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도쿄 23구 중 한 곳인 스기나미구에서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어느 정당에도 소속되지 않았으며 기존에 일본에서 정치 활동도 하지 않았던 여성 후보 기시모토 사토코(岸本聡子)가 새로운 구청장으로 당선됐다. 이를 기반으로 다음해 열린 구의원 선거에서 전체 48명 의원 중 여성 의원이 24명 당선되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의원이 절반을 차지하게 됐다. 도쿄의 자치구 의회에서 이렇게 많은 여성 구의원이 배출되는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일본에서 '스기나미의 변혁'이라고 불린 이 변화는 단순히 특정 정당이나 인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주민을 생각해 주는 구청장을 만드는 모임'이라는 구민들의 자발적 모임을 통해 사토코 구청장이 추천을 받았고, 이 모임에서 활동했던 인사들이 구의원에도 출마하면서 주민들이 스스로 정치에 참여하는 모델을 보여줬다.
이는 정당이 공천하는 후보에 주민들이 표를 주는 것이 아닌, 주민이 스스로 지역을 대표할 후보를 발굴하고 적극적 선거 운동을 통해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일본뿐만 아니라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는 한국에도 적잖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지역의 문제를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결정한다는 지방자치제도의 목적을 실제 구현한 사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프레시안>은 도쿄 스기나미구에서 '주민을 생각해 주는 구청장을 만드는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도모토 히사코(東本久子) 씨를 만나 모임이 만들어진 이유와 선거 이후 스기나미구의 변화한 모습에 대해 들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지역이 바뀌면 도쿄가, 나라가 바뀐다
1947년생인 히사코 씨는 간호사로 근무했다. 그는 30년 전 교복 폐지 운동을 벌이면서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보수·우익 단체인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 편찬한 일본의 침략 전쟁을 미화한 역사 교과서가 2001년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통과하자 이에 반대하는 시민단체 운동이 전개됐는데, 히사코 씨는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히사코 씨와 같은 학부모와 시민단체 등은 이 교과서 채택을 막기 위해 스기나미구 구청을 에워싸는 이른바 '인간띠 잇기' 운동을 벌였다. 이에 스기나미구는 이 교과서를 채택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이 사건은 일본 내 다른 자치구에도 영향을 미쳤다. 다만 스기나미구는 이후에 이 교과서를 채택했는데, 우익 성향의 야마다 히로시(山田宏) 구청장의 개입이라는 주장이 시민단체들로부터 제기되기도 했다.
히사코 씨는 이렇듯 구청장이 구민의 삶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보면서 구청장 선거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주민을 생각해 주는 구청장을 만드는 모임'을 결성하게 된 이유에 대해 "지방자치는 우리 삶에 직접 연결된다. 의원이든 지사든 지역 주민들이 선거를 해야 한다. 그래서 지역의 여론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아주 중요하다. 지역 여론이 모이면 도쿄도가 바뀌고 나라가 바뀔 수 있다"고 말했다.
히사코 씨는 "스기나미구는 주민자치라든지 민주주의와 관련해 여론을 조성할 수 있는 토대가 있었다"면서 "구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과제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곳이었다. 삶의 환경이 나빠지면 이를 바꾸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주체적으로 나서는 사람들이 모여서 구청장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 까지 이르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2021년 요시다 하루미(吉田晴美) 후보가 중의원 선거에서 당선됐을 때도 '정치를 바꾸는 8구의 모임'에서 활동했었다. 하루미 후보는 입헌민주당 소속이었는데 당시 야당인 공산당과 레이와신센구미, 사민당 등과 야당 단일화를 이뤄냈고 결국 자민당 후보를 꺾으며 당선됐다.
히사코 씨는 "정치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원하는 평화라든지 일상의 삶을 위해 우리의 목소리가 전달되는 정치를 위해서는 바꿔야 한다고, 지금의 자민당 가지고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며 당시 선거운동에 참여하게 된 이유를 전했다.
이후 1년이 지나 이번에는 구청장 선거에 시민들의 모임을 결성하게 됐다. 모임은 있었지만 막상 구청장으로 나갈 후보자를 정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유럽에서 주민 자치와 시민운동, 공공 서비스를 연구했던 기시모토 사토코(岸本聡子) 현 구청장이 일본으로 귀국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게 됐다. 그에게 구청장 후보를 제안하면서 선거운동이 시작됐다.
당시 선거에서는 여성들의 활동이 주요했다. 히사코 씨는 선거 운동 기간 중에 한 젊은 여성이 "어린이집을 없애지 말아주세요!"라고 외쳤을 때를 기억한다며, 이전에는 선거 운동을 해본 적이 없어서 전단지 한 장도 제대로 나눠주지 못했던 이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됐을 때 감동적이었다고 소회를 전했다.
"남녀평등을 외치는 사람들이 많지만 여전히 여성이 생활 속에서 맡아야 하는 부분이 많다. 육아만 해도 그렇고. 이렇게 생활을 영위하는 속에서 본인 체험에서 나오는 생각이 있었다. 여자는 어때야 한다는 관습 같은 것이 아직 남아있는데, 이 속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분출됐던 셈이다."
'주민을 생각해 주는 구청장'을 만든 이후 스기나미구에는 적잖은 변화가 나타났다. 사토코 구청장은 앞선 인터뷰에서 구민이 단순히 구청에 민원만 넣는 것이 아니라 구정에 직접 참여하는 폭을 넓혔다고 밝힌 바 있는데, 히사코 씨 역시 이 부분을 가장 큰 변화상으로 꼽았다.
"지금까지의 구정은 '탑다운' 식으로, 즉 구청장이 결정하는 방식이었는데 사토코 구청장이 취임하면서 주민과 대화가 많아졌다. 주민과 접점, 저변을 넓히는 '바텀업' 방식이 많이 보였다. 구민과 대화하면서 직원들도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
구에서 주로 다루는 중요한 사업들에도 변화가 있었다. 히사코 씨는 "어린이 권리 조례, LGBT 사안, 비정규노동자의 최저임금 상승 등의 의제가 다뤄졌다"라며 "국가가 해야 하는데 안하다 보니 지자체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한다는 생각도 든다"라고 말했다.
그는 빈부 격차가 커지는 원인 중 하나가 비정규직 확산이며, 특히 여성들이 비정규직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언급했다. 구 차원에서 이러한 격차를 줄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그는 "구청에서 공공사업을 위탁할 때 위탁 조건으로 노동자 임금을 한시간에 (최저임금보다 높은) 1400엔 이상 주는 회사에게 맡긴다거나 하는 방식"을 추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치인에 업혀있는 것이 아닌, 연대가 필요하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꾸준히 관심을 갖고 사회 운동을 벌였던 히사코 씨는 '새역모' 교과서 채택 반대 운동을 할 때부터 재일동포들과 연대 활동을 해왔다. 특히 스기나미구에는 조선학교가 있어서 학교의 선생님, 학부모들과 함께 관련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스기나미구에 있는 조선학교를 지원하는 시민단체도 생겼지만 여전히 일본 내에서는 차별이 존재하며, 구에서 보조금을 더 주려고 했지만 자민당 소속 구의원들의 반대로 의회 통과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히사코 씨는 수십년 동안 사회적 사안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던 동력이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나 혼자 외친 것은 아니고 친구들이 있었다. 이들이 함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나 혼자서는 무리다"라는 답을 내놨다.
그렇다고 그가 특정 단체에 소속된 것은 아니었다. 히사코 씨는 "개인으로서 연대하고 싶다. 단체에 소속되면 단체의 위치가 있어서 단체 생각을 우선적으로 하게 되기 때문에 차이가 생긴다"라며 "권위주의와 투쟁하는 과정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것부터 바뀌지 않으면 변화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이건 내 자신이 변화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스기나미구의 변혁에 힘썼지만 지난 2월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역사적인 압승을 하면서 또 한번 이러한 변혁이 가능할지에 대해 의구심도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히사코 씨는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선거를 위해 활동하는 '구민 가운데 스기나미' 모임을 만들었다"며 "각자 자유롭게, 스스로가 잘하는 분야에서 활약하는 방식의 선거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2월 중의원에서의 자민당 압승이 곧 있을 구청장 선거에 미칠영향에 대해 "당시 선거는 입헌민주당이 자멸한 선거라 직접적으로 영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라며 "스기나미구의 경우 특정 정당에 속하지 않은 구청장이 있으니까 지금 당장 어떤 영향이 있다고 느끼지는 않는다"라고 말했다.
히사코 씨는 "스기나미구에 주민들의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는 정치적 환경을 만들고 싶다. 또 다양한 사람들이 살기 편한 곳, 차별이 없는 곳을 만들고 싶은데 이건 계속 투쟁해야 가능하다. 모두가 사람답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에는 아직 멀었다"라며 앞으로도 스기나미구에서 이전처럼 시민 사회 활동을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는 한국의 정치인 및 유권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특정 후보자에게 시민들이 업혀있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다. 시민들이 후보에게 '니가 알아서 해라'라고 할 것이 아니라 같이 싸우고 연대 해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라는 답을 내놨다. 수십 년 간 본인이 속한 사회에서 목소리를 내며 활동해왔던 활동가가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내린 결론은 '자발적 참여'와 '연대'였다.
(통역 : 구와에 히로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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