하는 것에 대해 비판을 가해왔다. 서방 일부 국가들의 군사타격 행동이 진행된 이후에 중국정부는 리비아 교전 쌍방에게 휴전을 촉구해왔다.
6월에 들어서자 중국정부의 리비아 외교활동이 두드러지게 증가하면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6월 2일 카타르 주재 중국대사 장즈량(張志良)은 카타르 수도에서 몇 차례 리비아의 반정부 대표인 과도국가협의회(Transitional National Council)의 책임자들을 접견하였다. 6일에는 이집트 주재 중국대사관 공사급 참사관 리렌허(李連和)가 리비아의 반정부 측의 근거지인 벵가지를 방문하여 현지의 인도주의적인 상황 및 중국 기관들의 남은 자산에 관한 상황을 살펴보았다. 리렌허 공사급 참사관은 과도국가협의회의 책임자인 무스타파 압둘 잘릴(Mustafa Abdul Jalil) 등을 접견하였다. 이와 함께 7일부터 9일까지 압둘 아티 알 오베이디 리비아 외무장관도 카다피 대통령의 특사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하여 양제츠 외교부장과 회담을 가졌다.
6월 21일부터 22일 양일간에 리비아 과도국가협의회의 집행국 주석인 마흐무드 지브릴이 중국정부의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하였다. 중국방문 기간에 양제츠 외교부장을 접견하였다. 회담 중에 양제츠 외교부장은 리비아 과도국가협의회가 중국정부의 '중요한 대화 파트너'라고 밝혔다.
6월 동안 리비아에 대한 중국정부의 정책이 분명히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중국정부의 대 리비아 외교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은 분석할 수 있다.
첫째, 중국은 적극적으로 리비아 충돌에 개입하고 더 이상 방관자가 되지 않겠다. 3월 중순 중국정부는 리비아에서 교민들의 철수를 완료한 이후 리비아 내부 충돌에 대해 계속적으로 불간섭과 불접촉의 정책을 유지해왔다. 중국정부의 불간섭은 바로 리비아 국내의 충돌이 격화되는 것에 대한 불개입이었고, 내부 정치업무에 대해서도 불간섭 정책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불접촉의 정책은 바로 벵가지에 성립된 리비아 반정부 정권의 리비아 과도국가협의회와 접촉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중국정부는 리비아 중앙정부와만 접촉을 계속하였다. 리비아 내부의 대립하고 있는 쌍방에 대해 불개입, 불접촉 등의 입장을 취하면서 리비아 충돌사태에 대한 중국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외교학이나 국제법 및 외교관계의 관례에서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중국은 합법적으로 선출되었고, 아울러 국제사회가 승인하는 리비아 중앙정부와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리비아의 트리폴리에 설치된 리비아중앙정부는 여전히 국제사회에서 리비아를 대표하고 있고, 여전히 국제연합의 공식적인 회원국이자 아프리카연합, 아랍국가연합의 공식회원국이다. 리비아 중앙정부가 합법적인 정부라고 승인하는 국가는 대부분 입장을 바꾸지 않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중국정부가 추구하였던 리비아 충돌의 불개입 정책은 5월말부터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정부는 리비아정부 충돌 쌍방과 모두 접촉을 추진하였다. 앞서 지적한대로 특히 리비아 과도국가협의회 집행국 주석인 마흐무드 지브릴의 중국 방문을 추진하였고, 아울러 리비아 과도국가협의회국이 중국정부의 '중요한 대화 파트너'라는 점을 선언하였다. 이러한 입장 표명은 중국정부가 리비아 충돌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하겠다는 의미이며, 더 이상 방관자로 있지 않겠다는 의미다.
둘째, 중국은 리비아 충돌 쌍방에 대해 화해와 담판을 촉구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중국은 리비아 충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더 이상 방관자가 되지 않겠으며 군사적으로 무력을 사용하는 문제 반대하며, 적극적으로 충돌 쌍방 간에 화해와 담판을 촉구하는 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2011년 2월 중순부터 리비아 국내는 폭력 충돌이 시작되었다. 곧이어 3월 19일에는 서방국가 리비아정부에 대해 군사적 타격을 전개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국정부는 지속적으로 정치적인 협상과 평화적인 담판의 협상을 통해 리비아 충돌사태를 해결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중국정부는 6월 일련의 외교개입 활동을 취하였으며 이는 실천 중에 계속적으로 화해와 담판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정책이었다. 그러므로 중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은 바로 충돌쌍방이 모두 접촉하기를 희망하고 있으며 트리폴리의 리비아정부와 벵가지의 반정부측의 과도국가협의회 간의 정치적인 해결 방안을 찾고 담판을 통해 현재의 교착상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권고하였다.
셋째, 중국은 리비아 충돌이 최대한 조기에 해결될 것을 촉구하였다. 리비아 충돌은 2월 15일 국내에서 충돌이 발생한 날로부터 3월 19일 미국, 프랑스, 영국 등 서방대국이 공중폭격을 하는 국제사건으로 되는 동안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3월 19일부터 오늘까지 3개월 동안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대국을 위주로 한 리비아정부를 공격하는 군사행동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최대한 더 많은 지지를 획득하기 위하여 지휘권 통일을 협조해야한다는 이름하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이름하에 야간 폭격에서 주야폭격으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카다피 정부를 굴복시키지 못하고 있다. 현재 리비아 전투는 군사적으로 교착상태에 빠졌으며 양측 간의 세력을 비교해보면 어느 한쪽이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군사행동이 지속되면서 무엇보다도 리비아 인민들의 심각한 재난을 가져왔다. 사상자와 난민이 늘어나고 살 곳을 찾아 헤매는 난민이 증가하고 있다. 따라서 인도주의 문제가 국제사회에 대두하고 있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리비아의 충돌의 장기화를 방지할 수 있을 것인지, 또한 어떻게 하면 리비아 인민들에 대한 피해를 줄일 것인지가 핵심적인 문제이다. 최대한 신속하고 빠르게 이 충돌을 조기에 해결해할 수 있기를 바라는 입장에서 중국정부가 현재 리비아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정책을 취하게 된 고려 가운데 하나이다.
Ⅲ
리비아 사태에 대한 중국정부의 정책 변화가 나타나게 된 것은 당연히 국내외의 다양한 원인이 있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분석하고자 한다.
첫째, 중국의 국제적인 책임이다. 북아프리카 지역은 중국과 상대적으로 거리가 먼 지역이다. 리비아와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한 것도 30여년에 불과하다. 정확하게 평가하면 북아프리카에 대한 영향이 가장 큰 국제적인 역량은 유럽이고, 그 다음은 미국이다. 리비아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은 심지어 중동지역의 일부 국가보다도 못하다. 리비아 사태가 발생한 이후에 국제적인 간섭을 한 세력은 유럽 국가와 미국 위주였다. 이러한 국제적 간섭은 직접적으로 리비아 국내 정국의 변화를 제한시킨다. 그러나 중국도 국제정치에서의 중요한 일원이다. 바로 유엔의 안보리의 상임이사국으로 세계 평화유지에 중요한 책임을 지고 있다. 리비아 국내 충돌이 발생한 날로부터 중국정부는 사태의 추이에 관심을 갖고 평화적으로 해결하게 되길 희망하였다. 리비아 국내 충돌이 더욱 격화되고 유엔 안보리에서 처리 방안에 관한 토론과정에서 중국정부는 리비아 인민들의 상해를 줄여야한다는 점에서 출발하여 기권표를 던졌다. 유엔안보리 1973호 결의안에 명시된 비행금지구역의 결의를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후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은 비행금지구역에 관한 결의를 위반하거나 일방적으로 군사타격을 강화하였고 이에 대해 중국정부는 비난을 가하였다. 현재의 문제는 국제적인 군사간섭이 진행된 지 이미 3개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리비아 국내 충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 많은 국가들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이 이처럼 단순하게 군사폭력적인 방법으로 리비아 국내충돌의 문제를 처리하는 것은 해결 방안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새로운 국제역량이 개입하여 리비아 국내의 정치적 교착상태를 해결할 필요가 있다. 이 또한 리비아 대다수 인민들의 희망이기도 하다. 몇 달 동안 아프리카국가연합이 수차에 걸쳐 조정을 시도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21세기 이래 종합국력이 부단히 발전하고 경제와 정치 영향력이 부단히 확대된 중국은 리비아 국내 충돌의 쌍방의 희망에 부쳐 중국정부가 리비아 국내 대치국면을 해결하는데 더욱 큰 역할을 하길 바라고 있다. 그러므로 중국이 국제적인 책임을 질뿐만 아니라 리비아 인민들의 이익과 국내 충돌 쌍방 간의 바램에서 출발하여 중국정부가 리비아 충돌문제에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적합하다.
둘째, 리비아 충돌문제를 둘러싼 국제 외교무대에서 지난 몇 개월 동안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2월 리비아 국내 위기가 출현한 이후 세계의 대다수의 국가는 여전히 카다피 영도하의 중앙정부가 리비아를 대표하는 합법정부라고 인정하고 있다. 벵가지를 근거지로 하는 반정부 측을 지지하는 국가는 주로 일부 서구의 국가와 중동국가에 불과하다. 미국은 비록 리비아의 공중 폭격에 가담하기는 하지만 외교적으로 벵가지의 반정부측을 승인하고 않고 있다. 최근 두 달 동안 벵가지의 반정부측을 승인하는 정부도 크게 증가하고 있다. 벵가지의 반정부측을 승인하고 있지 않는 많은 국가들도 계속적으로 대표를 벵가지로 파견하거나 혹은 반정부측의 대표를 접촉하고 있다. 이를 통해 상황을 이해하고 일부 구체적인 문제들을 처리하고 있다. 이러한 국가들은 유엔안보리에서 통과된 1973호 결의안의 기권표를 던진 러시아도 포함되어 있다.
리비아 충돌문제의 발전과 이 문제를 둘러싼 국제 외교무대의 활동을 분석해 보면 중국도 리비아의 충돌 양측과의 접촉을 강화하고 중국의 외교 활동 공간을 넓힐 필요가 있다. 6월부터의 중국의 리비아에 대한 활동을 보면 중국의 외교 효과가 비교적 좋다. 예를 들어 리비아정부 대표가 중국의 리비아 위기에 대한 평화적인 해결 노력에 대해 환영하며 중국이 리비아 반정부 인사들을 접촉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만약 중국정부가 리비아 반정부 측을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지만 않는다면 개의하지 않겠다고 밝힌 점에서 잘 알 수 있다.
셋째, 중국의 국가 이익을 보호해야한다. 중국과 리비아 양국은 수교이후 정치적으로는 지속적으로 양호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 외에도 경제무역, 대형프로젝트 합작을 더욱 심화 확대하였다. 중국과 리비아 양국 정부의 양호한 관계로 인하여 중국의 회사들은 인프라, 에너지, 통신 등 대형 프로젝트에 많은 계약을 체결하였다. 양국의 이러한 배경 하에 2010년 말에 이르러 리비아에 거주하는 중국 교민은 약 35,000명이 되었다. 그 가운데 대부분은 에너지, 교통과 통신 3대 업종에 종사하는 인원들이다. 충돌 사태가 발생하기 전 리비아에서 유전, 철도와 전신공사에 투자한 중국의 대형 기업들이 많이 있었다. 불완전한 통계이지만 리비아에서 중국의 경제적인 투자와 계약액은 100억 달러를 초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리비아에서 35,000명의 교민들이 철수한 뒤 중국은 리비아에 대한 투자와 계약의 이익을 여하히 보호할 것인가가 중국정부가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요소이다. 그밖에도 리비아에서 충돌이 발생한 이후 오늘까지 4개월이 지났는데 리비아의 충돌도 계속적으로 끌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리비아의 충돌이 해결된 이후에 중국과 리비아 정부와 인민의 관계를 여하히 계속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점도 중국정부가 깊이 고려하는 과제 중의 하나이다.
현재의 상황에서 분석해보면 중국 외교활동의 효과가 나타나기는 아직 이르다고 평가할 수 있다. 외교적인 조정으로 리비아 충돌을 해결하는 문제의 앞날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리비아 충돌에 대한 영향력이 가장 큰 국제역량들, 유럽과 미국이 정치적인 조정으로 해결하려기보다는 계속하여 카타피를 압박하여 사퇴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6월 28일 국제형사재판법원이 발표한 카타피 등 3명에 대해 전 지구적인 수배령이 바로 그 하나의 예이다.
* 번역 한인희 대진대중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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