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부터 실패가 예견된 연금개혁이었다. 지난 3월 20일, 국민연금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으나 여·야 정치권의 반발과 시민단체나 노동단체들의 비판과 비난이 거세다. 그 비판과 비난의 관점들이 제각기 다르기도 하고, 각각의 주장에 많은 모순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비난을 피할 수는 없을 듯하다.
근본적으로 윤석열 정부와 여당은 물론, 야당들조차도 우리나라의 심각한 노후빈곤이나 노인자살이 부실하게 설계되고 왜곡 운영되어온 공적연금제도 때문이라는 문제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연금개혁 비전 못 보여줬다
그러다보니 연금개혁을 통해 이루고자하는 정책 비전을 어느 당도 국민들에게 보여주지 못했다. 연금개혁에 진정성이 보이지 않았다. 개혁의 모양만을 갖춘 채, 잘못 짜인 개혁구도 속에서 개혁의 주체가 불분명한 채 어수선하게 개혁이 진행되었다. 선장도 항해사도 없는 배가 나침판조차도 준비되지 않았으니 찾아갈 항구도 항로도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필자는 국회에 개혁기구가 급조되어 설치되었을 때, 윤석열 정부는 물론 그런 개혁구도에 비판 없이 선뜻 참여한 야당과 연금학자들에게도 문제를 제기한 바가 있다. 예상대로 결국에는 '연금개혁특별위원회'가 3차례나 재구성되며 공전하면서 '구조개혁'과 '모수개혁', '연금개혁'과 '국민연금개혁'을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개혁주체가 정부인지 국회인지, 개혁관련 정부 부처가 보건복지부만인지, 공적연금을 관장하는 행정안전부, 교육부, 국방부 등 다른 부처들의 책임은 없는 것인지 알 수 없게 진행되었으니 그 결과가 어떠하랴.
'완성판 연금개혁에 대한 약속', 개혁구도 설정에서부터 일그러져
윤석열 정부는 연금개혁을 핵심 국정과제로 내세우며 국민들에게 제대로 된 개혁을 철석같이 약속했다. 그러나 지금은 여·야 합의라는 명분을 들어 '국민연금법중일부개정안'만을 개혁이라는 상품으로 포장을 하여 통과시켜버렸다. 기억해 보라.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기간 중 "대통령 직속으로 연금개혁 기구를 설치하여 국민연금 뿐 아니라 공사연금제도 전반에 대한 개혁을 책임지고 완수하겠다."고 공약했다. 정부출범 시는 물론 '국정과제 점검을 위한 국민과의 대화' 에서도 "향후 수십 년이 지나도 연금개혁 얘기가 나오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임기에 연연하지 않고, 이해관계자들과 국민들의 참여하에, 완성품 연금개혁을 반드시 해 내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 약속의 절반만이라도 진정성 있게 연금개혁 구도 설정에 고민하고 개혁을 추진했더라면 어려움은 있었을지언정 지금과 같이 어설픈 결과를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극심한 노인빈곤과 자살, 사람의 안전보다 제도의 안전을 우선시한 연금개혁
우리나라의 노인빈곤에 대해서는 얘기하는 것조차 민방하다. 정치를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나 고급 관료들, 심지어 주류의 정책학자들까지도 여기에 무관심하거나 방관하고 있다. 그래도 자신의 정치 생명이나 이해에 아무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극심한 노인빈곤은 노인자살로 이어진다. 우리나라는 노인자살률 세계 최고 기록을 해마다 경신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10년, 20년 계속되어도 이를 타개할 정책을 구체적으로 공약하는 대통령 후보나, 정당이 없다. 참으로 이상한 나라다. 사람의 안전이 얘기되지 않고 있다.
공적연금제도를 노후소득보장과 노후존엄의 관점에서 설계하고 운영하는 국가들에서는 노인빈곤이 이슈가 되지 않는다. 노인자살도 심각하지 않다. 잘 설계되고 신중히 운영되는 공적연금이 노인빈곤과 노인자살 예방에 크게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도의 안전보다 사람의 안전을 우선하여 설계되고 운영되는 공적연금제도는 비단 현재의 노인들 뿐 아니라 언젠가 은퇴하게 될 젊은이들의 삶의 안전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들에게 미래의 불안을 제거해주어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지 않고 도전적 삶을 살도록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런 상승작용을 하는 연금제도를 만들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연금개혁논의는 항상 이와는 정반대로 흐르고 있다. '재정안정화'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운다. 그러나 이는 공적연금을 축소하려는 명분일 뿐이다. 연금제도 도입 100년이 넘어 진화해온 서양의 복지국가들이 과도한 연금을 조정하는 조치들을 차용하여 미성숙한 우리나라 연금제도의 선제적 삭감개혁을 강요하고 있다. 그들이 어떻게 장기간에 걸쳐 조심스럽게 보험료를 올렸는지, 이미 70%~90%까지 올랐던 연금 소득대체율을 서서히 낮추면서도 다른 방법으로 연금 수준을 보완해주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왔는지, 국가가 공적연금의 재원부담 주체임을 선언하고 30%이상의 예산지원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그 국가 재정으로 고등교육, 돌봄, 실업, 출산, 양육 등 소득활동에 어려움을 겪는 기간 동안 보험료를 어떻게 다양하게 지원하는지, 눈을 감고 함구하고 있다.
체제 개혁을 통해 신연금제도 구축, 정책교환(policy trade-off)에 유리
우리나라의 공적연금제도는 마치 기둥들이 기울어져 있고, 지붕과 벽에 구멍이 숭숭 나서 눈비와 바람을 막아주지 못하는 집과 같다. 어떤 것 한두 가지를 바꾸어서는 제대로 된 집 구실을 하도록 만들 수 없다. 예를 들어, 기초연금제도와 퇴직연금은 연금제도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노후소득 보장에 혼선을 주거나 역기능을 수행해오고 있다.
기초연금은 보편적 연금으로 제도의 정체성을 바로 세워야 한다. 현재의 기초연금은 최소 연금보장의 기능도, 보편적 기초연금(노인수당)의 기능도, 공적 부조기능의 수행도 하지 못하는 정체성이 없는 이름만의 기초연금이다. 공적연금의 소득대체율 계산 시에 계산에 넣지도 못한다. 공무원 등 특수직역 연금수급자들을 기초연금에서 이유 없이 배제한다. 또한 기초연금이 국민연금 가입기간과 연계되어 삭감되어 서로의 발전을 저해한다. 아울러 소득재분배 기능이 국민연금과 중복된다. 따라서 기초연금 적용의 보편성과 급여 적절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적절히 설계된 보편적 기초연금은 당해 연도 예산으로 당해 연도 연금을 지급하여 후세대에 대한 부담 전가 논란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국민연금은 막대한 기금을 보유하고 있어 국가 재정 투입이 제한됨으로 소득재분배에 따른 국가의 재정투입은 기초연금에 하도록 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게 될 때, 국민연금과의 관계도 재정립될 수 있고 국민연금의 소득재분배 기능을 축소하고 소득비례기능을 강화하여 국민연금의 재정문제를 개선할 수 있다.
퇴직연금 역시 연금제도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일시금으로 대부분 수령하기에 노후보장에 부적합하다. 따라서 연금선택을 의무적으로 하게 하고 공적기금관리기관을 설립 운영하여 기금수익율을 높이는 등의 획기적 제도 전환이 요구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특수직역연금제도와 국민연금제도의 수급구조를 같게 하는 것이다. 그래야 민관 공적연금제도간의 형평성 논란과 귀족연금 비난 등에 따른 직역 간 갈등을 방지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연금제도가 은퇴자간 집단 계급화를 형성하는 것을 방지할 필요가 있다.
세 개의 특수직역연금제도들의 구조를 '사회보험연금'과 '퇴직연금'으로 이원화 하되, 각각 독립적으로 운영하도록 하면 제도전환에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도 막을 수 있다. 사회보험연금 부분은 민관이 같게 하고, 퇴직연금 부분은 직업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차별화 하면 평등성과 특수성을 균형 있게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공무원의 직업상 특수성 보장이 필요하다면 공무원 퇴직연금 부분의 설계를 특수하게 설계해 주어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하는 것이다.
이번 국민연금 개혁은, 보험료 인상에 치중한 재정안정화 개혁
이번에 여·야가 합의한 국민연금개혁은, 외형상 더 내고 더 받는 개혁으로 보인다. 언론들이나 정부나, 여·야 모두 그렇게 홍보하고 있다. 즉, 소득대체율을 40%에서 2026년도부터 43%로 올려 소득보장기능을 강화하면서 보험료를 2026년부터 매년 0.5%씩 올려서 2033년에 13%가 되게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군 복무기간 중 6개월만 인정해주던 개인보험료 납부 없는 연금가입기간 인정을 12개월로 연장하고, 두 번 째 자녀 출산부터 인정해 주던 자녀출산 연금가입 인정기간을 첫 자녀부터 인정해주고 50개월로 제한하던 인정기간의 상한도 폐지한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여·야 젊은 의원들 모임과 여당 대권주자들은 50-60들에게 소득대체율을 즉각 올려주기 위해 젊은 청년들은 두고두고 높은 보험료를 내는 '청년 폭망 개혁'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소득대체율 3% 인상은 40년 가입기간을 기준의 인상율이기에 1년에 0.075%만 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인상된 소득대체율 적용은 법 개정 이후의 기간만 적용되기에 50세 가입자는 소득대체율 0.7%의 증가효과만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장년들의 연금급여 증가는 거의 없고 오히려 30~40년 근무하게 될 젊은 세대들에게만 혜택이 가게 된다. 반면, 상대적으로 보험료는 증가되는 시기에 모든 가입자가 똑같이 내게 된다. 따라서 소득대체율을 높이는 것은 오히려 후세대로 갈수록 더 많은 수혜를 많이 만드는 것이 된다.
이번 개혁에 대하여 정치인들은 여·야 막론하고 소득보장 관점과 제도의 합리성과 공정성, 형평성 등의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청년들을 이용하여 정치적 입지를 다지려는 모습이 뚜렷하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에서도 그렇고 이번 숙의토론 참여 청년들이나 청년 대표들은 오히려 보험료를 조금 더 내더라도 자신들이 은퇴했을 때 적절한 연금을 받기를 원하고 있다. 공적연금제도의 특성이 세대 간 부양제도라는 점만을 악용하여 세대 간 불신을 조장하는 것은 죄악이다. 오히려, 적정한 연금을 보장하는 것과, 직역 간 형평성을 보장하는 것과, 이를 위해 국가의 재정책임을 적정하게 지도록 하는 방안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해야 한다. 국가가 어떤 연금제도에 어떤 재정책임을 어떻게 지도록 하는가가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막연히 국가가 국민연금 지급을 보장한다는 규정은 심리적 위안 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말에 책임을 지는 정부, 정치인, 정당을 보고 싶다
국가는 국민들의 노후소득보장의 책임을 져야한다. 국가의 운영은 실질적으로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의 몫이기에 정치인들과 책임 있는 관료들은 노후소득보장제도의 핵심인 공적연금에 대한 공부를 진지하게 해야 한다. 수지상등의 원리나, 세대 간 형평성의 문제나, 재정안정화의 기준을 사적연금제도의 원리로 재단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사적연금제도는 금융상품이고 공적연금제도는 사회경제정책이다. 남자와 여자만큼이나 다르다.
가정에서 자식이 부모를 부양하던 것을 후세대가 전 세대를 부양하는 사회적 부양제도로 전환한 것이 공적연금제도이다. 공적연금제도에서 소득보장 기능이 약하게 되면 가정에서 자식이 부족한 부분을 메꿔야 한다. 가난해서 연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노인의 자녀는 대체적으로 가난하기 쉽다. 그러면 가난한 노인의 부족한 연금소득을 가난한 자녀가 메꿔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정의롭지 못하다. 공적연금제도를 만드는 의미가 퇴색된다.
2015년 공무원연금제도 개혁 시에 여·야 대표는 국민연금제도 개혁 시에 소득대체율을 50%로 인상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번 연금개혁 시 '시민공론단'에서도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50%로 하자는 안이 다수로 가결되었다. 노후소득보장이 그만큼 절실하고 우선한다는 합의된 결과다. 국민에 대한 약속을 지키고, 국민들의 숙의토론 결과를 존중해야 하는 것은 정당이나 정치인들의 선택이 아닌 필수다. 최우선 덕목이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정당들은 자신의 연금개혁 비전이 무엇인지, 그 비전을 위한 개혁 대안은 무엇인지 명확하게 제시하기를 바란다. 각자의 안을 가지고 있어야 토론도 하고 설득도 하고 협상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국민들의 선택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길 바란다.
*이재섭 공동대표는 사회정책학 박사(영국 University of Kent, 논문주제; 공적연금개혁의 정치)이며, 사단법인 복지국사소사이어티 공동대표 겸 연금개혁특별대책위원장, 공적연금수급자유니온 공동대표, 전,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전, 공무원연금공단 공무원연금연구소장 등을 엮임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