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 젠트리피케이션'이라고 하면 우주적, 학술적, 고차원적 현상인 것만 같다. 실은 그렇지 않다. 건물주는 우주에서 외계인을 데려와 임차 상인을 내쫓지 않는다. 어려운 학술 용어는 임차 상인을 내쫓는데 일절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건물주는 아주 명확하고 단순한 이유를 들어 임차 상인에게 나가라고 한다. 그것의 아주 명확하고 단순한 근거는 바로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이다.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은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의 원흉으로 취급된다.
건물주는 단 몇 마디 말로 임차 상인을 내쫓는다. 가령, 이렇게 말한다.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은 임차 상인을 5년까지만 보호해줍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제 건물에서 6년째 장사 중이십니다. 긴말 않겠습니다. 이제 그만 가게를 빼십시오!" 이게 전부다. 건물주가 이렇게 말하면, 임차 상인은 가게를 접어야 한다.
어제(9월 20일),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임차 상인 보호 기간을 5년에서 10년으로 늘린 것이 가장 눈에 띈다. 그러니까, 앞으로 건물주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은 임차 상인을 10년까지만 보호해줍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제 건물에서 11년째 장사 중이십니다. 긴말 않겠습니다. 이제 그만 가게를 빼십시오!"
10대 맞는 것보다는 5대 맞는 게 낫다. 마찬가지로, 5년 장사하고 쫓겨나는 것보다야, 10년 장사하고 내쫓기는 게 낫다. 임차 상인 보호 기간이 5년에서 10년으로 늘어났다는 건, 대충 이 정도의 의의가 있다.
'환산보증금 제도 폐지'는 이번에도 국회의 높은 문턱을 넘지 못했다. 환산보증금이란, 월세에 100을 곱한 후, 거기에 보증금을 더한 금액을 말한다. 그 금액이 일정 수준을 넘는 임차 상인은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을 부분 적용받는다.
이를테면 임대료 상한률 규정이 그렇다. 환산보증금 내의 임차 상인을 둔 건물주는,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이 보장하는 계약갱신 요구 기간 내의 임대차 계약 갱신 시, 5%가 넘는 임대료 증액을 할 수 없다. 그러나 환산보증금 외의 임차 상인을 둔 건물주는, 그런 제약을 받지 않는다.
서울의 환산보증금 기준 금액은 6억1000만 원이다. 부산은 5억 원이다. 제주도는 2억7000만 원이다.
환산보증금 외의 임차 상인을 환산보증금 내 임차 상인보다 덜 보호해 줘야 할 마땅한 이유는 없다. 어떻게든 이유를 꾸며내 보자면 "환산보증금 초과 임차 상인은 부자잖아요!" 정도가 있겠다. 하지만 임차 상인이 제아무리 부자라도, 건물주에 비하면 약자다. 힙합 가수 리쌍을 보자. 임차 상인으로서 리쌍은 건물주에게 내쫓겼지만, 건물주로서의 리쌍은 임차 상인을 내쫓았다.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이라고 불리는 임차 상인 내쫓김 현상은, 돈이 아닌 지위의 차이에서 비롯한다. 환산보증금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에 이견을 제기하는 전문가는 없다. 환산보증금 제도는 그냥 '무(無)논리'의 '갑툭튀'다. 그럼에도 관련 안건은 국회를 통과하지 못한다. 직시해야 한다. 이게 우리네 여의도 정치의 현주소다.
그렇기에 한 가지 묘안을 제안하고자 한다.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이 아닌,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 시행령'을 개정하는 거다. 그래서 환산보증금 제도를 (폐지가 아닌) 무력화하는 것이다. 시행령 개정은 국회가 아닌 정부가 한다. 그리고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의 환산보증금 기준 금액은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 시행령으로 정하게 되어있다.
현재 서울 6억1000만 원, 부산 5억 원, 제주도 2억 7000만 원 등으로 되어있는 환산보증금 기준 금액을 전부 1조 원으로 통일해 올리면 된다. 그러면 그 누구도 환산보증금 바깥의 임차 상인이 되지 않는다. 만약 1조 원이 너무 장난처럼 느껴진다면, 1000억 원으로 올리는 것도 괜찮겠다.
어쨌든 이건 확실하다. 정부는 마음만 먹으면 당장에라도 환산보증금 제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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