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 밖 노동'의 목소리, '일하는 사람의 권리 기본법'에 담겠습니다."
노동부와 노사발전재단은 지난 11월 21일, '권리 밖 노동 원탁회의'를 마무리하며 이렇게 밝혔다. 25일 서울 상암 DMC 타워에서 열린 '2025 우리 노동부 타운홀미팅'에서도 김영훈 노동부 장관은 같은 취지의 입장을 발표했다.
'일하는 사람 권리 기본법'?
김 장관이 말하는 '권리 밖 노동'이란 근로기준법 밖에 내몰려 있는 플랫폼·특수고용·프리랜서 노동자를 일컫는 개념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 개념에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도 포함되기도 하는데, 여하튼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새로운 법을 추진한다는 얘기이다.
연혁을 추적해보면 이재명 정부 공약과 국정과제에는 '일터 권리 보장법'이라고 명시된 바 있다. 그 법률의 이름을 '일하는 사람 권리 기본법'(이하 '일하는사람법')으로 바꾸어 추진하는 것인데, 아직 이 법의 구체적인 내용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지난 11월 24일 노동부가 공개한 카드뉴스에 따르면 다음의 3가지를 이 법의 핵심내용으로 소개하고 있다.
① 표준계약서 법제화 하겠습니다.
② 보수가 지급되지 않을 때, 분쟁이 발생했을 때 해결할 수 있는 창구를 만들겠습니다.
③ 경력 관리를 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 하겠습니다.
<인사이드경제>는 이 문구들을 보는 순간 소름끼칠 정도의 데자뷰를 느꼈다. 가만 있자, 내가 저 문구를 분명히 어디에서 봤는데…. 그게 뭐였더라? 몇 가지 키워드를 넣고 검색했더니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놀랍게도 윤석열 정부가 추진했던 '노동약자 지원법'이었다.
노동약자 지원법 시즌 2
윤석열 정부 역시 플랫폼·특수고용·프리랜서 노동자를 하나의 범주로 밀어넣었다. 이른바 '노동약자'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이 개념에는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도 포함되었다. 김영훈 장관의 '권리 밖 노동'이라는 어법은 윤석열의 '노동약자' 개념과 정확히 일치한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년 전인 2024년 11월 26일, 당시 여당이었던 국민의힘은 플랫폼·특수고용·프리랜서 등 이른바 '노동약자'의 실질적인 고충 해결을 위해 필요하다며 '노동약자 지원법' 입법발의 대국민 보고대회를 진행했다. 당시 보도자료에 나온 이 법안의 핵심 내용을 조항으로 요약하면 아래 표와 같다.
이재명 정부가 공개한 카드뉴스 내용이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더불어민주당은 윤석열의 노동약자법 추진에 찬성했던 것일까? 법안이 공개된지 이틀 뒤인 11월 28일, 더불어민주당 정책조정회의에서 김주영 의원은 "노동자 권리 보장에 대한 국가 책임을 외면함으로써 정작 그 실질은 텅텅 비어있다"고 저격했다. 그렇다면 민주당이 대안으로 내세운 답은 무엇이었을까?
"헌법이 보장하는 '일할 권리'와 노동기본권을 근본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는, 사용자 책임 회피를 위해 위장된 특고·플랫폼·프리랜서 노동자에 대한 '고용관계의 추정'으로 노동법을 우선 적용해야 합니다." ('24.11.28, 더불어민주당 정책조정회의 김주영 의원 모두발언)
소름끼칠 정도의 공통점
깊이 파고들수록 단순한 '데자뷰'가 아님이 분명해진다. 이재명 정부의 '일하는사람법'은 정말 여러 면에서 윤석열의 노동약자법과 연결된다. 우선 이 법 추진의 실무 총책임을 맡고 있는 권창준 노동부 차관은, 윤석열 정부에서 회계공시·타임오프 등 이른바 '노동개혁' 정책 전담부서인 노동개혁총괄국장 출신이다.
'일하는사람법'을 추진하는 실무 부서 이름은 '노무제공자지원과'인데, 이 부서는 윤석열 정부가 노동약자법 추진을 위해 신설한 '미조직근로자지원과'의 이름만 바꾼 곳이다. 심지어 노동약자법 추진을 위한 의견수렴기구는 노사발전재단을 통해 진행한 '노동약자 원탁회의'였는데, 이재명 정부는 이 기구의 이름만 '권리 밖 노동 원탁회의'로 바꿔서 재활용했다.
쥐 한 마리도 못 잡는다
"검은 고양이건 흰 고양이건 쥐만 잘 잡으면 되는 것 아니야?" 틀린 말은 아니다. 일하는사람법이건 노동약자법이건, 사각지대 노동자들의 권리 보장만 제대로 한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이재명 정부가 카드뉴스에 담은 핵심 내용을 보면 매우 실망스럽다.
우선 '표준계약서 법제화'부터 살펴보자. 역대 정부가 시범적으로 만든 몇몇 업종 표준계약서 내용에는 꽤 괜찮은 것들도 있다. 하지만 강제성이 없는 권고 수준이기에 이를 지키지 않는다 해도 사용자에게 아무런 불이익이 없다. '법제화'라는 말에 속아넘어가면 안 된다. 표준계약서 제정·보급을 '법에 담는다'는 것일 뿐 강제성을 부여한다는 말이 아니니까.
'보수 미지급 분쟁 창구'를 마련한다는 것은, 노동위원회에 신청하면 중재·알선을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재·알선은 노동위원회 준사법기능인 조정·구제에 비해 훨씬 효과가 떨어진다. 노동위원회가 중재안을 내놓더라도 양 당사자가 합의해야 효력이 있을 뿐, 합의가 안 되면 재판으로 갈 수밖에 없다.
'경력 관리'로 가면 얘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카카오톡에 들어가면 '톡 사원증'이라는 기능이 있다. 본인 인증을 하면 국민연금 등과 연계하여 내 경력과 재직을 증명할 수 있는 서비스이다. 민간기업도 이렇게 무료로 경력 관리 서비스를 해주는데 국가기관이 이런 걸 별도로 법까지 만들어서 서비스를 한다니 이게 우스운 일 아닐까?
당장 서비스하면 될 것을 뭐 하러 입법까지?
사실 윤석열의 노동약자법 내용 역시 마찬가지다. 국가가 취업촉진, 고용안정, 휴게시설, 법률상담 등의 서비스를 사각지대 노동자에게 제공하는 걸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별도 입법이 없으면 이런 서비스를 못하는 건가? 전국에 노동상담 인프라를 깔거나, 기존 고용센터 인프라를 활용해 서비스를 하면 된다.
플랫폼·특수고용·프리랜서의 경우 국민연금 사업장가입이 안 되어 경력관리를 해주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말 한번 잘했다. 이미 플랫폼·특수고용 일부 업종의 경우 고용보험·산재보험 가입이 이뤄지고 있지 않은가. 고용보험·산재보험을 통하면 배달 1건, 대리운전 1콜 경력까지 모두 증명이 된다. 전국민 고용보험 약속만 지키면 모든 사람에게 경력·재직 증명의 길이 열린다. 이걸 꼭 법까지 만들어서 해야 하나?
이쯤 되면 이제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입법을 하지 않더라도 지금 당장 가능한 서비스들을, 굳이 입법안으로 추진한다는 것은, 이 법에 동의하지 않으면 국가가 이런 서비스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협박하는 것처럼 들리니 말이다.
일하는사람법이 해결할 수 없는 것들
표준계약서나 경력 관리, 과연 이게 플랫폼·특수고용·프리랜서 노동자들이 가장 절실하게 원하는 것들일까? 얼마 전 대전에서 대리기사님 한 분이 승객의 차량에 매달려 1.5km를 끌려다니다 숨지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승객에게 폭행당해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그가 반복적으로 외친 말은 "살려주세요"가 아니라 "제가 잘할께요"였다.
취객을 상대하는 위험한 감정노동에 시달리며 매일같이 사선을 넘고 있는데, 플랫폼·특수고용이란 이유로 작업중지권도, 감정노동자 보호도 적용되지 않는다. 중대재해로 기록되지도 않고 사업주는 산업안전보건법으로 처벌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일하는사람법'은 이런 문제를 조금이라도 해결해줄 수 있을까?
정부가 아직 법안 내용을 공개하지 않아 속단할 수 없지만, 이미 국회에 발의된 다양한 '일하는사람법'을 살펴보면 답은 "NO"다. 산재 근절과도 맞닿아 잇고, 플랫폼·특수고용 노동자의 절실한 요구이기도 한 이 문제를 해결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법이 뭘 해낼 수 있느냐를 말하는 것보다, 뭘 해낼 수 없는지 얘기하는 것이 이 법을 이해하는데 훨씬 빠르다. 아래는 이를 정리한 것이다.
① 보수 미지급
△ 만나플러스 사태로 발생한 대규모 미정산 배달료, 콜센터 교육생이 받지 못한 인센티브, 학습지 교사의 미지급 수수료·성과급 문제를 일하는사람법은 해결할 수 있는가?
△ 플랫폼이 광고·유료결제·수수료 수익을 미정산한 채 버티는 돈, 학습지 본사가 성과·수수료 정산을 지연하는 돈, 보험사가 '실적 미달' 등의 명목으로 수당을 깎거나 지급을 늦추는 돈은 체불임금이 아니라 '정산 지연'으로 포장된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나?
② 감정노동자 보호
△ 취객을 상대하는 대리기사, 악플에 시달리는 웹툰작가, 욕설·혐오 콘텐츠를 처리하는 콘텐츠 모더레이터, 현장에서 폭언·협박에 노출되는 택배기사들은 왜 감정노동자로 보호받지 못하나?
△ 가사·청소·돌봄 플랫폼 노동자가 집에서 폭언·성희롱·위험을 감수해도, 학습지 교사가 가정 방문 중 폭언·성추행·안전위험을 겪어도, 택배기사가 문 앞에서 욕설에 시달려도 왜 감정노동자 보호의 사각지대에 방치되는가? 일하는사람법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③ 중대재해, 작업중지권, 직장내괴롭힘
△ 콜 몇 번 거절했다고, 별점 조금 떨어졌다고, 계정정지와 락(Lock)으로 일감을 끊는 일, 학습지 교사에게 '학생 배정 중단' 통보, 보험모집인에게 '코드 해지', 택배기사에게 '구역 회수'로 사실상 퇴출시키는 일이 어째서 부당징계·부당해고가 아니란 말인가?
△ 알고리즘과 관리자 눈 밖에 났다는 이유로 위험지역·심야·저가콜·기피 업무만 반복 배정하는 행위, 학습지 교사에게 저성과 구역만 몰아주는 행위, 보험모집인에게 실적이 안 나오는 상품·지점을 떠넘기는 행위에 왜 직장내괴롭힘 보호 장치는 작동하지 않는가?
△ 도로 위에서 죽어간 라이더·대리기사, 과로와 사고에 내몰린 택배기사, 장시간 운행과 과적·과속 압박에 시달리는 화물트럭기사의 죽음은 왜 중대재해로 기록되지 않는가? 일하는사람법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④ 최저임금법·산업안전보건법 적용
△ 라이브커머스 진행자·번역가·디자이너의 밤샘 작업 시간, 학습지 교사의 이동·대기·상담·관리 시간, 보험모집인의 실적 압박 속 무급 교육·회의 시간, 택배기사의 분류·상하차·대기·민원 처리 시간이 왜 노동시간도 아니고 최저임금 적용에서도 제외되는가?
△ 라이더에게는 '파트너' 호칭을, 학습지 교사에게는 '센터장님' 같은 자영업 포장을, 보험모집인에게는 '독립 사업자'라는 딱지를, 택배·화물기사에게는 '사장님'이라는 간판을 내세우며 왜 모두가 근로기준법·최저임금법·산업안전보건법 적용에서 동시에 밀려나야 하는가?
△ 계약서에 '개인사업자' '위탁' '프리랜서'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는 이유로 왜 학습지교사·보험모집인·택배기사·화물트럭기사가 실업급여·퇴직급여·사회보험과 안전보건 체계에서 영원히 제외되어야 하는가? 일하는사람법은 이 문제에 어떤 해법을 제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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