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기흥사업장 LED 생산공정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이 유해 요인에 노출돼 본인이 암에 걸린 것은 물론 태아마저 희귀질환 등을 앓고 있다며 근로복지공단에 이른바 '태아 산업재해' 승인을 신청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은 11일 서울 영등포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지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같이 밝혔다.
이날 산재를 신청한 이들은 △자녀가 자폐 진단을 받았고, 본인도 대장암으로 투병 중인 유모 씨, △ 2명의 자녀가 지적장애 진단을 받은 A씨, △난소암으로 투병하다 사망한 고(故) 이모 씨 유족 등이다. 이 중 유 씨는 이날 회견에 직접 참가했고, 다른 2명도 호소문을 보내왔다.
1997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18년여 간 근무한 유 씨는 자신의 근무환경에 대해 "약품이 손이나 방진목에 묻고 냄새가 심하게 나는 일들을 했다"며, LED 생산공정에서 '연구소마냥 약품이 그대로 노출돼있는 모습'도 봤다고 회상했다.
유 씨는 자녀의 질환을 산재로 의심하게 된 계기에 대해 "명예퇴직 후 같은 라인에서 일했던 동료 선후배들과 만나면서 우연히 제 딸과 같은 장애를 안고 있는 동료가 여러 명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1995~1999년 입사한 비슷한 또래 여성들에게서 지적장애, 자폐, 희귀질환 자녀가 다섯 명이나 됐다. 같은 조 동료들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본인 질환과 관련해서도 "현재 재직 중인 친구도 저와 같은 대장, 직장 쪽의 암으로 투병 중이고, 얼마 전에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배도 있다"며 "또 저와 같은 근무조에 있던 후배 여사원 두 명은 뇌종양, 림프종으로 아팠다"고 했다.
유 씨는 "삼성전자가 앞으로 더 이상 아픈 사람이 나오지 않는 안전한 회사가 되기를 희망한다"며 "큰 용기를 내 산재 신청을 한 만큼 끝까지 해볼 생각이다. 부디 저를 보시고 더 많은 사람이 용기내셨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A씨는 자신에 대해 "아직도 2세가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못 받아들이고 있는 못난 엄마이고 내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말하면서도 "단지 내 아이뿐 아니라, 반도체와 LED 라인에서 근무했던 많은 사람들이 본인과 2세의 건강을 잃었다는 것에 용기를 내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어 "비록 나의 2세에게 장애라는 심각한 돌덩이를 안긴 회사지만 저의 젊음과 같이한 회사를 미워하고 싶지는 않다. 피해받는 현장 노동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보상하는 양심 있는 삼성이기를 바란다"고 촉구했다.
세상을 떠난 이모 씨의 언니인 B씨는 "집안에 난소암에 대한 가족력이 전혀 없는데 왜 이런 병이 걸렸을까. 우리 동생이 왜 이렇게 젊은 나이에 암으로 사망해야 하는지 꼭 밝혀달라"며 "억울하게 죽은 우리 동생의 한을 꼭 풀어달라. 그리고 꼭 산재를 인정해주시기 바란다"고 했다.
반올림은 회견문에서 "오늘 산재를 신청한 노동자들이 근무한 삼성전자 LED 라인은 전자산업 직업병의 상징과도 같은 공간"이라며 "과거에 반도체 3라인이었던 이곳에서 작업자들이 직접 화학물질에 웨이퍼를 담그는 등 열악한 환경으로 많은 피해자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이어 "반도체 직업병을 처음 알린 고 황유미님 또한 반도체 3라인 피해자였다"고 덧붙였다.
반올림은 "삼성은 그간 노동자들을 위험에 내몰았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LED 라인의 비극에 대해 전혀 조치하지 않은 정부 또한 마찬가지"라며 "정부와 삼성이 피해자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책임을 느낀다면, 지금이라도 LED 라인의 피해자 상황과 열악한 작업환경에 대해 조사하고 사과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반올림은 또 2022년 만들어진 태아산재법(산재보험법 개정)이 이미 태어난 건강손상자녀에 대해 소급효를 인정하지 않아 이날 태아산재를 신청한 이들이 이 법의 적용을 받지 못한다며 "국회는 서둘러 태아산재법을 개정해 이미 발생한 건강손상자녀 피해자들에게도 충분한 신청기간을 보장하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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