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 이전에 위안스카이의 침략이 있었다

[최재천의 책갈피] <감국대신 위안스카이>

책 제목의 감국대신(監國大臣)이란 단어가 낯설었다. 중국의 천자(天子)가 일시적으로 권한을 대행시키던 기관이다. 조선이 청을 종주국으로 인정했지만, 청이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와 같은 '감국대신(監國大臣)'을 실제로 파견한 적은 없었다. 그것은 명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이 종주국임을 인정했다 해도 조선은 실질적으로 독립국이었다. 조선과 중국 간의 이른바 '사대', '종번(宗藩)'관계란 전통적인 유교적 천하관에서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의례(儀禮)적으로 따른다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청은 한중 관계사상 전례 없이 1882년부터 1894년까지, '속번(屬藩)' 체제를 내세워 위안스카이를 (일종의 총독격인) 감국대신으로 파견했다. 위안스카이는 중국 최근세사에서 매판적 반동정치가이자 권모술수와 이중성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비상한 수완과 능력을 갖춘 그는 사람들이 '괴걸 위안스카이'라 할 만큼 독단과 모략, 배반을 감행한 호전적 성격의 소유자로, 민중을 저버리고 권력과 부귀를 얻는데 몰두한 인물이다.

청의 입장에서 보자면 위안스카이는 10년간 '실질적인' 감국대신으로 조선에 군림하며 청국의 대조선 정책을 성공적으로 유지해, 조선이 열강과 결탁하는 것을 막고, 청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데 성공했다. 그가 집행한 청국의 조선 속국화 정책은 1905년 을사늑약 이전 시기에 가장 강도 높은 외세 침략의 한 형태였다.

"그런데 대다수 한국인들은 조선의 망국을 일본 탓으로만 돌리고 있으며, 청이 서양과 일본에 대항해 중화제국의 부흥을 시도하며 조선을 침략한 역사는 잘 모르고 있다. 임오군란에서 청일전쟁까지 10여 년 동안 이루어진 청나라의 군사·정치·경제면에서의 침탈과 그 현지 집행자였던 위안스카이의 존재를 다시 기억해 내는 것은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데 꼭 필요한 일이다."

위안스카이는 청일전쟁 이후 직예총독(直隸總督)의 자리에 올랐다가, 어부지리로 중화민국 대총통 자리에 앉았고, 나중에 황제에 즉위했다. 얼마 후 국민의 반대로 황제를 철회하고 울분 속에 1916년 급사했다. 그는 "근대 중국의 첫 번째 국가 횡령자"라는 혹평을 듣기도 했고, 학자들은 "제국주의를 대표하는 봉건적 잔재로서 나라를 훔친 '대도(大盜)'"라 칭하기도 한다. 그는 평생 10명의 아내를 두어 32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가 조선에 머무는 동안 세 명의 조선 여인(白氏, 金氏, 季氏)과 결혼해 7남 8녀를 두기도 했다.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 <감국대신 위안스카이>(이양자 지음) ⓒ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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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예나 지금이나 독서인을 자처하는 전직 정치인, 현직 변호사(법무법인 헤리티지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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