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영화인 80명 '이중잣대' 베를린영화제 공개 비판 "가자 학살엔 침묵"

심사위원장 "예술은 정치의 반대" 발언 논란… 과거 우크라이나·이란 문제엔 성명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참가해 온 영화인 80여 명이 영화제 주최 측에 공개서한을 보내 "우리는 영화 제작이 '정치의 반대말'이라는 심사위원장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을 외면하는 영화제의 조직적인 침묵에 참담함을 느낀다"고 규탄했다.

지난 17일(현지시각) <버라이어티>지는 하비에르 바르뎀, 틸다 스윈턴, 애덤 매케이, 페르난도 메이렐리스 등의 영화인 80여 명이 베를린영화제에 발송한 비판 서한을 공개했다. 모두 과거 베를린영화제에 참가했거나, 현재 참가하고 있는 영화계 종사자들이다.

이들이 공개 비판에 나선 이유는 베를린영화제 집행위원회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집단학살에 목소리를 내는 영화인을 검열했다는 의혹이 거듭 제기되고, 주최 측이 이중잣대를 적용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다.

논란은 지난 12일 심사위원장 빔 벤더스의 발언으로 증폭됐다. 7명 심사위원단이 참석한 기자회견에서 가자지구 학살에 대한 입장 등을 묻는 말이 나오자, 빔 벤더스는 "영화인으로서 우리는 정치에서 멀어져야 한다"거나 "(예술은) 정치의 균형추이며, 정치의 반대말이다"등이라고 밝혔다.

▲제76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단 위원들이 2월 12일 기자회견 전 촬영한 사진. 가장 왼쪽 아래가 심사위원장 빔 벤더스다. ⓒElena Ternovaja, CC BY-SA 3.0(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83882428)

그러나 베를린영화제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나 이란 독재 정권 등의 사안엔 목소리를 내왔다. 2022년 2월엔 '우크라이나 침공에 관한 영화제의 입장'이란 제목의 성명을 내고 "우리 영화제 스태프, 예술가, 영화인 일동은 우크라이나에 있는 친구를 간절히 생각하며, 평화를 염원하는 그들의 곁을 지키겠다"며 "영화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세상은 이미 더 이상의 고통과 파괴를 감내하기엔 너무나 위태로운 상태라고"라고 밝혔다.

2023년 영화제 개막식 갈라 현장에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화상으로 연결해 그의 연설도 들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그때 "예술과 영화는 정치 밖에 존재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문화가 악에 맞서 목소리를 내기로 결정할 때, 침묵을 지켜 사실상 악을 돕는 건 한쪽 편을 선택하는 것"이라고도 말했다.

2024년 2월엔 이란 정부의 탄압으로 마리암 모가담 및 베타쉬 사내하 감독이 베를린영화제에 참석하지 못하자, 두 감독의 공개서한을 영화제 공식 플랫폼을 통해 세계에 알렸다. 2011년에도 심사위원으로 선정된 이란 감독 자파르 파나히가 정부 탄압으로 참석하지 못하자, 그의 자리를 빈 의자로 남겨두고 연대를 표했다. 2006년엔 미국 관타나모 군사 기지에 갇혔던 피해자를 초청한 적이 있다.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는 빔 벤더스의 발언이 "양심의 가책도 없는 발언"이라고 규탄하며 지난 13일 영화제 참석을 보이콧했다. 그는 "(그의 발언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며 "이는 반인도적 범죄가 실시간으로 우리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에서 이에 대한 대화를 차단하는 방식"이라고 밝혔다. 로이 작가는 1989년 각본가로 참여한 <애니가 그 사람들을 데려가는 이야기>로 이번 영화제에 초청받았다.

빔 벤더스 발언이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키자, 영화제 집행위원장 트리샤 터틀은 그를 옹호하는 긴 성명을 지난 14일 발표했다.

터틀 집행위원장은 "예술가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영화제의 과거 또는 현재 관행에 관한 모든 광범위한 논쟁에 대해 언급하도록 요구받아서는 안 된다"며 "본인이 원하지 않는 한 제기되는 모든 정치적 사안에 대해 발언해야 할 의무도 없다"고 강조했다.

이에 영화인 80명이 "영화제가 과거 이란과 우크라이나 국민에게 자행된 만행에 대해 명확한 성명을 발표했던 것처럼, 베를린 영화제가 도덕적 의무를 다할 것을 촉구한다"며 "이것은 영화제가 할 수 있는, 그리고 마땅히 해야 할 최소한의 일"이라고 공개서한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2012년 12월 촬영)ⓒBy Vikramjit Kakati, CC BY-SA 3.0(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3443304)

이스라엘 주요 무기 수출국 독일

베를린영화제 측은 지난해 영화제에서 팔레스타인에 연대를 표한 영화인들을 표적 감시했다는 의혹도 사고 있다.

공개서한에 따르면 "지난해 베를린 영화제 무대에서 팔레스타인의 생명과 자유를 위해 목소리를 냈던 영화인들은 영화제 고위 프로그래머들로부터 공격적인 질책을 받았다고 보고"했다. 또 "한 영화인은 경찰 조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고, 영화제 지도부는 해당 영화인의 연설이 '차별적'이라고 간주"했다.

팔레스타인을 위한 영화 노동자(Film Workers for Palestine) 단체는 팔레스타인 사안과 관련해 '2024년 이전엔 느껴본 적 없는, 보호받지 못하고 박해받는 듯한 편집증적인 분위기가 지난해 베를린 영화제에 감돌았다'는 영화인들의 고충을 접수해 왔다.

독일은 이스라엘의 주요 무기 수출국이다. 스웨덴 군비 연구기관 SIPRI에 따르면 2019~2023년 동안 이스라엘은 전체 무기의 69%를 미국, 30%를 독일로부터 수입했다. 미국과 독일이 99%를 차지한다. 2003년부터 현재까지 독일이 이스라엘에 판매한 무기 총액은 약 33억 유로(56조 원)이다.

공개서한에 참여한 영화인들은 "국제 영화계의 흐름은 바뀌고 있다"고 강조했다. 암스테르담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IDFA)를 비롯해, 미국 블랙스타 영화제, 벨기에 겐트 영화제 등 많은 국제 영화제가 집단학살 및 인종차별 국가인 이스라엘에 대한 문화적 보이콧을 지지했다.

또 할리우드의 영화인들을 포함한 5000명 이상의 영화계 종사자들이 이스라엘 영화사와 기관과의 협업 거부를 선언했다. 마크 러팔로, 호아킨 피닉스, 루니 마라 등의 배우와 요르고스 란티모스, 마이크 리 감독 등도 참여했다.

이번 공개서한 참가자들은 "우리는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에 대한 베를린 영화제의 조직적 침묵과 영화인들의 표현의 자유를 방어하려는 의지가 부족한 것에 실망했다"며 "이스라엘의 집단학살과 반인도적 범죄, 전쟁 범죄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비판과 책임 추궁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데 가담하는 행위를 완전히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이번 베를린영화제 심사위원단엔 심사위원장 빔 벤더스를 비롯해, 미국 감독 레이날도 마르쿠스 그린, 일본 감독 히카리, 네팔 감독 민 바하두르 밤, 한국 배우 배두나, 인도 감독 시벤드라 싱 둥가르푸르,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제작자 에바 푸슈친스카가 포함됐다.

지난 12일 개막한 베를린 영화제는 오는 22일 막을 내린다.

▲이스라엘 영화사와 기관과의 협업 거부를 선언한 영화인들의 소식을 알리는 포스터. ⓒFilm Workers for Palestine 인스타그램

손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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