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加耶)의 출발은 김해 대성동고분군의 축조에서 비롯됩니다."
신경철 부산대 교수는 27일 '김해 대성동고분군과 유네스코 세계유산’ 주제 제29회 가야사학술회의에서 이같이 피력했다.
신 교수는 "가야에 대한 기록은 지극히 영세하다"며 "이는 동시기의 고구려·백제·신라와 대비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가야사의 복원은 상대적으로 매우 지체되었거나 여전히 많은 문제가 미궁의 상태로 남아 있다"고 밝혔다.
신 교수는 또 "가야에는 기록은 없고 유적만 남았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면서 "가야사의 복원은 거의 전적으로 고고학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다행히 근년 가야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가 급격히 진행되고 있다. 또한 고고학 자료에 의한 가야사 전반을 언급할 만큼 고고학자료는 충분히 확보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 중심에는 김해 대성동고분군이 자리 잡고 있다는 뜻이다.
신 교수는 "가야의 출발은 대성동고분군의 출현과 궤를 함께 하므로 대성동고분군의 존재 없이는 가야사자체를 논할 수가 없다"며 "현재 학계에서는 대성동고분군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고 지적했다.
신 교수는 "금관가야의 사실상의 몰락으로 기왕의 가야는 친신라(친신라계가야)권과 비신라(비신라계가야)권으로 이분되며 비신라계가야권은 다시 대가야연맹·아라가야·소가야연맹으로 분열된다"고 말했다.
"가야 연구자들 중에는 대가야를 과도하게 평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신경철 교수는 "대가야는 친신라권과 비신라권 분열된 후기 가야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고 밝혔다.
신 교수는 "가야의 최성기는 대성동고분군이 존재한 전기가야 때였이다"면서 "후기가야는 전기가야에 비해 현저하게 약화된 가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가야도 예외는 아니다. 이 점에서 대가야는 어디까지나 후기가야의 지역연맹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대성동고분군 축조중단으로 금관가야의 핵심세력은 여러 곳으로 이주한 것으로 생각된다"며 "초기수혜기(初期須惠器)를 비롯한 고고자료로 볼 때 주요세력의 일부는 일본열도로, 또 다른 일부는 영남의 내륙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신 교수는 "대가야·아라가야·소가야의 특징적인 토기양식이 출현하는 5세기 중엽까지인 20~30년 가량의 ‘비신라계가야’ 지역의 토기를 통칭하는 것이다"면서 "대성동고분군 축조중단부터 ‘비신라계지역’의 各政治體의 체제안정시기까지의 불안정기를 ‘토기형식의 난립기’로 표현한 것이다"고 말했다.
신경철 교수는 "가야지역의 토기형식의 난립기란 곧 가야지역의 혼란기를 말한다"고 하면서 "비신라계가야 지역은 토기형식의 난립기에는 정치체가 성립되지 않았거나 존재했다 하더라도 매우 불안정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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