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죽으러 들어갔다" 용균이 잃은 엄마가 맞닥뜨린 세상

[6411 투명인간의 목소리] ④ 김미숙 사단법인 김용균재단 대표

경희대학교와 노회찬재단은 2023년 1학기부터 200여 명의 학생이 듣는 교양강좌 '후마니타스 특강 : 6411의 목소리와 노동존중 사회'를 협력 운영하고 있습니다. 수업은 노회찬재단이 <한겨레신문>과 공동으로 진행 중인 연재 칼럼 '6411의 목소리' 필자를 매주 한 명씩 모셔 한 학기 동안 특강으로 운영합니다. '존재하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6411 당사자들이 청년들에게 전해주는 자신의 삶과 노동 이야기를 <프레시안> 지면으로 중계합니다.

다섯 번째는 김미숙 김용균재단 대표의 이야기입니다. 자신보다도 사랑했던 아들 용균이를 산업재해로 잃은 그는 진상규명을 위해 한참을 싸웠습니다. 그리고 용균이의 이야기가 용균이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매년 2000여 명의 노동자가 산재로 목숨을 잃는 이상한 세상을 바꾸기 위해 그는 김용균볍과 중대재해처벌법을 만드는데 온힘을 다했고, 여전히 더 안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며 살고 있습니다.

저를 불러 이야기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아들 키울 때, 어려서부터 허약해서 감기를 달고 살았어요. 요즘은 교육률이 높아서 아기 때부터 기초 교육을 하고 애들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학원을 보내지 않습니까? 저는 애가 건강하게만 우리 곁에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행복했으면 좋겠다가 제일 우선이었습니다. 이렇게 몸이 허약한데, 그렇게 애쓰지 않고 행복하게 자라다 좋은 일자리 취업이 정 안 되면 개업을 해서라도 먹고 살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으로 아이를 학교 갔다 오면 실컷 놀게 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친구들하고 재미있게 놀았던 게, 나이가 들어가다 보니까 정말 마음에 위로가 되고 그런 것이 진짜 필요하구나 라는 생각을 했고 아이도 저보다 너은 세상에서 삶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고등학교 때까지 태권도 학원만 보내고 다른 학원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되면서 애가 이제 대학을 가야 되니까 다른 학생들과 경쟁을 하더라고요. 용균이가 영,수 과목이 학업 전체 평균을 떨어트려 학원을 보내달라고 얘기해서 영수 학원을 보내줬어요. 학원 석 달을 다닐 때였어요. 영수가 거의 95점 이상이 넘어서 본인이 학원을 안 다니겠다고 저한테 얘기하더라고요. 지금 잘 하고 있는데 왜 그러냐 그랬더니 "안 다녀도 학원에서 공부하는 방법을 알려줘서 이 점수 나올 수 있다"고 해서 "그럼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그랬죠. 원래 성적이 뒤쪽에서 머물렀었는데 그렇게 학원 다니면서 이제 반에서 거의 1, 2등을 놓치지 않았어요. 반에서지만. 그렇게 이제 자존감도 높아지고, 내신 성적으로 대학도 다니고, 장학금 받으면서 다녔거든요.

그런 아이가 사회 나가는 것에 저는 누구나 하는 끼니 걱정이나 적응 걱정만 있었지 다른 부분은 하나도 걱정을 안 했어요. 너무나 집에서 모범생 같았고, 언제나 저희와 의논을 해서 결정했기 때문에, 그리고 저는 아이를 키우면서 제일 중요한 게 아이한테 아기 때부터 한 인격체로서 의사 존중해 줬거든요. 항상 이야기로 문제를 해결하고 그래서 서로 이해하는 관계였기 때문에 아이도 별 탈없이, 속 썩인 적 없는 아들이었습니다.근데 저희 부부는 자식이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용균이만 보고 살았거든요. 저는 그때 당시에 직장 생활을 했었고 가정을 중시하면서 살았는데, 저는 저 자신이 이 세상 누구한테도 가치가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저 자신보다 중요한 거는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요. 저보다 더 소중한 게 있었는데 그게 제 자식이었습니다. 그런 아이를 회사를 보냈는데 거기가 서부발전사 하청 한국발전기술 이었습니다.

▲고 김용균 씨 ⓒ필자제공

청천벽력 같던 용균이의 사망 소식, 그리고 이상한 현장

한국발전기술 입사하고 3개월도 안 됐는데 갑자기 집으로 전화가 와서 아이가 사고가 났다고 했습니다. 부랴부랴 태안의료원으로 달려갔는데, 거기서 하청 이사라는 사람이 저희를 맞이하며 하는 말이 되게 이상했습니다. '용균이는 착하고 일도 잘하고 성실했는데, 가지 말라는 곳을 가서 하지 말라는 일을 해서 사고가 났다'고 했습니다. 처음 보는 저한테 그게 할 소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일단 사과를 하고 나중에 사고 원인을 밝혀서 그다음에 이렇게 결과가 나왔다고 이해를 시켰으면 저는 그렇게 받아들였을 건데 거기서 바로 사고가 난 지 이제 만 하루도 안 지났잖아요. 사실 그날 사고 난 날은 밤 10시 반이 넘어서였고, 그다음 날 제가 갔으니까. 그런데 제대로 된 사고 조사도 없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말이 미심쩍어서 바로 그다음 날 현장에 들어갔습니다. 자식 죽은 곳에 제가 왜 들어가고 싶겠어요? 절대 가고 싶지 않죠. 너무 끔찍한 곳이었고. 근데 거기서 무슨 일을 하다가 어떤 위험으로부터 우리 아들을 죽게 했나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제 눈으로 직접.

사고 현장을 갔는데 4층으로 되어있던 그 안에는 탄가루가 눈처럼 쌓여 있었고 컨베이어벨트가 가동되면 분진이 날려 눈앞에 시야가 많이 막히는 곳이었습니다. 용균이가 일한 곳은 9~10호기였는데, 여기가 최신 시설이라고 아들이 얘기해서 저는 그만큼 안전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보니까 수많은 회전체가 다 안전 커버 없이 노출되어 있고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해 수입한 탄을 이동시켜 전기를 생산하게 되어있더라구요. 그런 컨베이어벨트를 이동하기 위해 수많은 회전체가 컨베이어를 물려서 가동되고 있거든요. 근데 컨베이어를 둘러싼 외항으로 철제 구조물이 쌓여져 있었어요. 날리는 탄가루를 차단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죠. 1호기에서 8호기까지는 이런 외항이 없는, 컨베이어벨트였는데 최신시설 답지 않고 가동되면서 떨어져 쌓여 있는 탄을 개구부에 주저않아 삽으로 꺼내고 가동에 이상이 없도록 점검을 하는 업무가 용균이가 맡은 업무라고 합니다. 개구부는 수없이 많이 뚫려 있었어요. 우리가 기본적으로 위험한 장비는 다 안전하게 커버를 씌워서 가동하는 게 원칙이잖아요. 만약, 노출되어 있으면 이 안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든지 어떤 식으로든 방어를 했어야 되는데 일 자체는 구조적 모순으로 그 안으로 들여다보고 일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어요.

저는 거기 처음 들어가 봤잖아요. 어떤 상태였고 어떤 위험이 도사리인지 처음 보는 저도 그 위험이 어떻게 용균이를 죽음으로 연결되게 만들었는지 금방 알 수 있었어요. 왜냐하면 가동되는 상태에서 수많은 개구부에 허리를 구부려 주저앉아서 낙탄을 꺼내야 되었고, 그리고 용균이가 하는 업무가 낙탄을 제거하고 점검을 하는 업무였어요. 이 개구부 속 회전체 물림점에 낙탄이 끼이거나 그러면 화재가 날 우려가 있으니까 이것을 점검해서 이상이 있을 시 사진 찍어서 상부에게 보고하고 시정한 다음에 또 상부한테 보고하는 이런 방식으로 일을 했는데, 개구부와 그안에 있는 회전체하고 일치되어 있으면 그 안에 안 들어봐도 되잖아요. 근데 불일치하다 보니까 안으로 머리를 넣고 눈으로 확인하고, 손을 넣어 사진을 가까이서 찍고 이런 상태였더라고요. 그래서 죽음의 이유가 이거였구나라는 것을 단박에 알았습니다.

거기 간 이유가 그것뿐만이 아니고 사고 난 현장에 무슨 증거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갔는데 가보니까 이미 물 청소가 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증거를 회사가 물청소를 이미 없애버린 거죠. 저는 거기서 감추는 이유가 있겠구나 싶었고 그래서 꼭 진상규명을 해서 책임자 처벌해야 되겠다 마음 다졌어요. 그때 심정은 억울해서 미치겠더라구요. 정말 악을 쓰면서 울었었어요. 지금도 그 생각하면 억울함으로 분노가 치밀어오릅니다.

용균이의 죽음은 개인적인 사고가 아니었다

제가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을 할 때, 서부발전과 하청하고만 싸우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근데 여기가 공공기관이다 보니까 제대로 해결을 하려면 이 나라하고도 싸워야 되겠더라고요. 국가 기관이다 보니 나라와 원하청을 저희가 마주하고 싸워야 되는 입장이었어요. 그러니까 이게 그냥 대충 싸워서 될 일이 아니고 국민들에게 많이 알려서 이것이 우리나라 공공기관들이 얼마나 노동자들을 위험에 내몰고 있는지 비정규직이라는 게 어떻게 위험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구조적 모순이 심각함을 알게 되었어요. 원래 예전에는 하청이 거의 없었으니까 모두가 정직원이었잖아요. 우리나라가 IMF를 겪으며 기업을 살리기 위해 비정규직을 엄청나게 많이 양산했잖아요. 원청은 하청 주면서 위험이 가장 약자한테 어떻게 떠넘겨지는지 이 사건을 해결해 나가면서 제대로 알 수 있었습니다. 국과수나 고용노동부가 차례로 조사를 했었고 경찰 조사도 했었는데 모든 증거가 기업이 갖고 있잖아요. 근데 다 증거 없애버리고 미리 서류상 불리한 것들을 다 해결하는 것들이 용균이 업무 단톡방을 보면 알 수 있었거든요.

그리고 경찰이나 고용노동부는 회사가 미리 손을 다 써 놓은 상태에서 이 사람들이 조사를 하기 때문에 회사의 말만 듣고 사고 처리를 거의 해버립니다. 이전의 사고를 들여다보니까 말단 꼬리 자르기식이나 사고 당사자한테 책임 전가를 해버린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면 회사가 가장 손해를 안 볼 수 있고 최적의 일 처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저희 유족 입장에서는 이런 식으로 사건을 덮어버리니 정말 피가 거꾸로 솟는 심정이 되고 굉장히 억울한 삶이 돼버립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하청회사 사람들이 죽는 이유가 안전을 나라에서 보장해주지 않고 기업은 나 몰라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오로지 경제 발전해서 돈만 벌면 모든 죽음을 용인하는 사회 기조나 정책 때문에 이 무고한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큰 과오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산재사망사고 대부분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고 있는데 죽음의 원인도 불완전한 행동을 한 피해자 몪으로 돌리는 게 심각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고용노동부한테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기업의 법 위반이나 안전조치를 확인하지 않고 기업들한테 알아서 하도록 냅두냐 그랬더니, 조사 인원이 부족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때 느꼈던 것은 윗선에 말해봤자 불이익 당할까 봐 외면하고 해결할 의지가 없다보니 관심조차 없어 보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더 이상 믿을 수 없어 유족 입장에서 회사도 사건 해결도 잘 모르지만 직접 해결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 일을 겪고 정말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될지 앞이 캄캄했고 숨 쉬고 먹는 것조차 아들한테 미안한 일이 돼버렸습니다. 그렇게 되다 보니까 아들의 진상 규명을 위해 제가 못할 게 없겠다 싶었고 한 번도 마이크 잡아본 적이 없는, 노래방에서나 잡아보는 마이크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해야만 했습니다. 무대 위에 올라갈 때마다 떨려서 신경 안정제를 먹고 올라갔던 기억들이 생생합니다.그렇게 한 거는 이 죽음이 용균이만의 죽음이 아니고 우리나라 수천 명의 죽음이 똑같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죽음이 그래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지 않도록 열심히 정부 상대로 싸웠습니다. 우리 아들은 그동안 냉동고에 넣어둔 상태인데 저희가 그게 제일 가슴 아프고 힘든 점이였습니다. 해결하기 위해 고용노동부나 경찰청. 종교인들을 만나고 전국으로 연대하러 용균이 사건을 열심히 알리면서 다녔죠. 그렇게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닌 끝에 두 달 만에 정부와 기업 상대로 합의를 이끌어냈는데요. 합의할 때 중요시했던 건 진정성 있는 사과와 특조위 조사해서 재발 방지가 저희한테는 가장 해결해야 될 문제였고 그리고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문제 해결하기 위해 합의를 했었습니다.

합의 뒤 정부 차원 총리 훈령으로 특조위가 만들어졌고 4개월에 걸쳐서 조사가 이루어졌고 마침내 결과가 나왔습니다. 22개 권고안이 나왔는데 합의에는 정부가 이 권고안을 받아서 해결할 수 있도록 제한 강제를 했습니다. 이 조사 결과 발표한 날 불행 중 다행스러웠던 것은 용균이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을 밝혔지만 그 뒤에 했던 말이 기가 막혔습니다. "용균이는 회사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할수록 죽을 수밖에 없다"고 발표했고 "원청은 하청을 주었으니 책임이 없고 하청은 내 사업장이 아니니까 위험을 바꿀 권한이 없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잘못된 구조로인해 이렇게 많이 죽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매우 가슴 아팠습니다. 우리나라 산재들이 다 이렇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것이였구나 그러니까 그동안 수십 년 동안 이렇게 아무렇치 않게 죽고 있었구나 라는 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그 죽음을 겪은 영혼들이 제 몸 안에 다 들어왔으면 좋겠다 싶었죠. 왜냐하면 그 참담한 억울한 영령들의 모아 힘을 내서 싸워야겠다. 그 마음으로 우리 아들이 "너는 나다, 엄마가 네가 될게." 그런 심정으로 싸웠습니다. 다시 용기를 내서 더 싸워야 할 이유가 생긴 거였죠.

원하청의 잘못으로 사망 사고가 나더라도 구조적 모순을 만들어서 결국 아무도 책임 책임지지 않고 처벌받지 않도록 나라가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전태일 평전>을 읽어봤는데 읽으면서 정말 힘이 빠졌습니다. 그때가 벌써 50년 전이었습니다. 그때 부르짖던 전태일이 했던 얘기나 지금의 제가 부르짖고 노동 문제 해결하려고 하는 똑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더라고요.그러나 잠시 되돌아보니까 그래도 노동조합 생기고 그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이 없으니까 노동조합을 가입해 단체로 뭉쳐서 부당함을 해결하기 위해 기업과 싸우고 이런 것이 만들어진 게 너무 큰 힘이었고 만들어져서 다행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사회가 IMF때 기업을 위해 비정규직을 대거 양산했고 비정규직까지 합법적으로 조합원은 되지만 원청 상대로 싸우면 불법이라고 합니다. 노동 3권은 법으로 보장되어 있지만 원청기업과 싸우면 불법으로 처리가 된다고 합니다. 실질적 처우를 바꾸려면 원청과 싸워야 하는데 원청과 교섭권이 없다 보니 무용지물 같은 상황인 거죠. 10년 전 쌍용자동차 투쟁이나 이번 대우조선소 하청 투쟁이 그래서 일어난 겁니다. 앞으로도 꼭 해결해야 할 문제인 거죠.

▲전태일 동상 앞에 선 김용균 씨의 어머니 김미숙 씨 ⓒ프레시안

회사 임원들에게는 무죄 판결이 나왔지만…

그때 당시 (용균이가 떠난지) 2년 지나고 그다음 해에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저희를 대변해 줄 검사가 그때 당시 위험 시설 방어 조치 미이행, 청소 점검 작업 시 운전 정지 미이행, 통로 및 점검구 내부 조도 불량 조도가 그 안에. 원래는 사물이 잘 보일정도로 법정 최하 기준이 17럭스였는데 이 곳은 법을 어기고 조도(불 밝기)가 1럭스밖에 안 되는. 실지로 촛불 하나 밟기였다고 합니다. 당연히 2인 1조를 해야 되지만 사실 여기서는 규정상에만 있는 실제로 진행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업무상 과실치사죄로 검사가 기소를 했습니다.재판 과정에서 가해자들 막말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중 기억에 꽃힌 것은 용균이가 일했던 "컨베이어 벨트가 공항 캐리어 운반하는 컨베이어벨트처럼 안전한데 왜 죽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현장 CC 카메라도 없고, 목격자도 없고 물증도 없어 왜 사고가 났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사실 CC 카메라 용균이가 달 수 있는 위치에 있나요? 하청이 원한다고 원청이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회사가 혼자서 일하도록 만들어 놨는데 어떻게 목격자가 있을 수 있습니까? 1.2km나 혼자서 일하는데 물증은 회사가 다 물청소로 은폐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이렇게 말하는 건 "적반하장도 유분수"라 생각합니다.

심지어 "열심히 일하길 바라지 않았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회사 다닐 때 열심히 안 하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열심히 일해야만 상위 조직으로 올라가게끔 되어 있는데 그거를 당연한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심지어 "아들이 죽으러 들어갔다"는 뉘앙스로 저의 감정을 추스르기 힘들 정도로 헤집어 놓았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가 더 가중된 피해자가 됨은 지금도 너무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측의 막말은 도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그 속에 들어가지 말라고 교육했다"고 하는데, 실제 낙탄 제거하는 것과 점검 업무는 이것과 상반되는 모순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일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원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원하청 법인을 합쳐 모두16명 기소가 되었습니다. 1, 2심을 거치고 재판 결과가 3년 뒤에 나왔습니다. 아들 사고 후 만 5년인 작년 말이었죠. 용균이 추모 주간에 용균이 대법 재판이 열렸습니다. 최종 대법 선고에서 원청 사장과 임직원 무죄라고 했습니다. 원청의 잘못함은 인정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 놓고 보면 잘못이 너무 약해서 처벌이 어렵다고 했습니다. 하청도 벌금형이나 집행유예로 실형을 받은 사람조차 없어 참담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아들한테 저는 뭐라고 해야 되죠? 저는 진상규명 책임자처벌을 위해 5년 동안 싸웠는데 정말 목숨 걸고 싸울 정도로 열심히 싸웠는데 아들한테 해줄 말이 없었습니다.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었는데 이것조차 못하는 심정이 말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과정에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이나 중대재해처벌법을 만드는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우리나라 안전이 서부발전만 바뀌어서 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서부발전 사장이 개인적으로 뭘 잘못해서가 아니고 우리나라 구조적인 문제였고 우리나라 전체적인 산업안전에 대한 문제였고, 어느 한 곳만 지적해서 처벌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중대재해처벌법을 만드는 데까지 제가 노력했던 것입니다.

구의역 김군, SPC 산재사망 사건의 교훈

아들 사건으로 드러난 문제점이 정말 많습니다. 인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필요했던 기본 2주 안전 교육도 없이 곧바로 현장에 투입 시켰습니다. 지켜지지 않은 2인 1조는 규정상 서류에만 존재했습니다. 발전소에서 혼자서 담당해야 할 업무가 많고 너무 길어서 위험할 때 기계를 멈춰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개구부와 회전체가 일치하지 않은 점이 점검하며 일하는 사람에게 어떤 행동을 유도하는지 알아야 하는데 아무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위험에도 일일이 머리를 넣어 컨베이어 벨트 흐름상 이상이 없는지 들여다봐야만 알 수 있고, 이상이 있을 때 상부에게 보고할 때 분진 많이 날리는 상태에서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찍었어야 했으므로 너무도 위험하게 일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원하청 소통 창구가 막혀 있습니다. 실제로 용균이 동료들이 위험 시정을 28번이나 요구했었습니다. 원하청이 모두 묵묵부답이었고, 하청 동료들이 자신들의 말에 귀 기울여주면 이런 답답한 처우 문제를 해소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얘기했습니다.

사고 현장 물청소로 현장 은폐한 상태였고 현장 보존을 위한 폴리스 라인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사고가 나면 어느 살인 사건이나 폴리스 라인이 쳐져서 그 현장 중요한 증거다보니 보존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회사 안에서는 회사가 마음대로 없애도 아무도 얘기를 못하는 것 같습니다. 고용노동부 조사에서 법을 어긴 건수가 서부발전이 1,029건이나 발견했습니다. 총체적 난국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원하청이 분리되면서 아무도 일하는 사람의 안전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문제였습니다.

회사는 법을 어겨도 벌금 몇 푼 내면 되고, 사람이 계속 죽어나가도 사람 목숨 한 사람 당 평균 벌금이 500만 원도 안 되며,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도록 법에 제 역할을 못하도록 만들고 회사 안의 사고는 사람들이 쉬쉬하면서 감춰서 빨리 잊혀지니 어느 누가 안전에 돈을 들여 신경을 쓰겠습니까? 일할 때 위험하면 멈출 작업 중지권도 하청은 없습니다. 실제로 컨베어 벨트를 위험해서 멈추면 그 로스타임 만큼 원청이 당사자나 하청에게 책임을 묻는다고 하니 두려워서 누구도 작업 중지권을 쓰지 못합니다.

특조위 조사에서 밝힌 바로는 1급 발암물질 결정형 유리규산이 석탄 분진에 들어 있었는데 이는 폐암이나 진폐증, 만성 질환으로 발생시킨답니다. 그러면 여기에 맞는 특급 마스크를 지급해야 되는데 일반 마스크를 지급해서 사용했더라고요. 석탄을 외국에서 들여올 때 성분 분석한 서류가 있지만 상부가 아무도 알려주지 않으니 누구도 의심하거나 의문을 제기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사건은 우리나라 전반적인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사건 사례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구의역 김군 사건 아시는 분들 있나요? 용균이 사건 몇 년 전에 구의역 김군 사건이 있었습니다. 구의역 김군 사건은 원하청이 무전기를 통해 일을 하는데 소통 창구가 달라서 열차가 오는 것을 원청에서 전달 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청 직원이 고장을 수리하다가 사고를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특조위 조사 바탕으로 재판 결과가 나와 원청 사장에게 징역 1년 실형을 선고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용균이 사건은 특조위 조사 결과가 잘 밝혔음에도 쓸모가 없는지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SPC 평택 재판공장에서 사망 사건이 있었습니다. 재작년 10월 15일 아침에 20대 청년이 소스 배합기에 몸이 딸려 들어가 사망사고가 났습니다. 검찰은 안전점검에서 교반기의 덮개가 개방된 된 점이 여러 차례 발각돼 근로자 끼임 및 협착 및 사고 발생 위험을, 주의를 받았음에도 강 대표가 안전 조치하지 않았다고 처벌을 했습니다.끼임 사고가 22년 6월과 8월 두 차례나 발생했었고 4년간 10건이나 발생했습니다. SNS에서 불매운동이 일어났죠. 그래서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명백한 인재였고, 근로자의 인권과 생명을 도외시하는 기업 형태를 두고만 볼 수 없는 공감대가 확산됐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사고 일주일 전에도 손끼임 사고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2인1조 근무 원칙도 지켜지지 않았고, 열악한 현장의 인권도 지켜지지 않은 상태에서 만든 빵을 저는 앞으로도 먹고 싶지가 않습니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공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구나 선혈이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다른 작업자들한테 작업 진행을 시켰습니다. 노동자가 죽어가며 흘린 피가 섞여 있는 빵을 먹는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앞으로도 파리바게트가 인권을 중시하지 않는다면 그 곳에서 만든 빵을 먹을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난달 황재복 SPC 대표가 불법 금품 수수 혐의로 먼저 구속되었어요. 허영인 회장이 며칠 전 전국 제빵기사들한테 민주노총 탈퇴하라고 종용한 혐의로 구속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말을 따르지 않으면 승진 불이익을 준다고 관여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위반의 협의를 받고 있습니다. 노동3권은 법으로 보장된 법인 만큼 노조에 대한 부당노동 행위를 한 확실한 증거를 확보했다고 하던데, 죄지은 만큼 높은 형량으로 구속 받아야만 이 사람들이 각성을 하고 재발 방지 노력을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촉구 단식에 들어갔던 고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가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안 본회의 통과 뒤 국회 본관 앞 농성장에서 열린 농성단 해단식에서 울고 있다. ⓒ연합뉴스

한해 2000명이 산재로 죽는 이상한 세상

투쟁 과정에서 제가 본 거는 정말 이상한 세상이었습니다. 한 해에 무려 2400여 명이 죽고 있는데 병들어 죽는 사람이 1300명이 넘고, 기업 안전불감증으로 산업현장에서 떨어지고 끼어서 맞아서 죽는 사람들이 6백명 이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2400여 명이나 되는 거죠. 사람들이 잘 말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다치는 사람의 숫자가 한 해마다 13만 명이라고 합니다. 이 속에는 전신마비와 장기간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과 팔다리가 잘려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들의 일시적 치료비는 넘어간다 치더라도 죽거나 다치는 이 분들의 인권은 누가 책임질 수 있냐는 거죠.

OECD 가입국 중 우리나라가 산재 사망 수십 년째 1위라는 치욕을 안고 있습니다. 경제성장률 10위권을 자랑하면 뭐 합니까? 그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병들어 죽고 다치고 그런데도 아무도 관심이 없다니 정말 해괴한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민 모두가 세월호를 겪으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저 무기력하게 국가가 하는 데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음을 뼈 아프게 겪었죠. 우리는 이제 겨우 국가의 부당한 역할을 의심하게 되었고 "국가란 무엇인가"를 인지하고 생명안전의 중요성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정부가 들어서도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 저한테는 커다란 배신감이 들어서 속천불(속에서 천불)이 납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겠죠.

어떻게든 아들 사건을 부당함을 알리고 다른 사건들도 묻히지 않도록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그것을 기반으로 중대재해처벌법을 만들고 산업재해를 줄이고 싶습니다. 김용균 재단도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산업안전보건법 개정과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의 필요성이 그래서 였습니다.

구 산업안전보건법에는 처벌 조항은 있지만 안전을 기업 자율에 맡기다 보니까 노동자 생명안전이 엉망진창이 되었으며 정부와 기업은 시민들의 안전 없이 경쟁에서 이길 산업 발전에만 열심히 구상했습니다. 사망 사고를 줄이려면 영국처럼 기업살인법을 같은 처벌법이 우리나라에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만드는 데 당사자 싸움이 중요했고 그래서 산재 피해자 모임 "다시는"에 저도 함께 하고 있는데 이분들과 같이 힘내서 앞장서서 싸웠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중처법이 통과되었죠. 근데 윤석열이 이 법을 또 유예하겠다, 또는 무력화시키겠다 계속 출마부터 지금까지 무력화 시도에 앞장서 왔기 때문에 윤석열은 제가 인정하는 대통령이 아닙니다. 저는 노동자가 우리나라에 거의 대다수를 이루는데 대기업 사장 빼고는 저는 다 힘없는 약자라고 생각합니다. 일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이 사람들의 보호를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업이 안전을 책임질 수 있도록 강제성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중처법을 만들고 이 후 수많은 사망 사건이 있었지만 그에 비해 기소도 저조한 데다 실제 처벌로 감옥 간 원청 사장은 지금까지 단 2건밖에 없는데 여러분들은 알고 있습니까?

먼저 한국제강이 있었고, 징역 1년이 선고되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에 또 자동차 부품업체 엠텍 대표가 징역 2년을 실형 선고받았습니다. 기업들이 처벌받는 것이 저도 싫습니다. 근데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일 시키는 건 정말 싫습니다. 참을 수가 없습니다. 기업들이 안전하게 만들고 일을 시켰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돈 번다면 저는 당연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여기 엠텍에서 돌아가신 분이 이주 노동자인데 금형에 끼여서 사망했습니다. 사고 발생 열흘 전에 수 차례 위험 개선 요청을 했었는데 회사가 무시하고 개선 없어서 사고가 났습니다. 그러면 여기는 당연히 처벌을 해야 되는 거죠.

더 안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들

우리는 거의 대부분 사회에 나가면 평생 일하며 살아야 하는 노동자입니다. 학교 교육에는 사회에 나갈 (학생들을) 뒷받침될 만한 안전하게 일할 권리에 대한 교육이 거의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일한 만큼 월급을 당당하게 받고, 위험하면 작업 중지해서 위험을 없애고 신체 안전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어야 합니다. 처우가 부당하면 해결 가능하도록 상부와 의사소통으로 개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노동 현장은 회사 내의 불법이 오히려 엄청 많습니다. 고용노동부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다가 노동 착취와 갑질로 일 량이 넘쳐나고 과로사와 우울증으로 자살자도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저는 비정규직 문제로부터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비정규직은 원청과 처우 개선을 위해 교섭할 권리가 없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제 손으로 비정규직이라는 평생 최저임금으로 시달리고 안전하지 않아 다치거나 죽어나가면서 더 위험해지는 잘못된 비정규직 사회를 없애버리고 싶습니다. 기업이 비정규직을 쓰는 이유는 가장 적은 비용으로 채용하고, 수십 년 일해도 월급은 최하 수준으로 머물러 이윤 극대화로 챙기면서 사고 책임은 형사적 처벌을 거의 없는 실정이고, 벌금 몇 푼이면 땡 하니 얼마나 기고만장으로 서민들의 가치를 하찮게 여기겠습니까? 지금의 수많은 어처구니없는 죽음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억울하고 억장이 무너져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납니다.

산업재해를 막기 위해서 우리는 그럼 무엇을 해야 할까요? 산업안전청을 만들었어야 합니다. 영국에는 기업살인법이라는 것을 만들면서 곧바로 전국의 사업장을 다니며 조사를 몇 년에 걸쳐서 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산업안전청을 만들어 실질적으로 실효성 있게 만들고 해서 사망 숫자를 많이 줄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그렇게 산업의 안전을 강제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세월호 10주기를 기점으로 생명안전기본법을 만든고자 발의했습니다. 생명 존중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가장 기본적 행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부당한 모든 차별을 없애기 위해 차별금지법을 만들어야 합니다. 인권에 해가 되지 않는 차원으로 보장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중에 노인 인구가 많아지고 그럴 때 사회보장 제도가 있어야 되는데 돌봄 문화를 법으로 보장받도록 해야 합니다. 일하다 아프면 쉬어야 합니다. 외국에는 코로나로 인해서 정부 차원에서 쉬는 동안 정부가 월급의 60~70%를 보조해 주면서 안전하게 만들 쉴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했고 그 이후 일하다 아파도 쉴 수 있도록 포괄하여 정부보조금을 보장해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비정규직들에게 최저임금으로 겨우 먹고 살 정도만 월급을 주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아프면 아파도 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돼버리는 것입니다. 사회가 기업을 위해 비정규직이 많이 양산했고 월급까지 반쪽만 주도록 만들었으면 아플 때 회복하도록 보조금 주고 쉴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고 김용균 씨 1주기. 생전에 김용균이 출근했을 길을 따라 김용균이 다녔던 회사로 행진하고 있는 사람들. ⓒ프레시안

부당함은 우리가 정치에 관심 없는 만큼 다가온다

벌써 김용균 재단 만든 지 5년 차입니다. 아들을 기리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더 중요한 거는 산업재해를 막는 역할을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비정규직 철폐와 청년 노동자 권리 보장 그리고 새로운 유족이 나오면 재단이 손 잡아주고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밖에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 연대 사업과 제가 담당하고 있는 것은 지금 언론 인터뷰나 강연, 유족 만남 위주로 일합니다. 각자도생이 아닌 모두가 연결되어 같이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습니다. 김용균재단은 정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오로지 시민들의 CMS 후원만으로 재단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여기는 사실 학생들이라 지금은 이런 후원을 하는 건 어려울 수 있지만 나중에 뜻있는 분들 사회에 나가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그럴 때 재단과 함께 힘을 내어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면 좋겠습니다.

학교 다니며 보는 세상과 사회에 나가며 마주하는 세상이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저도 그랬어요. 사회의 부당함은 알면서도 일하기 위해 웬만하면 참고 넘겼어요. 하지만 자식을 잃고 밝은 세상에 살다가 갑자기 어두운 세상으로 떨어진 기분이었습니다. 아무일 겪지 않을때는 사회의 부당함이나 어두운 면들이 잘 보이지 않으니 생각으로 연결됨이 쉽지 않습니다. 이렇게 큰일을 당하고 생각해 보니 내 인권을 방관함으로 인해 다 용균이가 겪었고 그로 인해서 내가 다시 겪고 있는 힘든 시간이 되었습니다. 용균이 회사만 그런 게 아니고, 산업 전반에 위험하고 이런 일자리가 넘쳐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많이 죽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정치에 관심이 없는 만큼 부당함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저도 예전에는 잘 모르니까 정치는 내가 성실하게 일하고 법 규정 잘 지키고 그렇게 하면 개개인이 다 그렇게 하면 알아서 잘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현실을 이렇게 당하고 보니 이것이 내가 그동안 사회를 너무 몰랐고 그게 결국은 나한테 모든 부당함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정치는 정치인만 하는 게 아닙니다. 힘 있는 자들만 하는 게 아니고 시민들이 얼마나 나서느냐에 따라서 정치와 정부가 받아안고 해결할 의지를 보인다는 것을 산안법하고 중대재해처벌법을 만들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일반 주부였고 회사원이 평범한 시민으로서 이런 것들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하지 않았습니다. 꼭 해내겠다 라는 마음으로 했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이런 일 당하고 저의 삶이 180도 달라졌습니다.

내 삶이 정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부당함을 해결하는 것도 결국 나 스스로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가족을 지키려고 노력해도 사회가 안전하지 않으면 어렵습니다. 다시 말해 사회가 안전해야 나와 내 가족을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두 법을 제정과 개정을 했지만 아무도 이 법이 통과될 거라고 예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민들과 함께 손잡으면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번 사건을 해결하면서 비정규직들의 처우가 어떻게 이 사람들의 삶을 갉아먹는지 용균이를 통해 보고, 용균이 동료들을 통해서 보고 우리나라 전반적인 산업재해 들여다보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비정규직들은 부당함을 당해도 해고 우려 때문에 말을 못합니다. 우리나라 비정규직 비율이 과반이 넘고 특수고용이나 일용직 프리랜서 같은 사람들이 최저임금을 받는 사람들까지 합치면 70% 이상일 거라고 예상합니다. 이 사람들 가정을 꾸릴 엄두조차 못 냅니다.

용균이가 회사를 다닐 때 저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엄마 나는 결혼은 못할 수 있어.' 그런 거예요. 왜 그러냐고 했더니 "회사 다니는 것도 고용이 불안하고 최저임금 받아서 나 하나 먹고 사는 것도 힘든데 어떻게 다른 사람 만나 자식까지 책임을 질 수 있냐"고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이게 내가 직면한 현실이구나 그때 알았습니다.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우리나라 비정규직들이 다 이런 현실이라는 거. 이게 용균이한테만 그치는 게 아니고 우리나라 전반적으로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비정규직들 그러면 이게 어떻게 결과가 나겠습니까? 결혼을 안 하면 출생률도 그만큼 낮아지는 거 아닙니까? 인구 소멸은 사실 우리 사회 다 같이 해결해야 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비정규직이 진짜 없어지고 모두가 당당하게 권리를 챙기면서 일하는 사회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위기라고 생각하고 함께 고민하고 선한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같이 풀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

▲김미숙 김용균재단 대표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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