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당 믿엉 살아왔는데…이젠 농사없이 바당 일만 하면 못살아"

[6411 투명인간의 목소리] ③ 이혜영 '세대를 잇는 기록' 대표

경희대학교와 노회찬재단은 2023년 1학기부터 200여 명의 학생이 듣는 교양강좌 '후마니타스 특강 : 6411의 목소리와 노동존중 사회'를 협력 운영하고 있습니다. 수업은 노회찬재단이 <한겨레신문>과 공동으로 진행 중인 연재 칼럼 '6411의 목소리' 필자를 매주 한 명씩 모셔 한 학기 동안 특강으로 운영합니다. '존재하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6411 당사자들이 청년들에게 전해주는 자신의 삶과 노동 이야기를 <프레시안> 지면으로 중계합니다.

세 번째는 평범한 제주도민들의 생활사를 기록하고 있는 이혜영 '세대를 잇는 기록' 대표의 해녀 이야기입니다. 그 속에는 해녀들의 노동과 역사는 물론, 누구보다도 가까운 곳에서 제주바다를 봐온 해녀들이 느낀 변화, 그리고 기후위기가 가져올 미래에 대한 암울한 전망과 경고가 담겨 있습니다.

제주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사를 기록하다

저는 제주에 와서 산 지 13년 됐는데요. 전에는 환경운동가로 살기도 했고, 책을 만드는 편집자로 살기도 했습니다. 제주에 어떤 목표를 가지고 무슨 일을 하겠다고 온 건 아니었는데, 제주 사회를 만나니 '변방 사회'고 자연 조건도 워낙 다르다 보니 육지보다 농경사회의 유산이 굉장히 많이 남아 있었고, 삶의 모습도 달랐어요.

그런 모습을 발견하면서 조금씩 조사하다 보니, '우리가 거의 두 세대 만에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이행했구나'하는 것이 굉장히 실감났어요. '두 세대 만에 우리 할머니 세대들이 어떤 삶을 살고 어떤 경험을 하고 살았는지가 완전히 사라지고 있구나. 우리가 놓치고 있구나. 미래를 바라보는 일에만 우리는 더 마음이 가 있구나' 그런 생각에 '그저 기록이 아니라 세대를 연결하고 삶의 연결성을 생각하는 기록을 해야 되겠구나' 하는 마음이 생겨서 '세대를 잇는 기록'이라는 단체를 만들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공부하고 인터뷰하고 기록하는 일을 7년 정도 전부터 해오고 있습니다.

기록하는 대상이 해녀로 국한되지는 않아요. 생활사를 기록하고 있는데요. 보통 역사학자들이 국가적이고, 역사에 중요한 기록들은 담당하고 계시죠.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기록은 외면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해녀뿐 아니라 소 키우던 '테우리(목축 종사자를 뜻하는 제주 방언)', 농부, 목수 등 사회 여러 분야에서 여러 모습으로 살았던 평범한 사람의 삶을 기록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대화하고 기록하는 일은 엄청 재미있어요. 왜 그런지 모르지만, 저는 어릴 때부터 할머니, 할아버지나 어른들과 이야기하는 걸 참 좋아했어요. 어르신들과 이야기 나눌 때 살면서 쌓아온 그런 노하우를 십분 발휘해 사랑을 많이 받기도 했어요. 어르신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대부분 그렇잖아요. 어르신들이 서로 비슷한 방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또래 사람들과 하지 않는 얘기도 있고요. 그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어르신들의 눈빛이 굉장히 반짝거려요.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이 아니라 20~30대 때 자신이 활기차게 일했던 그 눈빛으로 돌아가는 순간을 많이 만나요. 그런 과정이 굉장히 재미있기도 하고 마음이 막 뜨거워지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 물질에 나서는 보목 해녀들(2018). ⓒ이혜영 '세대를 잇는 기록' 대표

해조류 숲이 가득했던 6, 70년 전의 제주바다

몇 해 전에 제주바다를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지금은 너무나 바다가 오염됐고 기후 변화로 또 여러 변화를 겪고 있어서 '예전의 바다는 어땠을까, 우리가 잃어버린 바다는 어떤 바다일까'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50~100년 전 바다를 찍거나 기록한 내용, 특히 수중을 이야기하는 기록은 찾을 수가 없더라고요. '해녀 할머니들만이 그 모습을 날마다 생생히 겪어온 분들이겠구나' 해서 할머니들을 찾아가 인터뷰하기 시작했어요. 해녀들은 15살 정도에 '물질'이라고 하는 잠수를 시작했는데, 80대 중반이 되신 해녀 할머니들은 70년 전 바다를 기억하고 계신 거잖아요. 그 기록을, 할머니들을 대신해 제가 여러분께 제주바다와 해녀들의 삶과 노동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해녀들의 기록을 소개하기 위해 제가 준비한 강연의 제목은 '꽉꽉하고 지깍했던 제주바다와 해녀'입니다. 제목부터 제주말이 쏟아지기 시작하는데요. 제주에 살아온 할머니, 할아버지들 이야기다 보니까 제주말로 인터뷰했어요. 많은 부분 좀 알아듣기 쉽게 바꾸기는 했는데, 중간중간 제주말이 나오면 해설해드리겠습니다.

'꽉꽉하다'는 말은 '캄캄하다'는 말이에요. '지깍하다'는 말은 '빽빽하다'는 말이고요. 요즘 바닷속에도 모자반 바다 숲이 있어요. 하지만 예전에는 더 꽉꽉 차 있는 바다 숲이 있어 컴컴하고, 수풀로, 바닷 풀로 꽉 찬 그런 바다가 제주바다였다는 의미를 담은 제목입니다.

그 속에서 해녀들은 어떻게 '물질'을 해왔을까요? 제일 처음 '삼춘'한테 여쭤본 질문이 바로 이런 말이었어요. 제주 사람들은 남자, 여자를 가리지 않고 가까운 어른, 손위 어른한테 삼춘이라고 해요. 그래서 "삼춘~" 이렇게 부르면서 첫 질문을 시작하죠. 그러면 삼춘들이 "무사~" 이러거든요. "왜~?"라는 말이에요. 그러면 저는 "어린 때 본 바당(바다) 소곱(속) 모습 좀 고라 줍서(말해 주세요)"라고 하죠.

삼춘들 중에 두 분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은데요.

"그때는 우리가 일곱, 여덟 살만 되면 바당에 들어갔잖아요. 그리고 중학교 2~3학년 되면 이제 본격적으로 잠수를 허는 거라. 미역 캐고 우뭇가사리 캐고. 그땐예, 밭에 잡초 나듯이 꽉, 돌이 안 보이게, 구녁(구멍)이 안 보이게 풀이 났잖아예. 그걸 해치면서 뭐를 잡았잖아요." (김혜숙, 우도, 66세)

66세시지만 해녀들 중에는 굉장히 젊은, 어린 해녀라고 할 수 있죠. 우도에 계신 김혜숙 삼춘께서 처음 바다에 들어갔던 얘기를 해주셨어요. 중학교 2~3학년만 되면 본격적으로 잠수를 한다는 말이 한 사람의 해녀로 물질을 하게 되는 시기에 대한 말이고요. '구녁이 안 보인다'는 말은, 제주바다의 돌에 구멍이 있잖아요. 화산암들. 그 구멍이 안 보이게 풀이 났었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풀을 해치며 그 사이에서 소라 같은 걸 잡았다는 거죠.

이번에는 성산에 사시는 83세 고기열 삼춘 말씀이에요.

"메역(미역)은 바당에 가면 과작허주(가득했어). 엿바위(물 속에 솟은 바위)에는 메역이 꽉 차. 몇 번 안 해도 한 망사리 꽉 차고. 소라는 엿바위드레(-쪽에), 수심 깊은 여에 나지. 소라는 미역 줄거리 밑에도 있고, 감태 밑에 보면 엎어져 있어. 깅이(게) 새끼들 돌바쿠(돌덩이) 일루면(뒤집으면) 바글바글 이서놨지(있었지) 옛날에." (고기열, 성산, 83세)

엿바위는 썰물이면 드러나고 밀물이면 물속에 잠겨요. 그런 바위에 해조류가 많이 자라고요. 그러면 해조류를 먹고 자라는 소라나 전복 이런 패류들이 와서 살죠. 그 속을 헤치면서 물질을 했던 겁니다. 돌덩이를 뒤집어 보면, 게들이 바글바글 일어났던 풍요로운 바다가 60, 70년 전의 바다였던 거죠.

제주에 오셔서 몸국을 먹거나 들어본 적이 있을 거에요. 이 몸국이 바로 모자반으로 끓이는 국입니다. 돼지뼈 국물에다요. 제주말로 몸 또는 몰망이 모자반을 말하는 거에요. 사진에 보시면 모자반 숲이 지금도 바다 바닥에서 거의 수면까지 뻗쳐있는데요. 예전에는 10m(미터) 이상 자랐다고 해요. 제주도 해안 멀리 있는 비양도 같은 곳 근처에서는 아직 해조류 숲을 만날 수는 있는데, 예전에는 제주 해안 가까이에 있는 바닷속에도 그런 숲이 펼쳐져 있었던 거죠.

잠수 능력이 뛰어난 해녀들을 상군이라고 해요. 15m까지도 잠수하시는 분들이에요. 이분들이 가닿을 수 있는 바다에 그런 바다 숲이 펼쳐져 있었어요. 수면까지 모자반이 올라오니까 뗏목을 바다에 대고 고기를 잡거나 할 때, 뗏목을 모자반 끄트머리로 묶어서 닻처럼 사용할 정도로 모자반이 아주 꽉 차서 해수면까지 자라났다고 합니다. 지금도 사람 생활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 독도 연안 바다에서는 이런 모자반 숲이 남아 있습니다.

▲ 모자반 바다 숲. ⓒ조성익

15살이 되면, 한 사람의 일꾼이 되던 옛 제주

해녀가 된다는 건 15살 아이가 어른이 되는 일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9살, 10살 정도 된 아이들은 '구덕'이라는 제주도 전통 대바구니를 들고 바다에 가곤 했어요. 이 정도 나이 때는 아직 잠수는 할 수 없고, 바닷가 얕은 데서 참방거리면서 썰물일 때 돌 위로 드러난 톳이나 미역 같은 것을 뜯어오면서 바다 삶을 시작하는 거죠.

15살 전후가 되면 '애기 좀수' 일을 시작해요. 좀수는 원래 '해녀'를 부르던 제주 말이에요. 이 아이들도 어른 해녀처럼 '물소중이'(해녀복)를 입고, (물에 띄우는) '테왁'과 해산물을 넣는 그물망인 '망사리'를 매고 물에 듭니다. 지금은 테왁을 스티로폼으로 만들지만, 원래는 아버지가 박을 키워서 딸에게 첫 테왁을 만들어줬어요. 그러면 태왁을 띄워놓고 물속에 드리워진 망사리에 물질해서 잡은 걸 담는 거죠. 작살도 들고 다녔어요. 물고기를 쏘아 잡으려고요. 애기 좀수가 물질을 차츰차츰 익혀서 한 사람의 좀수가 되는 일이 15살 전후에 일어난다는 이야기가 저는 되게 의미있게 느껴졌어요.

남자아이들도 마찬가지였어요. 보통 남자아이들은 소를 책임졌어요. 소꼴을 주기도 하고, 6, 7살 때부터 소를 돌보는 일을 도왔죠.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기록에서 가구당 소 사육수를 보니, 제주도 사람들은 육지보다 5배 이상 많은 소를 키웠어요. 화산섬인 제주도의 땅은 현무암이 박힌 척박한 땅이라 밭갈이가 육지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었어요. 그리고 물을 댈 수 있는 땅이 거의 없어서 논농사가 안 되죠. 밭농사로만 살았기 때문에 많은 밭을, 험악한 땅을 수시로 갈아야 하고, 농작물을 운반해야 하니 소 없이는 농사를 짓기 어려웠어요. 거의 모든 집마다 한두 마리의 소를 길렀습니다.

저희 마을 할아버지 한 분은 어릴 때 겨울이 되면 가을에 모아놓은 소꼴이 떨어질까봐 늘 걱정이었대요. 어린아이였는데도요. 그때 제일 자주 꾸는 악몽이 아침에 일어나 소꼴을 주려고 나갔는데, 쌓아놨던 소꼴이 하나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꿈이었대요. 그러면 깜짝 놀라서 허둥지둥하다 깨어나 소꼴이 그대로 있는 걸 보고서야 안심했다고 해요. 여든이 넘은 지금도 가끔 그 꿈을 꾸신대요. 소를 돌보는 일에 한 소년이 얼마나 마음을 다했는지 느껴지는 이야기였어요.

그렇게 남자아이들도 15살 전후가 되면 소 한 마리를 혼자 감당하면서 밭을 갈았어요. 15살이면 아직 어린 소년이잖아요. 예전에는 '어린이'와 어른을 지금처럼 구분하지 않았어요. '어린이'라는 개념도 근대에 생겨난 거잖아요. 그런 전통사회에서 남자든 여자든 한 아이가 어른으로, 한 사람의 노동 일꾼으로 자리매김하는 시기가 바로 15살이었던 겁니다.

금모래 해변이 있는 화순리 박영추 삼춘이 15살 즈음 처음 물질을 가서 경험했던 얘기에요. 삼춘은 막 호탕하게 말씀하셨는데 성대모사가 잘 안 되네요.

"처음으로 미역 따러 가니까 미역이 가득 깔려 있는데도 물속에 들어가지질 않는 겁니다. 그래도 막 억지로 들어가서 미역을 붙잡으려고 하면 물살에 이리 착 눕고 저리 착 누워 그게 잘 안 되는 거라. 어떵(어떻게) 어떵 확 잡았다 싶어 나와 보니까 미역 꼬랑댕이만 쪼꼼. 하하하. 그렇게 차차 배운 거우다."

해녀는 바다에 갈 때는 혼자 가는 법이 어수다(없습니다). 혼자 가면 안 됩니다. 좀수가 서툰 때는 물길을 잘 몰라서 물살에 휩쓸릴 수도 있고, 하나 더 하겠다고 욕심을 내다가 숨이 모자라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으니까 위험할 때 도울 수 있도록 같이 어울려 가는 겁니다. 그래서 해녀는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사람이라고 하는 말도 있는 거주마씀(것입니다). 해녀들한테 바다는 무서우면서도 고마운 곳입니다." (박영추, 화순, 85세)

15살에 물질을 처음 할 때 물안경을 끼고 물속에 들어가면, 사물이 막 크게 보인대요. 손도 이만해 보이고, 거리 감각도 맨눈으로 볼 때랑 다르대요. 아이들이 잠수를 처음 하면 몸이 잘 가라앉지 않아서 용을 써서 겨우 들어가면, 옆에서 어머니, 고모, 이모는 물질을 해서 뭘 막 갖고 이미 나와 있을 거잖아요. 그렇게 한 사람으로 당당하게 사는 모습이 아이들은 부럽고, 그래서 어른처럼 되고 싶잖아요.

영추 삼춘도 처음 물에 내려갈 때 '많이 잡와야지'하는 마음이 얼마나 많이 있었겠어요? 막상 애써서 미역을 붙잡았는데, 처음에는 물살도 잘 모르니까 미역이 손에 잡힐 듯하지만, 물살에 착 착 하면서 빠져나가는 거예요. 숨도 다 해가고요. 그래도 어떻게 어떻게 손에 미역을 잡아서 물밖에 나와서 펴보면 꼬랑댕이만 조금 있더라는 모습이 눈에 그려지죠. 한 소녀가 해녀가 돼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해나가려 애쓰는 모습이 삼춘 말씀에서 느껴집니다.

▲ 애기 좀수와 밭 가는 소년. ⓒ홍정표

제주도에만 해녀가 있는 이유와 해녀의 역사

바닷속 세계는 땅 위와 달리 예측가능하지 않은 일들이 계속 일어나는 곳이에요. 언제 파도가 바뀌고, 물살이 바뀌고, 회오리가 쳐서 발을 끌어당길지 모르죠. 그러니 해녀들은 생존·생명 공동체로 함께 존재해요. 혼자 가면 더 많이 뭘 잡아올 것 같지만 그게 아니라 함께 가서 서로의 안위를 확인할 수 있는 거리에서 함께 물질하고 서로 도우면서 또 배우고,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가져온 것을 나누고 이런 방식으로 서로를 성장시키는 그런 공동체였어요.

'해녀가 왜 제주도에만 있을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잖아요. 해녀 문화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도 등재돼 있는데, 물론 제주가 섬이지만, 왜 남해안, 동해안, 서해안도 바다를 접하고 있는 데 해녀가 없을까요. 물론 지금 그런 곳에도 해녀가 계시지만, 다 제주도에서 육지로 가 거기에 정착하신 분들이에요.

제주도에만 해녀가 있었던 것은 조수간만의 차와 관계가 있다고 해요. 사람이 숨을 참고 들어갈 수 있는 수중 거리에 한도가 있으니 동해처럼 해안에서 즉시 해수면이 깊어지는 곳에서는 해녀가 활동하기 어려워요. 서해안, 남해안은 갯벌로 돼있으니까 잠수를 할 수가 없고요. 제주도만 물이 빠지고 들어올 때 수중 해수면의 차이가 물질을 할 수 있는 적정한 정도 수준이어서 해녀가 있을 수 있는 자연적 조건이 된다고 해요.

해녀는 아주 옛날부터 있었다고는 하는데,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조선시대 때부터입니다. <제주풍토기>라는 책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미역을 캐는 여인을 잠녀(潛女)라고 부른다. 2월에서부터 5월에 이르기 전까지 바다에 들어가 미역을 캔다. 미역을 캘 때에는 잠녀들이 벌거벗은 알몸으로 물가에 그득히 들어선다. 낫을 가지고 물 밑바닥에 들어가서 미역을 캐서 끌고 나온다." (<제주풍토기>, 이건(1614~1662) 지음)

음력 2월부터 5월은 미역을 캐는 최적기였어요. 조선시대에는 해녀들이 물질하면서 주로 미역을 캤던 거죠. 정약용의 <경세유표>에도 "제주도의 미역은 조선 사람 절반이 먹는다"는 말이 나와요. 예전에는 양식이 없었으니까 자연 상태에서 미역을 채취해야 되는데, 미역은 어느 정도 수심이 들어간 곳에 자라요. 미역이 있었기 때문에 해녀가 있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제주도 미역을 해녀들이 캐서 그것을 말려 육지에 수출한 셈이죠.

또 <제주풍토기> 중에 "벌거벗은 알몸으로 물가에 그득히 들어선다"는 말을 생각하면, 음력 2월에는 아직 물이 차잖아요. 찬 바다에서 거의 알몸으로 일한다는 것은 굉장히 천한 일이었어요. 그래서 조선시대 때 해녀는 하층민으로, 무시당하고 홀대받는 존재였어요.

<탐라순력도>에는 조선시대 해녀들이 그림으로 등장합니다. '탐라'는 제주의 옛 이름이죠. 조선 후기인 1700년대 초에 제주목을 다스리는 수령으로 파견된 제주목사 이형상이 제주도를 한 바퀴 돌며 시찰하면서 군사시설, 농경 상황, 가축 상태 등을 확인했는데, 이런 모습을 한 장 한 장 그림으로 그린 책이 바로 <탐라순력도>입니다.

책에는 제주목사가 용두암 근처에서 뱃놀이를 하는 장면도 나와요. 그 옆이 중요한데요. 옆에 뭔가 동동 떠 있는 걸 확대하면 5개의 태왁과 5명의 물질하는 해녀가 나와요. 뒤에는 천막이 쳐져 있고요. 해녀들이 조금 뒤에 베풀어질 연회에서 목사 일행, 관리들에게 대접할 전복을 채취하는 모습입니다.

조선시대에 전복은 조정에 진상하는 품목이었어요. 사실 이 전복 진상이 너무 고달픈 일이었어요. 애초에 전복 채취는 남자들의 일이었는데, 노동이 너무 고달프고, 전복 수를 채우지 못하면 곤장을 맞고 고초를 당하는 일이 빈번했어요. 바다 일은 사람의 노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닌데도 이런 것을 고려하지 않고 조정에서는 '해마다 얼마씩 말린 전복을 진상하라' 이렇게 명령이 떨어지는 거죠. 그러니 남자들이 전복 진상의 역을 피하려고 도망가고 유민으로 떠돌고, 이런 일이 속출하게 된 거예요.

그렇게 되면서 전복 진상 책임이 여자들한테 전가되면서 미역을 캐던 해녀들이 전복까지 채취해야 하는 처지로 변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들은 아이를 두고 떠나지 못하니까 아마도 이 모든 일을 그냥 감내하면서 했던 것 같아요.

▲ <탐라순력도> 속 제주 해녀들. ⓒ제주시/탐라순력도연구회

미역과 전복을 채취하던 해녀들의 역할은 일제강점기 때 조금 더 확장됐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소라를 먹지 않았는데, 일본 사람들이 소라를 좋아했대요. 지금은 우리도 소라를 좋아하지만요. 일본 사람들이 소라를 좋아하니까 아무도 잡지 않아 제주도 바닷속에서 넘쳐나던 소라를 해녀들이 잡아서 일본에 판매했던 거죠. 일본 상인들은 그 무게를 속이기도 하며 정당하지는 않았지만 소라와 해조류 등을 해녀들에게서 사들였어요. 그러면서 해녀들에게 현금이 생기기 시작한 거죠.

감태도 일본으로 수출한 중요 항목인데요. 감태라는 해조류는 다시마 종류인데, 요오드 함량이 굉장히 높아요. 이 요오드를 어디에 쓰냐면, 바로 폭탄의 원료가 됐어요. 전쟁 준비를 계속하던 일제가 폭탄을 제조하기 위해 제주도 해녀들에게서 감태를 대량으로 사갔던 거죠. 사들인 감태를 태워 재로 만들어 가지고 갔습니다. 이 감태로도 해녀들이 돈을 벌게 되었어요.

일제강점기의 또 한 가지 중요한 변화는, 제주도 해안도로가 뚫린 거에요. 농경사회인 조선시대에는 제주도 내륙으로 연결된 길이 이동의 중심이었어요. 울퉁불퉁한 해안도로를 따라가는 건 이웃마을 갈 때 정도였지 한 번에 해안을 돌 수 있는 도로는 없었거든요. 제주도의 자원을 반출하고, 군수물자 등을 반입하기 위해 일제는 해안도로를 닦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제주도가 내륙 중심 세계에서 해안 중심 세계로 완전히 바뀌는 변화가 생기고, 그와 함께 해녀들도 전처럼 하층민으로 핍박받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당당한 존재로, 그리고 일제의 만행에 저항하는 항일운동에 나서는 그런 존재로 변화해가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렇게 역사의 굴곡과 함께 해녀들의 지위도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에는 그해 첫 미역 물질을 하러 나서는 해녀들 사진이 남아있어요. 아까 말했던 것처럼 미역을 음력 2월에서 5월까지 채취하는데, 그 이전 기간에는 겨울 찬물에서 자라는 어린 미역을 채취하지 못하도록 금채기간을 둬요. 이를 어기면 해녀사회에서 굉장한 불이익과 책임을 져야 되는 불문율이죠. 금채기간이 보통 양력 3월 중순경 끝나요. 정확한 시기는 마을마다 각각 정하죠. 올해 미역 채취를 허하는 허채 기간이 며칠부터다라고 하면 그날을 벼르고 있다 해녀들이 몰려나가서 일제히 그해 첫 미역을 따요. 그날 모습이 장관이었다고 합니다.

1960년대에도 미역 채취는 여전히 중요한 일이었어요. 그런데 70년대에 들어서면 완도에서 미역 양식이 성공하고 이게 점점 퍼져나가면서 제주도 해녀들이 미역을 채취하는 일은 점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 금채기간이 끝나고 첫 미역 물질하러 나서는 해녀들. ⓒ홍정표

해녀들이 본 오늘날 제주바다

역사와 함께 삼춘들의, 해녀들의 삶도 많은 변화를 겪어왔어요. 삼춘들께 어릴 때 본 바다 모습과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여쭤본 질문은 "삼춘, 그 좋던 바당이 지금은 어떵(어떻게) 되었습니까?"였어요.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는 알고 있죠. 하지만 삼춘들 말씀을 들어볼게요.

"돌방(바위)에 가서 이렇게 의지하고 심을 때(잡을 때)가 있어. 심으면 이 돌이 바삭바삭 부서져. 지금은 오염되연(오염되었어). 바다가 얼마나 오염되시니(오염되었니). 돌이 부서지니까 톨(톳)이 부착을 못혀, 부착을. 풀이 이서야(있어야) 그걸 먹고 자라나는데 풀이 어시(없으)니까 이제 물건이 없주게." (박영추, 화순, 85세)

미역이나 톳 같은 해조류는 육지식물처럼 뿌리가 흙 밑으로 뻗어서 땅을 붙잡는 게 아니라 빨판 같은 것이 붙어 있는 다리를 펼쳐서 돌에 딱 붙어요. 그래서 '부착을 못한다'는 말은 돌이 맨질맨질하고 단단해야 거기에 힘차게 붙을 텐데 돌이 허옇게 돼서 부서지고 푸석푸석해지니까 톳이 돌에 붙어봤자 파도가 치거나 태풍이 불면 다 떨어져버리니 이제는 제대로 해조류가 자랄 수 없게 됐다는 말씀입니다.

"우미(우뭇가사리)도 어서(없어), 감태도 어서, 문어도 어시니까 해녀가 줄어드는 것도 자연이 그렇게 될 수밖에.. 게난(그러니까) 우리 이제 바당 믿지 못하난 농사 없이 바다 일만 하면 못 살아." (고미자, 법환, 70세)

해조류가 없으니까 그 사이에 알을 낳고 또 깨어나면 그 사이에 숨어 천적들을 피해 자라던 물고기들이 살 수 없고, 해조류를 먹이로 먹고 자라는 패류들이 없어지는 거죠. 바다에서 해조류의 역할이 육지에서 숲의 역할과 마찬가지에요. 숲이 사라진다는 게 단지 나무가 몇 그루 사라지는 게 아니잖아요. 나무를 터 삼아 살아가는 생명들이 함께 존재하기 어려워지는 거죠. 바닷속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삼춘들 말처럼 바다 믿고 살던 해녀들도 줄어들고 있어요. "예전에 막 바다 좋아놨을 때는 바당 물건 해서 집도 사고 애기들 공부도 시키고 다 허여났주(했었지)" 이렇게 말씀하세요. 그때는 바다를 믿고 살았는데 이제는 바다를 믿지 못하니까 육지농사 없이는 못 산다는 말씀을 하시는 거죠.

삼춘들이 말씀하시는 돌이 하얗게 되면서 바삭바삭 부서지는 모습을 '갯녹음'이라고 합니다. '갯가가 녹았다'는 말인데 충분한 어감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사전적 의미는 바닷물 속의 탄산칼슘(석회가루)이 해저의 바닥, 바위 등에 하얗게 달라붙는 현상을 말합니다. 백화 현상, 사막화 현상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하겠지요. 바닷속이 말 그대로 사막이 되는 거죠. 해조류가 돌에 붙어 살아야 되는데, 돌이 다 푸석푸석해져 모래가 되니 성게만 둥글둥글 굴러다녀요. 아기 미역도 언제 또 파도가 세게 쳐서 떨어져 나갈지 알 수 없이 아슬아슬한 모습으로 그런 돌에 매달려 있죠.

모두 다 알듯이 지금 기후변화로 바다의 수온이 높아지고 있어요. 바다가 대순환을 하면서 대기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수온 상승이 다시 대기에 영향을 크게 미치는데, 세계에서 수온 상승이 가장 빠른 나라가 우리나라에요. 최근 50년 동안 우리 바다의 연평균 표층수온 상승이 세계 평균의 약 2.6배나 돼요. 이 수온 상승이 백화, 사막화 현상을 더 빨리 가속하고 있어요. 해조류들이 더 빨리 서식지를 잃고 숲이 사라지면서 바다 생명도 살아갈 곳을 잃어가는 일이 계속되고 있어요.

▲ 백화현상이 일어난 바닷 속 돌. ⓒ한국수산자원공단

기후변화의 미래를 보여주는 예시가 발전소 온배수 문제가 아닐까 싶어요. 화력발전소나 원자력 발전소가 해안가에 있는 이유는 터빈을 돌릴 때 발생한 고열을 식히는 물을 공급받기 위해서잖아요. 그 엄청난 양의 물은 바다만이 줄 수 있으니까요. 터빈 온도를 낮추고 따뜻해진 온배수는 다시 바다로 쏟아져요. 이 온배수 온도는 주변 바다 온도보다 7도 이내여야 한다는 규정은 있는데, 이걸 확인하거나 규제하는 일은 없어요. 측정도, 조사도, 발표도 하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 온배수가 도대체 어떻게 나가고 있는지 잘 알려지지 않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 삼춘들 말씀이에요.

"막 저 집만큼헌 드럼통을 박아놨어. 저 우리 물질하는데 막 파제껸(파제꼈어). 그리로 물이 몇만 톤이 팡팡팡팡 들어가면 그 1000도 이상 되는 기계를 식혀 나오지. 그 식힐 때에 고기 알, 소라 알, 그 알맹이가 다 죽어버리는 거야. 뜨거운 열에 가면 다 죽어서 또 온배수로 나온다고. 그 뜨거운 물이 온 바다에 다 퍼지면, 우리도 7, 8월 달에는 그 가에를 히여올(헤엄쳐올) 수가 어서. 뜨거와서. 그런디 그 생명체들이 살 수가 이서?" (양**, 화순, 80세)

높은 압력으로 바닷물을 빨아들일 거잖아요. 물고기 알이나 치어가 연안에 살고 있고, 어느 정도 자라야 먼 바다로 갈 수가 있거든요. 이 작은 알, 어린 물고기들이 막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그리고 온도가 갑자기 올라가니까 다 죽어서 나온다는 거예요. 그래서 온배수가 나오는 주변의 모습은 정말 죽음의 상태예요. 제주도에 있는 삼양화력발전소. 한림화력발전소, 화순화력발전소 같은 곳 근처에 사는 할머니들이 그런 증언을 해주셨어요. 온배수 주변 바다를 보면, 기후변화로 수온이 점점 올라갈 때 바다가 어떻게 변할지 짐작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수처리장 문제도 굉장히 심각합니다. 제주도는 인구가 67만 명 정도 되는데 1년에 관광객이 1000만 명 이상 오고 있어요. 지난 10년 동안 제주도 인구도, 관광객 수도 급속도로 증가해왔어요. 새 하수처리장 건립 계획이 있고, 증축, 신축도 하고 있긴 하지만, 그 속도보다 더 빨리 오수, 하수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처리되지 않은, 거의 똥물을 방류해서 문제가 되는 일이 계속해서 제주도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우리가 제주도 바다에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거죠. 화순의 박영추 삼춘 말씀입니다.

"물에 들어 영 보면, 산에 소나무가 막 충이 들어 죽어가난(죽어가니까) 그거랑 같으구나 … 그 생각이 난게(났어). 자연이 죽으면 사람도 죽어. 살 수 없잖아요. 바다에 해초가 없으면 고기도 못 살듯이 산에도 마찬가지라. 자연이 없으면 사람도 다 죽어. 작은 거부터 죽어가다 차차 큰 것들까지…. 큰일이라. 잘 살수록 쓰레기 천지 아니, 제주도?" (박영추, 화순, 85세)

벌써 10년도 넘은 것 같은데요. 소나무 재선충 때문에 소나무가 누렇게 죽어가고 그걸 막으려고 많은 소나무를 베어내고 하는 일이 계속됐어요, 제주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박영추 삼춘이 소나무 재선충으로 죽어가는 숲을 보면서 '바다랑 숲이랑 육지랑 똑같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하셨어요.

어릴 때부터 바다, 자연 속에서 날마다 다른 생명을 계속 접하고 살았던 어른들이라 몸으로 아시는 것 같아요. 우리가 자연 안에서 그 일부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를요. 이제 나는 곧 죽을 거지만 '우리 아이들 어떻게 할 거냐'는, 그런 미래 세대에 대한 걱정을 할머니들이 하고 계십니다.

▲ 제주의 화력발전소와 하수처리장. ⓒ이혜영 '세대를 잇는 기록' 대표

제주도 바다와 이를 믿고 살아온 해녀들의 미래

앞으로 바다의 운명이 어떻게 되냐에 따라 해녀의 운명도 달라질 거예요. 이미 해녀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어요. 전에는 미역을 처음 채취하는 날 바다로 달려가는 해녀들이 한 마을에 300~500명 이렇게 있었는데 지금은 100명이 되는 마을이 별로 없을 정도로요. 지금 해녀인 분들이 돌아가시면 해녀라는 존재가 계속 있을 수 있을까. 아까 삼춘도 '해녀가 존재할 수 없는 바다로 바뀌고 있는데 어떻게 해녀 물질을 하느냐, 바다를 믿고 사느냐' 이런 말씀을 하셨잖아요.

<삼체>라는 드라마에서 외계의 목소리가 이런 말을 해요. "인간은 두려움이 없느냐? 인간은 두려움을 배워야 한다." 그때 할머니가 '바다는 무섭고도 고마운 곳'이라고 하신 말씀이 떠올랐어요. 두려움을 아는 세대셨던 거죠. 할머니 세대에는 자연에 대한 경외,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엄청난 과학적 발전을 바탕으로 사람들은 점점 '우리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넘어서 오만함에 이르게 됐고, 두려움을 모른 채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거라고 믿고 있어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두려움을 모르는 존재가 된 지금 우리 인류에 대한 질문을 외계의 목소리가 하는 것 같았고, 할머니들이 생각나 좀 놀라는 마음이 있었어요.

또 <삼체>에서는 이런 충격적인 장면도 나옵니다. 중국에서 문화 대혁명을 겪으면서 인간에 대한 믿음, 세상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상실한 여성이 외계에 이런 메시지를 보냅니다. "우리 인류는 우리를 회복하는 능력을 잃었다. 우리는 우리를 바로잡을 수 없다. 우리를 정복해달라." 저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면 그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의 운명과 미래, 바다의 운명과 미래, 해녀의 운명과 미래, 이 모든 것은 지금을 사는 우리 세대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도 우리의 노동과 그 조건, 모습, 그리고 마음과 생각은 역사적 시공간 속에서 톱니처럼 물려 만들어져 왔으니까요. 우리는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해나갈까요. 이 질문을 남기고 싶다는 바람과 함께 강의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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