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52시간제 흔드는 보수 양당과 재계의 진짜 노림수

[오민규의 인사이드경제] 최저임금, 산재보험 등 '최저기준'에 예외를 허용하면 벌어지는 일

"저는 예외를 가능하면 안 두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특정 연구개발 분야, 그중에서도 고소득 전문가들이 동의할 경우 그들이 몰아서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니 할 말이 없더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2월 3일 반도체특별법 국회 토론회를 주재하며 내뱉은 말이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말이다. '전 국민 25만 원 민생지원금' 정책을 내놓을 때 윤석열 세력이 쏟아낸 "고소득자에도 예외 없이 지급하란 말이냐"라는 공격에 공감이라도 한 것일까?

최저기준 흔드는 위험한 발상

이 대표의 주장은 근로기준법에 작은 예외를 인정해주자는 것인데, 이 논리를 조금만 응용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예외가 없는 게 가장 좋죠. 그런데 경제도 어렵고 일자리도 부족하니 특정 업종, 그중에서도 종사자들이 동의할 경우 법정 최저임금보다 낮게 지급할 수 있도록 해달라 하니 할 말이 없네요."

"일자리 늘리기 위해 제조업에도 파견직 사용 가능하도록 예외를 열어줍시다 … 경제활성화지구를 만들어 기업 투자를 유인하기 위해 노조 파업시 대체근로 가능하도록 예외를 둡시다 …"

규칙이나 규율, 법 규정이나 규제는 대부분 '기준'을 잡는 역할을 한다. 그 중에서도 근로기준법은 '가장 최저의 기준'을 잡아주는 법이며 그래서 법 이름에 아예 '기준'자를 박아넣었다. 이 법에 명시된 기준 이하로 노사 당사자가 합의하더라도 그건 당연 무효가 된다. 최저기준에 예외를 두면 규칙이 완전히 무력화되기 때문이다.

당사자 동의해도 최저기준 면제는 불가

이 대표가 언급한 '당사자 동의' 역시 최저기준에 적용하면 안되는 항목이다. 기계도 혹사시키면 망가지는데 하물며 사람이라고 다를까. 그래서 너무 길게 일하지 않도록, 너무 낮은 임금을 받지 않도록, 너무 어린 나이에 특정 노동에 투입되지 않도록 규칙을 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유사 이래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일하겠노라 요구하는 노동자들은 항상 있어왔다. 최저임금보다 낮은 임금이라도 좋으니 일자리를 달라 요구하는 이들 역시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도 있으며 아마 인류가 멸망하는 그날까지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요구를 수용할 경우 사회 전체가 궤멸적인 타격을 입는다는 점이다. 장시간노동과 저임금이 얼마나 많은 노동을 파멸시켜 왔는지, '산업화' 미명 아래 군사독재 시절 갈아넣은 노동자 몸뚱이가 어떻게 사멸해갔는지, 굳이 열거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 아닌가.

이 경우 당사자 동의나 요구를 인정하거나 수용해선 안 된다. 더 일하고 싶다 해도 막아야 하고, 덜 받고 싶다 해도 각국 정부가 법으로 금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저기준'에 구멍이 뚫리면 규칙 전체가 망가진다. 아주 작은 구멍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기준에 구멍이 뚫리면 벌어지는 일

산재보험은 고용보험과 함께 대표적인 사회보험이다.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무조건 가입해야 하는 '강제가입'이 사회보험의 원리이다. 그런데 2008년에 일부 특수고용 노동자들에게 산재보험 가입 권리를 보장하면서 이 원리에 구멍이 뚫린 적이 있다. (아래 법 조항 내용)

구 산재보험법 제125조 ➁ 특수형태근로종사자는 제5조 제2호에도 불구하고 이 법을 적용할 때에는 그 사업 또는 사업장의 근로자로 본다. 다만, 특수형태근로종사자가 제4항에 따라 이 법의 적용 제외를 신청한 경우에는 근로자로 보지 아니한다.

위 조항에 따르면 본인이 산재보험 가입을 원하지 않을 경우 '적용 제외 신청'을 할 수 있도록 구멍을 열어놓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조항으로 얼마나 많은 예외가 생겨났을까? 놀라지 마시라. 강제가입 원리에 작은 구멍 하나 생겼을 뿐인데 가입대상이 된 특수고용 노동자 90% 이상이 적용제외신청을 했다.

그게 과연 당사자의 자유의사였을까? 천만의 말씀! 사업주들은 이들 특수고용직과 계약서를 체결할 때 아예 '산재보험 적용제외신청서'를 같이 들이민다. 적용제외신청을 하지 않으면 일감을 주지 않겠다고 협박한 것이다. 그러니 눈물을 머금고 90% 이상이 신청하게 된 것이다.

구멍 막기의 긍정적 효과

이 사정은 박근혜 대통령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적용제외신청제도를 폐지하거나 사유를 제한하겠다고 공약을 내걸었고, 관련 법안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를 통과하기도 했다. 그러나 법제사법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해 입법은 지연되었고, 결국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에야 적용제외신청 사유제한 입법이 완료되기에 이른다. (2020년 개정, 2021.7.1.부터 효력 발생)

▲ 2019~2024년 산재보험 가입을 허용한 노무제공자 중 실제 산재보험에 가입한 사람의 수. ⓒ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

그 결과 무슨 변화가 벌어졌을까? 위 표는 국회 환노위 김위상 의원실(국민의힘)이 고용노동부에 질의·회시를 통해 받은 자료에서 추출한 것인데, 현재 산재보험 가입이 허용되는 노무제공자(특수고용·플랫폼) 업종에서 실제 가입자 수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여주는 데이터이다. (가입자 수는 모두 각 연도별 6월 30일 현재 수치임)

적용제외신청 조항이 유지되던 2019년과 2020년에는 10만 명 밑을 맴돌던 가입자 규모는 2021년에 23만 명으로 늘어나더니 2022~2023년에는 무려 80만 명으로 폭증한다. 2019~2020년에 비하면 3년 만에 무려 10배로 가입자가 늘어난 것은 '적용제외신청'이라는 구멍을 틀어막았기 때문이다.

최저기준 겨냥한 보수 양당의 노동개악

지난 수십 년 동안 정권을 나눠먹어온 보수 양당, 그리고 한국의 자본가들은 이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노동법의 최저기준에 아주 작은 예외라는 구멍 하나만 뚫어놓으면, 그 구멍을 통해 규제 자체를 완전히 무력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때문에 한국 노동법에는 유난히 단서와 예외 조항이 많다. "…… 하여야 한다. 단, ……한 경우에는 예외로 한다(그러하지 아니하다)"라는 조항들 말이다. 산재보험법에서 본 것처럼 아주 작은 적용제외신청이란 구멍으로 무려 90%에 달하는 가입대상을 배제해버린다. 그 작은 구멍 하나 메웠더니 가입자 규모가 순식간에 10배로 치솟지 않았던가.

최저임금 차등적용 논리 또한 마찬가지다. 이미 '최저의 기준'을 정한 임금인데 여기에 예외를 만드는 순간 최저임금 자체가 작동하지 않는다. 그 구멍이 어디인가는 중요치 않다. 돌봄노동인가, 이주노동인가, 숙박업인가? 어느 한 곳만 뚫리면 그 구멍으로 온갖 산업을 다 밀어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자본가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ILO 이사회 의장국, 협약 제1호를 무력화?

국제노동기구(ILO) 제1호 협약은 '공업부문 사업장에서 근로시간을 1일 8시간, 1주 48시간으로 제한하는 협약'이다. 이 협약은 ILO가 탄생한 바로 그 해, 그러니까 1919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한국에서 기미년 3월 1일 독립운동이 펼쳐지던 시절에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전에 만들어진 그 협약, 국제노동기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협약을, 반도체산업이라는 대표적인 공업부문에서 어기자는 논의를 여야가 논의해온 것이다. 게다가 한국은 작년 6월부터 ILO 이사회 의장국으로 선출되어 윤성덕 주제네바 대사가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는 입장 아닌가.

사실 ILO 협약이라는 것도 '적정 기준'이 아니라 '최저 기준'에 해당한다. ILO는 국제 노사정 기구로서 여기서 만들어진 협약은 각국 정부와 노동자단체만이 아니라 경총을 비롯한 사용자단체들도 논의에 참여해 합의로 만들어진 것들이니까 말이다.

ILO 이사회 의장국이 제1호 협약을 무력화하는데 앞장선다면 그 국제적 망신은 누가 감당할까. 아니나 다를까 여당 중진의원 입에서는 'ILO 협약 탈퇴'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협약 탈퇴 역시 최저기준을 무력화시키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ILO 협약을 탈퇴하는 순간 한국이 체결한 각종 FTA의 '지속가능발전' 챕터 위반이 제기되고 곧바로 무역분쟁이 시작된다. 그 뒷감당은 감안하고 얘기하는 건지, 왜 항상 부끄러움은 시민 몫인지, <인사이드경제>를 쓰는 내내 물음표만 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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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입니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글을 써 오고 있습니다. 주로 자동차산업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 등을 다뤘습니다. 지금은 [인사이드경제]로 정부 통계와 기업 회계자료의 숨은 디테일을 찾아내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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