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29일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로 아내와 두 아들을 잃은 김영헌씨가 12일 오후 서울에서 열린 '12.29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1주기 서울 시민 추모대회' 무대에 섰다. 그는 먼저 떠나 보낸 가족을 위해 쓴 추모 편지를 낭독했다.
김 씨는 참사 당시 인도 남부의 한 한국 기업 법인장으로 일했다. 당시 연말을 맞아 태국에서 가족들과 만난 뒤 김 씨는 인도로, 나머지 가족들은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리고 그날 참사로 가족을 잃었다. 김 씨는 참사 후 한국으로 돌아와 유가족협의회에서 진상규명을 위해 싸우고 있다. 김 씨의 추모 편지 전문을 싣는다.
사랑하는 내 아내 정희. 내 아들 예찬아, 유찬아.
너희가 없는 세상에 홀로 남겨진 지 오늘로 357일째. 너희들과 함께했던 태국 여행의 즐거움이 사라지기 전에 들려왔던 너희들의 사고 소식. 너희들보다 3시간 먼저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너희를 안았을 때의 그 따뜻함이 사라지기 전에 들려왔던 너희들의 사고 소식. 인도 숙소 도착 후 4시간 만에 들려온 너희들의 사고 소식.
TV, 유튜브를 통해 사고뉴스를 보고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숨을 쉴 수 없을 듯한 가슴의 무거움, 머릿속은 뻥 뚫린 듯 하얘지고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갑자기 그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그러다 갑자기 급해졌다.
"나는 지금 무조건 한국에 가야 한다."
현지 직원을 통해 서둘러 항공권을 확인하고 바로 공항으로 달려갔다. 한국까지의 24시간. '나는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무너지면 안 된다. 너희들을 확인할 때까지 무너지면 안 된다.' 스스로 다짐하면서 어떤 기사도 검색하지 않고 공항에서 대기하고, 탑승하고, 다른 비행기로 갈아타기 전 또 대기하고….
그때마다 걸려 온 지인들과 친구들의 위로 문자와 전화. "산 사람은 살아야지."
'아 결국 크게 잘못되었구나…' 그래도 나는 무너지지 않아야 했다. 온전한 정신으로 너희를 만나야 했다. 갈아탔던 한국행 비행기에서 끊임없이 생각했다. "너희들이 없는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생각하다 독한 술을 연거푸 석 잔을 마셔도 잠을 잘 수가 없었고 뜬 눈으로 한국에 도착했다. 공항에 마중 나와 있던 누나를 만났고, 누나와 함께 무안공항으로 향했다. 그러다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나까지 없었다면 누가 우리 식구를 기억해 줄까? 그래, 나라도 남았으니 우리 식구를 기억하자." 그렇게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와 목적을 찾았다.
무안공항에 도착해 신원 확인이 안된 너희를 찾기 위해 DNA를 채취하면서 '제발 온전하게… 제발….' 속으로 끝없이 빌었다. 너희가 확인됐을 때 너희를 보고 싶었지만, 좋은 기억만 가져가라는 형제들의 만류로 직접 확인은 못 하고 너희를 덮은 천 위로 너희를 끝없이 쓰다듬으며 확인했다. 머리, 얼굴, 팔, 다리 끝없이 너희들을 쓰다듬고 쓰다듬으며 확인했다. "그래 이제라도…. 이정도라도 돌아 와줘서 고맙다." 돌아와 준 너희들에게 고마웠다.
너희들의 장례를 치르고 너희들의 물건을 정리하고 바로 병원치료를 시작했다. 이후 너희들의 꿈을 꿨다. 꿈속에서 집을 치우고 있을 때 웃으며 나타나 나에게 "그래, 계속 그렇게 해줘"라며 가버린 정희. 취업이 돼서 양복을 입고 서 있던 예찬이. 팬티만 입고 나타나 귀엽게 춤을 춰준 막내 유찬이. 꿈에서 깨고 나면 그리움에 한없이 울다 다시 잠든다.
한동안 '만약에'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만약에 내가 인도 근무를 하지 않았다면."
"만약에 너희들이 인천공항에서 출발하는 패키지상품을 했다면."
"만약에 유찬이가 가고 싶어 했던 코타키나발루를 갔으면."
"만약에 날짜를 하루만 늦췄다면."
만약에, 만약에, 만약에. 너희들이 없는 현실을 인정하기 싫어 끝없이 생각했다. "만약에…."
하지만 다시 처음을 생각한다. 너희들을 기억하기 위해 나는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먼저 가버린 너희의 삶이 너무 원통하고, 비통한 마음은 갈수록 깊어진다.
정희야. 아직도 너의 카톡 프로필은 여전히 태국 파타야에서 여행 중이다. 아이들 엄마로, 어린이집 원장으로, 대학원생으로 3가지를 한꺼번에 하면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았던 예쁜 내 애인 정희.
사고 두달 전 너와 신혼여행 이후 처음으로 둘이서만 다녔던 인도여행. 그동안 어린이집을 운영하면서 힘들었던 점을 이야기했고 나는 인도생활의 계획을 이야기하면서 둘이서 2년 뒤 인도에서 같이 살기로 했던 약속.
인생의 노년을 계획하고 이제부터라도 너에게 더 잘해줄 수 있었는데, 이제부터 시작인데,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내가 너무나 미안했고 또 미안했다.
사랑하는 아들 예찬아.
어느덧 장성하여 아빠의 술잔을 부딪치며 세상을 이야기했지. 아빠 회사의 해외 근무 제안 시 너에게 물었었지. "아빠 없어도 엄마. 동생 잘 돌볼 수 있지?"하고. "그럼요. 저는 아빠가 그런 결정을 하신 것이 멋져요" 하며 아빠를 응원해 줬지.
며칠 전 너의 학교에서 1주기 추모식을 해줘서 다녀왔다. 운전하고 가면서 젊은 나이에 가버린 너의 삶이 너무나 안타깝고 억울하여 끝없이 울고 가고 정성껏 추모식을 준비해 준 학교 교수님과 관계자분들, 너의 친구들을 보면서 "우리 아들 정말 잘 살았구나" 생각했다. 잘 살아준 우리 아들이 너무 아까워 내려오면서 또 한없이 울었다.
한없이 귀여웠던 막내 유찬아.
세상 고민 없이 사는 것 같은 너네가 가끔 걱정됐는데, 훈련소를 마치고 장애인 센터 근무하면서 스스로 일어나고 생활 잘 한다는 엄마의 말. 우리 유찬이가 변했다는 엄마의 말에 아빠는 역시 "내 아들이야"라고 생각했다.
이제 막 세상을 알아가는 시기에 너무나 짧은 너의 21년. 항상 아빠가 귀찮게 만지고 쓰다듬어도 귀찮아하지 않고 아빠를 가장 좋아해 준 막내 유찬이. 아빠 꿈속에서는 항상 초등학교 2~3학년으로 나와서 귀여움을 떨고 있는 막내 유찬아.
예찬아. 유찬아. 아빠는 최근 아빠라는 말이 이토록 친근한 단어인 줄 이제 알았다. 이제는 너희들에게 들을 수 없는 '아빠'라는 말. 아빠가 아빠답게 생활하고 너희들을 기억할게.
사랑하는 내 가족 정희야. 예찬아. 유찬아.
나는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에서 또 생각했다.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유가족으로 살기엔 너무 힘든데 내가 버틸 수 있을까? 그래서 내린 결론이 '그래 단순 교통사고라 생각하자' 였다.
하지만 막상 와서 보니 원인은 너무나 명확했다. 그리고 희생자 대부분이 광주·전남 지역민이고, 우리 지역 정치권이 나서주고 우리 지역 경찰의 수사를 믿었다. 하지만 결국 다른 참사와 다를 바 없이 가고 있다.
나는 결심했었다. 우리 아이들이 알고 있는 아빠의 모습으로, 너희들의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아빠답게, 당당하게. 때론 단순하게 목이 터져라 외치고 미친듯이 너희들의 억울함을 알릴 것이고, 그리하고 있다.
가끔 아빠가 지칠 때면 너희들이 있는 추모관에서 한없이 울면서 다시 다짐한다. '무너지지 말자. 아빠답게 행동하자' 지켜보고 응원해 줘라.
우리 가족을 파괴시킨 주범. 내 아내의 인생 후반 계획을 파괴시킨 주범. 내 아들들의 청춘과 삶을 파괴시킨 주범. 그들에게 반드시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노력할게. 그때까지 아빠는 멈추지 않고 달릴게. 다 끝나는 날, 너희들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
최근 아무도 꿈속에 나오질 않아 많이 서운하다. 누구든 꿈속에 나와서 응원해 주라. 나는 영원히 김정희의 남편이자 김예찬·김유찬의 아빠임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오늘도 너희들의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많은 사람 앞에서 다짐한다.
2025년 12월 20일
김정희 남편, 김예찬·김유찬 아빠 김영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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