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은 논에서 생산돼 밥상 위에 놓이고, 분변을 거쳐 하수 처리돼 땅으로 돌아간다. 시작은 씨앗과 땅이고, 끝도 분해된 원소와 땅이다. 그럼 반도체의 시작과 끝은 어디일까. 시작은 초정밀 반도체 공장이고, 끝은 쓰레기장일까?
페트나 은달리코 카톤돌로 씨는 "시작도 땅이고 끝도 땅"이라고 말했다. 시작은 구리, 탄탈룸, 주석, 코발트가 묻힌 땅이고, 끝은 북반구 국가가 쓰레기를 버리는 남반구의 땅이라는 것이다. 그는 반도체 공장은 그사이의 중간일 뿐 시작도 끝도 아니며, 그래서 우리는 모두 연결돼 있다고 강조했다.
카톤돌로 씨는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영화를 만들고 시를 쓰는 예술가이자 '바산자 연대(Basandja Coalition)' 활동가다. 자원 착취와 공동체 파괴 등 콩고가 겪는 피해를 당사자의 시선으로 세계에 알리고,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다. 그는 올해 콩고와 전자산업 최상단의 연결을 그린 단편 영화 <카소로>를 만들었다. 이를 기회가 닿는 대로 세계 곳곳에 상영 중이다.
28일 경기도 수원유스호스텔에서 열린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을 위한 국제 포럼'에서 <카소로>가 상영됐다. 카톤돌로 씨와 모리스 카니 '콩고의 친구들(Friends of the Congo)' 상임이사, 태국 환경운동단체 어스(EARTH)의 의 티티꼰 분통마리 씨가 대담자로 참석해 전자산업 공급망의 가장 밑바닥 현실을 알렸다.
<카소로>는 코발트 광산이 즐비한 콩고 콜웨지 지역의 광산과 제련 공장, 열대 우림, 미국 실리콘밸리 한 반도체 연구실을 교차해서 비춘다. 클린룸의 한 과학자는 웨이퍼와 각종 광물 상자를 들고서 "이 물질(광물)이 없으면 이것(웨이퍼)도 없죠"라며 "이게 있어야만 칩을 계속 만들 수 있다"며 여러 번 강조했다.
카니 씨도 똑같이 "콩고가 없으면 세계의 전자산업도 없다"고 했다. 콩고는 세계 2위의 구리 생산국이다. 전 세계 코발트 공급량의 70%가량이 콩고에서 나온다. 우라늄도 풍부해 2차 세계대전 때 개발된 핵무기 원료의 근원지기도 하다. 이런 광물은 수십 가지가 더 있다. 대부분 배터리, 첨단 반도체, 데이터센터 등의 핵심 원료다. 공급망을 강에 비유하면 콩고의 땅은 반도체의 '상류'인 셈이다.
그러나 카니 씨는 지금의 생산구조를 "더러운 공급망"이라 칭했다. 상류의 주민과 환경은 심각한 오염과 수탈에 시달리고, 이 때문에 촉발된 정치적 갈등은 대규모 살상까지 낳았으나, 다국적 기업이나 구매력이 높은 북반구의 시민은 이 사실을 묵인하거나 모른 채 최상단에서 물건을 만들고 쓸 뿐이라는 것이다.
코발트 광산만 봐도 아동노동, 자원수탈, 환경오염, 건강피해 등의 문제가 겹겹이 쌓여 있다. 카니 씨는 "콩고 광물의 각축전 속에서 분쟁 등으로 사망자 수가 급증해 60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광산 개발을 이유로 강제 이주된 인구를 포함해 800만 명이 난민이 됐다"고 말했다.
또 "기계가 대지를 파헤치면 공기 중으로 유독 먼지가 날리고, 이는 식물에 내려앉아 식물을 죽이거나 물고기 등을 통해 체내에 유입된다"며 "하천 오염은 물론 천식과 유산율, 선천성 질환을 가진 아이의 비율이 늘었다. 연구 결과 광산 지역 여성의 체내 중금속 함량이 어느 나라보다 높았다"고 밝혔다.
분통마리 활동가는 태국을 전자산업의 '하류'라고 불렀다. 전 세계 전자제품 쓰레기가 버려지는 지역 중 하나다. 대부분 북반구의 구매력이 큰 나라들이 버린다. 소비가 많은 만큼 폐기물도 많은데, 이를 스스로 처분하지 않고 먼 땅에 버리는 것이다. 5년 가량 태국에 수입된 전자 폐기물 컨테이너를 분석했던 그는 "대부분 호주, 일본, 한국이 보냈고, 일부는 미국, 유럽 연합 국가가 보낸 것으로 분석됐다"고 밝혔다.
1989년 180여 개국이 맺은 바젤협약은 유해 폐기물의 국가 간 이동을 금지한다. 그러나 당국의 폐기물 컨테이너 감독 과정을 참관한 분통마리 씨는 "약 2년 동안 825개 가량의 컨테이너가 태국에 유입됐고, 약 150개가 불법 수입된 것이었다"며 "여기엔 PCB(회로기판) 등 유해 전자 폐기물이 다량 발견됐다"고 말했다.
전자 폐기물 처리장은 태국 동부의 농지에 집중돼 있다. 분통마리 씨는 "조사 결과 모든 장소가 전자 폐기물과 플라스틱 폐기물을 포함한 유해 물질로 오염돼 있었다"며 "각종 연구에서 폐기장 노동자와 지역 주민의 체내에서도 잔류성오염물질(POPs)과 중금속이 고농도로 발견되고 있다"고 밝혔다. 잔류성오염물질은 자연분해되지 않고 생태계에 남아 환경을 지속적으로 오염시키고, 내분비계 교란과 생식기능 저하 등 심각한 건강 장해를 일으켜 '스톡홀름 협약'(2001)으로 생산과 사용이 엄격히 금지됐다.
그러나 분통마리 씨는 2023년 연구 결과 "폐기물 노동자들의 혈액 시료에서 PBDE(폴리브롬화디페닐에테르)가 지방 1g(그램)당 19.9ng(나노그램)이 검출됐다"며 "대조군보다 최대 3배 높은 수준"이라고 밝혔다. 또 인근 지역과 방사된 사육 닭의 달걀 모두에서 다이옥신과 퓨란이 유의미하게 높은 수치로 검출됐다. 모두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잔류성오염물질이다.
분통마리 씨는 "반도체를 포함한 이 모든 전자제품이 처리장 한 곳에 섞이게 돼 여기에 어떤 화학물질이 얼마나 들어있는지, 어떤 새로운 독성물질을 만들어 낼지 알 수도 없다"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상류 단계의 공장에서부터 화학물질을 통제해야 하는 이유다. 그래야만 우리의 건강과 미래를 지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카니 씨는 한국 사회가 AI산업 및 반도체 부문에 막대한 투자를 예정한 상황을 두고서 "AI의 척추는 구리"라며 "데이터센터의 핵심 부품 대부분이 구리로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이어 "이는 콩고와 같은 구리 공급원에 극심한 압박을 가한다. 공급망 최하단의 사람들이 어떤 피해를 입는지는 앞서 충분히 설명했다"며 "한국도 국가 차원에서 공급망 책임을 이행하는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등 전자산업의 다국적 기업은 공시 의무에 따라 매년 '책임광물 관리보고서'를 발간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들은 분쟁 광물을 배제하고, 윤리적 기준을 충족한 책임 광물만 수급하고 있다.
이를 지적하자 카니 씨는 "그렇게 단언하면 안 된다. 전혀 엄밀하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광물이 일단 광산을 떠나고 나면, 원산지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이리저리 섞여 출처를 알 수가 없다"며 "이미 여러 연구가 있다. 과거 국제주석협회가 원산지에서 윤리성이 입증된 광물을 가방에 담고 바코드를 부착하는 공급망 추적 프로그램을 운영했으나, 비인증 광물에 가짜 태그가 부착되는 문제가 광범위하게 발각된 '세탁' 논란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카니 씨와 카톤돌로 씨는 콩고 내 전자산업 공급망 현실을 알리고 연대하기 위해 이달 아시아 국가를 방문 중이다. 말레이시아, 대만에 이어 세 번째로 한국을 방문했고, 다음 행선지는 일본이다. 카톤돌로 씨는 "땅에서 시작돼 결국 다시 땅으로 돌아가는 점에서 우리는 이미 서로 연결돼있다"며 "우리가 어떤 종류의 연대를 구축할 수 있을지를 함께 고민해 보자"고 제안했다.
아울러 "부정의한 채굴과 유해 폐기물을 근절하자는 고민이 여전히 그 방식을 보호하는 법의 틀 안에서 생각된다면, 어떻게 해결책을 찾을 수 있겠느냐"며 "해답과 연대를 찾는 데에 기존의 틀과 언어를 벗어나야 한다. 그게 아니면 임시방편이나 겉치레 밖에 찾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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