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윤동주의 산문을 훑어보다

[최재천의 책갈피] <나무가 있다>

시인 윤동주를 좋아하는 이들은 대부분 그의 시만 좋아할 뿐 그가 산문을 썼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나도 그랬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더듬어 돌을 찾아 달을 향하여 죽어라고 팔매질을 하였다. 통쾌(痛快)! 달은 산산(散散)히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나 놀랐던 물결이 잦아들 때 오래잖아 달은 도로 살아난 것이 아니냐, 문득 하늘을 쳐다보니 얄미운 달은 머리 위에서 빈정대는 것을-.

나는 곳곳한 나뭇가지를 골라 띠를 째서 줄을 매어 훌륭한 활을 만들었다. 그리고 좀 탄탄한 갈대로 화살을 삼아 무사(武士)의 마음을 먹고 달을 쏘다." (<달을 쏘다>)

식민지 시대를 살아간 시인이 해방을 꿈꾸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눈에 전혀 보이지 않는 희망이었다. 그래서 그 꿈은 "참혹한 기다림이요, 참혹한 절규"였다. '잔혹한 낙관주의(Cruel Optimism)'다.

본래 멜리사 그레그가 썼던 잔혹한 낙관주의는 잔혹한 환경에서도 거짓 환상에 속아 낙관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비극을 표현한 용어였다. 김응교는 이것을 끌고 와 윤동주의 산문을 해석했다. 본래의 의미와는 정반대로 "식민지 시대에 오지 않는 희망을 걸며, 잔혹하게 기다리는 상황"을 '잔혹한 낙관주의'라 이름 붙였다. "고통에서 사랑을, 어둠에서 빛을 탄생시키는 터널 끝의 낙관주의가 윤동주 산문의 자화상(이어령)"이 됐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떠올랐다. "3월 30일에는 전쟁이 끝날 거야."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4년 어느 날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어느 유태인이 함께 갇혀 있던 이들에게 말했다. "누가 그래?" "꿈에서 하느님의 예언을 들었어."

3월 29일이 되자 유태인은 갑자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30일에는 의식을 잃었고, 31일 사망했다. 직접 사인은 발진티푸스였다. 하지만 먼 원인은 희망의 상실이었다. 잔혹한 낙관주의의 또 다른 버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 코스모스가 홀홀히 떨어지는 날 우주의 마지막은 아닙니다. 단풍의 세계가 있고, ㅡ이상이견빙지(履霜而堅氷至)ㅡ서리를 밟거든 얼음이 굳어질 것을 각오하라ㅡ가 아니라 우리는 서릿발에 끼친 낙엽을 밟으면서 멀리 봄이 올 것을 믿습니다." (<화원에 꽃이 핀다>)

"산문가 윤동주는 말합니다. 순간순간,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갈 때 분명히 봄이 올 것이라고. 그는 '잔혹한 낙관주의'를 거듭 말합니다."(<나무가 있다>(김응교 지음, 아르테 펴냄)) 아름답고 고마운 책.

▲ <나무가 있다>(김응교 지음) ⓒ아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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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예나 지금이나 독서인을 자처하는 전직 정치인, 현직 변호사(법무법인 헤리티지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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