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강국의 그늘, 화학물질은 아직도 노동자를 죽인다

[프레시안books] 반올림 기록팀 <회로를 이탈하다>

지난 17일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활동가로부터 "오늘 또 한 분이 돌아가셨어요"라는 문자를 받았다. 바로 그다음 주 인터뷰 요청을 드리려 했던 전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노동자 고 박종성 님이었다. 폐암 말기로 4년 넘게 투병하다 사망했다.

깊이 황망하면서도, 이게 전자산업의 맨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학물질의 무서움이다. 반도체뿐 아니라, 디스플레이, 이차 전지, 전자회로 기판 등 나노미터 수준의 가공, 박막, 에칭 등의 공정이 동반되는 전자산업은 유해 화학물질의 집합소다. 중금속이나 벤젠 등 독성물질부터 유기용제, 강산·강염기 등 다종다양한 유해물질이 재료다.

'안전하다'거나 '위험이 없다'는 단정은 충분히 과학적이지 않다. '영업비밀'이 적용돼 세부 성분이 공개되지 않는 혼합물이 많고, 클린룸 등 실제 생산현장에서 어떤 2차 부산물이 만들어지는 지도 100% 파악되지 않았다. 입자가 아닌 유해 기체는 필터에 걸리지도 않고, 클린룸 전 구역에 확산할 수 있다.

기술 경쟁 때문에 신규 합성 화학물질은 수개월 단위로 교체되지만, 인체 독성 평가엔 적어도 수년이 걸린다. 작업자는 자신이 쓰는 물질이 완전한 독성 평가를 거쳤는지도 알지 못한다. 법적 기준치 이하의 농도라 해도, 여러 유기화합물에 장기간 노출됐을 때 인체에 미치는 영향은 아직 의학적으로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즉 위험은 전자산업의 본질 중 하나다. 그리고 이 위험은 이재용, 최태원 같은 총수나 임원이 아니라 최일선의 현장 노동자들 바로 옆에 있다.

반올림이 지난해 말 발간한 <회로를 이탈하다> 구술 기록집은 전자산업의 맨얼굴을 직업병 피해자 15명의 목소리로 드러낸다. 삼성전자, 삼성디스플레이, SK하이닉스, 서울반도체, 케이엠텍, 스태츠칩팩코리아 등 반도체·LCD 공장의 노동자들이다. 직종도, 질환도 다양하다. 모두 유방암, 폐암, 위암, 림프종(혈액암), 백혈병, 다발성 신경증 등 난치성 및 희귀 질환이다.

▲반올림 기록팀 <회로를 이탈하다> ⓒ반올림

반도체 폐기물·분진 청소한 노동자, 폐암 사망

책의 12번째 주인공인 박종성 님의 삶은 한국 사회의 압축판과 같다. 1986년 삼성코닝에 입사해, IMF 이후 1999년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분사돼 삼신주식회사 직원으로 전환됐다. 그러나 수년간 월급 삭감과 임금 동결이 이어진 후 정리해고까지 단행되려하자, 2005년 노동조합을 만들려 했다. 회사는 '유령노조'를 만들어 노조 결성을 방해했다.

그는 이후 삼성전자 기흥·화성 공장 하청업체에 입사했다. 반도체 공장의 폐기물, 분진을 처리하고, 기계·배관 등을 청소하는 일이었다. 짧게는 6개월, 길게는 2년 단위로 업체만 바뀌었다. 그렇게 12년 간 독성화학 폐기물과 분진 속에서 일했고, 2022년 폐암 4기를 판정받았다. 몇 개월 후, 한 반장이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표적항암제 약값으로 매달 800만 원을 써야 했지만, 하청노동자인 그는 가난했다. 그는 2025년 9월 "근로복지공단 여러분 제발 살려 달라"고 말하며 산재 신청을 했다. 10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그는 '내가 가야 감추고 안 보여주는 걸 알려줄 수 있다'며 공단의 현장조사를 꼭 따라가려 했지만, 그 전에 사망했다.

그의 구술 기록엔 '잉어 떼죽음' 일화가 나온다. 공장 폐수 마지막 단계에서 키우는, 시민들이 볼 수 있는 잉어가 있었는데, 어느 날 이 잉어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화학물질의 위험성을 잘 보여주는 일화다. 이후 도랑 주변엔 펜스가 설치돼 '작업 중' 팻말이 걸렸지만, 그는 "작업은 무슨 작업. 물이 오염돼서 죽었다"고 말했다.

▲지난 7월 17일 사망한 고 박종성님 빈소. ⓒ반올림

휘황찬란 '3대 메가' 안전·위험 언급 없어

김혜수(가명) 씨는 네 남매 모두가 반도체 회사에 다녔다. 그중 하이닉스에 다녔던 큰 언니는 33세에 위암으로 사망했고, 막내동생은 반도체 공장의 세정 설비를 유지보수하는 업체에서 13년간 일하다 백혈병 진단을 받고 6개월 뒤 사망했다.

이른 나이에 난치성 질환에 걸린 청년 노동자도 여럿이다. 1992년생 고 이가영 씨는 23세에 서울반도체에 입사해 25살 이미 뼈와 뇌에 전이가 된 채로 희귀질환인 '역형성 대세포 림프종'을 확진받고 2년 후 사망했다. 특성화고를 졸업한 이승환(23) 씨는 고3 때부터 케이엠텍에서 일을 시작했고, 2년 만에 백혈병을 진단받았다. 마이스터고를 졸업한 김선우(24) 씨도 스태츠칩팩코리아에서 일한 지 1년 만에 독성간질환을 얻었다.

책에 실린 15명의 노동자 중 5명이 사망했다. 반올림은 2007년 6월부터 지난 2월까지, 211명이 산재 신청을 했고, 이 중 115명이 산재 인정을 받았다고 밝혔다. 시신경척수염, 다발성경화증, 거대세포종, 루게릭병, 웨게너씨 육아종증 등 희귀 난치 질환을 포함한 49종의 질환이 확인됐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은 3대 메가 프로젝트란 화려한 구호를 내걸며 전자산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약속했다. 그러나 발표문 어디에도 위험이나 안전에 대한 언급은 찾을 수 없다. 기초적인 균형도 맞춰지지 않았다. 전자산업이 전자기기를 대량 생산하고 판매하는 결과만 고려하면 되는 산업일까. 정부는 누구의 삶을 보호해야 하느냐는 의문이 든다.

반올림은 '직업병 피해자'라는 호명 뒤에 가려진 피해자들의 삶을 충실히 드러내기 위해 생애구술사를 기획했다고 밝혔다. 6명의 기록자가 2025년 8개월간 피해자와 유족을 만나 글을 썼다. 책은 정식 출판하지 않고 후원 판매된다. 아래 링크를 통해 구매할 수 있다.

기록집 <회로를 이탈하다> 후원 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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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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