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한 선거판 세상, 탐정 영화는 과연 한가한 얘기에 불과할까

[영화, 시대를 넘다] <탐정 말로>

리암 니슨 주연의 <탐정 말로>는 전설의 작가 레이먼드 챈들러가 창조한 매력의 캐릭터, 필립 말로를 주인공으로 하는 탐정 영화이다. 할리우드 역사에서 필립 말로 역은 그 오래 전 험프리 보가트(<명탐정 말로>, 1946년, 하워드 혹스)나 엘리엇 굴드(<긴 이별>, 1973년, 로버트 알트만)가 해냈지만 그 둘을 대체할 배우는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이번 영화에서 리암 니슨을 캐스팅한 것을 두고 이런 저런 말들이 적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리암 니슨이 말로 역을 하기에 너무 강한 인상이라는 점 때문이다. 필립 말로는 예민하고 섬세하며 조금 마른 체구여야 한다. 리암 니슨은 다소 거구이다. 그럼에도 아일랜드 감독 닐 조단은 아일랜드 배우 리암 니슨을 캐스팅하는 조건을 받아 들인 것으로 보인다. 당초 이 영화는 한국의 유명감독에게 연출 의뢰가 들어 왔으나 리암 니슨이 필립 말로 역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탐정 말로>는 1946년작 <명탐정 말로>의 리메이크 작품이다. <명탐정 말로>는 챈들러의 대표적인 소설 <빅 슬립>을 원작으로 만들었지만 이번 리메이크 작 <탐정 말로>는 그때의 소설과 원작 영화의 여러 가지의 설정과 상황을 바꾸었다. 때문에 같은 영화인 척 다른 영화이고, 다른 영화인 척 같은 영화이다.

시작은 여느 탐정 영화처럼 전형적이다. (대체로 금발인) 치명적 유혹의 여자가 사건 의뢰를 하면서 얘기는 시작된다. 말로의 사무실에 자신의 성, 곧 퍼스트 네임이 '캐빈디시'라고 소개하는 여자(다이앤 크루거)가 찾아 온다. 그녀의 이름은 클레어이다. 클레어는 말로에게 자신의 정부(情婦)인 니코 피터슨이 사라졌다며 그의 행방을 찾아 달라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일은 늘 아주 작은 사건에서 시작된다. 발단은 늘 하찮은 사건이다. 니코 피터슨은 곧 차에 깔려 얼굴이 으깨진 시체로 발견되고 이후 사건은 일파만파로 번지게 된다.

▲영화 <탐정 말로>. ⓒ이놀미디어

니코 피터슨은 클레어와 탐정 말로만 찾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갱스터 루 헨드릭스(알란 커밍)까지, 주변의 모든 인물이 니코를 찾고 있는데 궁극적으로는 그가 같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세레나란 여자를 추적하기 위함이다. 이 여자는 그들 모두가 갖고 싶어 하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니코-세레나의 행방이 묘연한 가운데 이 둘을 알고 있는 니코의 동생 린 피터슨마저 멕시코에서 온 누군가에 의해 강간당하고 목에 칼을 찔린 채 살해 당한다. 린과 니코, 이 두 남매를 죽인 것은 누구인가. 클레어는 니코가 아직 살아 있다고 주장하고 대신 머리가 터져 죽은 남자는 그의 죽음을 위장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클레어가 니코를 찾는 이유는 무엇인가.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인 엄마 도로시 퀸캐넌(제시카 랭)과 그녀의 오랜 정부이자 영국 대사라 불리는 남자의 정체도 점점 수상해진다. 이 영국 대사는 사라진 남자 니코가 소품담당으로 일하고 있는 메이저 영화사 퍼시픽 스튜디오와 코바타란 이름의 상류 클럽을 소유하고 있다. 권력자이다. 대사가 코바타의 운영을 맡겨 놓은 플로이드 핸슨(대니 휴스톤)은 그곳에서 매음과 마약으로 돈을 벌고 있으며 살해당한 린은 코바타에 소속된 매춘부였음이 밝혀진다. 모두들 하나 같이 정상이 아니다. 엄마 도로시나 딸 클레어의 관계도 수상하다. 범인은 누구인가. 사건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탐정 말로>의 시대 배경은 1939년이다.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해 2차 대전이 발발한 직후의 상황이다. 미국은 아직 참전하지 않았지만 루스벨트 행정부가 전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 곧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불길함이 거리에 가득한 시대이다. 전쟁의 시대가 만들어 내는 불안의 아우라는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무장해제하고 욕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다. 엄마 도로시는 자신의 정부이자 권력가인 대사(그가 곧 영국 대사로 발령이 날 예정이어서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부른다.)가 딸 클레어를 건드렸다고 생각한다. 딸 클레어는 엄마 도로시가 자신의 불륜남인 니코와 잤다고 생각한다. 둘은 서로, 자신이 가진 것이라면 무조건 뺏으려 한다고 똑같이 생각한다. 모녀 관계는 질투와 갈등이 넘쳐나는 것처럼 보인다.

(영국) 대사는 탐정 말로와 처음으로 만나는 과정에서 인사말 대신 이렇게 말한다. "이곳은 지옥이고 나 또한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노라." 말로는 그 말에 대해 '(문학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대사라고 생각한다'고 응수한다. 대사는 그런 그에게 "셰익스피어보다 말로가 더 낫다는 얘기이군"하며 코웃음을 친다. 대사가 말하는 '말로'는 '크리스토퍼 말로'이다. 크리스토퍼 말로는 야사(野史)에서는 셰익스피어의 모든 작품을 대신 쓴, 유령 작가라고 알려져 있다. 대사는 탐정 말로를 만나면서 '너는 가짜이지만 진짜이고, 스스로는 자신이 낫다고 생각하는 인물일 터이니 잘난 척 하지 말고 함부로 나대지 말라'는 암시를 주는 셈이다.

ⓒ이놀미디어

말로가 자주 접촉하게 되는 LA 베이시티 형사 조(이안 하트) 역시 말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 말이야, 어떤 때는 정의가 눈이 먼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어떤 때 보면 정의라는 건 아예 없지." 이 영화는 삶의 철학을 얘기한다. <탐정 말로>는 정의가 사라진 전쟁과 아수라의 세상에서 그나마 끈덕지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할 것인가를 두고 실존적 선택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퍼시픽 영화사의 세트장에서는 나치 유겐트가 좌파 서적을 불태우는 장면을 찍는 중이다. 새로 탐정 말로의 운전기사 된 세드릭이라는 흑인 남자(아데웰 아킨누오예 아바제)는 그걸 바라보며 "나치는 책을 참 싫어하는군요."라고 말한다. 말로는 "나치는 싫어하는 게 많다."고 말한다. 세드릭은 지나가는 말처럼 "레니 리펜슈탈이 영화를 잘 찍(긴 하)죠."라고 중얼거린다. 레니 리펜슈탈은 나치당 선전영화인 <의지의 승리>와 <신념의 승리>를 찍었다.

탐정 말로는 세드릭을 클레어에게 퍼시픽 영화사의 새로운 경호원으로 소개하면서 "실력도 좋고 과거에 여러 상황을 처리한 경험이 있다"며 "말도 잘하고 무엇보다 비밀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끔찍한 세상을 살아 내기 위한 방법론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비밀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삶의 내면을 자기 방식대로 지켜가는 것이다. 말로가 보기에 대사와 같은,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은 '절대 지지 않는 사람들이고 결국 살아남는 사람들'이다. 말로의 세계관은 비관적이고 차갑다. 세상은 결코 좋아지지 않는다. 그것도 단 한 번에는 절대 좋아지지 않는다. 그 점이야 말로 레이먼드 챈들러와 하워드 혹스가 오랜 세월 전에 이미, 그리고 이번의 닐 조던 감독이 얘기하는 필름 누아르의 어두운 세계관이자 그 정수이다. 그들이 늘 '예리하고 섬세한 남자' 탐정 말로를 통해 보여주려는 얘기이다. 세상의 어둠은 좀처럼 가셔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 그러나 탐정 말로 같은, (비밀을 지키는) 동조자가 있어서 그나마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한다. 이 영화의 엔딩 타이틀 곡으로 흐르는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은 존 바티스테가 부르는 '빛은 어둠 속에서 가장 밝게 빛난다(The Light Shines Brightest In The Dark)'이다.

왜 갑자기 영화가 1939년으로 돌아 갔을까. 왜 갑자기 필립 말로인가. 가장 어두운 시대일 때 가장 빛났던 캐릭터를 찾고 싶어서였을 지도 모른다. 닐 조던이 보기에 지금은 가장 어두운 시대이며 따라서 우리 모두에게 한 줄기 빛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탐정 말로>는 오래 전의 필립 말로처럼 '살아 남으라, 어떻게든 살아 내라'는 조언 아닌 조언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이놀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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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

오동진은 신문,통신,방송사 문화부 기자로 경력을 시작했다.영화전문지 FILM2.0과 씨네버스의 창간멤버와 편집장을 지냈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집행위원장과 부산국제영화제 마켓 운영위원장이었다. 현재 영화 글만 쓰고 산다. 들꽃영화상 운영위원장이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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