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난 2월4일 탄핵심판 5차 재판에서 윤석열이 했던 말이다. 12.3 계엄의 밤에 헬기를 타고온 특전사 군인들은 국회 유리창을 깨고 복도를 내달렸다. 소화액이 하얗게 뿌려지고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모습들은 외신을 타고 나라 바깥으로 알려졌다. 많은 이들이 '이게 실화냐'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도 윤석열은 "그런 얘기들은 호수 위에 빠진 달그림자 같을 걸 쫓아가는 느낌을 받았다"고도 했다.
"개소리는 거짓말보다 더 위험하다"
'호수 위에 빠진 달그림자'라니...1000년 전 항저우 서호(西湖)에서 달을 보며 시를 읊었던 소동파(蘇東坡)도 아니고, 뜬금없는 계엄을 선포한 내란 수괴가 입에 올릴 말은 아니다. 법정의 윤석열은 이런 궤변으로 뻔한 사실을 흐리며 겉으론 태연한 척 했다. 누가 봐도 허세(虛勢)였다. 자신의 운명을 가를 법정에 끌려온 만큼, 가슴은 떨리고 요동쳤을 것이다.
이와 관련, 미 철학자 해리 프랭크퍼트(프린스턴대, 도덕철학)가 '개소리'를 주제로 삼아 쓴 소책자(On Bullshit, 2005) 하나가 떠오른다. 프랭크퍼트는 "의도적으로 기만적인 부정확한 진술을 하는 개소리는 거짓말보다 더 위험하다"고 못 박았다. 아울러 "개소리를 하는 것은 허세를 포함한다"고도 했다. 이즈음 윤석열의 법정 모습이 딱 그렇다(해리 프랭크퍼트, <개소리에 대하여>, 필로소픽, 2023, 49쪽).
폭력을 휘둘러 붙들려온 형사 피의자들 가운데 20~30% 가량은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우긴다고 한다. 이른바 기억 장애다. 윤석열의 경우는 기억 장애는 아닌 것 같다. '호수 위에 빠진 달그림자'를 말하는 걸 보면, 정신과 의사들이 말하는 '망상 장애'가 더 맞을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많은 시민이 잠 못 이루는 난리를 일으켜놓고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스라엘 차니(히브리대, 심리학)는 제노사이드(집단학살) 분야를 다루는 예루살렘 '홀로코스트와 제노사이드 연구소' 소장이다. 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문구는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보다 훨씬 더 기본적인 '전형적인 부정'이라 풀이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얘기할 것이 전혀 없다"고도 했다. 나치 학살을 부정하는 이들은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편다. 차니에 따르면, 그들조차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는 우기진 않는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 인간은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실제로 행한 해악을 부정하는 경우가 많다. 유아와 어린이는 우유를 흘리거나, 장난감을 부수거나, 사탕을 훔치고도 그 행위를 부인한다. 어른들은 돈이 없어졌다는 것, 집에 귀중품이 없어졌다는 것, 자동차에 이성이 함께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거짓을 말하면서 부정하는 것은 우리 대부분이 인생을 살아갈 때 유용한 도구다](이스라엘 차니, <폭력의 전염>, 선인, 2024, 243쪽).
위에 꼽은 사례들은 일상생활에서 가끔씩 벌어지는 일들이다. 하지만 내란을 일으키거나, 전쟁범죄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차니는 △나치의 홀로코스트, △20세기 초 튀르키에의 아르메니아인 인종청소, △'한국 여성들에게 성노예 생활을 강요'했던 일본군의 만행을 보기로 꼽으면서, 이런 극악한 전쟁범죄를 부인하는 것은 "인류 역사를 악의적이고 부정직하게 다시 쓰려는 시도일 뿐 아니라, 인류의 미래에 대한 공격"이라 비판한다.

괴링조차 홀로코스트 시인
1945년 10월 뉘른베르크 법정에 선 나치 주요 전범들은 처음엔 다들 대량학살을 부인했다. 최고위급 피고였던 헤르만 괴링도 그랬다. 몇몇 피고나 증인이 전쟁범죄를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 괴링은 욕설을 퍼부었다. "피비린내 나는 더러운 배신자 돼지새끼!", "그 악취 나는 모가지를 구해보겠다고 영혼을 팔아?"라는 식이었다. 수용소에서 죽은 이들의 처참한 모습이 담긴 동영상을 법정 안에서 틀어주자, 조금씩 분위기가 달라졌다. 괴링조차 재판 끝 무렵엔 홀로코스트를 인정하는 듯한 말을 남겼다. 뉘른베르크 피고인들의 정신 건강을 살폈던 미 정신과 의사 레온 골든슨이 전하는 괴링의 말을 들어보자.
[유대인을 죽이는 것이 곧 전쟁승리를 뜻한다면 모르겠지만, 학살은 아무에게도 득이 되지 않았다. 그저 독일에 오명(汚名)만 남겼다. 여성과 아이들을 죽이는 건 스포츠정신에도 어긋난다. 유대인 말살과 관련해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이 바로 그 대목이다. 하지만 나 스스로는 유대인 대량학살에 대한 책임은 거의 없다고 여긴다. 소문을 듣긴 했지만, 나는 다른 일로 바빴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았다 해도 내가 할 일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Leon Goldensohn, <The Nuremberg Interviews>, Alfred Knopf, 2004, 131-132쪽).
괴링은 '홀로코스트'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고, 더구나 자신은 책임 없다고 발을 뺐다. 거짓말이다. 역사의 기록들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제국보안본부장)가 괴링으로부터 '유대인 문제 관할권'을 위임 받아 △1942년 1월20일 베를린 교외 반제(Wannsee)에서 '유대인 문제 최종해결'(학살)을 위한 차관급 실무자 회의를 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아돌프 아이히만이 그 회의의 서기 역할을 맡았다. 연재 90, 91 참조).
부정론이나 수정론은 한 몸통
나치의 대량학살을 부인하는 자들을 흔히 '홀로코스트 부정론자(denier)'로 일컫는다. 대놓고 부정론을 말하진 않더라도, 그럴듯한 의문을 내놓으면서 재해석이 필요하다고 덧붙이는 이들이 '홀로코스트 수정주의자(revisionist)'다. 본질은 부정론자나 다름없다. 이재승(건국대 법학전문대, 기초학)에 따르면, 부정론자들의 주장은 크게 다섯 가지로 모아진다.
[△유대인 절멸을 위한 단일한 마스터플랜은 없기 때문에 홀로코스트는 없었다. △아우슈비츠나 다른 수용소에는 대량살상을 한 가스실이 없었다. △집단살해를 증명할 객관적인 문서가 없기 때문에 연구자들은 생존자의 (잘못된) 증언에 의존한다. △1941년부터 1945년 사이에 유대인 인구의 감소는 없었다. △뉘른베르크 법정은 유대인의 이익을 위해 차린 광대극이다](이재승, '기억과 법: 홀로코스트 부정', <법철학연구>제11권 제1호, 2008).
부정론자들의 시각에서는 홀로코스트란 '유대인들이 만들어낸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부정론자들 막무가내로 역사 부정과 왜곡을 꾀하는 편이라면, 수정론자들은 논리적으로 재검토해보자는 쪽이다. 적어도 겉으론 '중립적으로', '과학적으로' 홀로코스트를 따져보자는 것이다. 이를테면 '가스실이 없었다'고만 우기질 말고, 과학적으로 '가스실이 실제로 사용됐는지 살펴보자'고 말한다. 홀로코스트 연구자들은 수정론자들이 겉으론 이론적 접근을 말하지만, 본질은 부정론자들과 한패라 여긴다. 과학을 내세우지만 유사과학(類似科學), 달리 말해서 엉터리과학이라는 얘기다.
"아우슈비츠엔 가스실 없었다"
오늘날 신나치주의(neo-Nazism)에 기운 사람들이 '홀로코스트 수정주의의 아버지'로 떠받드는 인물이 프랑스인 폴 라시니에(1906-1967)이다. 라시니에의 이력은 20대 후반 프랑스 서부의 한 작은 지방대학의 역사학 교수로 출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항독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다가 붙잡혀 부헨발트 수용소에 갇혔다. 그런 공을 인정받아 프랑스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고, 1946년까지 짧은 기간이지만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 뒤가 문제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나치 대학살은 허구라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내가 수용소에 있어봐서 잘 아는데..."라며 자신의 말에 권위를 더하려 했다.
<율리시스의 거짓말(Le mensonge d'Ulysse, 1949)을 비롯한 여러 책에서 라시니에는 유대인들의 홀로코스트 선전이 거짓이란 주장을 펼쳤다. 요약하자면, △수용소에 가스실이 있었다는 증언들은 소문에 지나지 않는 거짓이며 △희생자 규모가 부풀려졌으며, 120만 명을 넘을 수 없고, 실제로는 80~90만보다도 낮고 △아우슈비츠에서의 학살설은 황당무계한 괴담이라 했다(리처드 하우드, <정말 600만이 죽었나?>, 리버크레스트, 2014, 176-177쪽).
바로 위 문단 내용은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책자(Did Six Million Really Die?, 1974)에서 가져왔다. 저자로 표기된 '리처드 하우드'는 가공의 인물이다. 영국의 신나치주의 성향을 지닌 국민전선(NF) 회원인 리처드 배럴이 원고 초고를 썼고, 또 다른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인 에른스트 쥔델(독일 국적의 캐나다 거주자)이 1974년 출판한 것으로 알려진다(배럴은 자신이 그 원고를 쓰지 않았다고 부인한다). 여기엔 라시니에를 극찬하는 문장들이 보인다.
[라시니에의 연구는 '나치 독일의 유대인 인종말살 프로그램'이라는 허무맹랑한 선전과 희생자 수 부풀리기만 빼면,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이 겪은 고난은 다른 민족들이 겪었던 고난에 비해 주목받을 이유가 없는 수준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60년 봄 서독에서 가진 순회강연회에서 라시니에는 독일인들에게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은 허구이며 이로 인해 죄책감에 짓눌려 살아선 안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리처드 하우드, 169쪽).
독일인들이 죄책감을 느낄 필요 없다는 라시니에의 주장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얘기다. 다름 아닌 일본의 극우파들의 망언과 맥을 같이한다.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를 빌기는커녕 "난징 학살은 없었다", "일본의 침략은 전쟁이 아니며, 식민통치는 한국에도 이로웠다", "우린 잘못한 게 없으니 미안해할 필요도 없고, 따라서 용서를 빌 필요도 없다"며 전쟁범죄로 얼룩진 과거사를 부정한다(김재명, <일본의 전쟁범죄>, 진실의 힘, 2024, 543-580쪽).

"유대인 홀로코스트는 그저 신화일 뿐"
에른스트 쥔델이 출판한 <정말 600만이 죽었나?>가 주장하는 바는 앞서 살펴본 라시니에의 주장과 판박이다. 이들은 독일 패전 뒤 승전국들이 홀로코스트 규모를 부풀린 이유가 있다고 본다. △전쟁 중 독일 드레스덴을 비롯한 도시 주거지를 겨냥한 마구잡이 폭격, △일본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등 연합국의 전쟁범죄를 가리려는 속셈에서라는 것이다. 아울러, '나치 독일의 공문서에는 유대인 집단학살과 관련된 문서가 없다'는 주장을 편다.
[유대인에 대한 학살이나 인종말살을 언급하는 문서가 없다보니, 홀로코스트주의자들은 전쟁 뒤 압수된 독일 문서에 적힌 용어나 내용을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해석하는 습관에 빠졌다. 간단히 얘기해, 유대인의 홀로코스트 신화는 자신들을 거부한 독일에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악의적인 의도 아래 근거 없는 가정과 추측, 그리고 상상이라는 부실한 기반 위에 세워놓은 거대한 조형물이다](리처드 하우드, 63-64쪽).
일본 극우들이 전쟁범죄를 부정하면서 '그런 문서가 어디 있느냐?'며 걸핏하면 기록 타령을 하는 것과 같다. 1983년 캐나다에 살던 한 여성 홀로코스트 생존자가 쥔델을 고소했다. '허위사실'을 퍼뜨렸다(캐나다형법 181조)는 혐의였다. 온타리오 주정부도 쥔델 고소에 함께 했다. 대법원까지 가는 공방 끝에 1988년 쥔델은 징역 15개월을 받았다.
쥔델의 말년은 편하지 못했다. 2002년 캐나다 인권법원은 '증오 메시지'를 퍼트려선 안 된다는 캐나다인권법을 어겼다며 쥔델의 웹사이트를 닫으라고 명령했다. 쥔델은 미국으로 옮겨갔다가 불법체류자로 붙잡혀 캐나다로 송환됐고, 2005년 독일로 추방됐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독일 검찰이었다. 만하임 법원은 '홀로코스트 부정'과 '증오 선동' 혐의로 징역 5년을 매겼다. 2010년 풀려난 그는 7년 뒤 심장마비로 죽었다(78세).
로이히터 보고서, "가스실 처형 없었다"
1980년대 캐나다에서 벌어졌던 '쥔델 재판'의 부산물이 <로이히터 보고서>(Leuchter Report, 1988)다. 쥔델이 법정 방어를 위해 '가스실 전문가' 프레드 로이히터를 고용한 끝에 나온 문제의 보고서다. 로이히터는 미국의 여러 교도소에 독극물 주사 장비를 비롯해 사형 관련 제품들을 판매 공급하는 작은 업체의 소유주였다(나중에 자격을 속인 혐의로 기소돼 2년 보호관찰형 받음).
로이히터는 쥔델의 변호사로부터 '가스실의 존재 여부를 과학적으로 분석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당시로선 거금인 3만 달러를 받았다. 그는 폴란드 아우슈비츠와 마이다네크 수용소에서 남몰래 그곳 가스실 벽과 천장, 바닥을 끌과 망치로 쪼개고 긁어낸 뒤 미국으로 돌아왔다. 사설 연구소에 그 가루들을 보내 치클론B 독가스 성분(시안화물 잔류물)을 찾아내려 했다. 하지만 여러 구조적이고 기술적인 이유로 독극물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다.
로이히터는 "실제로 가스실이 있었다면 잔류 독가스 농도가 훨씬 높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우슈비츠엔 가스실이 없었다"거나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이기엔 너무 작다"는 부정론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려 했던 그의 보고서는 허점투성이로 판명이 났다. 정밀조사팀이 구성돼 아우슈비츠 가스실을 검사해보니, 높은 농도의 치클론B 독가스(시안화물) 성분이 나왔다.
로이히터는 그 뒤로도 홀로코스트 부정론을 폈다. 영국에선 추방당하고 재입국이 금지됐다. 그를 영국으로 불러 강연하도록 했던 이가 문제의 '홀로코스트 이론가' 데이비드 어빙(1938-)이다. 위에서 짚어본 폴 라시니에가 1세대 홀로코스트 부정론(수정론)의 대표라면, 어빙은 2세대 대표라 할 만한다(3세대는 21세기 신나치주의자들). 어빙을 세계적인 화제의 인물로 떠올린 것이 '데이비드 어빙 vs 데보라 립스타트 재판'이다.

"어빙은 '깜빡이를 단 히틀러 빨치산'이다"
영국인 작가 데이비드 어빙은 미 유대인 학자 데보라 립스타트(1947-, 에모리대, 현대유대인역사)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할 때까진 '그저 그런 역사학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를 '역사학자'로 부르는 것은 어빙이 <드레스덴 파괴>(The Destruction of Dresden. 1963년), <히틀러의 전쟁>(Hitler's War, 1977), <처칠의 전쟁>(Churchill's War, 1987), <괴벨스>(Goebbels: Mastermind of the Third Reich, 1996) 같은 책들을 써냈기 때문이다. 주류 역사학자들의 눈으로 보면, 어빙은 특히 홀로코스트와 관련해선 이른바 '유사'(類似) 또는 '사이비' 역사학자일 뿐이다.
어빙은 <히틀러의 전쟁>에서 "히틀러가 유대인 학살에 대해 잘 몰랐고, 알았다면 학살을 반대했을 것"이란 주장을 폈다. 그런 어빙이 1996년 9월 립스타트와 출판사(펭귄북스)를 상대로 영국 법원에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자, 언론의 큰 관심거리로 떠올랐다. 립스타트는 1993년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을 비판하는 책을 하나 썼다. 어빙이 '명예훼손'을 당했다며 재판을 걸도록 만든 문제의 책이다. 여기서 어빙을 비판한 대목을 보자.
[어빙은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려는 가장 위험한 대변인(the most dangerous spokespersons) 가운데 중 하나다. (<드레스덴의 파괴>와 <히틀러의 전쟁>을 쓰는 등) 역사적 증거를 대는 데 익숙한 어빙은 홀로코스트 부정이라는 자신의 이념적 성향과 정치적 의제(political agenda)에 맞아떨어질 때까지 사실을 왜곡했다](Deborah Lipstadt, <Denying the Holocaust: The Growing Assault on Truth and Memory>, Plume, 1993, 181쪽).
같은 책에서 립스타트는 어빙을 가리켜 '깜빡이를 단 히틀러 빨치산'(a Hitler partisan wearing blinkers)로 묘사한 독일 역사가 마르틴 브로샤트의 글을 옮기면서, "어빙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증거를 왜곡하고 문서를 조작했다"고 못 박았다. "어빙이 홀로코스트의 역사적 현실에 어긋나는 주장을 편다"는 통렬한 비판이었다(Deborah Lipstadt, 161쪽).
영국 법원의 명예훼손 소송에선 원고가 아닌 피고가 '명예훼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피고가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자칫 패소할 위험이 따른다. 립스타트와 펭귄북스는 3000부 정도 팔리는 책 때문에 몇백 만 달러가 들어갈 비용을 물어야할 처지에 놓였다. 립스타트의 변론단은 재판에 앞서 3년 반 동안 근거 자료들을 준비했다.
이를 위해 이름난 역사가들과 전문가들이 합쳤다. 리처드 에반스(케임브리지대, 역사학), 로버트 얀 판 펠트(캐나다 워털루대, 건축사학) 등은 나치 학살에 관한 많은 분량의 문서, 증언들을 살펴보고, 재판부에 내놓을 전문가 보고서를 만들었다. 아우슈비츠 현지로 가서 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비용은 미 유대인위원회(AJC), 세계유대인회의(WJC),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같은 유대인 단체와 개인 후원금으로 메웠다.
"히틀러는 유대인 학살 알고 있었다"
재판은 2000년 1월부터 4월까지 영국 고등법원에서 열렸다. 밥정 공방이 이어질수록 재판부(찰스 그레이 판사)는 어빙이 히틀러에게 지나치게 우호적인 시각을 지녔기에 '객관적 역사가'(objective historian)의 기준에서 벗어났다고 봤다. 2000년 4월11일 그레이 판사는 피고 쪽 손을 들어주었다. 355쪽 분량의 판결문은 어빙이 '적극적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라면서, "반유대주의적이자 인종주의적이고 신나치주의를 조장하는 우익 극단주의자들과 연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판결문의 결론을 보자.
[어빙의 역사적 증거에 대한 처리는 매우 비뚤어지고 끔찍해서 부주의라고 보기 어렵다. 이와 같은 실수와 오해는 자신의 선입견에 맞춰 증거를 고의로 왜곡하거나 조작하려는 어빙의 의지와 일치한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증거를 고의적으로 왜곡했다](Deborah Lipstadt, <History on Trial: My Day in Court with David Irving>, Ecco, 2005, 275쪽에서 재인용).
건축사학자 로버트 얀 반 펠트는 폴란드로 가서 아우슈비츠 가스실을 살펴봤고, 700페이지에 이르는 보고서 작성을 거들었다. 재판 뒤엔 570쪽 분량의 책(The Case for Auschwitz. 2002)을 써냈다. 글 위에서 어빙이 "히틀러는 홀로코스트를 몰랐다"는 주장을 폈음을 짚었다. 립스타트와 그를 도운 역사학자 리처드 에반스는 "히틀러가 수용소 대량학살을 알고 있었다"고 반론을 폈다. 판사는 어빙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펠트의 관련 글을 보자.
[그레이 판사는 홀로코스트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히틀러가 알고 있었고, 그런 학살과 관련한 히틀러의 역할(명령)에 대해 데이비드 어빙이 증거를 조작했다는 대목을 판결문에서 별도로 다루었다. 그레이 판사는 "히틀러가 수용소들의 가스 살포에 대해 알고 있었고, 히틀러가 부하들과 함께 대량학살을 논의하고 승인했다는 상당한 증거가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는 결론을 내렸다](Robert Jan van Pelt, <The Case for Auschwitz>, Indiana University Press, 2002, 489쪽).
그레이 판사는 원고 어빙에게 피고 쪽 소송비용 240만 파운드(약 45억 원)를 물어주라고 판결했다. 어빙은 항소했지만, 2001년 7월 민사항소법원에서 기각됐다. 재판이 끝난 뒤 립스타트는 법정 바깥의 기자들에게 "이 재판은 홀로코스트 부정론에 치명적인 타격(devastating blow)을 입혔다고 본다"고 했다. 누구보다 어빙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2002년 어빙은 파산 선고를 받았고, 런던 메이페어에 있던 집을 비워줘야 했다.
어빙은 그 뒤 힘든 삶을 살았다. 영국 학계나 언론계에선 퇴출됐고, 출판사와의 계약도 없던 일이 됐다. 그래도 자신의 웹사이트를 운영하면서 신나치와 반유대 단체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과 기부금으로 버텼다. 유럽 국가들은 그의 입국을 막았다. 2005년에 오스트리아에 들어가려다 붙잡혀 징역 2년형을 선고받기도 했다(실제 복역은 13개월). 그 뒤론 친위대 총사령관 하인리히 힘러의 전기(2010)를 써냈다(2009년 유대인으로 추정되는 해커가 그의 컴퓨터에 접속해 이메일과 추종자들의 명단을 털어갔다).
어빙과의 법정싸움이 끝난 5년 뒤 립스타트는 그때의 재판과정을 돌아보는 책을 하나 냈다. 그 책에서 립스타트는 "반유대주의와 모든 형태의 편견은 이성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반박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세대에서 반유대주의와 편견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Deborah Lipstadt, 296쪽).
어빙과의 소송을 다룬 영미 합작 영화가 2016년 영국인 감독 믹 잭슨의 '부정(Denial)'이다. 한국에는 '나는 부정한다'라는 이름으로 개봉됐다. 명우 레이첼 바이스가 데보라 립스타트 역을 맡아 열연했다. 영화를 보면서 어빙 역을 맡은 영국배우 티모시 스폴의 연기력이 작품의 질과 몰입도를 높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럽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 뒤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행위를 금하고 이를 어길 경우 '범죄행위'로 처벌하는 조항을 강화해왔다. 이를테면, 프랑스는 1990년에 만든 게소법(Loi Gayssot)에 따라 홀로코스트를 부정하거나 반유대주의를 내걸면 형사범죄자 된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홀로코스트 부정은 기본법 제5조 제1항의 자유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를 어길 경우 명예훼손(제185조)이나 사자(死者) 명예훼손(제189조), 선동(제130조) 혐의로 처벌된다. 2022년 10월, 독일 의회는 형법 제130조를 개정해 '국제형사법이 명시한 종류의 집단학살, 반인도 범죄, 전쟁범죄를 찬성하거나 부정하거나 중대하게 경시하는 행위'를 처벌할 수 있도록 더 강화했다(김희정, '집단학살 부정 처벌의 정당성', <공법연구> 제52집 제1호 2023년 10월).
미국은 사정이 조금 다르다.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는 수정헌법 제1조에 따라 홀로코스트 부정론을 바로 처벌하진 않는다. 다만 미 언론과 정치권을 장악한 유대인 압력단체의 파워가 강력하기에 홀로코스트 부정론자가 버티긴 어렵다. 이웃 캐나다에선 홀로코스트에 대해 입만 벙긋해도 '인종주의자'로 몰려 감옥에 갈 각오를 해야 한다.

홀로코스트가 면죄부, 돈벌이 수단?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면서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는 자들은 지금도 적지 않다. 2024년 6월엔 95세 할머니인 우르줄라 하퍼베크가 독일 함부르크지방법원(항소심) 피고석에 섰다. 나치 시절의 범죄가 아닌, 홀로코스 부정과 관련해서였다. 하퍼베크는 그동안 여러 차례 법정에 섰고, 2018년부터 2년 동안 징역을 살았다. 2019년 유럽의회 선거에 극우 정당 '우파당'(Die Rechte) 후보로 옥중 출마한 전력도 있다.
법정에서 하퍼베크는 "홀로코스트는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거짓말"이고, "아우슈비츠는 죽음의 수용소가 아닌 노동수용소였다"고 목청을 높였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어릴 때 나치를 경험하고 95세까지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나치 학살의 희생자들은 그렇지 못했다"며 꾸짖으며 징역 1년 4개월을 매겼다(2024년 11월 사망). 지금 서구 사회에는 하퍼베크와 같은 생각을 지닌 이들이 적지 않다. 처벌이 두려워 두드러지게 나서지 않을 뿐이다.
끝으로 하나 생각해볼 점. 홀로코스트를 내세워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거나 이득을 챙기는 현실적 문제점에 대해서다. 팔레스타인에서 전쟁범죄를 저지르는 유대인들은 "우린 히틀러에게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러면서 홀로코스트를 면죄부인양 내세운다. 유대인 단체들과 변호사들은 배상과정에서 거액의 목돈을 챙겼다. '가짜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활개 치는 것도 문제다. 홀로코스트는 어느덧 유대인들에게 면죄부 또는 돈벌이로 변질됐다는 지적을 받는다. 이른바 '홀로코스트 산업'(holocaust industry)이다. 다음 주에 이를 비판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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