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근육' 자랑, 중국은 '침술' 생색…'해방'은 오지 않고 '계산기'만 남았다

[원동욱의 외교광장] 아라그치-왕이의 베이징 회담이 주는 의미

​1.

전쟁은 늘 근사한 작명소에서 태어난다. 이번에 미국이 고른 이름은 ‘해방 프로젝트(Project Freedom)’였다. 자유, 해방, 항행의 권리…. 수사(修辭)만 보면 당장이라도 중동에 유토피아가 건설될 것 같지만, 실상은 호르무즈 해협을 무대로 한 21세기판 ‘군사 강압 극장’이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선제공습으로 이란 최고지도자와 무고한 이들이 유명을 달리하고, 이란이 해협 봉쇄로 응수하는 이 비극적 기원을 지우는 순간, 국제정치 분석은 ‘강대국 예찬론’으로 변질된다.

​어제 5월 6일, 아바스 아라그치 이란 외무장관이 베이징에 내렸다. 트럼프의 방중을 9일 앞둔 시점이다. 같은 날, 트럼프 행정부는 ‘해방 프로젝트’의 잠정 중단을 발표했다. ‘최종 합의’ 가능성이라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이란 항구 봉쇄는 그대로 둔단다. 목줄은 꽉 쥐고 인심 쓰듯 산책을 멈추겠다는 트럼프식 ‘밀당’이다. 총성은 호르무즈에서 났지만, 김 빠지는 소리는 워싱턴에서, 그리고 박수 소리는 베이징에서 들려오고 있다.

​2.

이번 사태를 관통하는 가장 객관적인 풍경은 ‘청구서’의 이동이다. 미국은 함정과 헬기, 미사일을 동원해 막대한 전쟁 비용을 지출하며 스스로를 ‘글로벌 보안관’이라 자처했다. 그런데 정작 범인을 달래고 수갑을 풀 열쇠를 쥔 곳은 총 한 발 쏘지 않은 중국이다. 중국은 파키스탄이라는 ‘전천후’ 가교를 통해 미국과 이란 사이에서 ‘포스트잇 외교’(물밑 메모 전달)를 수행하며 중재자의 지위를 다졌다.

​왕이 외교부장의 발언은 정교한 코미디 대본 같다. “이란의 권익은 존중하되, 해협은 열어야 한다.” 이 말은 이란에겐 “우리가 네 편이다”라고 속삭이고, 미국에겐 “우리가 없으면 기름값 안 잡힐걸?”이라고 윙크하는 격이다. 국제정치학적으로 보면 이는 ‘중재 패권’의 전형이다. 미국이 군사력이라는 ‘근육’을 자랑하다 경련이 일어날 때, 중국은 ‘침술’을 놓으며 생색을 낸다. 미국이 ‘해방’이라는 이름의 비싼 밥을 차려놓자, 중국이 숟가락만 들고 나타나 ‘평화’라는 디저트까지 챙겨가는 형국이다.

​3.

이란의 아라그치 외무장관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혁명수비대 출신에 영국 유학파, 거기에 일본과 핀란드 대사까지 지낸 그는 산전수전 다 겪은 ‘협상의 달인’이다. 그의 철학은 “협상은 반복이고, 또 반복이다”라는 말에 압축되어 있다. 상대가 지칠 때까지 셔터를 올렸다 내렸다 하며 ‘시간’을 자산으로 만드는 법을 안다. 트럼프가 ‘한판 승부’를 원하는 도박사라면, 아라그치는 끝까지 수읽기를 멈추지 않는 바둑 기사다.

​특히 이번 방중은 트럼프가 도착하기 전 이미 중국의 식탁에 ‘이란산 요리’를 먼저 세팅해 두려는 고도의 선점 전략이다. 그는 중국이 이란 원유의 최대 구매자라는 실리적 관계를 협상의 완충지대로 치밀하게 활용하고 있다. 미국이 제재와 봉쇄라는 낡은 몽둥이를 휘두를 때, 아라그치는 중국을 배후 삼아 ‘생존 인프라’를 구축하며 제국이 정한 속도에 끌려가지 않겠다는 인내의 미학을 보여준다.

​4.

이 와중에 우리 정부의 고민은 깊다. 트럼프는 ‘나무호 사건’을 빌미로 호르무즈 파병을 압박했다. 다행인지 트럼프의 변덕으로 하루 만에 ‘해방’은 중지되어 한시름 놓인 셈이다. 동맹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트럼프의 입만 쳐다보는 우리의 모습이 너무 초라하고 애처롭다. 중국이 보여준 교훈은 명확하다. 21세기 세력 경쟁은 “누가 더 많은 군함을 보냈는가”가 아니라 “누가 더 많은 사람을 내 테이블에 앉혔는가”에서 결정된다.

​한국은 미국과의 동맹이라는 ‘방패’와 중동과의 경제 협력이라는 ‘창’을 동시에 가진 드문 나라다. 이 위치에서 군함 한 척을 더 보태는 건 전략적 기여가 아니라, 남의 전쟁에 들러리 서는 일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중국식 중재 모델의 모방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평화의 가치를 담은 ‘중견국 중재 플랫폼’을 설계하는 것이다.

​호르무즈의 안개는 여전히 자욱하다. 전쟁은 강대국의 자존심 싸움으로 시작될지 모르나, 평화는 결국 계산기를 두드리는 손끝에서 완성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군화 끈을 조이는 결연함이 아니라, 이 복잡한 계산기를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두드리는 영리함이다. ‘해방’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남긴 건 결국 파괴된 민중의 삶과 강대국의 실리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17일 청와대에서 프랑스·영국이 주도하는 호르무즈 해협 자유항행에 관한 화상 정상회의를 하고 있다. 이번 회의에는 한국,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캐나다, 호주, 이라크, 싱가포르 등 50여 개국 정상·대표들이 호르무즈 해협 항행의 자유를 위한 국제적 노력, 선원 안전 및 선박 보호, 전쟁 종식 후 항행 안전보장을 위한 실질적 방안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연합뉴스

원동욱

원동욱은 동아시아 국제정치와 중국 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학자이자 공공 지식인으로, 현재 사단법인 외교광장 부이사장을 맡고 있다. 2010년부터 동아대학교 국제대학 중국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교육과 연구를 병행해왔다. 한국교통연구원 책임연구원,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 제23대 한국현대중국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중국 정치와 외교, 미중 전략경쟁, 동아시아 질서를 연구하며, 주요 매체 기고와 사회대개혁지식네트워크 운영위원장 활동을 통해 공공 지식인으로서 사회참여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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