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복지공단이 삼성전자 반도체 공단에서 일하며 유해물질에 노출돼 본인은 물론 태아마저 질환을 앓게 된 노동자들의 '태아 산업재해' 승인 신청을 거절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한 뒤로 국회의 입법 활동이 사실상 마비되면서 자녀산재와 관련한 법 개정이 미뤄진 탓이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등 38개 시민단체는 26일 서울 영등포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지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 12일 공단이 관련 법 개정이 통과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녀산재 피해자 3명에 대해 불승인 통보를 내렸다며 "윤석열이 선포한 계엄으로 왜 반도체 산재 피해자가 고통을 겪어야 하느냐"고 규탄했다.
1997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18년여간 근무하다 대장암을 얻고 자녀도 자폐 진단을 받아 자녀산재를 신청한 유모 씨는 대독을 통해 "비상계엄을 선포한 윤석열 대통령 때문에, 탄핵하느라 국회에서 법 개정을 논의할 시간이 없었을 것"이라며 "그런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공단과 고용노동부가 이렇게 피해자를 우롱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성토했다.
그러면서 "국가가 반도체 산업이 중요하다면서 기업들에게 특혜를 주는데 왜 반도체 노동자들은 아프면 버리고 내치느냐"며 "나도 살고 싶다. 우리 딸아이도 지키고 싶다. 부디 제대로 조사해 산재를 규명해달라"고 했다.
2004년부터 7년간 삼성전자 LCD사업부에서 근무하며 얻은 자녀가 눈, 심장, 귀 등에 장애가 생기는 차지증후군을 앓자 자녀산재를 신청한 정모 씨도 "산재보험은 일하다 아프게 된 사람들을 보호하는 보험으로 알고 있다. 내 아이 또한 내가 일하다 아프게 태어났다"며 "아픈 아이를 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올해 연말은 너무나도 차갑다. 산재인데 산재보험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연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호소했다.
앞서 2022년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을 통해 업무 중 재해로 자녀가 장해를 입은 경우 산재보험을 받을 수 있게 됐지만, 법 시행 1년 전에 태어난 자녀까지만 산재보험을 신청할 수 있고 아버지는 자녀산재 피해를 입어도 보험을 신청할 수 없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지난 10월 근로복지공단 등을 대상으로 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박종길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은 정모 씨의 태아산재 신청이 인정되지 않은 사례를 두고 "이건 입법 미비 아니냐. 부모들한테 이중 고통을 주는 것이라는 데 동의하느냐"는 더불어민주당 김주영 의원의 질의에 "그렇게 생각한다"고 답한 바 있다.
자녀산재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조승규 반올림 노무사는 "법 시행 전 자녀산재 신청기간을 늘리는 개정안과 아버지의 업무로 인한 자녀산재를 인정하는 태아산재법 개정안이 국회에 발의됐지만 계엄상황으로 논의가 진행되지 못했다. 공단은 조사와 판정 등 절차를 밟으면서 국회 논의를 기다릴 수도 있었는데 현행법대로 하겠다며 갑작스러운 불승인 결정을 내렸다"며 "공단은 지금이라도 국회의 법 개정 논의를 겸허히 기다려야 하고 국회는 빠른 시일 내 자녀산재법 개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했다.
명숙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상임활동가도 "이것은 또 하나의 계엄이다. 자녀산재 불승인 결정은 위법이 아닐지언정 윤석열의 계엄처럼 기습적이고 신속하게 이뤄졌으며 노동자의 인권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 너무나 닮아 있다"며 "더 이상 노동자들이 병들고 일하다 죽지 않도록 일터를 민주적으로 바꿔야 한다. 근로복지공단은 이 변화의 흐름에 동참하라"고 촉구했다.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전삼노) 또한 이날 성명을 내고 공단의 자녀산재 불승인 통보를 규탄했다. 이들은 "공단은 올해 10우러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의 방사선 피폭 사고에도 우왕좌왕 대처했고 그 결과 '삼성 봐주기 아니냐'는 의혹을 샀다. 이번 불승인 결정 역시 공단의 안이한 노동자 보호 인식이 다시금 드러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삼노는 "이번 사건은 분명 국가와 사업주가 함께 책임져야 할 사안이지만, 근로복지공단과 고용노동부는 오히려 피해자들에게 높은 문턱을 쌓고 있다"며 "피해자들을 외면한 공단은 지금이라도 불승인 결정을 철회하고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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