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
우리는 경악스러운 뉴스와 함께 2026년을 맞이했다. 1월 3일 미 트럼프 행정부가 감행한 베네수엘라 침공과 마두로 대통령 부부 납치가 그것이다. '확고한 결의'라 명명된 이 침공 작전은 분명 국제법과 주권을 유린하는 폭거였다. 미국은 이를 위해 2025년 봄부터 보복 관세 부과, 현상금 인상, CIA 비밀 작전과 카리브해 군사력 배치 등 치밀한 사전 준비를 마쳤고, 트럼프는 이 납치극을 플로리다 별장에서 TV쇼 보듯 지휘하며 ‘범죄자 사냥’이라는 거짓 프레임으로 포장했다.
미국의 명분은 2024년 베네수엘라 부정선거론과 마약 카르텔이다. 그러나 선거의 공정성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다수의 서방 언론들은 일부 자료를 근거로 ‘부정 선거’를 주장하지만, 전미변호사협회(NLG)와 라틴아메리카 선거전문가협의회(CEELA)는 베네수엘라의 투표 제도가 기술적으로 무결하며 민중의 의사가 반영된 민주적 절차였다고 반박한다. 주류 언론이 외면하는 이러한 반론은 미국의 군사 개입 명분이 선택적이고 편향된 정보에 기반한다는 걸 보여준다.
트럼프가 주장하는 '마약 카르텔 수괴' 프레임 역시 정권 교체를 사법 집행으로 둔갑시키려는 기만적인 수법에 불과하다. 미 정보기관들의 정식 보고서조차 갱단과 정부의 직접적인 연관 증거가 부족하다고 분석하고 있으며, 마약 유통의 주된 경로 역시 베네수엘라가 아닌 다른 지역임이 통계로 입증되고 있다. 트럼프 스스로 고백하듯, 이번 침공의 본질은 베네수엘라의 석유 자원을 강탈하고 신자유주의 질서에 편입시키려는 미국의 패권주의에 있다.
상임이사국인 미국이 국제법을 정면으로 위반하게 되면서, 안보리 중심의 다자주의는 해체되고 일방적인 최후통첩과 군사 타격이 외교의 주된 수단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 때문에 남반구 국가들의 결속력이 높아지고, 서구의 각자도생도 심화되겠지만, 희망은 국가 간 경쟁에 있지 않다. 그 대신,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위한 저항과 트럼프가 일방적이고도 제국주의적 방식으로 이식하려는 권위주의적 신자유주의 통치의 대결이 곳곳에서 펼쳐질 수 있다.
그린란드
카라카스에서 총성의 메아리가 그치기 무섭게 트럼프의 시선은 그린란드로 향했다. 1월 17일, 자신의 트루스소셜 계정에 올린 글에서 트럼프는 "베네수엘라에서의 위대한 승리는 시작일 뿐"이라며 "이제 우리는 북쪽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는 "그린란드는 위대한 국가의 전략적 안보와 에너지 자원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노골적인 야욕을 드러냈다. 그는 "미국을 보호하기 위해 건설하려는 '골든돔' 미사일 방어망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그린란드를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덴마크 정부는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고, 유럽연합 차원의 대응을 요청했다. 코펜하겐과 그린란드 수도 누크에선 대규모 시위도 열렸다. 이 상황에서 트럼프가 그린란드 주민과 덴마크 정부, 유럽연합이 모두 반대하는 '영토 판매'를 관철시키려면, 무력 사용이 필요할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지만, 세계 정세를 극악의 불안정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미국의 이런 침략적 태도는 지난 연말 미 행정부가 발표한 <미국 우선주의: 전략적 주권과 새로운 서반구 질서>란 제목의 국가전략 보고서에서 예고된 바 있다. '먼로 독트린'에 빗대 '돈로 독트린(Don-roe Doctrine. 도널드 트럼프+먼로)'으로 불리는 이 보고서는 미국 본토에 위협이 되는 마약 카르텔, 독재 정권, 테러 단체를 ‘병균’이라 규정하고,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 서반구 내에서 미국의 “무제한적 선제 타격권”을 선포하고 있다.
또 미국의 패권을 위해 중남미의 석유와 그린란드의 전략 자원을 미국의 통제 하에 두겠다는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점을 놓고 볼 때 미국은 이런 식의 노선이 큰 실패를 마주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노골적으로 베네수엘라 침공 같은 일을 벌일 것이다.
이란
이런 와중에 연말부터 촉발된 이란 내 반정부 시위가 급진적이고 전국적인 양상으로 변화하자, 트럼프는 이 기회를 버리고 싶지 않았던 듯하다. 베네수엘라 공격 하루 전인 1월 2일 그는 트루스소셜 계정에 "만약 이란이 그들의 관습대로 평화로운 시위대에게 총을 쏘고 잔인하게 살해한다면, 미국이 그들을 구출하러 갈 것"이라며 "우리는 완전히 준비되었고 장전까지 마쳤다"고 했다. 13일엔 "이란의 애국자들이여, 계속 시위하라. 기관들을 점령하라!"며 이란 내 민중항쟁의 급진화를 촉구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언급은 오히려 이란 상황을 보다 위험하게 몰고 갔다. 수천 명의 시민들이 무고하게 학살됐고, 시위에 대한 무력 진압에 빌미를 줬다.
1월 12일 이란의 전통적 좌파 정당 투데당(Tudeh Party of Iran)은 논평을 통해 '정교 분리', '입법·사법·행정 및 사회 계획에서 이를 실현하는 민주 정부 수립으로 나아갈 것', '신자유주의 경제 프로그램의 완전한 중단', '모든 노동운동가 및 정치범의 석방' 등 이란 신정 체제의 모순을 비판하고 투쟁의 방향에 대한 입장을 밝히면서도, "이란 내부 문제에 대한 모든 형태의 외세 개입을 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지배 독재체제 내 권력층과 미국에 의존하려는 세력 모두 어떤 형태로든 이란에서 독재가 지속되기를 원한다"는 점을 꼬집었다. 즉 '이란 정부=반미', '반정부 시위대=친미'라는 구도는 진실 왜곡이며 "지난 30년간 정권이 추진해온 경제 정책으로 나타난 빈곤과 불평등, 권력층의 부패와 재산 축적이 그 뿌리"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란 민중의 항쟁에 적극 연대해야 한다. 그것은 이란 사회가 팔레비 왕정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세속적인 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이란 민중의 시도는 내내 서구 강대국들의 훼방이나, 정교 일치론자들에 의해 짓밟혔기 때문이다. 이란 민중에게는 자신의 노동권을 보장받고, 민주주의를 누릴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국내 언론들은 이란 민중 항쟁의 근본적 모순과 복잡성을 다루지 않고 있다. 이번에도 역시 서구 언론 베끼기만 반복할 뿐이다.
미국, 그리고 한국
한편 미국에선 미네소타주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민단속국과 트럼프 행정부에 맞선 대중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자 추방 정책은 단순히 법 집행의 문제가 아니다. 오랜 시간 저임금 노동시장의 핵심 동력으로 간주되던 이주민들이 과거보다 더 조직화되자, 통제가 까다로워진 노동력을 폐기하려는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저항은 단순히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트럼프가 상징하는 '약탈적 신자유주의 전선'의 심장부에서 터져 나온 파열음이다.
따라서 이 운동은 이란 경제 제재와 실정으로 인해 굶주리는 민중들의 투쟁, 한국 사회의 불안정 노동자들의 처지와 맞닿아 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장소에서 다른 구호를 외치는 듯 보이지만, 그 기저에는 '신자유주의적 수탈의 권위주의적인 지구화'에 맞선다는 공통 분모를 갖고 있다. "건드리면 박살 난다"(Fuck Around and Find Out)는 돈로 독트린의 슬로건은 국가 권력의 압도적 폭력과 공포를 배경으로 한 '위로부터의 위협'일 것이다. 이에 맞선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운동은 집요한 지속성, 공동체의 연대, 평등과 자유에 기반한 시민성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한국의 이재명 정부는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과제를 마주하고 있다. 수출액은 사상 처음으로 7000억 달러를 돌파했지만, 반도체 산업에 편중돼 있다. 한동안 이런 양상을 극복할 가능성은 낮아 보이며, 반도체 경기가 꺾이면 나라 경제 전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평범한 사람들이 체감하는 민생은 거의 재난 수준에 가깝다. 소비 증가율은 극도로 저조했고, 일자리 증가폭은 크게 축소됐으며, 원화 가치는 크게 하락했다. 한데 정부가 택한 활로는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보인다. 주식시장 부흥과 AI 대전환이 그것이다. 이는 단기적인 경기 부양과 산업 경쟁력 확보라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사회공공성이나 민생 차원에서는 구조적 위험을 안고 있다. 주식시장이 활성화되면 주주 환원과 기업 가치 증대에는 기여할 수 있겠지만, 기업의 이익이 주주 배당과 자사주 매입에 집중되면서, 실질적인 임금 인상이나 노동조건 개선으로 이어지긴 어렵다. 이는 자산소득과 노동소득의 격차를 더 크게 벌려 평범한 사람들의 생존을 더 위협한다.
기술 주권 확보라는 미명 아래 이뤄지는 현 정부의 AI 전방위 투자는 공공의 자산을 사적 자본의 이익을 위한 인프라로 전락시킨다. 자동화 기술이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노동시간을 감축하는 게 아니라, 단지 빅테크 이윤 증식으로 귀결될 경우, 대규모 실업과 양극화, 불안정 노동의 확산은 불가피하다. 정부가 제출한 '대한민국 인공지능 행동계획(안)'대로 국민 세금으로 구축한 공공데이터를 빅테크 기업들의 AI 학습용으로 팔아넘기면, '데이터 민주주의'가 아니라 '디지털 지대 추구'만 심화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회운동은 길을 잃었는가
지난해 우리 사회는 겨울 내내 이어진 대중행동을 통해 비상계엄을 몰아냈다. 그러나 우리가 지켜낸 민주주의는 결코 완결적이지도 않고, 여전히 모순을 안고 있다. 사회의 극우화는 불평등과 개인의 고립화에 따른 결과이며, 그런 점에서 우리는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만든 사회 구조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심화되는 극우 세력 조직화나 20대 여론의 보수화 현상을 볼 때, 구조적 불안정성은 더 심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지난 연말 시민사회 내 명함 내밀기 좋아하는 일부 인사들이 '윤석열 퇴진 비상행동' 차원의 토론이나 아래로부터의 숙고 과정 없이 국무총리실 산하 사회대개혁위원회에 들어간 것은 매우 퇴행적 행각으로 보인다. '비상행동'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수많은 시민과 노동자들과의 토론 없이 소수 인사들이 독단적으로 참여한 것은 운동 내의 위계만 심화할 뿐이다.
이는 윤석열 퇴진 비상행동이 가졌던 근본적인 체제 변혁의 요구를 단순한 '정책 제안' 수준으로 격하시키며, 대중의 분노를 관료제의 절차로 소멸시킨다. 박근혜 퇴진 이후 문재인 정권 하에서도 적지 않은 시민사회단체 인사들이 청와대나 국회, 정부기관으로 들어갔는데, 이것이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를 진전시켰는가? 운동은 후퇴하고 몇몇 사람들의 출세로 끝났을 뿐이다.
나라 안팎의 정세가 혼돈으로 치닫는 지금, 다음달 5일 사흘간 서울 대방동 서울가족플라자에서 '2026 체제전환운동포럼'이 열린다. 체제전환운동포럼은 2024년 “우리의 대안을 조직하자”는 슬로건으로 처음 열렸던, 사회운동을 위한 토론의 장이다. 2024년에는 총 500여 명, 연인원 700여 명의 활동가 및 연구자들이 참가하면서 ‘체제전환’이라는 문제의식을 한국 사회운동에 접속시켰고, 다양한 운동과 쟁점들이 서로 가로지르는 계기가 된 바 있다. 이 경험은 이후 체제전환운동 조직위원회 건설과 계엄 직후 ‘세상을 바꾸는 네트워크’ 구성의 에너지가 됐다.
2026년의 문턱에서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보다 엄혹하다. 기후위기로 인한 기후 재난은 일상이 되었고, 불평등은 신분제처럼 견고해졌다. 지금의 체제 안에서 '더 나은 삶을 꿈꾸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의문들이 절망으로 바뀌고 있다. 부분적 개혁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국면이 우리 앞에 다가와 있다. 곳곳에서 체념 가득한 말들이 자주 들리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절망의 시대에 유일하게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집단적 운동이다. 이제 우리는 고장난 기계의 부품을 교체하는 대신, 새로운 기계를 설계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마주하고 있다.
역사는 세상을 망쳐온 권력자들과 시스템이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은 적이 없음을 증명한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가치들은 모두 '아래로부터의 저항'이 맺은 열매였다. 19세기 아동노동 착취와 무제한적 노동시간은 당연하게 여겨졌었다. 이를 멈춘 것은 자본가의 뉘우침이 아니라, 거리로 쏟아져 나온 노동자들의 저항과 연대였다. 근대 민주주의 초기 유산계급 남성만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참정권 역시 여성 참정권 운동이나 민권 운동 등 '배제된 자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면서 전면화될 수 있었다. 제국주의 시기 식민지 민중의 독립투쟁 역시 '지배와 피지배'라는 제국적 질서를 흔들었다. 오늘날 빅테크 독점과 불평등, 전쟁과 권위주의 정권의 폭력에 따른 민주주의 후퇴 역시 이런 저항의 물결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체제전환운동포럼은 절벽을 마주한 한국 사회운동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열린다. 그 때문에 이번 포럼에서는 단순히 위기를 비판하는 데 머물지 않고, 파편화된 저항들을 하나로 묶어 체제 자체를 바꿀 수 있는 민중의 힘을 구축하는 것을 도모하고자 한다. 각자의 현장에서 고립돼 싸우던 이들이 한데 모여 공동의 전망을 그릴 때, 비로소 전환은 실천 가능한 현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포럼은 인공지능과 디지털 자본주의가 초래한 새로운 수탈의 방식을 폭로하며 문을 연다. '인공지능에 맞서 저항을 연결하는 디지털저항운동' 세션에선 현대적 수탈의 메커니즘을 날카롭게 진단하고, 이에 맞설 디지털 권리와 민주적 통제의 가능성을 깊이 있게 탐구할 예정이다. 이어서 '극우의 부상과 사회운동의 과제', '부채와 민중의 권리', '자본에 맞서는 지역정의', '진보정치의 길찾기' 등 다섯 가지 주제들을 중심으로 세션이 열린다. '사회공공성을 위한 노동운동', '탈시설 민주주의', '학생운동', '팔레스타인 연대', '자본의 수탈에 맞서 생명의 저항', '3.3% 노동자의 권리! 일하는사람기본법 vs. 근로기준법' 등 여섯 가지 주제로 자유 세션들도 열린다. 지금의 국내외 정세를 진단하고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실천들을 찾는 종합 세션까지. 총 12개의 세션들을 다룰 이번 포럼은 윤석열 퇴진과 정권 교체 이후에도 자꾸만 되돌아가는 한국 사회 현실에 맞서 '되돌아가지 않고 새롭게' 사회운동을 재구성하자고 제안한다.
혼돈과 절망의 정세를 마주한 지금, 길을 밝힐 희망은 다시 사회운동에 있다. 우리는 고통의 기록자가 아닌, 새로운 세계의 설계자가 되어야 한다. 이번 포럼은 야만의 시대를 뚫고 나갈 저항의 씨앗들을 확인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체제전환운동포럼에 함께 모여 새로운 세계의 지도를 그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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