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가 끝나면 늘 쉬운 말들이 먼저 나온다. 이번에도 그랬다. 20대 남성이 보수화됐다. 2030이 극우화됐다. 젠더 갈등이 모든 것을 갈랐다. 틀린 말만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정치가 실패했을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말은 대개 유권자 탓이다. 유권자가 변했다. 유권자가 무지하다. 유권자가 감정적이다. 이런 말은 자기 책임을 덜어주기에 정치세력에게 편하다. 문제는 2030이 갑자기 변절한 것이 아니라 민주당과 진보정치가 그들의 삶을 더 이상 설명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밤늦게까지 딸과 이번 선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딸 세대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조금 더 가까이 듣고 싶었다. 그들은 과거의 민주화 서사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반독재, 탄핵, 촛불, 민주주의의 언어를 모르지 않는다. 오히려 잘 알고 있기에 더 냉정하다. 민주주의를 말하는 세력이 실제로 얼마나 공정한가. 개혁을 말하는 사람들이 자기 자리를 얼마나 내려놓는가. 미래를 말하는 정당이 다음 세대에게 얼마나 많은 기회를 열어주는가. 그들은 바로 그 지점을 보고 있다.
2030 남성을 모두 극우로 부르는 순간, 우리는 그들의 삶을 더 이상 보지 않게 된다. 그들의 분노 안에는 젠더 문제가 있다. 병역 문제도 있다. 취업 불안도 있다. 집을 살 수 없다는 절망도 있다. 자산을 만들 기회가 사라졌다는 박탈감도 있다. 부모 세대와 선배 세대가 부동산과 주식으로 자산을 불리는 동안, 자신들은 뒤늦게 출발선에 섰다는 감각도 있다. 서울의 청년에게 젠더는 경쟁의 전선이다. 지방의 청년에게 정치는 사라지는 미래의 문제다. 같은 청년이라 해도 불안의 모양은 다르다. 그런 차이를 보지 않고 "이대남”이라는 말 하나로 묶으면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다.
"2030 여성은 그래도 민주당 편”이라는 생각도 안전하지 않다. 전국적으로 보면 2030 여성은 여전히 민주당 지지 성향이 강하다. 그러나 서울처럼 상징성이 큰 공간에서는 다른 신호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4년 전 서울시장 선거에서 30대 여성의 54.1%는 민주당 송영길 후보를 지지했다. 이번 선거에서는 서울 30대 여성의 53.6%가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를 선택했다. 지지율의 크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향의 역전이다. 민주당을 향했던 표심이 4년 만에 국민의힘 후보 쪽으로 뒤집혔다. 서울 20대 여성에서도 오세훈 후보 지지는 4년 전보다 늘었고, 민주당 후보와의 격차는 크게 줄었다. 탄핵 국면에서 여의도와 한남동, 남태령에 섰던 젊은 여성들까지 민주당과 일정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면, 그것은 단순한 보수화가 아니다. 정치적 신뢰의 균열이다.
불안의 모양은 다르지만, 그 모두를 관통하는 공통분모가 있다. 청년들은 자기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 구조에서 배제되어 있다고 느낀다. 누군가는 젠더의 언어로, 누군가는 자산의 언어로, 누군가는 지역 소멸의 언어로 그 배제를 말한다. 서로 다른 불안은 결국 같은 질문으로 모인다. 누가 기회를 결정하는가. 누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누가 미래의 이름으로 현재의 권한을 계속 붙들고 있는가.
그 균열의 중심에는 위선의 문제가 있다. 청년들은 보수와 진보의 이념표를 먼저 보지 않는다. 누가 더 위선적인가를 본다. 조국 사태는 이 문제를 상징한다. 법적 판단의 문제가 전부가 아니다. 청년들이 본 것은 따로 있었다. 평등을 말하던 사람들이 이미 충분한 특권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 기회를 말하던 사람들이 자기 자녀에게 더 촘촘한 기회를 만들어주었다는 의심. 약자를 말하던 사람들이 실제로는 사회적 강자의 언어와 자원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는 장면. 그 장면은 오래 남았다.
문제는 특정 개인에 대한 호불호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위치와 언어의 불일치다. 사회적으로 이미 강자가 된 사람들이 여전히 약자의 언어로 자신을 설명할 때, 청년들은 그것을 위선으로 받아들인다. 과거에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는 사실이 현재의 특권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한때의 투사였다는 기억이 지금의 기득권성을 지워주지도 않는다.
정치가 이 감각을 이해하지 못하면 계속 실패한다. 정책이 좋아도 소용없다. 신뢰받지 못하는 세력이 내놓는 정책은 때로 모욕처럼 들린다. 공공임대주택을 말해도 그렇다. 주거권 중심 정책이 필요하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청년들은 묻는다. 왜 당신들은 집을 사고 자산을 만들었는데, 우리에게는 소유의 욕망을 내려놓으라고 말하는가. 왜 당신들은 사다리를 올라간 뒤, 이제 와서 사다리 없는 사회가 더 정의롭다고 말하는가. 이 질문을 마타도어라고만 치부하면 안 된다. 그 안에는 매우 현실적인 분노가 있다.
이재명 대통령에 대한 청년층의 평가는 이 지점에서 복잡하다. 반민주당 정서가 곧 반이재명 정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재명은 기존 민주당 주류와 다른 서사를 가지고 있다. 비주류, 행정가, 실용주의자, 성과를 내는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는 여전히 작동한다. 민주당은 싫지만 이재명 개인의 추진력은 인정하는 청년도 있다. 그러나 이 인정은 안정된 지지가 아니다. 조건부 인정이다.
코스피가 올라도 청년의 계좌가 비어 있으면 성과가 아니다. 경제지표가 좋아도 청년의 주거 사다리가 닫혀 있으면 성과가 아니다. 대통령의 리더십이 강해도 민주당의 낡은 구조가 그대로라면, 청년들은 다시 돌아서게 된다. 결국 문제는 한 인물의 호불호가 아니라, 그 인물을 둘러싼 정치 구조가 실제로 바뀌는가에 있다.
민주당이 착각하지 말아야 할 대목이 있다. 청년들은 설득의 대상만이 아니다. 동원의 대상은 더더욱 아니다. 그들은 정치의 주체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런데 민주당은 아직도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50년대생, 60년대생, 이른바 386으로 불렸던 세대가 여전히 앞줄을 차지하고 있다.
민주화의 공은 작지 않다. 그 공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민주주의의 자리를 계속 소유할 수는 없다. 한 세대의 역사적 정당성이 다음 세대의 정치적 기회를 대신할 수는 없다.
세대교체는 생년월일의 문제가 아니다. 70년대생, 80년대생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새롭지 않다. 낡은 방식으로 권력을 쥐면 그들도 낡은 세대다. 핵심은 나이가 아니라 권한이다. 공천권, 발언권, 의사결정권, 자원배분권을 실제로 넘겨야 한다. 청년에게 박수치는 자리를 주는 것이 아니라 결정하는 자리를 주어야 한다.
국민의힘이 잘해서 청년이 간 것이 아닐 수 있다. 민주당이 싫어서 간 것일 수 있다. 보수가 희망이라서가 아니라, 진보의 위선이 더 견디기 어려워졌기 때문일 수 있다.
정치세력은 여기서 두 갈래 길 앞에 선다. 하나는 익숙한 길이다. 2030을 탓하고, 극우화라고 부르고, 인지전과 혐오의 문제로만 다루는 길이다. 그 길은 편하다. 내부 반성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길 끝에는 더 강한 백래시가 있다.
다른 하나는 불편한 길이다. 민주당 자신이 기득권이 되었음을 인정하는 길이다. 청년에게 훈계하기 전에 자리를 내주는 길이다. 공정과 기회를 다시 정치의 중심에 놓는 길이다. 자산 형성의 사다리를 복원하는 길이다.
청년이 월급만으로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생애 첫 자산 형성을 위한 공공 금융, 장기 저리 주거 금융, 청년 주택 지분 축적 제도 같은 구체적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공공임대와 주거복지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청년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머물 공간이 아니다. 자기 삶을 설계할 수 있다는 감각이다. 노동소득이 자산 형성으로 이어지는 통로, 지역에서 일하고 살 수 있는 기반,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안전망이 함께 있어야 한다.
지역 청년에게는 "서울로 올라오라”는 말이 아니라, 지역에서 살아도 미래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 산업, 주거, 교통, 문화, 교육이 따로 놀면 안 된다. 지역 청년정책은 몇 개의 창업지원금이나 청년센터로 끝날 수 없다. 지역에서 일하고, 관계 맺고, 아이를 낳거나 낳지 않을 자유를 갖고, 나이 들어도 존엄하게 살 수 있는 생활권을 설계해야 한다.
젠더 갈등도 훈계로 풀 수 없다. 청년 남성을 혐오 집단으로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 청년 여성이 경험한 차별과 폭력을 지워서도 안 된다. 병역, 노동시장, 채용, 돌봄, 안전, 주거를 함께 놓고 다시 이야기해야 한다. 젠더 갈등을 도덕적 비난의 언어로만 다루면, 사회적 불안은 더 거칠어진다.
나는 69년생이다. 민주화 이후 세대와 다음 세대 사이 어딘가에 서 있다. 이제 우리 세대가 해야 할 일은 더 크게 말하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 오히려 한 걸음 물러서는 일일 수 있다. 물러선다는 말은 침묵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책임을 내려놓겠다는 뜻도 아니다. 앞줄을 비우겠다는 뜻이다. 딸들이 만들고 살아갈 미래를 위해, 낡은 정치의 자리를 조금씩 걷어내겠다는 뜻이다. 다음 세대가 말하게 하고, 결정하게 하고, 실패할 권리까지 갖게 하는 일이다.
2030은 변절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기 삶을 기준으로 정치를 다시 평가하고 있다. 그 평가가 불편하다면, 유권자를 탓할 일이 아니다. 정치가 먼저 늙었다. 민주당이 먼저 낡았다. 청년들은 그 사실을 투표로 말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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