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반도체 신화, 한국 경제 '알몸' 드러나나?

[IT 일상다반사] '공룡' 반도체 산업, 빛과 그림자(上)

"베스트셀러 한두 권 냈을 때가 위험하다." 한 출판사 사장에게서 들은 말이다. 대략 이런 식이다. 목돈이 들어오면, 처음에는 좋다. 빚도 갚고, 여기저기 생색도 낸다.

베스트셀러의 저주

문제는 그 다음이다. 슬슬 착각하게 된다. 숱하게 낸 책들 가운데 고작 한두 권이 성공했을 뿐인데, 마치 대형 출판사라도 된 양 착각한다는 게다. 그러나 시장은 변덕스럽다. 불티나게 팔리던 책이, 갑자기 뜸해진다. 계속 잘 팔릴 줄 알고, 잔뜩 찍어냈던 책은 재고로 쌓인다. 이때 정신을 차려야 한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출판사가 거둔 막대한 매출 가운데 베스트셀러가 차지하는 몫을 빼면, 경영 상태는 오히려 위험 수위라는 점을 애써 무시한다. 이미 성공한 베스트셀러와 유사한 책을 또 내면, 역시 잘 팔릴 줄 안다. 그러나 잔치는 끝났다. 시장은 새로운 기획을 원한다. 한두 차례의 성공 경험은 이제 족쇄가 된다. 새로운 상상력이 싹트는 것을 방해한다. 출판사는 '한때의 베스트셀러'와 함께 천천히 잊혀진다.

무역 흑자 절반이 반도체에서…반도체 착시 효과

그런데 여기서 '베스트셀러'의 자리에 반도체를 넣으면, 그대로 한국 경제 이야기가 된다. 반도체가 '베스트셀러'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올해 초부터 지난 7월까지 한국의 무역흑자는 228억 달러인데, 반도체 흑자가 107억 달러다. 무역 흑자의 약 47%가 반도체에서 나왔다. 앞서 예로든 출판사의 사례에 딱 들어맞는다.

본격적인 시동이 걸린 지 50년쯤 된 한국 경제는, 출판사로 치면 베스트셀러를 네댓 권쯤 냈다. 반도체, 휴대폰, 자동차, 조선, 철강 등이다. 1등 공신은 역시 반도체다. 삼성이 한국을 먹여 살린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삼성이 반도체 산업을 일궈냈으니까.

반도체 산업의 매력은 높은 수익률이다. 전체 수출액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율이 10%안팎인데. 무역 흑자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거의 절반이라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수출액이 조금만 늘어도, 흑자는 훨씬 짭짤해진다. 국가 경제를 운용하는 입장에선 기특할 수밖에 없다.

이어지는 이야기도, 앞서 예로든 출판사와 똑같다. 반도체에서 워낙 높은 이익이 나오다 보니, 다른 부문에서 죽을 쑤는 게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이른바 '반도체 착시효과'다.

반도체 가격, 바닥 없는 추락…한국 경제, 빨간불

징후는 이미 나타났다. 지난 7월 기준으로 전체 광공업 생산은 한 달 전보다 1.1%포인트 늘었다. 그러나 반도체를 빼면, 계산이 달라진다. 반도체를 제외한 광공업 부문 생산은 한 달 전보다 0.1%포인트 줄었다.

반도체가 계속 한국을 먹여 살려주면 될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거기서도 빨간불이 들어왔다. 지난 7월 반도체 재고는 지난해 같은 달에 비해 69.4%포인트 늘었다. 반면, 반도체를 제외한 광공업 부문 재고 증가율은 7.3%에 불과하다. 재고가 늘어나는 '속도'도 빨라졌다. 재고를 가리키는 그래프의 기울기가 높아졌다는 말이다. 지난 7월 반도체 재고가 한 달 전에 비해 늘어난 비율은11.1%다. 4~6월에는 3% 안팎에 그쳤던 수치다.

반도체 가격도 떨어지고 있다. DDR2 1Gb 667㎒ D램의 경우, 지난해 1월 이후 꾸준히 가격이 올라서 지난 3월 26일 3.00달러로 정점을 찍고 꾸준히 하락세다. 지금은 2.00달러 안팎이다. DDR3 1(Gb) 1066㎒ D램의 경우도 지난 5월 2.72달러를 기록한 뒤 가격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

경제학 교과서 첫 장에 나온 내용대로다. 세계적인 경기 침체로 반도체 수요는 줄었는데, 공급은 늘었다. 당연히 가격이 떨어질 밖에.

▲ D램 시장조사 업체인 D램익스체인지 홈페이지 캡처. D램 가격표(현물가격은 지난 14일 기준, 고정거래가격은 지난달 말 기준)가 온통 아래쪽을 향하는 빨간 화살표로 메워져 있다. 반도체 가격이 하락 국면을 맞으면서, 이런 날이 흔해졌다. ⓒ프레시안

'치킨게임' 주도하는 삼성…도박의 끝은?

반도체 공급을 늘린 힘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에게서 나왔다. 지난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으로 천문학적 규모의 삼성 비리가 세상에 알려진 뒤, 이 회장은 한동안 삼성 경영에서 손을 뗐었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지난해 말 이명박 대통령이 이 회장을 사면했다. 면죄부를 받은 이 회장이 경영에 복귀하며 내린 첫 지시가 반도체 공장 증설이었다. 이 결정에 따라 삼성전자는 내년까지 약 20조 원을 반도체 공장 증설에 투자하기로 했다.

반도체 수요가 하락 추세인데, 공급을 늘리겠다는 결정이 어떻게 나왔을까. 이 회장의 정확한 속내는 알 수 없다. 사면이라는 특혜에 부응하는 투자 결정을 해야 했고, 마침 이 회장이 복귀한 지난 3월에는 반도체 경기가 좋았다는 점이 배경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보다는 다른 해석에 더 무게가 실린다. 반도체 산업의 특성을 고려한 해석이다. 삼성전자의 주력제품인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도박판에 가깝다. 미래 예측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막대한 자본 투자 결정을 해야 한다는 점이 그렇다. 경쟁기업이 어떤 전략을 갖고 있는지에 따라 전략이 바뀌는 게임이라는 점도 중요한 특징이다. 게임이론 연구자들이 종종 반도체 시장을 연구 주제로 삼는 것은 이런 맥락이다.

그 가운데서도 '치킨게임' 개념이 잘 적용된다. '치킨게임'은 1950년대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놀이에서 나온 말인데, 한밤중에 도로의 양쪽에서 두 명이 각자의 차를 몰고 정면으로 달리다가 충돌 직전에 핸들을 꺾는 사람이 지게 돼 있다. 핸들을 꺾은 사람은 겁쟁이, 즉 치킨으로 몰린다. 양 쪽 모두 핸들을 꺾지 않아서 둘 다 죽는 경우가 많다. 1950~1970년대 미국과 소련 사이의 극심한 군비경쟁을 빗댄 말이기도 하다.

가격이 뚝뚝 떨어져도, 공급을 늘리는 삼성전자의 전략 역시 '치킨게임'의 일종이다. 경쟁업체가 투자를 포기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시장 점유율을 높일 수 있고, 결국 호황이 닥쳤을 때 막대한 이익을 거두게 된다.

"문제는 시장 점유율…천수답식 경영, 벗어나겠다"

그런데 삼성전자의 궁극적인 야심은 더 원대하다. 지금의 시장 구도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최지성 삼성전자 사장은 지난해 말 "메모리 반도체 사업이 천수답식 경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통제할 수 없는 변수인 날씨에 따라 수확량이 좌우되는 농사가 천수답식 경영에 해당한다. 도무지 예상할 수 없는 수요 변화에 따라 가격이 널뛰듯 변하는 반도체 시장을 잘 비유한 말이다.

천수답식 경영에서 벗어나겠다는 말은 삼성이 시장 지배자가 되겠다는 뜻이다. 마치 미국의 카길 등이 국제 농산물 시장을 지배하듯 말이다. 독·과점적 지위를 이용하면, 가격을 조절할 수 있고 이익 범위를 조절할 수 있다. 삼성전자는 최근 반도체 장비를 싹쓸이해서, 해외 경쟁업체는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는 환경을 만들었는데, 이런 결정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지난해 D램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점유율은 35%대였다. 이 비율을 50%이상으로 높이겠다는 게 삼성의 목표다. 이렇게 해서 시장지배자가 되면, 무리한 '치킨게임'을 하느라 치른 비용을 충분히 회복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한 반도체 업체 연구원의 말이다. "반도체 '치킨게임'은 얼마나 낮은 가격에서 이익을 낼 수 있느냐에서 승부가 갈린다. 삼성전자는 이 부문에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고 있다. 다른 업체들은 이익을 낼 수 없지만, 삼성전자는 이익을 낼 수 있는 가격대가 있다. 이런 가격대가 유지되는 것은 삼성에게 전략적으로 유리한 상황이다. 설령 삼성전자가 이익을 낼 수 없는 수준으로 가격이 떨어져도, 삼성전자는 충분히 감당할 맷집이 있다. 삼성전자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게 우선이다."

1995년 반도체 대호황, 이건희 북경 발언…2년 뒤, IMF 구제금융

그런데 진짜 문제가 있다. '삼성=한국'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런 등식이 성립한다면, 최근의 반도체 가격 하락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삼성은 치킨게임에서 제법 승산이 있다. 그러나 한국 경제와 삼성 재무 상태 사이에는 까마득한 간극이 있다.

반도체에 의존하는 비율이 지나치게 높은 한국 경제는, 반도체 가격이 조금만 떨어져도 크게 흔들린다. 반도체 흑자에 가려져 있던 그늘이 드러나는 것만으로도 타격을 입는다. 그리고 이런 타격을 감당할 맷집이 없다. 넘치는 현금을 주체하지 못하는 삼성과 부실 재정으로 허덕이는 한국 정부는 처지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 <과학동아> 1991년 6월호에 실린 삼성 이미지 광고. 잠자리에 들기도 한참 늦은 때인 새벽 3시에 커피 타임을 가질 정도로 반(反)인권적인 노동에 시달린 삼성 직원들이 반도체 성공 신화의 진짜 주인공이다. ⓒ프레시안
선례가 있다. 1996년의 경험이다. 1993년~1994년 PC 운영체제로 윈도95가 도입되면서 반도체 시장은 대 호황을 맞았다. PC 보급 증가와 기존 PC의 메모리 업그레이드가 맞물렸기 때문이다. 당시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선 4Mb D램에서 16Mb D램으로의 세대교체가 진행됐다.

1995년이 절정이었다. 당시에도 삼성전자 등 반도체 업체는 넘쳐나는 현금을 주체하지 못해서 고민이었다.

이건희 회장이 "기업은 이류, 행정은 삼류, 정치는 사류"라는, 이른바 북경 발언을 내뱉은 것도 이때다. 굳이 청와대가 아니어도 발끈할 만한 말이다. 한국 정치가 삼류도 못 되는 사류라면, 정치권에 뇌물을 뿌리며 공생 관계를 유지한 재벌 역시 비슷한 수준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유독 기업만 상류 급이라고 하니, 반발을 산 게 당연하다.

반도체 부문의 천문학적 성공, 삼성의 반도체 사업이 한국을 먹여 살린다는 믿음이 이런 오만방자한 발언을 낳았다. 실제로 반도체 호황은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끌어 올렸다. 1990년대 초 6% 안팎이던 경제성장률은 1995년 들어 8.9%로 치솟았다.

그러나 잔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주력 품목이던 16Mb D램 가격이 1996년 들어 폭락했다. 반도체를 대체할 수출품목이 없었던 한국 경제는 한순간에 침체에 빠졌다. 경제성장률은 1996년 들어 7.2%로, 1997에는 5.8%로 떨어졌다. 상품수지 적자 역시 3, 4배로 늘었다. 그리고 1997년 가을, 한국은 IMF 관리 체제로 떨어졌다.

재벌은 더 영리해지고, 정부는 더 무모해지고

다시 반도체 가격이 떨어지고 있는 지금은 14년 전과 얼마나 다를까. 메모리 반도체 수출에 대한 지나친 의존, 메모리 반도체를 대체할 품목을 못 찾는 상황 등은 그대로 닮았다. 대통령 선거를 2년 앞두고 있다는 점도 닮았다. 물론, 다른 점이 더 많다. 논란의 중심에 있는 삼성이 14년 전보다는 영리해졌다는 점이 그 중 하나다. 삼성은 최근 온갖 비난과 망신을 무릅쓰고 용산 개발 사업에서 발을 뺐다. 공식적으로는 삼성물산의 결정이지만, 그룹 차원의 판단이 있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반도체로 번 돈을 무모한 자동차 사업에 쏟아 붓던 1990년대 중반의 모습과는 분명히 달라졌다.

걱정스러운 쪽은 정부다. 재벌은 이렇게 영리해졌는데, 정부는 오히려 더 무모해졌다. 그저 4대강 사업처럼 무모한 사업에 돈을 쏟아 부을 뿐이다. 무역 흑자의 절반을 차지하던 반도체 수출이 줄어드는 날, 그래서 한국 경제의 맨얼굴이 드러나는 날이 두렵게 여겨지는 이유다. 베스트셀러 한두 권 낸 걸로 자만하면 회사 망한다던 출판사 사장의 충고가 지금 가장 절실한 사람은 바로 한국 경제 수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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