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 사태에도 상품은 배송된다. 그냥 배송되는 게 아니라 점점 빨리 배송된다. 기업들은 경쟁사들과 차별되는 배송 서비스를 내놓든가, 최소한 업계 표준을 따라가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그래서 '새벽배송', '오늘배송', '당일배송'은 물론이고 '휴일배송', '1시간 배송', '도착보장', 심지어는 '지금배송'과 '즉시배송'도 등장했다. 연 365일, 주 7일,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간다.
빠른 배송이 도입되는 업종도 다양해지고 있다. 편의점과 슈퍼마켓은 물론이고 TV 홈쇼핑도 당일배송 서비스를 시작했다. 가전제품은 추가 요금을 내면 '오늘보장'이라는 이름으로 당일 설치를 해주고, 화장품은 '오늘드림'이라는 이름으로 3시간 내 고객에게 배송한다. 빠른배송 전쟁이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그래도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지금'이라는 이름이 붙더라도 실질적으로는 1시간 내 배송이다. 네이버가 올해 선보일 계획이라는 '지금배송'은 주문 1시간 내로 상품이 배송되는 서비스고, 마켓컬리가 서울 일부 지역에서 시작한 '컬리나우' 서비스도 1시간 내 배송이다. 그런데 유럽과 미국에서는 '퀵커머스'라 불리는 빠른배송 앱들이 10분 단위로 경쟁을 벌인 선례가 있다. 해외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살펴보고, 이를 통해 유통업계의 빠른 배송 경쟁에 대한 통찰을 한번 얻어보자.
1. 2020년, 독일
2020년 독일에서 고릴라스(Gorillas)라는 회사가 설립되었다. 검정색 재킷을 입고 커다란 검정색 배달 가방을 들고 다니는 라이더들이 베를린 시내를 누비며 식료품을 배달했다. 고릴라스는 "당신보다 빠르다"라는 모토를 내세웠다. 고객이 식료품을 주문하면 10분 안에 고객의 문 앞까지 배송해 준다는 것이었다. 고릴라스는 베를린에서 독일 전역으로 빠르게 사업을 확장했고, 나중에는 유럽연합(EU)과 미국에도 진출했다. 2021년 고릴라스의 직원은 2000명이 넘었으며 1000명이 넘는 라이더를 직고용하고 있었다.
고릴라스 설립과 비슷한 시기에 플링크(Flink)라는 또 하나의 식품배송 스타트업이 베를린에서 영업을 개시했다. 독일어로 flink는 '신속하다'는 뜻이다. 플링크 역시 고객에게 10분 내로 식료품을 배송하는 서비스를 약속했다. '다크스토어'라 불리는 소규모 물류센터를 도심에 여기저기 만들어 놓고 미리 갖춰놓은 상품을 배송했다. 플링크 라이더들의 옷은 핑크색이었다. 2021년이 되자 오스트리아 등 유럽 3개국에 진출했고, 미국 음식배달업체인 도어대시(DoorDash)의 투자를 받는 기업이 되어 있었다.
고릴라스와 플링크는 둘 다 1년 만에 10억 달러가 넘는 기업가치를 인정받아 유니콘 기업이 되었다. 하지만 빛나는 성공과 별개로 노동자 처우와 관련해서는 평판이 좋지 않았다. 고릴라스에서는 초창기부터 위험한 노동 여건, 장비 문제, 성과 압박 등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이 제기되었다.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고 2022년부터는 임금 체불 문제가 심각했다. 플링크의 경우 노조 탄압을 위한 노동자 부당해고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런 가운데 두 업체 모두 신규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대폭 할인을 제공하며 투자자 자금을 빠르게 소진했다. 대부분의 배송 건들은 10분 이상 걸렸기 때문에 10분 배송 정책이 점진적으로 철회되기도 했다.
코로나 팬데믹이 끝난 2022년 12월, 고릴라스는 튀르키예에 본부를 둔 퀵커머스 업체인 게티르(Getir)에 인수되었다. 검정색 재킷을 입던 고릴라스 라이더들은 게티르의 보라색 재킷으로 갈아입었다. 게티르의 웹사이트에는 "몇 분도 소중해요. 생활이 바쁘니까요"라는 문구가 있었다. 이 게티르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잠시 후에 이야기하자.
2. 2021년, 런던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1년, 런던 시민들은 밖에 나가서 장을 보기 어려울 때 위지(Weezy), 디자(Dija), 고릴라스(Gorillas), 잽(Zapp)과 같은 앱을 이용할 수 있었다. 고릴라스는 방금 소개한 대로 베를린에 본사를 둔 업체였다.
위지는 2019년 설립되었는데 본래 유통업체가 아닌 식료품 판매업체로 출발했다. 그래서 위지는 물류창고나 다크스토어가 아닌 매장을 거점으로 신선식품 등을 배송했다. 지역사회의 소규모 빵집과 정육점 등 소상공인들과 협력한다는 점을 내세웠다. 위지는 젊은 층만이 아니라 전 연령대의 고객을 확보하고 있었다.
잽은 2020년 런던에서 설립된 스타트업으로 간식, 음료, 식료품, 약품 등을 24시간 내내 20분 내에 배송했다. 새벽 1시에 기저귀가 떨어졌다거나, 새벽 2시에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을 때 빠르게 배달해 줬다. '잽스토어'라는 이름의 다크스토어에 상품을 갖춰놓고 운영했으며, 라이더를 직고용했다. 잽은 설립 6개월 만에 런던 대부분의 지역으로 뻗어나갔고 나중에 네덜란드와 프랑스에도 진출했다.
디자는 "번거롭지 않은 최고의 장보기 경험"을 내세우며 2021년에 설립되었다. 상품이 10분 내로 도착하지 않을 경우 3개월 동안 무료배송 혜택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모든 주문은 전기자전거로 처리하고, 라이더를 직고용해서 최저임금과 유급휴가까지 보장했다. 디자 역시 영업을 하는 모든 지역에 소규모 물류센터를 확보하고 있었다. 초반에는 이익을 내지 못했고 "우선 성장에 치중"하겠다고 밝혔다.
이 기업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우선 디자는 2021년 11월 고퍼프(Gopuff)라는 미국의 식료품 배달 업체에 인수되었다. 디자에서 노동자로 일했던 라이더들은 고퍼프에서 독립계약자 형태로 일하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위지도 게티르에 인수되었다. 그리고 앞서 밝힌 대로 베를린에 본부를 둔 고릴라스 역시 게티르에 인수되었다.
잽은 2022년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철수했으며 영국 케임브리지, 맨체스터, 브리스톨에서 영업을 중단했다. 잽은 지속가능한 성장을 목표로 런던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또 인지도가 높은 딜리버루나 우버이츠 같은 음식배달 앱들과 제휴해서 자사 상품을 주문할 수 있도록 했다.
위지와 고릴라스를 인수한 게티르는? 코로나 기간에 다른 퀵커머스 업체들을 압도하며 빠르게 성장했다. 영국에서 게티르는 20분 내에 음식과 음료를 배달하는 초고속 배송을 내세워 단기간에 수십억 파운드 규모의 음식배달업체가 되었다. 독일과 영국 외에도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프랑스, 네덜란드 등으로 빠르게 사업 확장하면서 유럽 전역에서 2만 개가 넘는 일자리를 창출했다.
그러나 빠르게 성장한 만큼 사업 축소도 빨랐다. 2023년이 되어 고객들이 오프라인 매장으로 돌아가자 게티르의 확장세는 주춤해졌다. 게티르는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포르투갈에서 운영을 축소하고 2만3000명의 직원 중 10퍼센트를 감원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2024년 4월에는 독일에서도 철수하겠다고 발표했다. 1800명의 독일 게티르 직원들이 해고당했다. 5월 중순 게티르는 유럽 영업을 전면 중단하고 튀르키예 시장에 집중하겠다고 발표했다.
3. 게티르가 유럽에서 철수한 이유
"게티르(Getir)는 왜 유럽에서 철수했어?" 두 종류의 인공지능에 물어봤다. 무난한 답변이 먼저 나왔다. "총 매출액의 7퍼센트를 차지하는 유럽과 미국에서 철수하고 튀르키예 사업에 집중하기 위해"라는 게티르의 공식 답변이었다. 그와 함께 인공지능은 도심의 다크스토어 규제가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줬다. 다크스토어가 들어선 곳에서 항시적 소음과 교통체증 등의 문제가 발생하자 주민들의 민원이 늘었다. 프랑스는 일부 도심의 물류 거점에 폐쇄 명령을 내렸다.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 같은 도시는 다크스토어 신규 설립을 금지했다.
시장분석가들은 퀵커머스 업체들이 배송 속도에 초점을 맞춘 것이 판단 착오였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빠른 배송을 실현하려면 물류 거점의 수가 아주 많아야 하는데, 인구밀도가 높은 도심일수록 물류창고 임대료가 비싸다. 집품, 포장, 배송을 각각 담당할 노동자도 많이 필요하다. 고객의 집 앞까지 배달하려면 배송 과정에서 인건비가 높아진다. 게다가 배송과 물류는 부상 위험이 따르고 노동 착취가 발생하기 쉬운 분야로 손꼽힌다. 퀵커머스 사업 모델 자체의 취약성이다.
유럽의 스타트업 전문 매체인 <시프테드(Sifted)>는 게티르가 유럽에서 인건비를 많이 지출했다고 지적했다. 게티르는 주문 건당 지급하는 전형적인 긱 이코노미 모델을 따르지 않고 배달노동자에게 시간당 임금을 지급했다는 것이다.
유럽 퀵커머스 시장에서 게티르는 앱 다운로드 수나 점유율이 압도적이었는데도 버텨내지 못했다. 원인은 사업 모델 자체의 한계, 노동 관련 분쟁, 그리고 도심 내 다크스토어 규제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현재 유럽 퀵커머스 시장에 남은 주요 플레이어로는 잽, 플링크, 고퍼프가 있다. 잽은 앞서 설명한 대로 런던 중심부에 영업을 집중하고 있으며, 고퍼프는 영국에서만 운영한다. 플링크는 독일과 네덜란드, 프랑스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지난해 추가 투자를 받았지만, 아직 흑자를 낸 적은 없다.
유럽의 사례는 퀵커머스 기업의 이상적인 모습, 즉 '소비자에게 상품을 빠르게 배송하고 노동자에게는 적정한 임금을 지급하면서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룬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임을 알려준다. 특히 유럽연합이 플랫폼 노동자 법적 보호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앞으로도 빠른배송업체들에 유럽이 가장 매력적인 시장이 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4. 빠른 배송의 비용
반대로 퀵커머스 업체가 비교적 괜찮은 실적을 올리는 나라도 있다. 미국에서는 인스타카트(Instacart), 고퍼프, 그럽헙(Grubhub) 같은 업체들이 빠른배송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인스타카트는 매출액이 증가하고 있으며, 그럽헙은 아마존과 제휴해서 아마존 프라임 회원들에게 음식배달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는 전략으로 생존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인도에서 퀵커머스 업체들이 10분 배송을 내걸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미국과 인도의 공통점은 유럽 국가들에 비해 규제가 약하고 도심 인구밀도가 높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값싼 노동력이 풍부하다. 기술 혁신 같은 다른 조건들은 미국이나 유럽이나 동일하므로, 결국 퀵커머스 수익성의 차이는 사람의 노동과 관련된 조건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하자면 퀵커머스는 값싼 노동력이 풍부하고 노동자 보호가 약한 나라에서 성공할 수 있다. 심지어 유럽에서도 퀵커머스의 '10분 배달'을 담당했던 라이더의 다수가 이민자였다.
그러면 한국은? 한국에서는 퀵커머스 스타트업들이 서로 경쟁하며 시장을 주도하는 양상이라기보다, 기존의 이커머스 강자들이 배송 경쟁을 벌이면서 스타트업과 제휴하는 양상이다. 시장 점유율이 절대적으로 높은 기업이 로켓의 속도로 배송하고 있으니 다른 기업들도 따라가려고 한다. 그래서 주5일 배송을 하던 택배업체가 주7일 배송으로 전환한다. 그러는 동안 도시 소비자들은 상품을 초고속으로 받는 것에 익숙해진다.
그러나 편리함에 공짜는 없다. 누군가는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기업이 손해를 감수하면서 영업하거나, 소비자가 빠른 배송에 대해 추가적인 요금을 지불하지 않는 이상 노동자에게 비용이 전가되기 쉽다. 시간 내 도착을 '보장'하려면 누군가는 더 빨리 뛰어다녀야 한다. 새벽배송 서비스를 제공하려면 누군가는 야간노동을 해야 한다. 배송 노동자의 건강권과 노동권을 확고하게 보호하는 조치가 이뤄지지 않으면 유통업계의 '빠른배송 전쟁'은 사람 잡는 결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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