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행 피해 달아났는데 "벌금 내라"는 업체…필리핀 가사관리사의 눈물

[토론회] 불안한 체류, 배제된 노동 - 필리핀 돌봄노동자의 목소리

한국에 체류 중인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이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면 회사가 벌금을 물게 하는 등 인권 침해를 받고 있다는 증언이 나왔다. 심지어 성추행을 피해 이용자의 집에서 나온 가사관리사가 '작업장 이탈'이라는 명목으로 벌금을 낸 사례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국제가사노동자의 날을 맞아 12일 서울시 중구 서울시의회에서 열린 '불안한 체류, 배제된 노동 - 필리핀 돌봄노동자의 목소리' 토론회에서 이미애 제주대 학술연구교수는 이같은 내용이 담긴 연구보고서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 실태와 양질의 돌봄을 위한 제언>을 발표했다.

보고서는 고용노동부와 서울시가 추진한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으로 한국에 입국한 필리핀 가사관리사 23명과 통역자 2명을 대상으로 한 기초·설문조사, 포커스그룹·심층 인터뷰 등을 바탕으로 작성됐다.

보고서에는 외국인 가사관리사 중개·관리 업체가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에게 부당한 사유로 벌금을 내게 한 사례들이 담겼다.

통역자 A씨는 "어떤 노동자는 남성 이용객으로부터 '임신 걱정 없다'며 유사 성행위를 요구 받았고,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가슴에 손을 대는 고용주를 피해 고객의 집인 일터를 나왔는데 오히려 작업장 이탈로 벌금을 물었다"고 했다.

이 교수는 이어 "성추행 사건이 다수 발생했다는 통역자와 몇몇 비당사자 노동자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나 보호 조치가 이뤄졌는지 확인되지 않는다"고 썼다.

A씨는 가사관리사들이 '이 고객은 힘들고 어렵다', '생리 팬티도 빨래한다', '이용객의 집에서 2시간 청소하고 시어머니 집에서 청소 한 시간 더한다'는 이유로 업체 측에 컴플레인(불만 신고)을 하면, 업체에서 "벌금 1만 원을 내라"고 하며 불만 제기 자체를 막았다고 했다.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은 계약서상 아동 돌봄전문가(caregiver)이며 가사 업무는 동거 가족 구성원을 위한 부수적이고 가벼운 직무를 하도록 돼있다.

한 가사관리사는 같은 시간을 일했는데 동료와 임금 차이가 난 이유를 묻자 "'어떻게 해서 알게 됐나?"'라며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라고 하거나 벌금을 부과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A씨는 전했다.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은 이 밖에도 다양한 갑질과 열악한 노동환경에 노출된 것으로 조사됐다. 보고서에 따르면, 업체는 가사관리사들을 억압적으로 통제했다. A씨는 시범사업 초기 기숙사 오후 10시 통금과 관련 "처음에는 못 나가게 했고, 기숙사 CCVT 관리도 계속 있다"며 필리핀 가사관리사가 "사생활, 누구든 만나면 (회사 측이) 알고 싶어했다"고 했다.

SNS 대화 내용도 감시 대상이었다. A씨는 "SNS 소통에 대한 업체 감시가 심각했다"며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이 "자기들 채팅방에서 힘든 것, 불편한 것, 답답한 것 자기끼리 대화했다. 그런데 누가 캡쳐해서 사무실에 보냈다"고 했다. 이어 이런 일 때문에 "노동자들이 서로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정보를 공유하는 것 자체를 문제시하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고용업체가 일부 노동자를 다른 노동자 간 대화를 감시하고 보고하는 역할로 활용하면서 노동자 집단 내부에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착취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평했다.

뿐만 아니다. 시얌 씨(가명)는 인터뷰에서 "(고용업체가) 비자로 위협한다"는 말을 반복적으로 했고, "추방될까 두려웠다"는 여러 노동자의 증언도 보고서에 담겼다. 본국에 다녀오기 위해 연차휴가를 쓰고 싶은데 회사가 이를 요청하면 응답하지 않거나 '나중에'라며 미루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가사관리사들도 있었다.

저임금 문제도 심각했다. 보고서에 담긴 필리핀 가사관리사 11명 임금 조사에 따르면, 공제 전 월급은 평균 192만 원이었지만 숙소·통신비 등 공제액이 평균 74만 원에 달해 실수령액은 평균 118만 원에 그쳤다.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의 임금은 실 근무시간에 따라 달랐는데, '30시간 이상 노동'이라는 애초 약속이 징계나 기타 사유로 지켜지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11명의 응답자 중 3명(20%)이 이 경우에 해당했다.

이 교수는 "스쁠루(가명)와 에네(가명)의 월 평균 지출은 교통비, 식비 공과금 뿐 아니라 위생용품, 화장품, 날씨 변화에 따르는 옷 구매 등을 고려하면 주거비를 제외하고 약 50만~70만 원"이라며 "주 30시간 미만 노동을 하는 이들은 (본국에) 송금을 거의 할 수 없다. 심지어 에네의 경우 필리핀의 가족에게 월 30만~40만 원씩 송금을 받고 있는 지경"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조사를 통해 확인된 필리핀 돌봄노동자들의 문제는 개별 사례가 아닌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문제"라고 했다. 그러면서 해결방안으로 △체류 안전성 보장과 사업장 이동권 확보 △노동권 강화 및 전문성에 기반한 공정한 처우 △실효성 있는 관리·감독 체계와 고용업체 권한 적정화 △가사관리사에 대한 법적 보호 강화와 국적에 관계 없는 포용적 돌봄 체계 구축을 제안했다.

끝으로 이 교수는 인터뷰 중 한 필리핀 가사관리사가 "코리안 드림을 거의 포기했다. 실망스러운 일이 너무 많았다. 그래도 지금 이 자리를 통해 코리안 드림을 다시 품어보려고 한다"라고 했다고 밝혔다. 이어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 사회 돌봄 체계 전체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토론자들도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의 문제점들을 지적했다. 조혁진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번 시범사업에 대해 "외국인 고용정책 역사상 가장 이례적인 외국인 고용 사례"라며 "일부 정치인의 주장과 한국사회에 적합하지 않은 홍콩, 싱가포르 등을 사례로 드는 곡학아세가 난무한 상태로 제대로 된 사회적 논의가 진행되지 않은 채 정책이 추진됐다"고 비판했다.

조 연구위원은 제도 개선책과 관련해서는 "돌봄 공공성 강화 및 돌봄노동 일자리 질 개선이 가장 우선 과제"라며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돌봄노동 일자리가 '괜찮은 일자리'로 인식되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인구감소로 인한 절대적 노동공급 부족 시대에 '저임금 외국인력 도입' 기조에서 벗어나 '선택받는 국가'가 되기 위한 준비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김혜정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사무처장은 "돌봄노동의 대안을 '저임금 이주가사돌봄 노동자'로 여기는 차별적 프레임에서 벗어나 모두에게 평등한 제도개선이 필요하다"며 "또한 정부는 이주가사돌봄 노동자의 근무 환경을 정기적으로 모니터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고용노동부는 같은 날 보도설명자료에서 "가사관리사가 불만을 제기했다는 이유 등으로 벌금을 부과한 사실이 없음을 확인했다"며 협박, 성추행에 대해서도 "통역직원, 가사관리사(근로자 대표 등), 서비스제공업체를 통해 전체 가사관리사를 대상으로 확인한 바 발생한 바 없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또 "주 30시간 미만 근무하는 경우에도 주 30시간 이상 임금을 지급하고 있다"고 했다.

토론회 주관단체 중 한 곳인 이주가사돌봄노동자권리보장을위한연대회의 관계자는 이에 대해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이해당사자인 업체를 통해 알아봐 놓고 가사관리사의 피해 사실을 부인하는 공식 발표를 하는 것은 잘못된 대응"이라며 "이런 식의 조사는 더욱더 사실이 드러나기 어렵게 하고, 오히려 당사자들을 위축시키고 불안하게 한다"고 비판했다.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에 참여할 필리핀 노동자들이 6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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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락

내 집은 아니어도 되니 이사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집, 잘릴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충분한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임금과 여가를 보장하는 직장,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나, 모든 사람이 이 정도쯤이야 쉽게 이루고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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