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사회적 욕망을 제거한 한 지식인의 일상이 궁금하다면

[영화, 시대를 넘다] 퍼펙트 데이즈

평온한 일상을 산다는 것은 지루함의 반복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 지루함을 지루함이 아니라 편안하고 평화롭게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능한 한 혼자여야 한다. 사람이 얽히고 관계가 엮이면 평화는 있을 수 없다. 도피 아닌 도피, 은둔 아닌 은둔은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공격적인 평화 추구 행위이다. 평이한 일상을 유지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 또 한가지는 정해진 루틴을 잃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정해진 것을 먹으며, 정해진 일상의 도구들을 쓰고, 정해진 길을 다니며, 정해진 휴식을 취해야 한다. 일상이 나를 변화시키려 아무리 애를 쓴다 한들 나 스스로는 일상을 고정해야 한다. 그래야 돌발의 변수를 최소화 할 수 있다. 나 혼자만의 일상을 깨뜨리지 않을 수가 있다.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 히라야마(야쿠쇼 코지)는 매일 새벽 동네 할머니가 골목길을 쓰는 빗질 소리에 잠을 깬다. 그 소리에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매일 똑 같은 방식으로 개고 좁은 계단 아래에 있는, 역시 아주 작은 주방 겸 욕실에서 이를 닦은 후, 물 뿌리개를 갖고 올라 와 창가에 모아 놓은 화초에 물을 뿌린다. 이 화초는 그가 매일 점심 때 들러서 벤치에 앉아 점심을 먹는 도쿄의 한 신사에서 스님의 허가를 받아 캐 온 풀이거나 꽃이다. 그는 꽃에 물을 준 후 옷을 갈아 입는다.

히라야마는 도쿄 공중화장실의 청소부이다. 현관 문을 나가기 전 선반에서, 어제 퇴근하면서 가지런히 늘어 놓은 것들을 챙긴다. 일단 필름용 소형 카메라를 웃옷 포켓에 넣은 후, 자동차 키를 챙기고, 곧 뽑아서 마실 캔 커피 동전을 챙긴다. 시계는 어떤 날은 차고 나가고 어떤 날은 두고 나간다. (조용한 아침에 비해) 문을 비교적 벌컥 열고 나와서는 거의 매일처럼 하늘을 본다. 오늘은 맑겠군, 아니면 오늘은 흐리네, 라는 표정을 짓는다. 그는 자신의 낡고 오래된 차에 올라, 차 안 위쪽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카세프 테이프 중 하나를 골라 꽂는다. 화창한 날에는 애니멀스의 '하우스 오브 라이징 선'을 듣고 조금 흐린 날에는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페일 블루 아이즈'를 듣는다. 그리고 곧 그의 화장실 노동이 시작된다. 퇴근한 직후에는 동네 목욕탕에서 몸을 씻고 자전거를 타고 나가 허름한 지하상가에서 하이볼을 한 잔 마신다. 가끔 중고책방에 들러 1천원짜리 문고판 책을 하나 산다. 그는 요즘 윌리엄 포크너 책을 읽고 있으며 그걸 다 읽은 후에는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11>을 사서 보게 될 것이다.

▲<퍼팩트 데이즈> ⓒ티캐스트

히라야마의 하루 일과는 영화적으로 30분 정도이다. 전체 러닝타임 2시간짜리인 영화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같은 얘기를 4번 반복한다는 것인가. 그것도 나쁘지 않은 실험적 예술이 될 것이다. 같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같은 미세한 균열과 변화를 영화가 어떻게 캐치할 것인가도 흥미로운 지점일 수 있다. 게다가 히라야마는 영화가 시작된 후 1시간10분이 지나도록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는다. 그와 같이 화장실 일을 하는, 덜 떨어졌지만 그래도 착해 빠진 청년 타카시(에모토 토키오)는 사귀고 있는 술집 여급에게 히라야마가 너무 과묵하다며 그가 좀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 말 속엔 히라야마가 이런 일, 곧 청소부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암시가 깔려 있다.

히라야마의 삶을 보고 있으면 그 옛날, 지금은 잊힌 감독이 돼 버린 웨인 왕의 주옥 같았던 초기작 <스모크>(1995)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얼마 전 작고한 희대의 작가 폴 오스터의 단편을 영화로 만든 이 작품에서 주인공 오기(하비 카이틀)는 자신의 잡화점 가게에서 주로 담배를 팔아 가며 사는데 그는 매일 정해진 시간, 정해진 스폿(spot)에 삼각대를 세우고 지나가는 거리를 찍는다. 거리는 매일 똑같지만 거리의 표정은 매일 바뀐다. 오기가 담는 거리의 모습처럼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 히라야마의 매일매일도 반복되는 생활은 같아도 거의 매일처럼 미세한 변화가 읽혀진다. 다만 숨 죽이며 그 변화를 지켜 볼 뿐이다.

<퍼펙트 데이즈>를 만든 독일의 빔 벤더스 감독은 말년에 이르러 점점 더 사색이 깊은 극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는데 다소 기복이 있다 해도 히라야마의 일상처럼 비교적 고른 점수의 작품을 만들어 내고 있다. 벤더스는 일찌감치 일본적인, 극도로 고요한 삶에 경도돼 왔으며 그 질서와 정돈의 정도에 매혹당해 왔다. 빔 벤더스가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일본 감독은 오즈 야스히로이고 그래서 만든 것이 다큐멘터리 <도쿄가>이다. 빔 벤더스는 종종, 아니 자주 다른 예술가를 향한 존경심과 예를 표하곤 하는데 <도쿄가>같은 류의 작품을 만드는 일이 그것이다.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이나 <피나>같은 작품이 그랬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너무 좋아해서 <돈 컴 노킹>이란 영화도 만들었다. 이번 <퍼펙트 데이즈>는 폴 오스터의 소설을, 에드워드 호퍼 풍의 화면으로 찍되, 오즈 야스히로의 고즈넉한 분위기로 그려 나간 작품이다. 그런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 예술적으로 엄청나게 고양돼 있는 작품인 셈이다.

ⓒ티캐스트

반복되는 일상이어도 히라야마의 삶에 미세한 균열과 변화가 가해진다. 그건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그가 일상을 변하게 하지 않으려 한들 일상이 스스로 변하거나 그에게 끊임없이 작은 충격이나마 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그에게 가출한 조카 딸 니코(나카노 아리사)가 찾아오기도 하고 고급 승용차를 탄 그의 누이 케이코(아소 유미)가 그 아이를 찾으러 오기도 한다. 그는 차를 타고 떠나는 누이 동생을 한번 안아 주고 홀로 됐을 때 울기도 한다. 동료 청소부 타카시가 여자 친구 때문에 술집에 가야 한다며 돈이 필요하다고 해서 돈을 뜯기기도 하며, 그것 때문에 차 기름이 떨어지자 아끼는 카세프 테이프 중 하나를 비싼 값에 팔기도 한다. 공중화장실 운영본부에 전화해서는 타카시를 대체할 다른 인력을 빨리 보내 달라며 약간 화를 내기도 한다. 조카 니코는 히라야마에게 자신의 엄마가 얘기하길 "너의 삼촌은 우리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이야"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조카 니코는 삼촌 히라야마를 좋아하고 흠모한다. 히라야마의 아주 조용한 삶을 흔들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조카 니코 뿐이다.

히라야마가 왜 공중화장실 청소부의 삶을 살게 됐는지 영화는 일일이,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아니 매우 모호하게 처리하는데 그게 이 영화의 또 다른 위대한 지점 중 하나이다. 사람 모두는 각자가 지닌 풍파의 삶, 그 에피소드로 살아가기 마련이며 그 사연의 깊이 하나하나가 눈물과 웃음 없이는 들을 수 없을 터이다. 그걸 다 기록할 수는 없는 노릇일 것이다. 조용히 묻고 살아 가는 삶, 거기에 역설적으로 인생의 성취가 달려 있을 수 있다.

<퍼펙트 데이즈>는 비뚤어지고 왜곡된, 군사주의와 집체주의의 역사 아래 과도할 만큼 신중하고 조심스런 삶을 살아가는 일본 사회에서 의도적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회피한 한 지식인의 절망스럽지만, 그렇다고 죽음에 이르기까지는 않는, 그래서 오히려 희망을 찾으려는 고단한 노력 같은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마치 이병주의 소설 <행복어 사전>의 주인공 서재필이 의도적으로 교열부 기자의 삶을 택한 것 같은 소극적 실천의 행위일 수 있다. 언급하지 않음으로 해서 비판하고 관여하지 않음으로 해서 동조하거나 휩쓸리지 않은 삶은 그래서 오히려 더욱 더 간난(艱難)하고 힘들다. 사람이 욕망을 스스로 제거하려 할 때만큼 스스로에게 가혹해질 때는 없다. 히라야마는 스스로 욕망을 차단한 지식인이다. 혹시 그는 전공투 세대였을까. 한때 적군파에 경도됐다가 그 폭력성에 급격한 회의를 느꼈던 젊은 시절을 보내지 않았을까. 이 영화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는 것은 한 인간이 지닌 역사성이라는 것이 필시 보편성을 띠고 있어서일 수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오래 이어지는 히라야마의 정면 쇼트를 보면서 야쿠쇼 코지가 실로 인생 최대의 연기를 펼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코지는 이제 더 이상 배우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번 영화로 다 이루었다. 그는 뛰어난 배우이다. 더 훌륭한 것은 그가 정말 좋은 사람일 것 같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국내에서 7월4일에 개봉한다.

ⓒ티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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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

오동진은 신문,통신,방송사 문화부 기자로 경력을 시작했다.영화전문지 FILM2.0과 씨네버스의 창간멤버와 편집장을 지냈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집행위원장과 부산국제영화제 마켓 운영위원장이었다. 현재 영화 글만 쓰고 산다. 들꽃영화상 운영위원장이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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