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발칵 뒤집힌 날…과학책 한 권, 세상을 완전히 바꾸다

[김성수의 영국이야기] 찰스 다윈이 영국에 뿌린 '진화'라는 씨앗

1859년 11월 24일, 영국 런던의 한 서점에서 <종의 기원>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초판 1250부가 하루 만에 매진되었다니, 요즘 말로 하면 '대박'이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은 아마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단순히 과학책을 한 권 냈을 뿐인데, 영국사회 전체가 마치 벌집을 쑤신 듯 난리가 날 줄은.

교회가 발칵 뒤집힌 날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하기 전까지 영국인들은 성경에 따라 인간이 신의 특별한 피조물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학자가 나타나서 "아니요, 우리는 사실 원숭이와 친척입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때 영국 교회의 반응은 예상할 만했다.

주교들은 설교단에서 "인간이 원숭이에서 왔다니, 말도 안 된다!"며 소리 높여 외쳤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격렬한 반대가 오히려 다윈의 책을 더 유명하게 만들었다. 금지하면 할수록 더 읽고 싶어지는 게 인간 심리 아닌가. 결국 교회는 의도와 반대로 다윈의 홍보대사 역할을 톡톡히 해준 셈이다.

사회계급론에 날개를 달다

다윈의 '적자생존' 개념은 영국의 기존 사회질서를 정당화하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상류층은 "우리가 위에 있는 건 우리가 더 '적응'했기 때문"이라며 자신들의 지위를 과학으로 포장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진화에서 뒤처진 거니까 어쩔 수 없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다윈 본인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다윈이 말한 '적합성'은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환경에 대한 적응력을 의미했는데, 일부 사람들이 이를 자기 멋대로 해석한 것이다. 마치 "내가 성공한 건 노력해서"라고 말하면서 뒤로는 금수저를 감추는 것과 비슷했다.

제국주의에 과학적 근거를 제공하다(?)

영국이 세계 곳곳을 식민지로 만들던 시절, 일부 제국주의자들은 다윈의 이론을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데 써먹었다. "우리 영국인이 다른 민족들보다 진화적으로 우월하니까 그들을 지배하는 게 자연스럽다"는 식이었다.

물론 이것도 다윈의 본래 이론과는 전혀 상관없는 억지 해석이었다. 다윈은 인종 간 우열을 말한 적이 없었는데, 정치인들이 과학을 자기 편의대로 비틀어 쓴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가짜 뉴스 수준이었다.

여성해방운동에 미친 복잡한 영향

다윈의 이론은 여성운동에도 양면적 영향을 미쳤다. 한편으로는 "모든 생명체가 같은 조상에서 왔다"는 관점이 남녀평등 사상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남성이 성 선택에서 더 공격적이고 경쟁적으로 진화했다"는 해석이 남녀 역할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특히 빅토리아 여왕(1819~1901) 시대 영국 신사들은 다윈의 이론을 인용하며 "여성은 집에서 아이나 키우는 게 자연스럽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작 다윈 자신은 똑똑한 아내 엠마(1808~1896)와 평생 동반자로 살았으니, 이런 해석이 얼마나 웃기는 일인지 알 수 있다.

과학교육의 혁명

다윈 이후 영국의 교육 체계도 크게 바뀌었다. 그전까지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신학이 교육의 중심이었는데, 점차 자연과학이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같은 명문대학들도 어쩔 수 없이 생물학, 지질학 과목을 늘려야 했다.

이는 영국이 산업혁명의 선두주자가 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과학적 사고방식이 퍼지면서 기술혁신도 빨라졌고, 결국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는 데 기여했다. 다윈이 의도했든 안 했든, 그의 이론은 영국의 국력 신장에 한몫했다.

종교와 과학의 새로운 관계

다윈 이후 영국에서는 종교와 과학의 관계가 새롭게 정립되었다. 처음에는 극심한 대립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양쪽 모두 타협점을 찾기 시작했다.

진보적인 성직자들은 "신이 진화를 통해 창조하셨다"며 신학적 해석을 내놓았고, 과학자들도 "과학은 '어떻게'를 설명하고 종교는 '왜'를 다룬다"며 영역을 나누었다. 마치 부부가 서로 간섭하지 않기로 합의한 것 같았다.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

다윈의 진화론은 영국 대중문화에도 깊숙이 스며들었다. 빅토리아 시대 풍자 잡지들은 다윈을 원숭이 몸에 인간 얼굴을 한 캐릭터로 그리며 놀려댔다. 하지만 이런 조롱조차 다윈의 유명세를 높이는 데 일조했다.

소설가들도 진화론에서 영감을 받았다. H.G. 웰스(1866-1946)의 '타임머신'이나 '모로 박사의 섬' 같은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진화와 퇴화, 인간과 동물의 경계에 대한 상상력이 새로운 문학 장르를 만들어냈다.

현재까지 이어지는 영향

오늘날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세속화된 사회 중 하나가 되었다. 교회 출석률은 계속 떨어지고 있고, 과학적 합리주의가 사회 전반에 뿌리내렸다. 물론 이 모든 변화를 다윈 혼자서 만들어낸 것은 아니지만, 그가 던진 작은 돌멩이가 큰 파장을 일으킨 것은 분명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다윈 자신은 평생 조심스럽고 신중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혁명가라기보다는 차라리 연구실에서 조용히 관찰하기를 좋아하는 학자였다. 그런 그가 영국사회를 이렇게 뒤흔들어놓을 줄은 본인도 몰랐을 것이다.

결국 다윈이 영국사회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의심하는 용기'를 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기존의 권위와 관습에 도전하고, 증거에 바탕해 생각하는 습관 말이다. 비록 그 과정에서 오해와 악용도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더 열린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150여 년이 지난 지금, 다윈의 무덤이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는 매년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한때 그를 이단자라고 몰아세웠던 그 교회에서 말이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찰스 다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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