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 영국에 미친 영향, 사랑과 전쟁 사이

[김성수의 영국이야기] 이웃사촌보다 못한 이웃나라

영국과 독일의 관계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사랑 없는 결혼"이라 할 수 있겠다. 바다 건너 이웃으로 살면서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다시 미워하기를 반복한 두 나라의 관계사는 그야말로 막장드라마의 교과서다. 하지만 미움도 사랑의 다른 표현이라더니, 독일이 영국에 미친 영향은 생각보다 깊고 넓다.

독일산 왕족들의 영국정착기

영국왕실을 보면 독일의 영향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조지1세부터 시작해서 빅토리아 여왕까지, 즉 1714년부터 1901년까지 약 187년간, 이 기간 영국은 독일 하노버왕조가 지배했으며 자연스레 독일계 왕족들이 영국왕실을 이끌었다. 그래서 당시 영국왕실은 거의 독일수입품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빅토리아 여왕은 독일출신 남편 알버트 공을 맞아 영국왕실을 완전히 독일화시켰다.

웃긴 것은 1차 대전 때 독일과 싸우느라 바빴던 영국왕실이 독일식 성씨 '삭스-코부르크-고타'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 민망해서 급히 '윈저'로 바꾼 일이다. 마치 한국전쟁 때 일본이름을 쓰던 사람이 급히 개명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헨델부터 비틀즈까지

독일음악가들의 영국진출은 가히 문화침공 수준이었다. 헨델은 아예 영국에 정착해서 영국 국가급 작곡가가 되었고, 멘델스존은 영국음악계의 구세주로 떠받들어졌다.

하지만 정작 영국인들이 독일음악의 영향을 받아 만든 음악은 전혀 독일답지 않았다. 비틀스의 록 음악은 독일 함부르크에서 다져진 실력을 바탕으로 했지만, 결과물은 순수 영국산이었다. 이는 마치 중국집에서 배운 요리사가 한국식 짜장면을 만드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칸트에서 마르크스까지

독일철학이 영국에 미친 영향은 그야말로 혁명적이었다. 칸트의 철학은 영국 경험주의에 찬물을 끼얹었고, 헤겔의 변증법은 영국지식인들의 머리를 한 바퀴 돌려놓았다.

특히 마르크스는 영국에서 <자본론>을 쓰면서 영국 자본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영국정부 입장에서는 집에 얹혀사는 세입자가 집주인을 욕하는 격이었지만, 그 덕분에 영국노동운동은 이론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독일철학자가 영국에서 영국자본주의를 비판한 책을 써서 전 세계 사회주의운동에 영향을 준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라이프니츠부터 아인슈타인까지

독일과학자들의 영국진출은 마치 프리미어리그에 뛰어든 외국인 선수들 같았다. 라이프니츠는 뉴턴과 미적분학 발명권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했고, 19세기에는 독일대학의 연구체계가 영국 대학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20세기 들어서는 나치를 피해 영국으로 온 독일과학자들이 영국과학계의 보물이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비록 미국으로 갔지만, 수많은 독일과학자들이 영국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히틀러가 과학자들을 내쫓아서 영국이 과학강국이 된 셈이니, 이 또한 역사의 묘미다.

원수에서 동맹까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독일과 영국은 서로를 철저히 알게 되었다. 1차 대전에서는 참호전의 참상을, 2차 대전에서는 런던 대공습의 공포를 경험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나서 보니 진짜 적은 따로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냉전이 시작되면서 독일과 영국은 갑자기 한 편이 되었다.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동맹이 되는 것은 국제정치의 기본상식이지만, 그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당시 사람들은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마치 어제까지 싸우던 형제가 외부의 적이 나타나자 갑자기 손을 잡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맥주에서 자동차까지

오늘날 독일이 영국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일상적이고 실용적이다. 영국사람들은 독일 맥주를 마시고, 독일자동차를 타고, 독일축구를 보면서 독일을 욕한다. 이는 마치 일본제품을 쓰면서 일본을 싫어하는 한국인들과 비슷한 심리다.

특히 축구에서 독일은 영국의 영원한 라이벌이다. 영국이 축구를 만들었다면 독일은 그것을 과학으로 발전시켰다. 영국축구가 감정과 열정의 축구라면, 독일축구는 이성과 조직의 축구다. 그래서 영국 사람들은 독일축구를 보면서 감탄하면서도 질투한다.

사랑할 수 없는 이웃

독일이 영국에 미친 영향을 종합해보면, 그것은 마치 까칠한 이웃과의 관계와 같다. 미워하고 싶어도 배울 점이 너무 많고, 좋아하고 싶어도 경쟁상대로서의 긴장감을 놓을 수 없다.

영국 사람들은 독일의 체계성과 효율성을 부러워하면서도 그들의 진부함을 비웃는다. 독일 사람들은 영국의 자유로움과 유머를 부러워하면서도 그들의 무질서함을 답답해한다.

결국 독일과 영국의 관계는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원수이자, 가장 닮고 싶어 하는 경쟁자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계가 계속되는 한, 두 나라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 나갈 것이다. 미움도 사랑의 한 형태라고 했으니, 독일과 영국의 관계야말로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원수도 사랑하라'는 말이 있지만, 독일과 영국은 '사랑하는 원수'가 되어버린 것 같다. 21세기에도 이 복잡 미묘한 관계는 계속될 것이고, 우리는 그 과정을 지켜보며 국제관계의 묘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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