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통찰의 러브 스토리, 모두 전생(前生)에 있다

[영화, 시대를 넘다] <패스트 라이브즈>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근래에 나온 영화 가운데 가장 매혹적인 오프닝 시퀀스를 보여 준다. 심야의 나이트 바에 세 남녀가 앉아 있다. 가운데가 여자, 양쪽이 남자이다. 여자와 한 남자는 아시안이다. 세 남녀의 대화는 저 멀리 떨어져 있어 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바 이쪽 편의, 얼굴이 나오지 않는 두 남녀의 관찰자 시점으로 보여진다. 보이스 오프로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나온다. "저 사람들 어떤 관계일까?" 이번엔 남자 목소리. "글쎄? 아시안 두 남녀는 부부이고 한 사람은 친구?" 목소리의 남녀는 그렇게 세 남녀를 두고 이런 저런 분석의 대화를 나눈다. 사람 보는 눈에 있어서는 여자의 촉이 좋은 법이다. 목소리 여자는 아시안 두 남녀의 관계에 묘한 감정이 섞여 있음을 눈치 챈다. 목소리 여자의 대사에 의심의 기운이 가득 찰 때쯤 카메라는 바에 나란히 앉아 있는 세 남녀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줌 인(zoom in)을 해서 들어 간다. 앞으로의 이야기가 이 세명의 이야기, 혹은 이들 중 두명의 이야기로 좁혀 들어갈 것임을 암시해 간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찍은 오프닝 씬들이며 한 컷 한 컷의 정성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영화는 사실 오프닝 장면 하나가 전체를 결정짓는다. <패스트 라이브즈>의 오프닝은 좋다. 아주 좋다.

영화는 때론 내부자의 눈으로 보여질 때가 있고 그래서 관객들과는 매우 다른 감흥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이달 11일 열릴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작품상과 각본상 후보로 이름을 올린 <패스트 라이브즈>를 보면서 과거의 영화 <넘버3>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패스트 라이브즈>를 만든 샐린 송 감독은 <넘버3>의 송능한 감독 딸이다. 송능한은 1997년 <넘버3>로 빅 히트를 거둔 후, 1999년 <세기말>이란 영화가 크게 실패하자 '영화판에 염증을 느낀 듯' 모든 걸 훌훌 털고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영화계에서는 그가 캐나다와 한국을 오가며 작품 연출을 종종 할 것이라 생각했고 10여 년 전쯤에는 실제로 국내의 유수 제작자 한 명이 송능한을 한국에 데려 올 프로젝트를 기획한 적까지 있다. 송능한은 약 24년전 한국을 떠났으며 다시 돌아 오지 않았다. 그건 이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의 숨겨진 프롤로그이다. 전사(前史)이다. 물론 이 영화에 송능한의 존재는 없다. 스쳐 지나 가긴 한다. 샐린 송은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송능한이란 존재를 생략하고 있다. 샐린 송에게 부성은 부재한다. 그녀의 얼터 에고인 영화 속 주인공 노라(그레타 리)는 오로지 엄마(윤지혜)와만 소통한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주인공 노라의 이민 24년 성장사이자 러브 스토리이다. 나영(문승아)은 12살 때 아빠를 따라 캐나다로 이민을 와 노라라는 영어 이름으로 성장한다. 12년 후인 24살 때는 홀로 미국으로 건너 와 희곡작가 수업을 들으며 퓰리처나 노벨문학상을 꿈꾼다. 한국을 떠나 올 때 나영은 해성이란 이름의 또래 남자 애 해성(임승민)과 친하게 지냈고 퍼피 러브(puppy love), 어린 연정을 느꼈는데 20대의 노라가 된 나영은 부모에게서 독립해 뉴욕에서 생활을 하면서 역시 자신처럼 성장한 해성(유태오)과 SNS를 통해 만나 장거리 통신(通信) 사랑을 시작한다. 노라는 어느 날 페이스북에서 해성이 자신을 찾고 있음을 알게 된다. 둘은 그렇게 다시 연결된다. 남녀가 다시 만나면 모든 것이 다 새로워진다. 과거는 약간씩 윤색된다. 둘은 자신들이 지금껏 서로를 보고 싶어 했으며 최소한 지금도 약간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둘은 각자의 일에 집중하기 위해서(특히 노라가) 통신 연애를 끊는다. 노라는 작가 레지던스에 들어가고 거기서 만난 또 다른 작가 지망생 아서(존 마가로)와 결혼까지 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캐나다에서 뉴욕까지 노라의 24년이 흐르는 동안 그녀와 해성과의 만남과 헤어짐은 반복된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A24

제목인 '패스트 라이브즈'는 직역하면 과거의 생, 곧 전생이다. 의역하면 인연이다. 노라는 남편인 아서에게 말한다. 아시아에는 인연이란 개념이 있다. 남녀가 결혼까지 하려면 8천번의 인연이 쌓여야 한다, 현세에서 남녀가 같이 지낸다는 건 두 사람 모두 과거의 삶에서 엄청나게 얽혀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랑은 결코 우연이 아니지만 우연처럼 보이는 것이고, 우연이 아니기 때문에 한 번 한 번의 만남과 사랑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하지만, 종종 정말 우연처럼 보이기 때문에 설혹 헤어지는 일이 생기더라도 다음 번 생에서의 또 한 번 벌어질 우연한 만남을 위해 그리 슬퍼할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추억처럼 간직해야 하는 것이지만 차마 소유하지 못할 때 그 '소유에의 욕망' 이야말로 비록 슬픈 일이긴 해도 기이한 삶의 동력과 에너지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영화가 역설하고 있는 건 바로 그 부분이다. 노라와 해성은 노라의 미국인 남편 아서를 가운데 두고 24년만에 가까스로 다시 만나지만 노라가 아서를 버리지도, 해성이 노라를 바짝 끌어 당기지도 못한 채 다음 (생)을 기약하고 헤어진다. 앞으로 둘은 다시 만나게 될 것인가. 바람결에 소식이나 들을 것이다. 그렇게 각자 늙어갈 것이고 그러다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야 말로 우리 모두 패스트 라이브즈, 곧 전생에서 숱하게 반복하며 겪어 온 삶의 규칙이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한 코리안 아메리칸 여인의 성장사와 연애사인 척, 사실은 그 안에 풍부하고 깊은 인생철학을 심어 놓은 작품이다. 이 영화를 두고 사람들이 강한 페이소스(pathos, 공감)를 느끼게 되는 이유일 터이다. 사랑은 사랑 얘기만 해서는 사랑 얘기로 받아 들여지지 않는다. 사랑이 진짜의 러브 스토리가 되기 위해서는 '위대한 통찰'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노라는 아마도 이제 풀리처상에 접근할 작품을 쓰게 될 것이다. 해성은 해성 대로 인성이 더 좋은 중년남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사랑을 통해 세상살이에 혜안을 얻게 되는 남녀는 그 인식의 거리와 넓이만큼 성장하게 된다. 영화는 두 남녀가 그렇게 될 것임을 보여 준다. 감독 샐린 송 역시 그와 같은 과정과 경험을 통해 이 작품 <패스트 라이브즈>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전격적으로 샐린 송의 자전적 스토리에 기반을 둔 작품임을 천명한다.

노라 역의 그레타 리(한국명 이지한)는 일종의 발견이다. 그녀의 각진 마스크는 이번 영화를 위한 것이라는 느낌을 줄 정도이다. 뉴욕이라는 공간에서 살아가는 아시아 여성 지식인, 30대, 노 키드 부부의 아내, 극작가의 이미지를 얼굴 하나에 다 담아 내고 있다. 최적의 주연 캐스팅이었으며 영화가 캐스팅의 예술 임을 보여주는 적극적인 사례로 꼽힐 것이다.

<패스트 라이브즈>의 마지막 장면은 마치 로버트 와이즈(<사운드 오브 뮤직> 감독)가 50년전에 만든 영화 <두 사람(Two people)>의 마지막을 떠올리게 한다. 로버트 와이즈의 두 남녀 주인공 린제이 와그너와 피터 폰다는 건널목을 두고 마주 서있다. <패스트 라이브즈>의 노라와 해성은 막 도착한 우버 택시의 뒷문을 열어 둔 채 대화를 나눈다. 영화 <두 사람>의 두 사람은 대화가 없지만 자신들이 헤어져야 함을 운명처럼 깨닫는다. <패스트 라이브즈>의 두 사람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데 그 어울리지 않는 문어체의 대사들이야 말로 거꾸로 자신들의 이별을 애써 포장하고 위로하는 연기임을 드러낸다. 두 영화의 두 장면 모두 어마어마하게 슬프지는 않지만 어마어마하게 공허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아주 흡사하게 닮아 있다.

사랑은 걸코 충만함을 주지 않는다. 그러는 적이 없다. 늘 빌 공(空)의 허전함을 준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에리히 프롬이 얘기했던 '사랑하기의 기술(The Art of Love)'과 사랑의 본질에 대해 추구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급기야 삶의 본질을 꿰뚫고 싶어 하는 샐린 송의 영화적 욕망이 담겨져 있는 작품이다. 사랑하면 인생이 보인다. 사랑이 위대하다고 하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A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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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

오동진은 신문,통신,방송사 문화부 기자로 경력을 시작했다.영화전문지 FILM2.0과 씨네버스의 창간멤버와 편집장을 지냈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집행위원장과 부산국제영화제 마켓 운영위원장이었다. 현재 영화 글만 쓰고 산다. 들꽃영화상 운영위원장이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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